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왕산가는방법 알려주실분??? 서울에서 갈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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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산 가기
서울 인왕산 - 서울시내가 한눈에...
서울시 종로구와 서대문구에 걸쳐있는 산으로 모나지 않은 바위가 아름다운 산이다. 해발 338m. 정상에 서면 서울 중심가와 청와대 부근이 한눈에 보인다. 바위산이기 때문에 조망도 좋고 기차바위, 치마바위, 매바위, 범바위 등이 저마다 기이한 모습들을 뽐내고 있다.
지하철 이용시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1번 출구로 나와 사직공원방향으로 도보로 5분 걸어 사직공원옆 인왕산길을 따라 올라간다.(50여분 소요)
버스이용시 : 2, 152, 156, 158, 159, 205, 205-1, 543, 588-2번 사직공원에서 하차 사직공원옆 인왕산길을 따라 올라간다.(50여분소요)※ 공휴일·일요일 다음날은 등산이 불가능합니다.
이대로 끝내면 아쉬울것 같아 조심히 가시라고 인왕산 산행 정보를 알려드리오니
많은 참조 되시길 바랍니당^^
서울의 4산 인왕산
1. 명칭과 연혁 인왕산의 이름은 광해군일기 8년(1613) 3월 24일조에 "인왕은 부처님 중에서도 아름다운 부처님이다. 이 산에 옛날 인왕사(仁王寺)가 있었기에 인왕산이라 불리었다"라고 하였듯이, 그 산에 인왕사가 있어 붙여진 이름임을 알 수 있다. 원래 인왕산은 백악의 서쪽에 있어 조선초 태조·세종년간에는 서봉(西峰)·서산(西山)이라 부르던 것이, 『신증동국여지승람』에 '仁王山'과 '仁王寺'라는 이름으로 나타나고 있어, 성종 12년(1481) 『동국여지승람』이 편찬되기 이전에 인왕산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인왕은 불법의 수호신으로 사문(寺門) 또는 수미단 전면의 좌우에 안치하는 한 쌍의 금강역사로서, 둘 다 용맹하고 험악한 얼굴을 가지며 일명 이왕(二王) 또는 금강신(金剛神)이라 한다. 이렇듯 인왕산은 불교와 밀접한 관계가 있던 산으로 세종의 내불당(內佛堂)이 이곳에 있었고, 인왕사 서쪽에는 금강굴이 있었으며, 또 세조 때에는 복세암(福世庵)을 짓기도 하였다.세종 때 기록을 보면 인왕사가 있던 골짜기는 '인왕동'이라 불렀는데, 이는 인왕사동에서 변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인왕산 아래 골짜기 물 흐르는 곳을 일컫는 옥류동(王流洞)과 합쳐져 후에 옥인동(玉仁洞)이라는 마을 이름이 생겨났다. 이렇게 인왕산과 인왕동 이름의 유래가 된 인왕사는 태조와 성종 때의 기록에도 종종 등장하며, 연산군 때는 인왕사 복세암과 금강굴이 경복궁을 내려 누르고 있으므로 근방의 민가와 함께 철거토록 했다는 기사로 보아 적어도 연산군 때까지는 존속했던 사찰임을 알 수 있다.인왕산은 일명 '필운산(弼雲山)'이라 하는데 필운은 서산(西山)을 뜻하는 이름이다. 조선 중종 32년(1537) 명나라 사신 공용경( 用卿)이 왔을 때, 중종이 사신 일행을 경회루에 초대하여 연회를 베풀면서 손님을 최선으로 접대하는 풍습에 따라 공용경에게 주산인 백악과 서쪽 인왕산의 이름을 붙여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공용경은 북쪽의 백악을 '공극(拱極)', 서쪽의 인왕을 '필운'이라 하였는데, 이는 '우필운룡(右弼雲龍)'에서 따온 것이다. 운룡이란 임금을 상징하므로 임금을 보필할 때 오른쪽에서 한다는 뜻인데, 경복궁의 정전인 근정전에서 남쪽을 향해 보면 인왕산이 오른쪽에 위치하기 때문이었다. 필운산이라는 명칭은 명나라 사신에게 예의상 요청한 것이므로 이름으로 정착되지 못하고, 산기슭에 필운동과 필운대의 지명만이 남아 전한다.인왕산은 한양이 도읍으로 정해지면서 주산인 북악의 서쪽에 있어 우백호에 해당함으로써 일찍부터 주목되었다. 따라서 경복궁을 짓고 도성을 수축할 당시 인왕산 능선을 따라 서쪽 성곽이 축조되었다. 그런데 한양 정도 당시 북악 주산론에 대응하여 인왕산 주산론이 있어 필운대 일대가 궁터로 주목되었다. 차천로(車天輅)의 『오산설림(五山說林)』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태조께서 임금이 된 뒤 (중략) 도읍을 어디에 정하면 좋겠느냐고 물으니, 무학이 점을 쳐서 한양으로 정하고 인왕산을 주산으로 삼고 백악과 남산으로 좌청룡, 우백호를 삼으라 하였다. 그러나 정도전이 이를 마땅치 않게 생각하고 이르기를 옛적부터 제왕이 모두 남쪽을 향하고 다스렸지 동쪽으로 향하였다는 말은 들어 보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이에 무학은 '지금 내말대로 하지 않으면 200년 뒤에 가서 내 말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하였다.한편 『한경지략』에는 다음과 같이 부연 설명하고 있다.무학이 200년 뒤라 한 것은 곧 임진년(1592)을 가리킨 것이다. 임진왜란으로 도성이 무너지고 깨지고 불탔으니 참으로 용케 맞는 말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인왕산 주산론은 『태조실록』에는 보이지 않아 그 신빙성에는 문제가 있으나, 인왕산 서편 선바위 전설과 더불어 국초에 불교 세력과 성리학 세력간의 주도권 다툼의 일면을 볼 수 있는 것으로, 그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고 하겠다. 그리고 도읍을 건설할 때 좌묘우사(左廟右社)의 제도에 따라 인왕산 기슭 서부 인달방(仁達坊)에 인왕산을 주산으로 하여 사직단을 건설하니 나라의 상징이 인왕산의 품안에 자리잡게 되었다. 그리고 세종의 셋째 왕자인 안평대군은 인왕산 동북 기슭에 무계정사를 마련하여 풍류를 즐기며 조정의 일을 살피기도 하였다. 또 지리도참설에 따른 이야기로 명종 때 학자 남사고(南師古)가 인왕산 아래 사직골에 왕의 기운이 있다 하더니, 과연 선조가 사직골에서 났다. 이후 광해군 때에는 인왕산 아래 새문동(塞門洞)에 왕의 기운이 어리어 있다는 소문이 퍼져서, 그 기운을 누르기 위하여 인왕산을 주산으로 삼고 그 남쪽 기슭에 경덕궁을 세우기도 하였다. 그러나 새문동 정원군(定遠君)의 집에서 태어난 인조가 왕위에 올랐다. 광해군 당시에 경덕궁 말고도 인왕산 기슭에 인경궁과 자수궁도 세워져서 일대 장관을 이루었다.인조 2년(1624) 2월 안주병사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켜 도성을 점령하자, 뒤쫓아온 도원수 장만(張晩)이 무악에 진을 치고 이괄을 공격하고자 하였다. 이때 이괄은 도성 주민들에게 "장만을 단번에 무찌를 터이니 나와 싸움구경을 하라" 하므로, 도성 주민들이 인왕산의 곡성(曲城) 부근에 올라 구경하는데 흰옷 입은 사람들로 덮여 인왕산은 백로처럼 되었다고 한다. 인왕동은 도성 안에 경치 좋기로 손꼽히던 곳이었다. 조선 후기의 화가인 정선(鄭敾)은 비 온 뒤의 인왕산 경치를 지금의 효자동 방면에서 보고 그린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 : 국보 제216호)」로, 강희언(姜熙彦)은 자하문 근처인 도화동에서 보고 느낀 「인왕산도(仁王山圖)」로 각각 그 아름다운 경치를 실감나게 표현하여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의 대표작으로 남기도 하였다. 따라서 인왕동 뿐 아니라 이 산 기슭 곳곳에는 이름난 인물들과 깊은 인연이 얽힌 곳이 적지 않게 흩어져 있다. 지금 청운초등학교 뒷골목 안쪽의 깊은 골짜기는 백운동(白雲洞)으로 이름있던 곳이었다. 그 아래는 김상용의 집이 있던 청풍계(淸風溪)였으며, 그 근방에 세심대(洗心臺)가 있어 임금도 찾아 구경하던 곳이었다. 청풍계 청하동(淸霞洞)에서 고개 너머 남쪽은 김수항의 별장이 있었고, 그의 아들 김창업이 살던 옥류동(玉流洞)이 있었다. 그 울 안은 송석원(松石園)이라고도 했는데 평민 시인 천수경(千壽慶)이 거닐며 독서하던 곳이다. 송석원에서 서남쪽 지금의 누상동에는 북촌 제1의 활터 백호정(白虎亭)이 있었고, 고개 너머 지금의 배화여자고등학교 경내 일부는 이항복의 옛 집터 필운대(弼雲臺)이다. 또 사직단 남쪽(사직동 262번지)에는 선조가 태어나 자란 도정궁(都正宮)이 자리하였다.한편 도성의 유적은 일제의 의도적인 파괴와 광복 후의 정치적 혼란과 행정의 공백기를 틈타서 성곽 파손이 계속되어 그 일부가 잔존하는 형편이었다. 그리고 1968년 북한 무장공비의 청와대 습격사건을 계기로 안보상 인왕산의 방위체제가 문제되어, 인왕산의 출입이 통제되었다. 정부에서는 가능한 범위내에서 도성을 원형대로 복원하기로 하였는데, 이는 문화유산의 ...
출처 : Daum 지식
글쓴이 : 님아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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