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북한은...

북한인권운가들의 중국에서활동....

제봉산 2013. 8. 11. 09:32

지난 8월 5일 서울 마포구 신수동 사무실에서 만난 유재길(45) ‘시대정신’ 사무처장은 1년 전을 회상하며 “통탄스럽다”고 했다.

그는 작년 7월 20일 북한 인권운동가 김영환씨 등과 함께 중국에서 쫓겨났다. 다시 중국에는 갈 수 없는 영구추방이었다. 그는 작년 3월 29일 중국 다롄(大連)시에서 김영환(50)·이상용(33)·강신삼(43)씨 등과 함께 국가안전위해죄 위반혐의로 중국 당국에 체포돼 114일간 구금된 가운데 심문을 받았다. 유씨가 현재 몸담고 있는 ‘시대정신’(대표 이재교)은 대한민국 선진화와 북한 민주화를 추구하는 시민단체로 과거 운동권에 몸담았다가 전향한 인사들이 많이 참여하고 있다.

당시 언론에 대서특필된 사건의 주역은 1980년대 주사파의 교범인 ‘강철서신’의 저자이자 ‘주사파의 대부’로 불렸던 김영환씨였지만 유 사무처장은 또 다른 측면에서 사건의 장본인이었다. 전북대 의예과 88학번인 유 처장은 1989년 의예과 학생회장을 지낸 후 자퇴했다가 1995년 전북대 정치외교학과 95학번으로 다시 대학에 입학했다. 김영환씨 등이 1991년 조직한 지하당 민혁당의 전북지역 학생운동 조직 담당을 맡아 거점 확보를 위해 다시 대학에 들어간 것이다. 하지만 김영환씨가 전향하면서 민혁당이 와해되자 그 역시 전향해 북한 인권운동에 뛰어들었고, 1999년 6월 중국으로 건너가 내리 13년간 중국에서 활동을 벌였다. 그는 전향한 386 주사파 중 중국에 가장 오래 체류하며 북한 민주화 운동의 최일선에서 활약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작년에 중국이 그와 김영환씨의 활동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며 체포와 구금을 자행한 속사정을 가장 잘 아는 당사자이기도 하다. 유재길 처장의 형은 유성엽 의원(재선·전북정읍·민주당)으로, 유 처장의 체포 소식이 알려질 당시 형제가 함께 주목받았다.
그는 자신의 체포와 추방으로 인해 13년간의 노력이 물거품이 됐다는 점을 무엇보다 안타까워했다. “중요한 북한 민주화 활동가들이 영구추방되면서 우리 네트워크가 지리멸렬해졌죠. 중국 국가안전부로부터 검거돼 수사를 받다 보니까 자책감과 허탈감이 많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구축한 망을 잘 보위하지 못한 데 대한 자책감과 13년간 쌓은 노력이 파괴된 데 대한 허탈감 때문에 더 힘들었습니다.”

‘물거품이 됐다’는 중국에서의 활동에 대해 한 번도 제대로 털어놓지 않은 그에게 당시 사건과 관련해 가장 궁금한 대목인 “중국에서 무슨 일을 했느냐”를 물었다. 그는 말을 아끼면서도 왜 자신들이 체포당했는지에 대해 설명했다. “우리는 기획탈북이나 탈북유도 같은 활동은 거의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탈북한 분들과 만나서 대화를 하며 다시 북으로 들어가서 활동하겠다고 하면 지원을 했죠. 탈북자들을 감화시켜 북에 들어가 반체제 활동을 하도록 한 겁니다. 그런 과정에서 우리가 지원했던 사람들이 북한에 들어갔다가 잡히기도 했습니다. 북한 정권 입장에서 보면 위협적일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유 처장은 자신들과 접촉했다가 다시 북한에 들어간 사람들의 수에 대해서는 “말하기가 그렇다”며 “여러 해 동안 여러 명의 사람을 지속적으로 (접촉)해 왔다”고 밝혔다. 그는 “우리와 접촉했다가 다시 북으로 들어간 분들 중 지금도 활동하는 분들이 있다”며 “하지만 국내에서는 바로 연락하기가 쉽지 않다”고 했다. 자신들이 중국에서 영구추방됨으로써 북한 내부 망을 복원할 수 없게 된 것이 더욱 안타까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북한 민주화 운동가들이 중국에서 주로 접촉한 탈북자들은 대학생 등 지식인 계층이었다고 한다. “주로 젊은이들과 얘기를 나눴는데 신뢰가 쌓이면 우리가 과거 주사파였다는 사실을 털어놓았습니다. 그러면 놀라워하기도 하고, 전향한 과정에 대해 공감도 했죠. 자신들도 수령 체제에서 돌아서려고 하는 순간 우리가 겪었던 경험이 도움이 됐던 겁니다. 우리의 경험으로 인해 탈북 젊은이들과 공감대를 이룰 수 있었죠.”

탈북 젊은이들에게 북한의 실상을 일깨우고 반체제 활동을 위한 감화를 위해 건네는 책은 두 가지가 가장 중요했다고 한다. 하나는 ‘북한 민주화와 민주주의적 전략’ 등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가 탈북 후 쓴 저서들이고 또 하나는 서울에서 암살된 김정일의 처조카 이한영이 쓴 ‘대동강의 로얄패밀리, 서울잠행 14년’이었다고 한다. 유 처장은 “황 전 비서의 저서와 이씨의 책은 우리도 여러 경로로 (북한 내부에) 꽤 배포했다”고 밝혔다.

물론 대화를 나누고 감화를 받은 후에도 북한에 다시 들어가 반체제 활동을 벌일 것을 결심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는 게 유 처장의 말이다. “우리와 대화를 나누고 우리가 건네준 책을 본 탈북자들의 첫 반응은 ‘맞서 싸우고 싶다’였지만 곧 ‘(내부 실상을) 알긴 알더라도 어쩔 수가 없다’고 포기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정작 결심을 실행에 옮기려면 망설이고 동요하는 게 일반적이었습니다. 북한의 경우 반체제 활동을 벌이다 적발되면 연좌제로 인해 자신뿐 아니라 부모 형제가 모두 정치범 수용소가 끌려가거나 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위험까지 감수하며 결심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이런 연좌제는 북한 내부 반체제 세력 구축에 엄청난 제약이 됩니다. 중압감이 엄청나지요. 때문에 북한 반체제 세력이 아직은 개별화돼 있고 조직화돼 있지 못한 게 사실입니다.”

유 처장에 따르면, 당시 중국 국가안전부가 유씨 일행을 체포한 배경에는 명백히 북한의 ‘압력’이 있었다. “수사를 받던 과정과 이후 풀려 나와 함께 고초를 겪은 동료들과 이야기를 나눠 보니 북한 보위부에서 우리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고 중국 국가안전부를 압박한 것이 분명해 보였습니다. 저를 담당했던 중국 수사관은 ‘북한 보위부에서 납치조와 암살조가 파견됐다. 니네들을 납치 암살하려고 북한에서 사람들을 파견했기 때문에 (우리가) 선수를 쳤다. 우리가 니네들을 선제적으로 격리하지 않았으면 북한 보위부에 끌려갔거나 죽었을 것이다’고 하더군요.”
북한 보위부의 ‘추적’과 관련해 중국 수사관들이 사진도 보여줬다고 한다. 함께 활동하던 우리 측 활동가가 숙소에서 나오거나 압록강변에 서 있을 때 찍힌 사진들이었는데, 그 인사가 접촉했던 북측 인사들이 찍은 사진이 분명해 보였다고 한다. “우리가 접촉했던 북측 인사가 배신한 것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지만 아무튼 북측 인사가 찍은 사진이 북한 보위부로 넘어갔고 그게 다시 중국 국가안전부로 넘어가 우리의 체포를 위한 압박 증거 수단으로 활용됐다고 보여졌습니다. 북한 보위부와 중국 안전부가 공조를 하는 게 확실해 보였습니다.”

유 처장은 “우리의 활동이 감지된 게 길어야 체포 시점으로부터 2~3년 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며 “장기간 매복수사와 추적을 통해 그전에 감지됐으면 그전에 조치를 취했을 것”이라고 했다.

유 처장 일행이 체포된 것은 작년 3월 다롄에서 회합을 가진 직후였다. 회합을 가진 4명 중 3명이 회합 후 각각 다른 곳에서 체포됐고, 단둥(丹東)에서 다롄으로 들어와 접촉하려던 또 다른 활동가가 다롄에 도착하자마자 붙잡혔다. 이들 한국인 활동가 외에 “수년간 도와주던 중국인”도 붙잡혀 우리 활동가들과 똑같이 114일간 구금됐다. 다롄의 회합 장소에 있었던 4명 중 한 명은 붙잡히지 않았다. 유 처장은 “단둥에서 다롄으로 오던 친구가 단둥에서 오래 활동했는데, 중국 국가안전부에서 이 친구를 최소 1년에서 반년 전부터 추적하면서 그 친구 동선을 파악하다 제가 노출된 것 같다”고 했다.

유 처장은 중국에서 13년간 활동하면서 식당 사장으로 신분을 위장했다고 한다. 옌지(延吉)와 다롄, 선양(瀋陽) 등에서 한때는 식당을 5개까지 운영하기도 했다. 유 처장은 “의대를 졸업하지 못했지만 의사 친구들이 우리 활동을 재정적으로 도우면서 식당을 운영해 활동비를 마련할 수 있었다”며 “중국에서 활동하면서 가장 아쉬웠던 부분이 재정문제였다”고 했다. “제가 활동하던 시기의 절반 정도는 햇볕정책 시기였습니다. 동료들이 왜 국정원에서 할 일을 네가 하고 있느냐고 물을 만큼 김대중·노무현 정부에서는 우리 활동에 대한 지원이 인색했습니다. 제가 당국자들에게 기회가 있을 때마다 말하지만 북한에 쌀이나 의약품을 지원할 때 그 비용의 0.1%만이라도 우리가 해온 공작적인 일이나 비공개적인 일에 체계적이고 지속적으로 투입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게 통일을 앞당기는 길이라고 믿습니다.”

유 처장과 김영환씨를 포함한 4명은 중국 국가안전부에 각각 따로 붙잡혀 다롄시의 국가안전부 취조실 격인 검찰 연수원에서 30일간 수사를 받았고, 이후 단둥의 구치소로 옮겨가 84일간 구금됐다. 체포와 심문의 주체는 단둥 국가안전부였다고 한다. 중국 잡범들과 뒤섞여 있던 구치소로 옮겨간 후에도 평균 열흘에 한 번꼴로 추가 수사가 이뤄졌다고 한다. 체포 직후에는 누가 붙잡혀 왔는지 서로 모르는 상태였지만, 수사가 진행되면서 ‘누가 이런 진술을 했다’는 수사관들의 말을 듣고 붙잡혀 온 사람들의 면면을 파악할 수있었다고 한다. 유 처장은 “중국 측이 114일간이나 우리를 가둔 이유는 중국과 북한뿐 아니라 한국까지 포함해 우리의 모든 네트워크망을 알아내려 했기 때문”이라며 “‘시대정신’과 전향한 386 등 우리에 대한 모든 것을 파악하려고 집요하게 물어봤다”고 했다. 심문은 한 사람당 2인1조로 이뤄졌고, 필요할 때마다 통역을 부르는 방식이었다고 한다. 김영환씨는 중국에서 풀려난 직후 기자회견과 방송 출연 등을 통해 자신에 대한 심문 과정에서 전기 고문과 잠  안 재우기 고문 등을 당했다고 증언한 바 있다. 유 처장은 이와 관련해 “김영환 선배가 조사 과정에서 핵심 인물로 부각되면서 중국 측이 김 선배를 통해 국내까지 모든 상황을 알아내려고 했었다”고 말했다. 김영환씨는 추방 후 기자회견에서 자신이 묵비권을 계속 행사하자 체포한 지 13일째인 4월 10일쯤부터 7일 동안 연속으로 잠을 재우지 않는 가혹 행위를 하기 시작했고, 4월 15일부터는 전기 고문을 가했다고 폭로했다. 이후 김씨는 2차 영사 면담 때인 6월 11일 “전기 고문과 잠 안 재우기 고문을 당했다”고 우리 정부 관계자에게 고문 사실을 알렸다고 밝혔다.

유 처장은 중국에 처음 입국해 활동을 벌일 때의 목표가 ‘북한 대안세력’의 육성이었다고 강조했다. “중국에서 일정 기반이랄까 거점을 갖고 있다가 북한이 본격적으로 흔들리기 시작한다면 대안세력을 구축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당초 예측은 1990년대 말을 기점으로 5~10년 안에 북한이 크게 흔들려서 지금과 같은 감시망이 무너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 빠른 속도로 반체제 대안세력을 구축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봤는데, 우리의 예상보다 북한의 생존이 길어지고 있습니다.”

유 처장은 “하지만 다가오는 또 다른 5~10년 후에는 북한 체제가 크게 흔들릴 것으로 확신한다”며 “우리가 추방되지 않았으면 계속 역할을 했을 텐데 중요한 시기가 다가오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역할을 할 수 없어 통탄스럽다”고 했다.


김영환 북한민주화네트워크 연구위원


	김영환 북한민주화네트워크 연구위원
김영환 북한민주화네트워크 연구위원

“北 반체제 인사들의 신변을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네크워크를 복원하는 게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안전 문제를 종합적으로 고려하면 쉽지 않습니다.”

1년 전 벌어졌던 중국에서의 체포와 구금을 회상하는 김영환씨의 목소리도 유재길 사무처장과 별반 다를 바 없었다. 그 역시 자신들의 영구추방으로 북한 반체제 네트워크가 지리멸렬해진 것을 안타까워했다. 지난 8월 7일 전화로 인터뷰한 김씨는 “북한 내부 반체제 인사들과 연락을 하려면 할 수 있지만 그분들의 신변 안전 문제를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씨 역시 탈북했다가 반체제 활동을 하러 다시 북한으로 들어간 사람들의 수에 대해선 “밝히기 곤란하다”고 했다.

김씨는 중국에서 추방된 후 중국에서 당한 고문을 국제사회에 고발하는 활동을 벌였다. 김영환 석방대책회의 측은 김씨에 대한 중국의 전기 고문 사실 등을 UN 등 국제기구와 인권단체에 호소할 방침도 세웠다. 하지만 고문대책회의는 작년 9월 20일 ‘유엔 고문보고관에 보내는 청원서 제출을 유보하는 우리의 입장’이라는 제목의 성명서를 내고 “유엔 고문보고관에 청원서를 제출하는 등의 추가적 활동을 유보하고 상황을 지켜보려고 한다”고 밝혔다. “내외신 언론을 통해 이 문제를 한국과 중국, 국제사회에 공론화했고 추후 중국 내 북한인권운동가들에 대한 강제구금과 고문 등의 행위는 일어나지 않을 것으로 평가한다”는 이유였다.

김씨 역시 전화 인터뷰에서 “고문 후유증은 이제 없다”며 “고문 문제는 더 이상 제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김씨는 작년 12월 10일 세계인권선언일에 국가인권위원회로부터 ‘대한민국인권상’ 국민훈장 석류장을 받았다. “중국에서 고문당하며 생각한 것은 북한 주민들이 당하는 정치적 고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점이었습니다. 감옥에서 명상할 때 북한에서 고문당해 죽은 사람들이 떠올라서 고통스러운 순간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고통스럽게 숨진 사람들이 이 시대의 진정한 영웅이 아닌가 합니다.”

김씨는 작년에 자신이 받은 국민훈장을 그 영웅들에게 바치겠다며 “북한이 민주화돼서 그들의 이름을 자유롭게 얘기할 수 있을 때가 되면 지금 제가 받은 훈장 이상을 그들의 영전에 바치고 싶다”고 했다.

현재 북한민주화네트워크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김씨는 현 김정은 체제의 앞날에 대해서는 “점진적 개혁 개방으로 나가는 분위기이지만 연착륙은 쉽지 않고 장기적으로는 미래가 어둡다”며 “북한에서 자생적 대안세력이 생겨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