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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旅窓筆滴-중국 운남성편 운남성-11. 여강-2. 여강고성(麗江 古城:

제봉산 2009. 12. 2. 22:15

-旅窓筆滴-중국 운남성편 운남성-11. 여강-2. 여강고성(麗江 古城:

 



-旅窓筆滴-중국 운남성편

운남성-11. 여강-2. 여강고성(麗江 古城: Lijiang Gu sheng/Ancient town):
2009.7. 空慧

리쟝 고성(麗江 古城: 여강고성)은 여강 시내에 있는 옛마을로

1997년 12월 4일 ‘세계문화유산지구’로 지정된 곳이다.

그 실 여강고성은 쓰촨 랑중(泗川 ?中: 사천 랑중),

산시(山西: 산서) 핑야오(平遙: 평요), 안후이(安徽: 안휘)

서센(?縣: 흡현) 등과 더불어 중국정부가 지정한 중국 4대 고성 중의

하나다.

일찍이 송(宋)나라 말, 원(元)나라 초옆인 1253년,

원세조(元世祖) 쿠비라이 칸(忽必烈: 홀필렬: Kubilai Khan: 후비리에: 1215~1294)이 남쪽으로 침입해 들어와서 따리국(大理國)를 정벌할 무렵,

아 곳 리쟝(麗江: 여강)에 이르러서 병영을 세운 후부터 발전되기 시작하였으니 약 800년의 역사를 가진 마을 이다.

현재 3,8㎢ 넓이에 상주인구 3만 여명이 거주하고 있다.

그러나 성곽(城郭: 城壁)없는 성읍(城邑)의 규모를 갖춘 것은

명대(明代)에 이르러서 였고,

그 전 까지는 나시족(納西族: Nasi)의 원조(元朝)라 할,

무(木: 목)씨 성을 가진 투쓰(土司: 토사)가 통치 하였다.

성곽없는 성(城)이 된 데에는 그럴사! 전설이 있다.

토사(土司) 목(木)씨 성(姓)에 둘레(성벽을 두르면)를 만들면 곤(困)

자가 된다. 곤(困)자는 부족하고 괴로운 것을 의미하는 한자(漢字)이다.

그러므로 나시족의 절대 권력자인 토사 목(木)씨 의 반대로

성벽을 두르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지형(地形)을 보면 서쪽에 사자산(獅子山) 북쪽에 상산(象山) 등

높은 산들이 있어서 차가운 북풍한설(北風寒雪)을 막아주어

겨울이 온난하고.

앞에 위롱쉐산(玉龍雪山(Yu long Xueshan: 옥용설산)으로부터

흘러내리는 신선한 물은 여러 갈래로 나뉘어 고성 곳곳을 흐른다.

그러나 고산지방이며 해발 2400m에 위치함으로 산소가 희박하여

고산병에 주의를 요하며,

날씨의 변덕이 심하여 뜨거운 햇살이 비쳤는가 하면 먹구름으로 바꾸며

이슬비가 내리기를 하루에도 몇 번씩 번복하기 일수다.

여강고성은 실로 중국 남쪽의 실크로드라고 할 차마고도(茶馬 古道)의

요충지(要衝地)로서 옥천(玉泉)이라는 이름의 금사하 (金砂河)의 줄기가

골목마다 흘러 금붕어가 놀고,

고성의 중심에는 쓰팡지에(四方街: 사방가)가 있다.

사방가에서부터 칠일가(七一街) 오일가(五一街) 신의가(新義街).. 등

많은 상가공목이 ! 맘樗獵. 사방가는 차마고도(茶馬古道)

상인들의 물물교환 장소였다.

상가 마포(麻布: 삼베) 목면(木棉: weave Cotten) 은동제품 상점,

여관, 음식점등이고 최근에 카페도 많이 생겼다.

사방가에서 방사형으로 길이 나있는데 바닥은 모두 우화슬

(五花石: 오화석)을 다듬어 깔아 놓았다.

또한 사방가에는 게공토리(科貢坊: 과공방)라는 3층 문루(門樓)의

건물이 있는데,

나시족들은 패방과낙(牌坊過洛)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패방(牌坊)이 있는 골목이라는 뜻이며.

패(牌)란 바로 과거급제하여 벼슬을 한 포시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패방과낙은 벼슬한 집 골목이하는 뜻이다.

이 과공방은 청(淸)나라 가경 년대(嘉慶年代: 1760~1820)에

양조란(楊兆蘭)과 양조영(楊兆榮) 2형제가 행시(行試)에 급제했고

또한 양조영의 아들인 양석신 (楊碩臣)도

도광년대(道光年代: 1820~1850)에 행시에 합격하여

일문삼거(一門三擧)로 진사(進士)의 벼슬을 하였기로

나시족 후손들에게 장학(?學)의 표본과 목적으로 세운 건물이다.

고성이라고 하지만 성벽이 없는 옛 마을로

대연진(大硏鎭: Dayan)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고성의 모든 집들은 나무로 된 기와 건물이다.

1996년 2월 진도 7의 초대형 지진에 4.000여명의 인명피해가 났는데도

목조 2층 건물! 들 70%가 모두 무사?다.

집 구조는 3면이 방이고 한 면이 벽인 구조로 되어있는데,

이 군락이 독특하며, 집집마다 루른 나무 늘어진 시원한 물 줄기,

붉은 꽃과 붉은 연등(燃燈)의 품격있는 수도(水都)이니 서양의 베니스(Venice) 보다 더 격조 있게 고풍스럽다.

또한 소주(蘇州)보다 매끄럽고 아름답다.

야경은 더욱 아름답고, 골목마다 음식점, 주사(酒嗣: 술짐) 갖가지

민예품 토산품 점들이 즐비하다.

더위를 식히며 한숨을 돌리는데 옆에 마치 꿀벌(蜜蜂)을 팔기에 보니

석청 (石淸/ 石靑子/ 石蜜: wild honey)이였다.

운 좋게 만난 석청 한 컵(cup: 10위안(元) 약 1800원)을 먹고 나니

맛도 일품이고 우리나라에서는 맛보지 못한 꿀맛이며 눈이 밝아 지고

갈증과 더위도 가신듯 했다.

 
↑ 여강고성 안내도


 
 여강고성 세계문화유산 비
 
↑ 여강고성 입구 광장 옥룡교에 있는 물레방아 (2개의 물레방아는 직경이 20m로
느리지만
하루도 쉬지않고 수백년을 흘러 나시족의 끈질긴 근성의 표상이기도 하다)








 
↑ 여강고성 수로가의 집들




 
↑ 여강고성 골목
 
↑ 여강고성 차마고도 승마체험하는 관광객
 
↑ 여강고성 석청꿀
 
↑ 여강고성 직녀(織女)를 마사녀(摩梭女)라고 부른다.
 
↑ 여강고성 동파(東巴) 차림으로 돈 버는 노인
 
↑ 여강고성 음식점 입구
 
↑ 3층 문루가 있는 과공방(科貢坊)이 잇는 사방가
(1944년 화재가 나서 새로 재건였다.)
 
↑ 과공방을 뒤로 한 사방가(四方街) 나시족 여인들


 
↑ 여강고성 사방가(四方街)

 -土司(토사): 옛날 마을의 통치권이나 지배자를 뜻하는 말인데 후에

중국의 중앙 정부가 중국 국내의 소수민족의 토착 지배자들에게 수여한

직위다..

 Subject  : 운남-12.여강-3.동파문자(東巴文字)



임종욱-旅窓筆滴-중국 운남성편

운남성-12. 려강(麗江)-3. 동파문자(東巴文字: Dongba Pictography) :
2009.7. 空慧

Omniglot(옴니글롯)인 동파문자(東巴文字: Dongba Pictography)는

중국 운남성의 나시족이 사용하던 상형문자(象形文字: pictography) 이다.

나시족들은 동파문자를 나무와 돌에 남아있는 흔적이라는 뜻의

'스쥬노쥬(森究魯究: 삼구노구)‘라고 말해왔는데,

일찍이. 기원전 부터 만물의 형상을 그대로 그려 기록하여 신화 전설,

종교의례, 천문역법, 민속풍습, 의학 등도 기록해왔다고 한다.

동파(東巴)라는 말은 사제가 주관하는 샤머니즘(shamanism)

즉 원시종교인 동파교에서 비롯되었다고 불 수 있고,

나시어(納西語)로 현명한 사람(智者: 지자) 즉 동파족 사제(司祭)를

지칭하며,

동파족 사제는 유다교(猶太敎 :Judaism)의 랍비(rabbi)와 같이

무속(원시종교), 의술, 예술과 장인을 모두 포괄하며

나시족의 주요 문화 전승인이며,

스승이요 장로(長老)이다. 이 동파들이 상형문자를 이용해 천지창조와

신화 및 전설, 종교의례, 천문역법, 사회생활 등을

동파경(東巴經)이라는 경전에 기록했다.

이 동파 문자가 세계에 알려진 ! 것은

1907년과 1909년 리장(麗江: 여강)을 찾았던

프랑스 학자에 의해서 1913년 서구세계에 소개한 책이 발간된 후부터였다.

연혁을 보면 나시족(納西族: Naxi)은 중국 북부 초원지대에 살았던

아촐리족(Acholi)인 강족(羌族: Gang)의 후예라고 한다.

그러므로 1,000년 전 나시족이 북에서 남쪽으로 이동하여 히말라야

기슭에 정착한 유목민족이면서도 티베트 불교와, 도교(道敎)의

영향을 받아 들여 동파문화를 꽃피웠다.

그러므로 일부 학자들은 동파문자의 기저에는 유목민적 기질이 농후하게 남아있다고 말한다.

여하간 나시어(納西語)는 티베트어 계열에 속하며, 티베트어의 단어를 차용(借用)하였다고들 한다.

나시족들은 유목생활을 하면서 여러 종종과도 접하며 독특한 동파문화를 이어왔으니 자연신과 하늘에 제사지내며 동파경(經)을 읽고 동파무(舞)를 추는 의식(儀式)을 하며 그런 것을 기록으로 남기기 위하여 대나무로 만든 죽필(竹?)과 송진과 먹을 섞어 종이에 수만 권의 동파문서를 만들었던 것이다.

 
↑ 나시족 동파교 제사 때 읽는 경
 
↑ 나시족 경전(經典)

동파문자는 뜻과 음율(表意和表音)을 갖춘 상형문자라고 한다.

한자(漢字)도 처음엔 상형문자로 시작되었는데,

한자가 상당히 추상화된 것에 비해 동파문자는 문자의 모양이

사물의 원형을 상당히 잘 표현하며

유지하고 있어 그림문자에 가까운 특징을 보여 준다.

또한 이집트 신관문자(hieratic scrip:神官文字:神官書體: 히에라틱),

수메르(Sumer) 쐐기문자(cuneiform scr1pt: Litteraecunetae:

楔形 文字: 설형문자)와 같이 뜻을 나타내는 부분과 음을 나타내는

부분 으로 나눌 수 있다.

나시족은 동파 문자 외에 한자의 영향을 받은 음절문자(音節文字: syllabary: 자음표) 인 게바 문자(Geba script)와 로마자에 기반한

철자법등 3종류의 서기체계(書記體系: writing system)를 갖고 있다.

천 여 년의 역사를 갖고있는 동파 문자는 현재로 총 1400여 자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현재 동파전문인은 겨우 20명 정도라고 하니 문자해독이

얼마나 지속될지 염려된다.

동파문자는 메소포! 타미아(Mesopotamia)의 설형문자(楔形文字:

cunei- form script)나 중국 은(殷)나라 갑골문자(甲骨文字: carapaces inscription)

보다 더욱 원시적이어서 현대적인 그래픽 부호를 연상케 한다.

나시족은 동파문자 외에 한자의 영향을 받은 음절문자인

게바 문자(Cephas)와 로마자에 기반한 철자법등 3종류의 서기체계의

경전 (書記體系)를 갖고 있다.

이렇게 동파문자는 나시족의 종교경전 (宗敎經典) 겸 백과사전인

동파경(東巴經)에 쓰였다.

동파문자는 처음에는 흑색(黑色: black)으로 표기하다가 후에는 여러 색으로 채색하여 완전히 그림문자(Pictography)의 형식으로 쓰여졌을 뿐 더러

악보같이 율동적이기도 하고 철학적이고 사실적 이기도 하다.

한자로 말 탈 기(騎)자는 말 머리 뒤에 사람을 태우고 달리는 형상이고,

행복'(幸福)은 남녀가 함께 춤을 추고 기뻐하는 모습을 형상화하는 등

인간의 희로애락, 선과 악, 온갖 사물에 대한 관점을 원시적인 관념으로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다.

여강고성에는 동파문자가 담벽 차이즈바(猜字壁: 시자벽)에

많이 그려져 있고, 흑룡담(黑龍潭) 등 곳곳에 동파문자박물관이 있다.

또한 리강에서 10km 거리인 백사! (白沙村)에 가면 볼 수있다.

 
↑ 시자벽(猜字壁)
 
↑ 여가아고성 시자벽(猜字壁) (남자라는 동파문자를 가리키고 있는 필자)
 
↑ 백사촌 백사벽화 담벽의 동파문자 騎(기: horse back ridding),
 
↑ 일생동안 서로 사랑한다.라는 일생상연(一生相戀)

근래에 그려진 도파문 드림들;

 
↑ 인간의 원천을 나타내는 인지시원(人之始原: nature of human being)
 
↑ 동파문자 사신도(東巴文字四神圖)
 
↑ 동파문자 연가(戀歌: love song)
 
↑ 동파문자 방적(紡績: weaving)
 
↑ 동파문자 춘파(春播: spring seeding)
 
↑ 동파문자 하서(夏鋤: summer weeding)
 
↑ 동파문자 추수(秋收: autumn harvest)
 
↑ 동파문자 바다(海: sea)

관견(管見)이지만 동파문자는 역사적 미술적 가치를 지녔고

문맹( 文盲)들에게 쉽게 읽혀질 수 있는 원시적 상형문자임으로

과학적 학술적 유용성은 결여됨으로 전문학자가 겨우 20명에 불과하다.

인간의 생활이 편리해지면 문명에 밀려 먼 훗날은 그 흔적조차 없어질지

모른다. (다음 편 백사벽화에서 다시 소개한다)


Subject 운남-13.백사벽화와 수하고성



임종욱-旅窓筆滴-중국 운남성편

 

운남성-13. 려강(麗江)-4. 백사벽화(白沙壁畵)와 수하고진(束河古鎭):
2009.7. 空慧

백사벽화(白沙壁畵: Baisha painting) 리강에서 10km 거리에 백사촌(白沙村)이 있다.

나시족의 조상들은 중국 주(周)나라 때부터 중원의 한족(漢族)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왔는데,

당.송(唐.宋)대에는 남조(南詔)등에 의해 약소국으로 전락하였다가 명(明)나라 이후

다시 세력이 커져 목부(木府)라는 관청까지 두어 보호를 받았다.

그 때 목부(木府)의 수반(首班)은 나시족 족장(族長)이며 성이 무(木: 목)씨이다. 목씨木氏) 성은,

성이 없었던 나시족 족장에게 명태조(明太祖) 주 원장(朱元璋: 1328~1398)이 자기 성(姓)을 하사한 것인데

족장은 간편하게 줄여 나무목(木)자 만을 성으로 썼다.

백사벽화라는 현판이 붙은 목씨 종가 정문을 들어서면 명태조 (明太祖) 주 원장(朱元璋)이 보고 반했다는

수령(樹齡) 500년의 버드나무가 있으니 이름하여 경유왕(?柳王: willow tree)이다.

 
↑ 노란 담장은 모두 동파문자의 시자벽(猜字壁)이다.
 
↑ 박사벽화 정문(백사벽화 正門)
 
↑ 수령(樹齡) 500년 버드나무 경유왕(?柳王)

그 목씨의 집성촌(集姓村)이 백사마을(白沙鎭: 백사진)이고

종가 (宗家)에 유명한 백사벽화(白沙壁畵: Baisha hanging painting)가 보존되어있다.

백사벽화는 약 600년전 한족(漢族)의 불교(佛敎), 장족(藏族; 티베트인)의 라마교(喇?敎: Lama)

그리고 도교(道敎: Taoism)의 선불도(仙佛道)를 합친 천수관음도(千手觀音圖)이다.

이 벽화가 모택동(毛澤東: 1893-1976)의 문화혁명 때 홍위병 (紅衛兵)들의 야만적이고

무차별한 파괴행각이 있을 때 백사촌의 촌장인 목씨가 벽화 밖에

모택동 초상을 덧씌워 화(禍)를 면하였던 것이다.

 
↑ 백사벽화 천수관음도(白沙壁畵千手觀音圖)

대보적궁(大寶積宮) 유리전(琉璃殿)에는 명.청대(明淸代: 1385~1619) 때 도교에술가 티배트불교 라마교 화가들이 ?여

그린 동파화가 보존되어 있다.

또 목씨 종가(宗家)인 목씨토사역사문화전(木氏土司歷史文化展) 에는 박물관 격인 족원청(族源廳)이 있어

나시족에 대한 역사와 문화를 엿볼 수 있다.

그 중에서 청말(淸末) 서양인들이 중국을 집어삼킨 후 중국인들을 야만적인 미개인으로 취급할 당시

가죽 으로 만든 공기주머니(浮囊: 부낭: air bag)를 가슴에 차고 도강 (渡江)을 위한 부교(浮橋) 역할을 했던 나시족 남성들의

사진을 보고 문명인이라고 자처하는 서양인들의 행동이 더 야만적임을 실감했다.

그러나 역지사지(易地思之)로 생각해보면 서양인들만 탓할 일이 아니다.

유목생활로 해양문화가 없어서 선박(船舶)을 모르는 그들이 배 만들기를 알았다해도 나무를 깎아

배를 만들기 보다는 손쉽게 양가죽(羊皮: 양피)에 공기를 넣! 부낭(浮囊)을 만드는 편이 쉽고도 감편한 일이니까.

또한 배금주의(拜金主義)는 싫어하지만 돈 앞에 큰소리치며 오기를 부려봐야 없는 자만 손해이니

있는 자는 어느 시대나 석가모니의 말대로 천상천하 유아독존 아니던가.

 
↑ 가죽으로 만든 공기주머니(浮囊)를 차고 부교역할은 했던 나시족.
(백사진 목시종가 족원청(族源廳) 소장)

백사촌은 평화롭고 옛 문화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나시족 전통마을 이다.

꾸밈없고 문명의 때가 묻지 않은 고풍스런 집과 사람들,

나식고악(古樂)을 연주하는 동리 노인들의 한여한 목가적인 모습과 야크(?牛: yak)보다 크고

황소보다 작은 핀속 소먹이를 잔득 비어 오는 여인들의 억척스런 모습 등이 발길을 멈추게 한다.

 
↑ 백사촌 마을 입구 정문에서
↑ 백사촌 마을 입구의 서양인 관광객
↑ 백사고악을 연주하는 목가적인 백사촌 노인들
 ↑ 백사촌 나시족 여인이 소먹이 풀을 베어 지고 오는 광경
 
↑ 가난하지만 마음편한 백사촌 노점상

목부(木府)는 중원의 한족(漢族)이 이 서남이(西南夷)인 나시족을 통치하기 위한

지방행정기관인데 성심보국(誠心報國: 성심을 다해 나라에 보답한다)라는 현판이 붙은

의사청(議事廳)의 크기가 우리 나라 창덕궁(昌德宮) 인정전(仁政殿) 보다 크다.

이곳에서 일년 에 한번 열리는 의전행사(儀典行事)는 언제 있을지 구경거리다.

쑤허꾸찐(束河古鎭: Shuhe Ancient town: 속하고진)) 여강에서 북쪽으로 약 7km 지점에 있는

옛 차마고도의 역참(驛站) 이다. 역참이 있는 마을이니 의당 있어야할 여인숙은 눈에 띄지 않았다.

여강고성 대연진(大硏鎭: Dayan)과 흡사하게 사방가(四方街)도 있고,

산 아래에 만가가 있고 상가, 연못, 대석교(大石橋) 소석교(小石橋)등 돌다리가 실용성 있게 만들어져 있다.

이곳 수경가(水景街)는 넓다.

 
↑ 속하고성 정문
↑ 속하고진 안내판
 
↑ 속하고성 수로가 점포

 
↑ 속하고성 수경가(水景街)에서
↑ 음식점(酒店: 주점)의 동파문자 선전판
 
↑ 엣날 수비병 복장을 한 음식점 선전원

물의 마을 수도(水都)인 여강에서 나시족은 물을 아끼고 슬기롭게 살았음을 볼 수 있는 삼안정이 있다.

여강 고성에도 있는 삼안정(三眼井: Tri ocular well)은 한 곳에 우물을 3개 만든 것을 말한다.

사실은 물은 한곳에서만 ?지만 우물은 3개를 만들어서 첫 번째 우물은 식수,

두 번째는 밥 짓고 야채 등 식재료용으로 쓰는 물, 3번째는 세탁용 물로 쓴다.



 
↑ 속하고성 삼안정(三眼井)

실같이 가늘게 감자를 썰어 기름에 오래 튀긴 감자튀김(potato fry),

두부지짐 등도 풍미롭고, 바비큐는 좀 야만스럽게 보이고,

재복을 불러들이는 동파개구리(東巴 招財蛙: 동파 초재와)라고

그럴사 한 이름을 붙힘 목각 개구리는 해학적(諧謔的)이다.

 
↑ 속하고성 바비큐
 
↑ 속하고성 감자튀김
 
↑ 속하고성 나시족 개구리 목각=東巴招財蛙(동파 초재와)
 
↑ 나시족 남녀를 묘사하여 다산을 기원하는 부적
 
↑ 속하고진 풍물(風物)

운봉컴사랑
출처 : 앵두나무
글쓴이 : 앵두나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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