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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빨치산 단편소설) 천 왕 봉

제봉산 2012. 1. 26. 16:14

 (빨치산 단편소설) 천 왕 봉

 

                               天王峰

 

                                                          지은이: 이 태 (남부군 저자)

 

 

1

 

1953년 12월. 남원포로수용소.

 

정확히는 ‘공비생포자수용소’, 큼지막한 P자(prisoner의 약자) 표지를 저고리 앞 뒤에 붙이고 다니는 빨치산 포로들의 수용소이다. 그러니까 전혀 전쟁포로로 대우받지 못하고 있는 ‘죄수’들의 수용소인 것이다.

 

영양실조로 누렇게 뜬 얼굴의 군상들이 콘세트 안 흙바닥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조그만 소리로 객담을 나누고 있다. 그 한녘에서 김민호는 혼자 창가에 기대 서서 구주죽이 내리고 있는 비를 바라보고 있다.

 

벌써 초겨울의 문턱에 들어선 계절이지만 비는 가을비처럼 줄기차게 내리고 있다. 김민호는 ‘운명’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혁명전사인 나는 운명이라는 비과학적 개념을 믿어서는 안된다. 자연과 인간의 모든 현상은 그만한 원인이 있어서 생기는 결과일 뿐이다.

 

그 인과의 법칙을 불가(佛家)에서는 전생과 내세라는 관념속에서 구하기도 하고 또는 적선(積善)과 적악(積惡)의 응보로서 설명하기도 하지만 나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현실적으로 적선한 자가 복을 받는 것은 아니며 적악한 자가 불행해지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의 경우가 허다하다. 그렇다면 나를 이 자리에 있게 한 원인은 무엇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을 내 자신에게서 찾을 수가 없다. 지난 겨울 지리산 거림골에서 박격포탄에 찢기어 피범벅이 되어 숨을 거둔 이지숙의 처참한 주검, 그 착하고 사랑스럽던 소녀의 어디에서 그래야 할 원인을 찾을 수 있었던가?

 

콘세트의 문이 덜커덕 열리며 미군복 우비에서 빗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헌병 하나가 들어섰다. 철조망 둘레를 순찰하다가 비가 워낙 거세니까 잠간 땡땡이를 부리기 위해 포로들의 막사로 들어 선 것이다. 어깨의 칼빈총을 내려서 거꾸로 들고 흔드니까 총구에 고여 있던 빗물이 주르륵 흘러 나왔다.

 

“제기랄 크리스마스가 내일모랜데 눈이나 펑펑 내렸으면 좀 좋아. 무슨 놈의 겨울비가 이렇게 퍼붓는대.”

 

헌병은 안주머니에서 화랑담배 한 가치를 빼물다가 막사 안의 시선이 자기에게 쏠리고 있는 것을 의식하자 “에라.......” 하면서 담배를 곽째 포로들에게 던져줬다. 좌중의 포로 한 사람이 잽싸게 그것을 받았다.

 

곽 속에는 담배가 세 가치 남아 있었다. 포로들의 아귀같은 눈이 집중되자 담배를 받은 포로는 한 가치를 입에 물고 나머지 두 가치를 옆의 포로에게 던져줬다. 담배가치를 받은 포로는 다시 그 담배를 두동강이를 내서 좀 긴 쪽 하나는 자기가 물고 나머지는 옆사람에게 건넸다. 마치 당연한 권리를 나눠주듯이. 그 담배토막마저 얻어걸리지 못한 포로들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입맛만 다시고 있다.

 

“달빛 어린 고개 위에서 마지막 나누어 피우던 화랑담배 연기 속에....... 야, 미안해. 요담에 락키스트라이크 몇 곽 얻어다 줄 께.”

 

워커군화 끝을 까닥거리며 전우가를 흥얼거리고 있던 헌병이 붙임성있는 웃음을 지으며 생색을 냈다. 두루뭉실하고 독기가 없는 인상의 청년이었다.

 

“에에또 어디까지 불렀더라....... 추풍령아 잘 있거라 우리는 전진한다....... 담배 한 가치라도 매사가 복불복(福不福)이지.

내가 헌병이 된 것도 우연히 헌병대위로 있는 우리 형님 친구를 만난 덕분이었지. 그렇잖았으면 지금쯤 철의 삼각지댄가 피의 능선인가 하는 곳에서 몽달귀신이 돼 있었을 텐데.

썩어지면 그것도 못써먹잖아. 양귀비를 죽으로 앵긴대도 무슨 소용이야. 아이구 아찔.”

 

“빽이 든든하시군요.”

 

포로 하나가 낯간지러운 아첨을 했다.

 

“마 말하자면 그렇지. 하지만 그것도 복불복이니까 내 재수지 뭘. 에에또....... 들국화도 송이송이 피어나 반기어 주는....... 하지만 당신들도 재수가 좋아. 그걸 알아야지. 당신들도 곧 군사재판을 받을 테지만 지금은 양반이야.

몇 달 전만 해도 엉망이었어. 백전사(白戰司 :야전령부, 기간: 51년 12월 1일 ~ 52년 2월 8일) 겨울작전 때는 빨치산들 사기가 떨어져서 어찌나 포로가 많이 잡히는지 일일이 조서 꾸미고 자시고 할 도리가 있어야지.

2, 3백명씩 한꺼번에 재판을 하는데 성가시니까 검찰관이 전원에게 일률적으로 사형을 구형한 후 재판장이 피고들을 네 줄로 늘어 세워 놓고 ‘맨 앞줄 사형! 둘째 줄 무기! 셋째 줄 이십 년! 넷째 줄 십년이다’ 하고 무더기로 전결(언도)해버린 일도 있었다는군.

 

(위의 내용은 틀렸습니다. 많은 빨치산들을 생포한 다음 아주 간단한 심사 끝에 대부분의 빨치산들을 3월 중순경에 석방했다고 나와 있습니다. 백전사의 성과로는 사살 5천 8백명, 포로 5천 7백여명으로 집계 되어 있으며 미국 공간사(公刊史)에는 9천여명을 사살한 것으로 나와있습니다. 글 쓴 저자도 자신의 책 남부군 하권 152페이지에서 “당시 한국정부는 빨치산 포로들에게 믿기 어려울 만치 관대했다. 군사법정은 양민 학살의 혐의가 없는 한 극형을 가하지 않았으며 기껏해야 몇 년의 유기징역을 과하거나 혹은 그대로 석방 사면해 버렸다. '한국 전란 2년지'에 의하면 한국정부는 52년 3월 12일부터 20일 사이에 수용 중에 있던 빨치산 포로 약 4000명을 심사 끝에 방면한 것으로 나와 있다” 라고 적어 놓고 있습니다. 또한 저자는 52년 3월 19일 붙잡혔는데 그때 남원수용소 상황을 대충은 알 것인데도 소설이란 형식을 빌어 사실인양 왜곡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만 소설을 통해 그 당시 시대상황도 생각해보면서 참고삼아 읽으시라고 글을 올리는 것이니 지금 소설의 내용이 전부 사실인 것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고 봅니다.)

 

 

꽤나 싱거운 재판장이었던 모양이지만 단심제(單審制)니까 그대로 확정돼서 사형받은 사람은 며칠후 끌려나가 총살되고 징역 먹은 사람은 일반 형무소로 이감돼서 십 년이고 이십 년이고 에누리없이 감옥살이 하는 거지.

 

어떤 땐 2백 명을 한꺼번에 재판하는 데 와이로깨나 썼던지 세 명은 무죄로 빼주고 나머지 전원에게 사형을 언도해 놓고 나서 설치장관의 확정과정에서 이름 위에 OX를 쳐서 절반쯤 징역형으로 줄여 준 경우도 있었다는군. 위수사령부 참모들의 그날 기분 하나 손끝 하나로 사람이 죽고 살고 하는 거지.”

 

“헌법에 보장된 변호받을 권리도 우리에겐 인정되지 않습니까?”

 

“야아, 헌법이라....... 대한민국 헌법을 부정한 당신들이지만 구색을 맞추기 위해 국선변호사라는 것을 붙여 주긴 하지.

하지만 보수가 제대로 나오나 뭐가 답답하다고 애써 변호하겠어. 속으로는 저녁에 약속한 술자리 기생 함락시킬 궁리나 하면서 천편일률적으로 ‘인생이 불쌍하니 잘봐달라’를 되풀이하고 있으니 아무 소용없다구.

하기사 죄상이 모두 엇비슷한데 어떻게 경중을 가려? 그야말로 복불복이지. 안그래?....... 노들강변 언덕 위에 쓰러진 전우야....... 지리산 쪽이 훤한 걸 보니 비가 그칠래나.......”

 

 

-한 사람의 생사와 운명이 다른 한 사람의 그날 기분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것이다. 아이들은 장난으로 돌을 던지지만 얻어 맞는 개구리에게는 생사의 문제라는 우화가 있더니.......

 

김민호는 헌병이 신이 나서 떠들어대는 얘기를 귓전으로 들으며 또 한 번 ‘운명’이라는 어휘를 생각했다. 인간의 행불행을 좌지우지하는 실체는 과연 무엇일까? 희미한 회의가 그의 머리를 스쳐갔다.

 

“그래도 생포하고 투항은 다를 게 아닙니껴. 투항자한테도 사형을 때리는 수가 있습니껴?”

 

경남부대에 있었다는 한갑동이라는 사람이 침을 꿀꺽 삼키며 물었다. 봄에도 촌티가 흐르는 중년의 사나이이다. 막사의 포로 중 유일하게 다 해진 바지저고리를 입고 있다.

 

“그 차이가 미묘하단 말씀이야. 생포되면서 손을 쳐들면 투항이 되니까 의식불명의 부상포로 이외는 투항과 생포를 구별할 수 없지.

경찰이나 군부대나 공적을 올리기 위해 대개 ‘생포’로 보고하니까 문서상 투항은 별로 없지. 그러니까 재판에서도 별 차별이 없을 수밖에. 투항과 생포 어느 쪽으로 취급되느냐 그것도 복불복이지. 에에 또....... 한강수야 잘 있거라 우리는 전진한다.......”

 

김민호에게는 ‘투항’을 믿고 있는 그 한갑동이 비굴하고 얄밉게만 보였다. 하기사 그에게는 집에 처자식이 있을 테니까 사형에 대한 공포가 남다를 수도 있다.

 

그럼 너는 어떻냐? 네가 죽음을 초월할 수 있다면 그때 왜 죽지 못했느냐? 솔직히 고백한다면 나는 죽음이 두려웠었다. 토벌대의 총구 앞에서 손을 든 것은 살고 싶은 미련 때문이었다.

 

아마도 몇 천 명 중 한두 사람이나 있을 규격 외의 인간을 제외한다면 평균적인 인간은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이 오히려 정상일 것이다.

 

그 정상이 악덕인 것처럼 우리는 길들여져 왔다.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당과 수령에게 기꺼히 바치겠노라’고. 전쟁이 그 ‘위선’을 최고의 미덕이며 절대선(絶對善)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전쟁은 끝났고 무기를 내던진 순간 우리들의 투쟁도 끝난 것이다. 따지고 보면 전쟁 그 자체가 비정상적인 소산이 아니었던가.

 

수용소 안에서는 지금도 상당수의 포로가 은근히 ‘투쟁’을 외치고 있지만 그들의 대부분은 ‘중국과 미국 사이에 모종의 협정이 이루어져 우리들은 북으로 송환된다’ 는 출처불명의 소문을 믿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솔직히 말해서 여태까지 고생한 보람이 물거품이 되는 것이 아깝다는 생각 때문인 것이다.

 

특히 이북에 고향을 둔 포로들은 고향에 돌아가 가족들과 다시 만날 수 있는 길이 영원히 막힌다는 강박감도 거기 보태졌다. 사형장에 끌려 가면 그 가냘픈 기대마저 허사가 돼버린다. 그러니까 ‘투항’에 기대를 거는 한갑동이나 ‘투쟁’을 외치는 대부분의 포로들이나 심정적인 차이는 없는 것이다. 김민호는 얄밉게만 보이던 한갑동이 어찌보면 가엽게도 느껴졌다.

 

 

“한때는 구형도 전결도 본인에게 가르쳐주지 않던 시기가 있었지. 자기가 얼마를 구형받았고 어떤 판결을 받았는지 모르고 있다가 사형장에 끌려나가 집행 직전에 너는 사형이다.

형무소에 이감된 후에 너는 몇 년이다 하고 일러주는 거야. 그 얼마전에 사형을 언도받고 집행을 기다리던 죄수들이 소란을 피운 사건이 있어서 그랬다는군.

지금은 어지간히 질서가 잡혀서 그런 엉터리는 없어. 제대로 구형하고 언도하고 하니까 그것만 해도 어딘가? 당신들은 운이 좋다는 내말 알 만하지? 세상만사 복불복이야....... 낙동강아 잘 있거라.......”

 

 

헌병이 말한 사형수 탈출사건은 52년 4월의 소위 ‘광주 일가사 사건’이라는 것이다. 군재에서 확정판결을 받은 빨치산 죄수들을 임시 수용한 캠프 중 일가사(一假舍: 1번 임시 숙소)에는 대부분이 사형수인 약 3백 명이 수용돼 있었다.

 

그들에게는 인간이 먹는 최저의 질과 최소의 양이 급식됐으며 24시간 수갑을 찬 채 24시간 고개를 숙이고 있게 했다. 고개를 비끗하기만 해도 몽둥이가 내리 때렸다.

 

어차피 죽음을 앞두고 있는 이들이지만 수용당국의 너무나 가혹한 처우와 고통을 견디다 못해 어느날 우발적인 동기로 일제히 궐기해서 경비헌병의 막사를 습격했던 것이다.

 

궐기는 했지만 허리를 가누기 어려울 만치 쇠약한 수용자들이 더구나 수갑이 채워진 상태에서 무장헌병들과 맞설 도리는 없다. 경비대가 난사하는 기관총 아래 많은 사형수와 무기징역수들이 피범벅이 되어 쓰러졌고 나머지 사형수들은 곧 무등산 형장으로 끌려가 총살형이 집행된 사건이었다.

 

(여기 나오는 일가사 사건도 제가 인터넷으로 찾아보았지만 확인할 수 없었고 이것이 진실이라면 과거사 조사위원회가 그냥 놔두지 않았을 것입니다. 김대중, 노무현 시절에 틀림없이 문제가 크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내용을 찾을 수 없었으며 아마 빨치산끼리의 소문을 통해 크게 부풀려진 사건이라 생각합니다.)

 

 

53년 12월 현재 이 캠프에 수용중인 죄수들은 그 당시 ‘산’에 있었기 때문에 그런 비극적인 사건은 모른다. 다만 형장에 세워진 연후에 언도를 한 적도 있었다는 헌병의 ‘객담’을 들으며 그렇게 총살돼 간 ‘전우’의 그 순간의 심경을 생각하며 소름이 끼쳐옴을 느낄 뿐이다.

 

그러니까 당신들은 운이 좋은 편이라니....... 그것도 복불복이라니.

 

그 호인형의 헌병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막사를 나간 후에도 한동안 막사 안이 술렁거렸다. 전투에서 수없이 죽음의 공포를 경험한 그들이지만 사형대에서 맞이하는 죽음의 공포는 그 차원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모두가 느끼고 있었다. 사형을 두려워한대서 비겁자일 수는 없는 것이다.

 

“사형이 몇 프로나 될까? 제기랄 사형만은 면해야 할 텐데. 징역형이면 무기라 해도 언젠가는 세상에 나갈 희망이 있지만.......”

 

“도마 위에 오른 고긴데 칼자루 쥔 놈들한테 맡겨놓을 수밖엔. 바둥거려 봤자 별 수 있나. 충남부대의 참모장하던 이욱 동지는 조사할 것도 없이 충남유격대가 저지른 모든 일은 자기 책임이라며 종용(慫慂:억지로 권유함)히 사형을 받아 지금까지도 경비대의 칭송을 받고 있다잖아. 그런 영웅적 자세는 취하지 못할망정 꼴사납게 허둥대서야 쓰갔나.”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백선엽 [6·25 전쟁 60년] 지리산의 숨은 적들 (177) [중앙일보]

주력이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빨치산의 고급 간부도 속속 붙잡혔다. 충남 도당 68사단의 참모장 이욱이 대표적인 사례였다. 그는 당시 29세로 북한 정규 인민군 포병 장교로 낙동강 전선에서 싸우다가 퇴로가 막혀 북으로 도망치던 도중 충남 도당과 합류해 68사단의 참모장이 된 인물이다. 그는 운장산에 머물다가 수도사단의 공격을 받아 도망을 가던 중 전투경찰대에 붙잡혔다. 고등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그는 54년 처형대에 올라 생을 마감했다. 당시 충남 도당 부대는 병력과 화력이 떨어진 데다 제대로 ‘보급 투쟁’을 하지 못한 채 산속에 숨어 도토리로 연명한다고 해서 ‘도토리 부대’라는 수치스러운 별명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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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선엽[6.25전쟁 60년] [중앙일보]에 있는 내용중 일부 입니다.

 

한 달여 동안에 지리산과 백운산을 공격했던 수도사단은 빨치산 1867명 사살, 1055명 생포의 전과를 올렸다. 회문산과 백아산, 조계산과 화학산 일대에 숨어든 빨치산을 뒤쫓았던 8사단도 3기 작전 기간 동안 사살 1715명, 생포 1972명의 성과를 기록했다. 운장산과 덕유산 일대를 수색했던 예비 부대 서남지역전투사령부도 102명을 사살하고 615명을 생포했다.

 

이는 백 야전전투사령부에 보고된 숫자다. 대개 전투의 성과는 부풀려지게 마련이다. 사살한 적을 일일이 검증할 시간 여유가 없기 때문에 숨진 사람의 숫자를 세는 데는 과장이 끼어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전체 작전이 커다란 성과를 올렸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지리산을 중심으로 그 주변 지역에 숨어 있던 빨치산 부대는 이로 인해 원래의 전투력을 모두 상실할 정도로 타격을 입었다.

 

내가 100여 일 동안 이끌었던 전투사령부의 작전은 1952년 2월 8일 아침 6시를 기해 끝이 났다. 나중에 언급하겠지만, 나는 이 작전을 마감한 뒤 창설되는 2군단을 맡아 임지를 춘천으로 옮겼다. 나머지 빨치산을 처리하는 임무는 수도사단장 송요찬 장군에게 맡겨졌다.

 

수도사단 역시 3월 14일 작전권을 서남지구전투사령부에 인계한 뒤 전방으로 이동하면서 백 야전전투사령부의 모든 작전은 완전히 막을 내렸다. 전체 작전 기간을 통해 우리가 거둬들인 성과는 결코 작지 않았다. 사살 7000여 명, 생포 6000여 명의 성과였다. 이 전과를 두고 기록마다 적지 않은 차이를 보이기도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최소 1만 명 정도의 빨치산이 전투사령부의 작전에 걸려들어 목숨을 잃거나 포로로 잡혔다.

 

육군본부는 애초 빨치산의 숫자를 3000명 정도로 파악했다. 비무장 대원까지 포함해도 8000명을 넘지 않을 것으로 봤던 것이다. 이를 감안하면 전투사령부의 보고는 기대치를 훨씬 넘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작전으로 빨치산이 이 땅에서 영원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수도사단이 철수한 뒤에도 빨치산 일부는 명맥을 겨우 유지하면서 활동을 벌였다. 가끔 산간 가옥이나 그 밑의 마을에 내려와 보급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 빨치산의 활동은 치안을 위협하는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경부선을 위협하고, 전라선을 끊으면서 군사물자의 이동에 지장을 초래하는 등 사회의 근간마저 뒤흔드는, 국가안보 수준의 위험은 아니었던 것이다.

 

백 야전전투사령부의 작전 성공으로 그런 국가안보 위협은 사라졌다고 해도 잔당(殘黨)의 준동은 멈추지 않았다. 훨씬 뒤의 이야기지만, 최후의 빨치산은 63년이 되어서야 사라졌다. 그 전까지 겨우 명맥을 유지하면서 꿈틀대던 빨치산들은 백 야전전투사령부가 떠난 뒤 작전을 펼쳤던 서남지구전투사령부와 경찰이 토벌했다.

 

지리산과 빨치산을 이야기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이현상이다. 평양의 ‘열사(烈士)’ 묘역에는 그의 가묘(假墓)가 만들어져 있다. ‘남조선 혁명가, 1905년 9월 27일생, 53년 9월 17일 전사’라는 묘비도 세워져 있다.

 

그는 남한에서 활동했던 모든 빨치산의 상징이자 구심점이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어딘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그가 사살된 채 발견된 때는 53년 9월 18일이다. 이현상의 시체는 40대 후반 중늙은이의 모습이었다고 했다. 줄이 선 미제 군복 바지와 농구화의 깨끗한 차림이었다. 군복 안에는 일기와 한시가 적힌 수첩, 그리고 염주가 들어 있었다.

 

군 토벌대에 사살됐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실제 피살 경과는 불확실하다. 당시 경찰을 이끌고 토벌에 나섰던 차일혁 총경의 수기는 그런 점에서 참고할 만하다. 차 총경은 9월 18일 수색대로부터 보고를 받았는데, 발견한 이현상(추정) 시체를 두고 “정확하게 뒤에서 가슴까지 관통한 것으로 보아 상당히 가까운 거리에서 총을 맞은 것 같다”고 묘사했다.

 

차 총경의 회고에 따르면 이현상은 토벌대가 쏜 총탄에 맞아 숨진 것이 아니라, 김일성의 남로당계 숙청에 따른 여파로 평당원으로 강등된 다음 같은 빨치산에 의해 죽임을 당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인다.

 

나는 이현상이 사망할 때 육군참모총장으로서 그를 쫓는 토벌대의 활동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사망은 치안과 사회 근간을 어지럽히던 빨치산의 활동이 대부분 종결됐음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비록 그가 국군의 총격에 맞아 숨졌는지, 아니면 빨치산에 의해 사살된 것인지 분명치 않지만 어쨌든 그의 죽음으로 남한 내 빨치산의 활동은 커다란 단락을 맺은 셈이었다.

 

이현상의 제 5지구당은 그의 죽음과 함께 소멸했지만 전남과 전북·경남 도당 등은 관할 지역을 몇 개의 작은 지구로 나눠 10명 정도의 작은 부대를 운영했다. 그러면서 재건을 꿈꾸었겠지만 대세(大勢)는 이미 넘어간 뒤였다. 그의 죽음 뒤 경남 도당을 지휘했던 이영회의 부대도 후속 토벌대에 의해 전멸했다.

 

나는 육군참모총장으로 있으면서 53년 겨울을 맞아 전방으로부터 1개 정규 사단을 추가로 투입해 빨치산의 뿌리를 완전히 제거하는 작전을 실행했다.

 

새로 투입된 사단은 박병권 소장이 이끄는 5사단으로, 53년 12월 1일 남원에서 정식으로 전투사령부를 발족했다. 그때까지 지리산 지구 일대에서 세력을 유지했던 빨치산은 줄잡아 800명 선. 박병권 장군의 전투사령부는 54년 2월까지 1단계 작전을 펼치면서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던 빨치산과 주요 간부들을 하나씩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

 

이현상에게 자주 반기를 들었다가 제 5지구당 해체 뒤 실질적으로 서남지구 빨치산들을 총지휘했던 전북 도당 위원장 방준표 또한 54년 1월 31일 남덕유산의 아지트에서 최후를 맞이했다. 빨치산들은 그렇게 사라져갔다.

 

[지리산의 숨은 적들 (187) 지리산을 떠나며]

 

‘백 야전전투사령부’의 100여 일에 이르는 작전이 당시 커다란 민폐 없이 무사히 끝나면서 오늘날까지 특별한 소송 제기나 시빗거리 없이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은 ‘민폐 근절’이라는 대원칙을 제대로 지켰기 때문이다. 나는 이 점에서 나와 함께 작전을 펼쳤던 수많은 백야사 구성원과 미 고문관, 경찰 관계자 등에게 감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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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이욱은 왜 죽지 않고 예까지 잡혀와서 수모를 겪었단 말인가? 그렇게 말하는 저 사람도 왜 죽지 못하고 손을 들었단 말인가?

 

그런 냉소적인 생각을 하면서도 김민호는 왠지 그런 유연한 자세로 있는 강수철이라는 사나이에게 호감같은 것을 느꼈다. 그는 전남부대에서 연대장까지 지낸, 산에서는 상당한 고위간부였다. 하루는 그 강수철이 혼자서 창 밖을 내다보고 있는 김민호에게 다가와서 은밀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김민호 동무, 동무는 맨날 혼자서 도는데 무슨 걱정이라도 있소?”

 

“남달리 특별한 걱정도 없지만 철조망 울타리 속에 갇혀 있으면서 걱정없는 사람도 없잖아요?”

 

“하긴 그렇지. 동문 소속이 어디였어? 동무는 어딘가 쓸쓸해 보여서 어쩐지 내 마음이 가는데, 언제나 외톨이어서 아는 동무가 없더군.”

 

“예, 여기에 같은 부대에 있던 전우가 하나도 없어서 좀 외로와 보였는지도 모르죠. 전 첨에 102부대라는 독립유격대에 있다가 부대가 남부군에 편입된 후에는 92사단에, 그게 김지회부대로 개편되고 소멸된 이후에는 경남에 소환돼서 덕유산 소지구당에 있었습니다.”

 

“대단한 투쟁경력이군. 남부군이라면 이현상부댄데 잘 싸운 동지들이지. 한데 102는 인민군 6사단의 낙오병부대 아닌가? 그렇다면 동무는 인민군 출신이오?”

 

“마산서 후퇴하다가 입산한 45밀리 박격포중댑니다.”

 

“내 방호산 장군의 6사 얘긴 들었어. 마산서 미군 함포에 두들겨 맞아 반타작 했다지? 낙동강 전선서 제일 편제를 잘 유지하며 후퇴했대서 유명하지만 그래도 수 백 명의 포로를 냈는데 용케 입산했군. 훌륭해.”

 

“저의 아버지가 연안의 독립동맹에 계시다가 전사하셨기 때문에 저는 혁명가 유가족입니다. 그런 제가 어떻게 투항을 합니까?”

 

“그렇군. 그럼 인민군 때 계급은?”

 

“소성(小星)하나 달았습니다. 사리원농대 다니다가 단기훈련 받고 나온 학도병입니다.”

 

“군관이라....... 그럼 산에서도 상당한 간부로 있었겠군.”

 

“뭘요. 중대장급의 하급간부로 있었습니다. 덕유산서는 소부대장을 했고.”

 

“전투도 많이 하고 고생깨나 했겠군. 아무튼 2대에 걸친 영예로운 혁명가 집안이군. 훌륭한 투사여. 한데 동무한테 괜스리 정이 가서 말해주는 건데 이 막사에도 헌병대의 밀대가 몇 있으니 말조심하란 말이오.”

 

“밀대라니 스파이 말입니까? 설마 동지들끼리.......”

 

“무슨 소리. 일전에도 전남소속이었던 간부 한 놈이 제 살자고 끄나블 노릇을 열성적으로 했거든. 명색이 고급간부였던 놈이 말야.

심지어 재판장에서까지 아무개는 이러이러했습니다 하고 고자질을 했는데 그게 너무 지나치니까 얄밉게 본 재판장이 그놈에게 사형을 때렸단 말야.

네가 많은 사람을 죽게 했으니 너도 한번 죽어 보라고. 놈은 세상에 이런 경우없는 짓이 있느냐고 펄펄 뛰며 울고불고 했는데 오죽하면 방청하던 친동생까지 형님은 죽어 마땅하다고 내뱉더라잖아.”

 

“세상에.......”

 

“이욱같은 영웅도 있지만 대개는 살기 위해 염치불구지. 식사때 못 봐? 서로 한 술이라도 더 먹겠다고 아귀다툼하는 꼴을. 더러워서 못 봐주겠어.”

 

이날 이후 강수철에 대한 김민호의 존경심과 신뢰는 한층 더 굳어졌다.

 

 

 

 

 

2

 

그 무렵 수사관들은 군사재판을 준비하느라고 포로들을 수사하고 분류작업을 하고 있었다. 분류는 ABCD 4등급으로 나누는데 D급은 피난민과 피랍자로서 빨치산에 휩쓸려 수용소에 수용돼 있는 사람들이다. D급으로 분류되면 경찰서를 거쳐 도민증을 발급받고 방면됐다.

 

C급부터 군법회의에 회부되는데 C급은 후방부대의 비무장대원으로 소극적인 가담자, B급은 무장대원으로 적극 가담자, A급은 살인용의자, 골수 노동당원, 지도급 간부들이다. 그런데 그 분류가 엉성하기 짝이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빨치산의 산에서의 동태는 증거가 없기 때문에 본인의 진술 이외는 증인의 말에 의할 수밖에 없는데 53년 무렵에는 빨치산 자체가 궤멸상태에 있어서 증언을 들을 동료 빨치산을 찾아 내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더구나 대개의 빨치산부대는 수시로 편제를 바꿨기 때문에 어쩌다 같이 있었다는 동료를 찾아낸다 해도 그 기간이 짧아 피의자의 전력을 알아낼 도리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포로들을 하나하나 증거를 구비해서 군법회의에 기소하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수사관이 이용한 것이 수용자 간의 밀고제도였다. 이른바 헌병대의 밀대라는 것이다.

 

그렇게 엉성하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수용자 가족과의 뒷거래도 성행했다. 수용기간이 오래 되다 보면 경비 헌병이나 문관들과 지면이 생기게 마련이다. 고향이 부근인 포로는 그런 경로를 통해 가족에게 자기의 소식을 알리고 가족들은 수사관에게 손을 쓰는 것이다.

 

가족이라야 대개 극빈자들이니까 큰 돈이 거래되는 것은 아니다. 쌀 한 가마면 죽을 사람이 살아난다는 말이 있었다. 손만 쓰면 A급으로 분류된 사람이 D급으로 둔갑하기도 했다. 김민호도 그런 낌새를 느낀 일이 있었다. 그러나 38이북이 고향인 김민호에게는 도움을 청할 친척이나 친지가 전혀 없었다.

 

해가 바뀌면서 김민호도 동료 포로 여남은 명과 함께 특무대에 불려나가 조사를 받았다. 이 수사관들은 포로들을 시멘트 바닥에 한 줄로 꿇린 다음

 

“이 빨갱이놈의 새끼들, 성가시럽게 재판은 무슨놈의 재판이야! 당장 다 쏴 죽여버리지!”

 

하면서 구둣발로 걷어차고 곤봉세례를 퍼붓고 해서 우선 기를 꺾어 놓은 다음 “이 새끼들아, 뒷조사가 다 돼 있으니까 바른대로 말해야지 섣불리 거짓말 지껄여대면 한 방에 보내버린다!” 고 다시 한 번 엄포를 놓고는 책상 앞에 한 사람씩 앉혔다.

 

김민호는 기름통을 뒤집어 쓴 것처럼 반질반질해서 기생오라비라는 말이 어울리는 젊은 수사관 앞에 앉혀졌다.

 

그런데 조사가 시작되기 전 수사관이 잠깐 자리를 뜬 사이에 옆자리에서 회괴한 꼴이 벌어지는 것을 목격한 것이다. 옆자리에서 조사를 받고 있는 포로는 전북부대에서 대대장으로 있었다는 김민호와 동갑내기의 사나이였다.

 

그는 수용소에서 김민호의 옆자리에 있었는데 얼마전 1차 심문을 받고는 풀이 죽은 표정으로 돌아오더니 김민호를 붙들고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세상에 귀신이 곡할 일이지. 내가 전북 회문산에 있을 때 번개병단이란 데서 중대장을 한 일이 있는데 그걸 수사관이 알 까닭이 없는데 그때 어떠어떠한 전투에 참가했으며 군경 얼마를 죽인 일이 있지 않느냐고 추궁하는 거야.

내가 입이 좀 가벼워서 언젠가 자랑삼아 무용담을 털어 놓은 일이 있는데 그걸 어느 놈이 밀고를 한 모양이야. 되게 부풀려서 말야. 사람 해친 혐의만 있으면 사형이라는데....... 요놈의 주둥이 때문에 난 죽는가봐.”

 

그는 어느모로 보나 움직일 수 업슨 A급으로 생각됐었다. 그런데 그날 수사관은 서류뭉치를 뒤적이며 도무지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임마, 네가 중대장을 했다구? 너 학교 다니다 고향에 내려와 숨어 있다가 공비한테 납치됐다면서? 널 잘 아는 사람이 있더군. 공비들이 미쳤다구 납치해 온 놈을 중대장을 시켜? 그게 말이 돼?”

 

그는 어안이 벙벙해서 무슨 함정이 아닌가 하고 수사관 눈치를 살폈다.

 

“내가 말야. 네 형을 잘 알아. 너 어느 판이라고 잘난 체 허튼소리를 지껄여대.”

 

그제서야 사태가 돌아가는 것을 알아차린 그는 “예, 예” 하고 맞장구를 쳤다. 수사관은 전번 조서를 찢어버리고 새 용지에 무엇인가 극적이더니.

 

“여기다 지장 찍어. 잘 들어라. 넌 생명의 위협을 느껴 산에 끌려갔지만 놈들이 시키는 대로 짐이나 지고 다녔지. 총은 들어 본 일도 없다. 알았지?”

 

그는 곧 경찰서로 넘어갔다. D급이 돼서 방면된 것이다.

 

김민호의 담당 수사관은 잉크병에 꽂았던 펜을 꺼내들며 조용히 물었다.

 

“자, 우리 신사적으로 하자구. 니가 내 성질을 모르겠지만 난 기분파야. 솔직히 고백하면 인간적으로 봐줄 아량도 있어. 알겠지? 나이는?”

 

“스물 다섯입니다.”

 

“본적 주소?”

 

“본적은 황해도 사리원시....... 주소는 어디라고 하면 될까요?”

 

“본적지와 같음이면 돼. 산에서 뭘했나?”

 

“하급간부로 있었습니다.”

 

“번거로우니까 내 말해줄까? 102부대서 정찰대장, 다음에 남부군에서 중대장, 경남에서 소부대장을 했지? 임나하면 상당한 간부지 뭐가 하급간부야. 인민군 장교였다며?”

 

“네, 하지만 아시다시피 중대니 소부대니 해도 성원이 열 명도 채 안됐습니다. 이름만 거창하지 말단 전사입니다.”

 

대답하면서도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수사관이 미리 자신의 경력을 그렇게 소상하게 알고 있을 까닭이 없었던 것이다. 자기는 수용소에서도 항상 외톨이였다. 강수철 이외에는 자신의 신상에 관해 깊은 대화를 나눈 적이 없다. 강수철? 설마....... 산에서 연대장까지 지냈다는 사람이 그럴 리가 없다. 김민호는 일순 떠오른 의혹을 곧 지워버렸다.

 

“좋아. 고급이고 하급이고 그건 상관없고, 사람 몇이나 죽였나?”

 

“사람 죽인 일 없습니다. 절대로.”

 

“절대로? 산에서 총을 메고 다닌 놈이, 더구나 명덕전투, 가회전투, 덕산전투, 운봉전투, 마천전투, 곡성전투 유명한 전투는 골고루 따라다닌 놈이 어떻게 사람을 안죽일 수 있나. 생각해 봐라.......”

 

“전투는 했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맞아 죽었는지는 저도 모릅니다.”

 

“옳지, 전투를 하자면 총을 쐈을 게 아닌가. 총을 맞으면 죽지? 죽일라고 쏜 것은 틀림없잖아. 됐어.”

 

“.......제가 질문을 해도 되겠습니까?”

 

“해봐, 순순히 ‘자백’했으니까 들어줄 만한 건 들어주지.”

 

김민호는 그동안 찜찜하게 생각했던 일을 그 기회에 털어 놓았다.

 

“아시다시피 저는 인민군 출신입니다. 지금도 군적은 그대로 있습니다. 대열에서 낙오했을 뿐입니다. 낙오병은 항복을 해야 한다든가 저항을 해서는 안된다는 전쟁법규는 없는 것으로 압니다. 재판에 회부될 이유가 없습니다. 전쟁포로로서의 정당한 처우를 요구합니다.”

 

“뭐라고? 재판받을 이유가 없다? 그런 어려운 문제는 높은 사람이 알아서 할 일이고 우리는 우리 임무만 수행할 뿐이지. 이 사람 가만 보니 좀 건방지군. 잘 봐줄랬더니만.......너 정규군인이래도 양민을 해치면 전범에 걸리는 거 몰라? 괜스리 똑똑한 체 하면 네 손해야.”

 

“제가 언제 양민을 해쳤습니까?”

 

“재판 받아 보면 알게 돼.”

 

 

수용소에서 김민호는 더욱 외롭고 울적했다. 강수철과 어쩌다 눈이 마주치면 그렇게 보아서 그런지 애써 시선을 피하는 것같았다. 누구하고도 얘기를 나누고 싶질 않았다. 그래서 더욱 고독했다.

 

산에서는 모두 피를 나눈 형제처럼 다정했던 전우들인데.......

 

그는 어느덧 과거에 사는 사람이 돼 있었다. ‘산’이, 그 고통스럽던 시절이 되려 그립기까지 했다. 그 당당하고 늠름했던 전사가 ‘산’에서 내려온 순간 비렁뱅이처럼 비굴해지다니....... 어느쪽이 진실이고 어느쪽이 가면일까? 얼마전에 재판을 받고 어디론가 격리돼버린 소년 하나는 이런 말을 하고 있었다.

 

“우리 정치지도원 동무는 항상, 생포되거든 혀를 깨물어 자결하라고 학습을 했는데, 수용소에 들어와 보니까 지도원 동무가 나보다도 먼저 들어와서 멀쩡하니 앉아 있잖아요. 내 원.”

 

성선설(性善說)과 성악설(性惡說)은 이 수용소에서 다시 한 번 혼돈에 빠져버리고 있다.

 

며칠후 군법회의가 열렸다. 남원천 건너 언덕 위에 세워진 콘세트 안에 마련된 재판정에 열 사람씩 한 조가 된 포로 피고들이 불안스런 표정으로 끌려 나왔다. 무장한 헌병들이 재판정 안팎을 철통같이 에워쌌다.

 

포로들이 피고석에 한 줄로 세워졌다. 완전히 무력한 몇 사람의 인간들이 재판이라는 이름으로 죽고 사는 ‘운명’의 심판을 받는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남원지구 위수사령부 고등군법회의를 개정하겠습니다.”

 

법무관의 낭랑한 목소리가 공동(空洞: 텅빈 공간) 같은 건물 안에 울려퍼졌다.

 

“인정심문이 있겠습니다.”

 

소령계급장을 단 스무나뭇 돼 보이는 재판장이 선 순서대로 한 사람씩 호명하고 나이, 본적, 주소, 학력 등을 형식적으로 물었다. 미군 작업복 윗도리에 아래는 회색 솜바지를 걸친 어수룩한 인상의 청년이 첫 차례였다. 이름이 사복동이고 본적이 충남 서산이라고 했다.

 

재판장이 재차 물었다.

 

“학력을 물었는데 왜 대답이 없나?”“소학교 문턱에도 못 가봤는데 뭐라고 대답하면 돼유?”

 

“그래?”검찰관이 경찰관 세 명을 살해한 악질분자라는 요지의 간단한 논고를 한 후 증인심문이 시작했다.

이 경우의 ‘증인’은 피고 본인이다.

 

“검찰관의 논고대로 틀림이 없나?”

 

“저는 절대 사람 죽인 일 없시유. 산사람들 시키는 대로 짐을 져다 준 죄밖엔 없이유.”

 

“네가 공비가 아니란 말인가?”

 

“공비가 뭐래유?”

 

“빨치산!”

 

“우리동네에 까치산은 있어두 빨치산은 없시유.”

 

사실 사복동은 지능이 백치에 가까운 사람이었는데 그것을 너스레를 떠는 것으로 생각한 재판장은 심증이 몹시 상했다.

 

“너 육이오때 자위대를 했지? 보초도 서고.”

 

“보초야 가끔 섰지만 총은 없고 작대기만 들구 섰시유.”

 

“그때 자위대에서 숨어 있는 경찰관을 찾아내서 죽인 일이 있잖아.”

 

“전 절대 사람 안죽였시유.”

 

“넌 안 죽였어도 본 일은 있지?”“본 일도 없이유.”

 

“그럼 얘기를 들은 일은 있겠지? 한 동네니까.”

 

“그런 얘기들을 하기는 하드구먼유.”

 

사복동의 운명은 이 한 마디로 결정됐다. ‘살인방조’의 확증이 잡힌 것이다.

 

“됐어. 자리에 가 앉아!”

 

다음은 강수철의 차례였다. 강수철은 고개를 떨구고 다소곳이 인정심문을 마쳤다. 그 태도가 회개하는 빛이 역력해 보였다. 검찰관이 논고를 했다. 일시적으로 옛 친구의 꾐에 빠져 산에 들어갔으나 곧 전비(前非: 과거 잘못)를 뉘우치고 차일피일 수동적으로 시일을 보내다가 귀순 투항했다는 요지였다.

 

재판장이 동정의 빛이 완연하게 간단한 증인심문을 했다. 강수철은 시종 절에 간 색시같은 시늉을 하며 가끔은 눈물까지 머금어 보였다.

 

 

 

 

 

3

 

 

“다음은 김민호!”

 

김민호는 암담한 기분으로 피고석에서 일어났다. 형식대로 인정심문이 끝나고 검찰관이 괘지에 적은 논고문을 억양없는 어조로 읽어 내려갓다.

 

“피고 김민호는 사회주의체제하에서 선택된 자만의 특권인 대학교육을 받을 만큼 열성적인 공산주의자로서 북괴의 6.25남침이 시작되자 인민군에 자원입대하여 장교로서 종군 중 9.28후 동료 패잔병을 규합하여 102부대라는 이적단체를 구성하는 데 주동적 역할을 하고 그 정찰대단이 되어 서부경남 산악지대에 입산, 이후 남부군 김지회부대 중대장, 덕유산 김소부대장 등을 역임하면서 덕산지서 습격, 곡성읍 습격 등 대소 40여 회의 전투에 참가, 살인, 약탈, 방화를 자행해 온 자로서 국방경비법 제32조 등 여러 조항에 해당되며 그 행위가 매우 극렬하고 악질적일 뿐 아니라 뉘우치는 빛이 전혀 없으므로 최고의 형으로 처벌함이 가하다고 논고합니다.”

 

김민호는 멀리서 울려 오는 남의 얘기처럼 멍멍한 표정으로 그 논고라는 것을 듣고 있었다. 증인심문이 시작됐다. 재판장이 요식대로 물었다.

 

“논고대로 틀림이 없나?”

 

김민호는 잠시 망설였다. 논고에는 아무런 구체성도 없고 사실적시도 없다. 전쟁 자체가 죄인 것이다. 하지만 일방적 통고나 다름없는 이 재판에서 내가 무슨 말을 할 것이며 그게 도대체 무슨 소용일까?

 

이 시각, 완전히 무력한 내가 나를 지배하고 있는 저 절대적 힘 앞에서 무슨 설득력을 기대할 것인가. 그렇다고 논고를 그대로 승복할 수는 없다. ‘민호야, 네 운명이, 네 생사가 판가름나는 순간이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한다.’ 김민호는 그 순간 아득한 고향집의 어머니를 떠올렸다.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선 제가 대학을 다닌 것은 반드시 열성분자여서가 아닙니다. 아버지가 해방전 독립동맹에서 일을 하시다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혁명가 유가족회에서 주선을 해준 것입니다. 아버지는 조선의용군으로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하셨습니다.”

 

“독립동맹이니 조선의용군이니 하면 중국 연안에 있던 좌익결사 아닌가? 선대서부터 공산당을 했군. 그러니까 열성적일 수밖엔.......”

 

“해방전 좌익운동은 독립투쟁의 일환이었습니다.”

 

“어쨌든 빨갱이는 빨갱이 아닌가. 그리고?”

 

서북청년단 출신인 재판장은 약간 신경질적인 어투로 말했다.

 

“자원입대라고 하지만 그때 우리 학급 남학생 전원이 한 사람 빠짐없이 지원했습니다. 그리고 1주일간 단기교육을 받고 소위계급 달고 전선에 보내졌을 뿐입니다.

개개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말입니다. 대한민국에도 그런 경우는 있을 것입니다. 전쟁이 우리들 젊은이를 그대로 놔두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거싱 어째서 제 개인의 책임입니까?”

 

“좋아. 그럴 수도 있겠지. 그건 죄와 상관없어. 다른 할 말은 없나?”“산에서의 경력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살인, 방화, 약탈을 한 일은 없습니다.”

 

“보급투쟁도 안해단 말인가? 3년 동안 뭘 먹고 살았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식량 구득은 안할 수 없었지만 그건 말하자면 긴급피난입니다. 범죄로 간주될 수 없습니다. 그건 왜 굶어 죽지 않았느냐고 따지는 얘기나 마찬가집니다.”

 

“빨갱이는 이론을 잘 깐다더니 덩신 좀 건방지군 그래. 지금 난 피고하고 법률토론을 하고 있는 것이 아냐. 당신은 사실여부만 말하면 돼.”

 

“사실여부를 말하겠습니다. 방화는 토벌대 쪽이 했지 우리가 한 적은 없습니다. 적어도 제가 소속했던 부대는 실화방지를 위해 여간 조심하지 않았습니다. 산생활에서는 산중의 초막 하나도 매우 요긴한데 불태울 까닭이 없습니다. 아무튼 저 자신은 방화도 살인도 한 일이 없습니다.”

 

“인제 하고 싶은 말 다 했나?”“한 말씀만 더 드리겠습니다. 저는 대열에서 낙오했을 뿐 지금도 군적에 있는 군인입니다. 낙오병은 전투를 하지 말라는 전쟁법규가 있습니까?

전선 후방에서 싸우면 안된다는 법규가 있습니까? 또 이 재판에서 포로들에게 적용되고 있는 국방경비법 32조는 이적죄(利敵罪)인데 전쟁이라는 것이 한 쪽에서 보면 상대방 성원은 모두 이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게 바로 전쟁입니다. 군사재판장에 설 이유가 없습니다. 전쟁 포로로서 정당한 대우를 해주십시오.”

 

“개전의 정이 전혀 없군. 설사 정규군이라도 양민에게 해를 입히면 범죄가 되는 것이 세계적 통례 아닌가? 도대체 제복없는 무력집단을 군대로 인정하는 나라가 어디 있나? 아무튼 피고는 공소장의 경력사실을 인정했으니까 그만하면 됐어. 자리에 가서 앉아! 다음, 한갑동!”

 

김민호는 힘없이 자리에 앉았다. 만사는 끝났다는 허탈감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이제 내 운명은 저 젊은 재판장 손에 달려 있다. 눈앞의 저 동갑내기뻘의 새파란 내 생사를 마음대로 좌우할 수 있는 절대권자라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우스꽝스럽기도 했다.

 

얼마 후 사실심리가 모두 끝나고 검찰관의 일괄적인 구형이 선언됐다. 경비 헌병들이 일제히 앞에 총을 했다. 검찰관이 헛기침을 몇 번 하고 나서 괘지를 집어 들고 일어서자 장내가 일시에 물을 끼엊은 것처럼 조용해지면서 두 줄로 가지런히 앉아 있는 포로들의 숨소리가 한층 크게 들렸다.

 

“구형을 하겠습니다. 피고 사복동 사형!”

 

사복동은 그게 무엇을 뜻하는 말인지 모르는 것처럼 얼떨떨한 표정으로 검찰관을 쳐다 보고 있다가 둘레의 시선을 의식하자 옆사람들을 한 번 둘러 보고는 말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피고 강수철, 징역 5년!”

 

강수철의 얼굴에 희색이 돌았다. -살았구나! 구형이 5년이니 전결은 기껏 3년쯤으로 떨어지겠지. 모범수로 인정되면 1년 반 후엔 나갈 수 있다. 아냐 논고에서 개전의 정이 농후하다고 했으니까 어쩌면 집행유예로 당장 풀려날지도 몰라.

 

강수철은 창 밖을 내다봤다. 남원천 너머 겨울 햇살이 눈부신 시가지가 내려다 보였다. 해맑은 자유의 천지가 거기 펼쳐져 있었다. 아아, 자유! 얼마나 신나는 어휘인가. 따뜻한 온돌방과 김이 서리는 흰쌀밥과 여자의 보드라운 살갗이 바로 옆에 다가와 있는 것이다.

 

아아, 얼마나 그립던 것들인가. 그러나 강수철은 수심에 찬 표정을 바꾸지 않고 다소곳이 앉아 있다. 재판장의 동정적인 심증이 흔들려서는 안되는 것이다.

 

“다음. 피고 김민호, 사형!”

 

김민호는 애써 태연을 가장하려 했으나 벌겋게 상기된 얼굴을 자각하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예상했던 일이었다. 일순, 검은 천으로 눈을 가리우고 말뚝에 묶여 있는 자신의 모습이 머리에 떠올랐다. 차갑고 습기찬 땅구덩이속에 누워 있는 자신의 주검을 떠올렸다. 이제 며칠 후에 다가올 그 절망의 순간을 회피할 아무런 수단도 자신에게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닭았다.

 

모든 것은 ‘운명’이다. 그 숱한 전투의 어느 한 찰나에 직격탄이 머리를 관통할 수도 있었다. 그렇게 치부해 두자. 애써 태연을 가장하면 할수록 무르팍이 덜덜 떨려 오는 것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다음. 피고 한갑동, 사형!”

 

억! 한갑동은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벌떡 일어섰다. 헌병들이 달려들어 잡아 앉혔다.

 

“저는 투항을 했습니다! 귀순입니다! 너무합니다!”

 

한갑동은 절규하며 푹석 주저앉았다.

 

이날 출정한 30명 중 절반 가까이가 사형을 구형받고 나머지가 무기서부터 5년까지의 징역형을 구형받았다. 재판이 끝나자 모두가 재판정 가까이에 세워진 막사에 격리 수용됐다. 정보차단을 위해 일단 출정한 포로는 다시 그전 수용소로 돌려 보내지 않는 것이다.

 

재판 계류자들의 막사는 수용소보다 한층 경비가 삼엄했다. 막사안에 처넣어진 이들은 장터에 풀어놓은 촌닭처럼 잠시 어리둥절하다가 점차 냉정을 회복하자 재판결과에 대한 의견들을 교환했다. 정확하게 말하면 서로의 말 속에서 위안과 구원을 찾고자 하는 것이다.

 

“내가 헌병한테 들은 얘기로는 요즘은 옛날처럼 덮어놓고 사형을 때리진 않는대. 일단 사형을 구형하지만 전결과 확인 과정에서 대개 무기나 20년쯤으로 떨어진다는구먼. 일 년에 한두 번씩 감형이 된다니까 무기는 곧 20년으로 20년은 10년쯤으로 줄어들고 형기 절반 이상 살면 나머지는 탕감도 해준다니까, 마 사형을 구형받았다 해서 낙심할 필요는 없어.”

 

‘정보통’이라는 별명이 붙은 포로의 얘기다. 그는 무기를 구형받고 있다. 일단 사형만 모면하면 언젠가는 출옥할 희망이 생기니까 그의 표정은 비교적 느긋했다. 당장 사지를 결박당한 채 총살장에 끌려갈 두려움이 없으니까 그것만 해도 어딘가? 종신징역이라는 절망적인 벽을 의식하는 것은 형무소에 이감되고 얼마 지나서부터의 일이다.

 

그들의 유일한 정보원(情報源)은 경비 헌병의 아는 체하는 말 뿐이니까 그 말을 절대적으로 믿을 수밖에 없다. 사형 구형자들의 귀가 구세주를 만난 듯 ‘정보통’ 쪽으로 쏠렸다.

 

일반 사회같았으면 10년 정도면 대단한 중형이지만 여기서는 기준이 다르다. 10년 이하의 구형을 받은 사람은 조금은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조심스럽게 한녘에 앉아 있다. ‘파격적’으로 가벼운 구형량이 사형이나 무기를 구형받은 동료들에게 배신감을 갖게 할지도 모른다는 염려와 설명불능의 가책감 때문이었다.

 

그중에서도 예외적으로 가벼운 구형을 받은 강수철은 시종 시선을 창 밖으로만 보내고 있다. 남과 눈이 마주치는 것이 어색해서만이 아니라 자꾸만 번져나오는 기쁜 기색을 감추기 위해서였다.

 

다만 그에게도 일말의 회한은 없지 않았다. ‘산’에서 연대장으로 있을 때 연락병처럼 달고 다니던 소년전사 하나가 수사과정에서 진술을 잘못한 탓으로 그날 사형을 구형받은 것이다. 말하자면 진술하는 기술이 서툴렀던 것이다.

 

살인행위를 ‘봤다’하면 공범이고 ‘들었다’하면 방조가 된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다니....... 저 녀석이 산에서도 대가리가 잘 안돌더니만, 쯧쯧.

 

그는 소년전사와 오랫동안 산 생활을 같이 해오면서 고운정 미운정 다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연대장이던 자기는 곧 자유의 몸이 되고 자기가 부리던 소년은 총살된다는 모순을 느끼지는 못하고 있었다.

 

바로 어제까지 평등한 포로 신분으로 아무런 격의없이 생활해왔던 사람들 사이에 단 몇 시간 동안에 메울 수 없는 깊은 흠이 생겨 있었다. 사형과 무기징역, 그 종이 한 장 두께의 죄의 차이가 이들의 운명에 삶과 죽음이라는 절대적인 벽을 쌓아 놓은 것이다.

 

그로부터 근 십 년에 걸쳐 빨치산 죄수들 사이에 끈질기게 떠돌던 소문들,

 

‘평화협정이 성립되면 우리는 북으로 송환된다. 협상은 곧 시작된다. 아니 이미 진행중이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라면 전향도 허용된다. 어떻게든 살아 남아라. 이것은 당중앙의 지침이다.’

 

등등 출처불명의 소문들이 떠돌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김민호의 귀에도 그런 풍문은 들려왔다. 하지만 그게 사실이라해도 사형이 집행되면 만사는 영원히 끝나는 것이다. 이제는 바둥거릴 시간도 기회도 다 지나가지 않았는가. 부질없는 망상은 그만두자.......

 

 

 

 

 

4

 

 

수용자들의 착잡한 상념 속에 하루 해는 순식간에 넘어갔다. 이틀 후에 그들은 다시 군법회의장에 끌려 나갔다. 재판장의 전결(판결)이 언도되는 것이다. 단심제니까 관여 법무관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법률에는 전혀 소양이 없는 전투병과의 위관급 장교 몇 사람이 대법관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장교들 중에는 우익청년단체 출신들이 많았다. 좌익청년들과는 서로 불구대천의 원수처럼 생각해 온 사이다. 자연히 감정이 개재되지 않을 수 없다. 피고인 포로들은 도수장에 끌려나가는 짐승처럼 풀죽은 표정으로 재판정에 들어서서 도열했다. 언도는 5분도 채 걸리지 않고 끝났다.

 

예상대로 사형구형자 중 상당수가 무기징역으로 감해졌다. 사형을 언도받은 것은 김민호와 사복동, 한갑동 등 열 명이었다. 이들에게 사형이 언도될 때마다 앞에 총을 한 헌병들이 일제히 철커덕 하고 요란스런 장탄 소리를 냈다. 이판사판으로 발악하는 피고가 있을까봐 기를 죽여놓는 것이다.

 

순간 사형수들의 얼굴이 창백하게 굳어졌지만 자세를 흐트러뜨리는 사람은 없었다. 실오라기같은 희망이지만 이들에겐 마지막으로 군법회의 설치장관, 즉 위수사령관인 사단장의 최종확인이라는 절차가 남아 있는 것이다. 강수첼에게는 3년 징역에 2년간 집행유예가 선고됐다. 그는 재판정을 나오면 바로 남원경찰서로 보내져서 소정절차를 밟고 자유의 몸이 될 것이다.

 

포로 죄수들은 이제 완전히 다른 궤도를 걷는 적어도 세 개 이상의 그룹으로 나뉘어졌다. 사형과 징역형과 방면, 그 차이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크다. 사실상 산에서 그들은 엇비슷한 삶을 살아왔다. 그것이 재판정에서는 하늘과 땅으로 나뉘어진 것이다.

 

산에서 상하급자의 명령체계는 엄격했다. 가히 불가침이었다. 그러나 산에서 내려온 순간 그것은 아무 의미도 없어졌다. 군사재판정도 별로 거기 무게를 두지는 않는 듯이 보였다. 아니 산에서 ‘간부보존’이란 명분 아래 상대적으로 평안한 위치에 있던, 또 그래서 끝까지 살아 남을 수 있었던 고위간부, 특히 정치간부들의 형사적 책임은, 얼어 죽고 굶어 죽고 맞아 죽을 것을 요구받으며 총을 들고 악전고투했던 말단 전사들의 형사책임보다 상대적으로 가볍게 평가됐다.

 

그 분명한 모순은 그러나 어느 사회에서나 존재하는 아주 보편적인 현상에 불과했던 것이다. 일반사회에서는 그것을 ‘유전무죄 무전유죄’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 다를 뿐이다.

 

평균적인 인간 김민호는 자기에게 사형이 내려지는 순간 사고가 일시 정지된 듯한 환각에 빠졌다. 눈은 필름이 끊어진 흑백화면을 보고 있는 듯했고 그 소리는 멀리서 들려오는 이명(耳鳴)같기도 했다. 이 젊은 육체가 며칠 후 싸늘한 시체로 변한다는 공포는 그 다음 순간에 왔다. 그리운 모든 것들에 대한 뿌리칠 수 없는 미련은 다시 그 다음에 온 지각(知覺)이었다.

 

절차는 김민호의 사고와 상관없이 진행됐다. 자신의 의사에 의해 자신을 운신해 본 기억은 아득했다. 벌써오래전부터 그의 육체는 완전한 타율에 의해서 조작돼 왔다. 재판이 끝나자 헌병들은 사형수의 손목에 하나하나 수갑을 채워서는 콘세트 밖으로 끌어냈다.

 

그 수갑은 그들의 사형이 집행될 때까지 그들의 손목에서 벗겨지지 않을 것이었다. 이제 그들은 수족을 움직이는 최소한의 자유까지 잃었다. 그들이 그 완벽한 구속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은 죽는 순간이다. 나치스는 수용중인 유태인에게 ‘노동이 곧 자유’라고 선언했지만 이 경우는 에누리없이 ‘죽음이 곧 자유’인 것이다.

 

징역형을 받은 죄수들은 착잡한 표정으로 먼저 끌려나가는 이들을 바라봤다. 두 그룹의 포로죄수들은 그 순간부터 영원히 차단되는 것이다. 글자 그대로 영원히.

 

 

“조인영 동무! 나 먼저 간다. 먼저 가서 네가 좋아하던 희숙 동무 만나면 네 소식 전하마. 잘 있거라. 조동무!”

 

“건식아! 할 말이 없구나. 잘 가거라. 언젠가 출옥하면 내가 너의 어머니 너 대신 봉양하마. 아무 걱정 말고 부디 마음 편안히 가거라! 언젠가 영원한 평화의 나라에서 우리 다시 만나자꾸나!”

 

“그래, 좌도 우도 없고 혁명도 증오도 필요없는 그런 투명한 세계에서 우리 다시 만나자....... 잘 있거라!”

 

 

3년 동안 같은 부대에서동고동락했다는 사형수 박건식과 징역수 조인영이 헌병들의 제지를 무릅쓰고 한 마디씩 주고받았다. 희숙이란 이태 전 겨울, 지리산에서 전사한 소녀대원의 이름이다. 흰나리처럼 순결하고 아름다운 소녀였다. 헌병들도 숙연한 표정이 되어 그들이 나누는 절규를 심하게 만류하지는 않았다.

 

사형수들이 스리쿼터에 실려 끌려간 곳은 어제 수용됐던 막사에서 육모정 쪽으로 1킬로미터쯤 떨어진 언덕 밑에 외롭게 서 있는 조그만 막사였다. 그 막사로 이송돼 가는 도중에 그들은 철조망으로 칸막이 된 두 개의 허름한 막사 옆을 지나가게 됐다.

 

그 막사는 징역형을 언도받은 포로죄수들의 임시 수용소였다. 그들은 전주, 대전, 안동 등 일반형무소로 이감되기 전 일시 그곳에 남녀별로 격리돼서 수용돼 있었던 것이다.

 

철조망 울타리가 이중으로 둘러쳐진 그 막사 마당에는 여자죄수 여남은이 나와서서 침통한 표정들을 하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 죄수들은 반대켠 막사에 격리돼 있어서 보이지 않았다. 사형수들이 그 막사 가까이를 지나칠 때 돌연 한 여자 죄수가 소리를 질렀다.

 

“민호 동무! 아이구, 김민호 동무! 나야 김춘삼이....... 아이구! 민호 동무!”

 

김춘삼은 자꾸 외마디 소리만 질러댔다. 그녀는 수갑을 찬 채 무장 헌병들의 엄중한 감호를 받으며 실려 가고 있는 김민호 일행이 사형수들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수용소의 경비 헌병이 달려와서 여자 죄수들을 막사 안으로 몰아넣지 않았더래도 김춘삼은 ‘아이구!’ 라는 외마디 영탄사 이외의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어, 춘삼 동무!”

 

김민호도 수갑찬 손을 번쩍 들어 보였지만 스리쿼터는 순식간에 그 앞을 지나쳐 버렸다. 김춘삼은 헌병들한테 떠밀려 뒷걸음질치 듯이 막사 안으로 사라졌다.

 

김춘삼, 산에서는 ‘목동’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던 그녀는 주로 산중 신문의 발간요원으로 등사원지 긁는 일을 해왔기 때문에 김민호와 자주 만날 기회는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몇 가지 공통점이 있어 남달리 친숙하게 지내온 사이였다.

 

우선 그들은 부대 안에 두 사람밖에 없던 이북출신 학생 빨치산이었다. 김춘삼은 김일성대학 재학 중 문화공작 요원으로 동원돼 내려왔다가 입산한 터였다.

 

김춘삼의 고향은 함경북도 경성(鏡城)이지만 그녀의 아버지는 김민호와 같은 황해도 신천 사람이었다. 일제때 지하운동을 하다가 일경의 수배를 받고 유랑하던 끝에 경성에서 목동의 어머니를 만나 그곳에 묻혀 살아온 터였다.

 

그런 가정사정이 김민호와 비슷했고, 다같이 혁명가 유가족회의 주선으로 대학에 다니고 있었다는 내력도 같았다.

 

어느 늦가을, 부대가 천왕봉 마루터기 언저리에서 야영을 한 일이 있는데 그날밤 두 젊은이는 보초를 교대하다 우연히 만나 그때까지는 남아 있던 콘크리트 산장의 음산한 잔해 위에 걸터앉아 돌아갈 수 없는 북녘의 고향집 얘기를 나누며 서로를 위로하고 향수를 달랬다.

 

그날 밤 중천에는 별들이 찬란했지만 북쪽 하늘은 짙은 운무에 묻혀 공제선(空際線 : 하늘과 지형이 맞닿는 선)을 분간할 수도 없었다. 북극성도 보이지 않았다.

 

“저 북두칠성 맨 아래 두 개를 연결한 선 다섯 배쯤 되는 곳에 북극성이 있을 텐데 오늘밤은 안보이네요.”

 

“안보이지만 있는 건 분명하니까 안개가 개면 나타나겠지.......”

 

그것은 마치 그들의 앞날을 암시하는 것처럼 느껴졌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그 이후 신문발간을 위해 비트(비밀 아지트)에 들어간 김춘삼과, 전투부대 중대장인 김민호가 다시 만날 기회는 한 번도 없었다.

 

더구나 김민호가 덕유산으로 전속된 이후는 서로의 소식조차 완전히 두절돼 있었다. 그 두 사람이 참으로 우연히도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찰나의 해우와 영원한 이별을 동시에 맞이했던 것이다.

 

사형수 막사에는 세 사람의 선객(先客)이 있었다. 전남 조계산의 중부 전투지구당 소속들이라고 자기소개를 했다. 그들은 최종 확인을 거쳐 이제 집행만 남은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언사가 당당하고 초연한 기색까지 엿보였다.

 

“동무들, 우린 금명간에 총살될 테지만 기왕 이렇게 된 이상 공화국 만세를 부르며 당당하게 가기로 약속을 했어요. 솔직히 말해서 확인절차가 남아 있는 동안은 혹시나 해서 언동을 조심하기도 했지만 인제 무서울 게 뭐 있어?”“확인단계에서 감형되는 수가 많습니까?”

 

재판정에서 ‘투항’을 주장했던 한갑동이 물었다.

 

“우리도 열 명이 여기 같이 들어왔는데 일곱 명이 무기나 이십 년으로 감형이 되서 저쪽 막사로 옮겨갔지. 하지만 언제나 그런 비율로 감형되는 건 아니니까. 그날 일진나름이지.”

 

“빨치산의 환갑은 스물 다섯이라니까 마 환갑 진갑 다 지낸 셈이지. 아까운 목숨도 아냐.”

 

 

‘스물 다섯 환갑’은 스물 다섯이면 벌써 육체적으로 그 가혹한 산 생활을 감당할 수 있는 한계연령이라는 뜻과, 빨치산이 죽지 않고 그만큼 살면 장수하는 셈이라는 뜻으로 산 사람들이 쓰던 우스갯소리였다. 그러고보니 김민호도 어느덧 ‘빨치산 환갑’을 맞이한 셈이었다.

 

스물 다섯의 환갑이라....... 그는 이상한 세계에 사는 이방인을 바라보듯 사형집행을 앞두고 허튼 소리를 지껄여대고 있는 세 청년을 쳐다봤다.

 

-죽음이 확정되면 인간은 저렇게 담담해질 수 있는 것일까? 저게 진심일까? ‘당성’이 그렇게 만드는 것일까? 아니면 몸에 밴 ‘허세’일까?

 

김민호는 빨치산 죄수들과 경비 헌병 사이에서 하나같이 ‘영웅’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는 충남유격대 참모장 이욱의 종용한 최후를 생각했다. 죽음을 앞둔 그의 자세가 너무나 의연해서 많은 헌병들이 감동한 나머지 그의 필적을 요청했다.

 

이욱은 그때마다 ‘앉거나 서거나 말할 때나 잠잘 때나 언제나 오직 평화를 위하여’라고 써줬다고 한다. 사형에 해당할 만큼 ‘극악무도’했던 그가 오직 평화만을 염원하고 있었다니....... 그 극단적인 모순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김민호는 며칠 후면 자신에게 닥칠 것이 거의 확실한 죽음에 대해서 나름대로의 의미를 정립해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하면서 그 세 이방인을 응시했다.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 해도 나는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말은 죽음에 직면한 적이 없는 도덕론자의 말장난일 뿐이다. ‘한 인간의 생명의 가치는 지구보다도 무겁다’는 말은 사이비 철학자의 거짓말이다.

 

사람의 목숨이 하루살이만도 못하게 다루어지는 현실 앞에서 그것들은 모두 한가하고 공허한 수사학일 뿐이다. 그 모든 것을 초월할 수 있는 지혜는 무엇일까? 종교인들이 말하는 내세란 과연 있는 것일까?

 

 

“사형이 확정돼도 집행은 보통 상당기간 유예되는 것 아닙니까? 몇 달 아니 몇 년 후가 되는 수도 있다던데.......”

 

한갑동이 다시 물었다. 생에 대한 미련은 마지막 순간까지 그치지 않는 것이다.

 

“웬걸, 그건 민재(民裁)의 경우 말이지. 여기서는 확정되면 며칠 안에 집행해버린대. 재판이라는 모양을 갖췄다 뿐이지 사실상 즉결처분이지. 기왕에 총살할 놈들, 감시하고 밥먹이고 성가시럽다 이거겠지. 싸움에 진 것이 죄니까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그러니까 산에서 전사한 것으로 치자 이거야. 전사하는데 무슨 시간이 걸려?”

 

“밥이나 한 번 실컷 먹어 봤으면 좋겠어. 기왕에 죽는 우리들한테 밥 한 끼 실컷 먹여 보내면 어때, 개새끼들. 가만....... 이럴 게 아니라 한 번 따져보자.”

 

확정 사형수 한 사람이 벌떡 일어서더니 철조망 밖에 있는 경비 헌병에게 소리쳤다.

 

“야, 너희들 상사한테 가서 말해라. 다만 며칠이라도 인간다운 대우를 해보라구. 아무리 죽는 목숨이래도 살아 있는 동안은 밥이나 제대로 먹이라고 말이다. 등이나 맘대로 긁게 이 수갑도 풀고 말이다.”

 

“야, 이 빨갱이놈의 새끼들! 너희들이 인간이냐? 인간이 인간대우를 요구해야지. 사람 백정놈이 무슨 말이 그렇게 많아? 게다가 줍소사 해도 시원찮을 판에 건방지게 그 말투가 뭐야! 또 시끄럽게 굴면 뎃뽀데쪼(등뒤로 채우는 수갑) 채워버릴 테다.”

 

헌병이 욕설로 되받아쳤다. 친형이 적치하에서 희생됐데서 빨갱이라면 이가 갈린다는 격렬한 반공주의자다. 사형수가 또 뭐라고 대꾸하려는 것을 동료 사형수가 치사스럽게 굴지 말라며 제지했다.

 

밤이 됐으나 며칠째 잠을 못자 지칠 대로 지쳐 있는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거의가 뜬눈으로 새우는 것같았다. 가끔은 넋두리를 주고 받는 말소리도 들렸다.

 

 

 

 

 

5

 

 

이튿날 죄수들이 보리밥 한 덩이의 아침식사를 마쳤을 즈음에 군재의 검찰관이 헌병 칠팔 명을 대동하고 막사를 찾아왔다.

 

“저승사자다!”

 

그동안 겉으로는 태연한 듯이 보였던 확정 사형수 세 사람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검찰관은 예상했던 대로 그 세 사람의 이름을 호명하고 몇 마디 형식적인 확인을 하더니 헌병들에게 고개짓을 했다. 헌병들이 달려들어 그들을 에워싸고 막사 밖으로 끌어냈다.

 

“동무들! 우린 먼저 간다. 잘들 있어. 곧 만나자!”

 

세 사람은 막사를 나서며 각기 한두 마디씩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한 시간쯤 후 서북릉 쪽 골짜기에서 일제사격의 총성이 울려왔다. 총소리는 산울림해서 길게 여운을 끌고는 사라졌다.

 

그날 오후 검찰관이 또다시 막사를 찾아와서 세 사람을 호명했다. 이름을 불리운 순간 세 사람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변했으나 이번에는 설치장관의 확인단계에서 20년 징역으로 감형된 것을 알리는 호명이었다.

 

세 사람의 얼굴빛이 칠면조처럼 바뀌면서 벌겋게 상기됐다. 그중에 한갑동이 끼어 있었다. 그는 까무러치듯 비틀거리며 잠시 호홉까지 멎은 듯 멍청한 표정이 되더니 이윽고 고개를 떨구며 호명되지 않은 일곱 사람을 둘러봤다.

 

그로서는 만감이 교차되는 심정으로 이제 사형이 확정된 일곱 사람에게 마지막 작별인사를 하고자 했던 것이지만 실어증처럼 더듬거리기만 하다 말았다.

 

 

-구천(九泉)길에도 운명의 갈림목은 무척 많구나. 전투에서 총탄이 조화 부리듯이.......

 

문득 그런 생각을 하면서 김민호는 옆자리에 앉아 있던 박건식의 손을 꽉 잡았다. 박도 김의 손을 힘껏 잡았다. 이제 일곱 사람은 에누리없는 운명공동체가 돼버린 것이다. 짧은 겨울해가 이미 기울고 있었다. 어둠의 장막이 절망 속의 운명공동체를 에워싸기 시작했다.

 

“여보세요, 이거 받아요.”

 

밤이 이슥할 무렵, 헌병 한 사람이 철조망 너머로 무슨 보따리같은 것을 던져 보냈다. 사형수 한 사람이 주어보니 시멘트 포장지에 싼 누룽지 뭉치였다.

 

“배들 고프지요? 밥누룽지 모아놓은 것이 있길래 가져왔어요. 나눠 먹어요.”

 

가물가물하던 사형수들의 눈에서 일시에 생기가 돌았다. 박건식이 누룽지를 일곱 등분으로 나눴다. 사형수들은 그것을 아귀처럼 먹어치웠다. 헌병들 중에는 가끔 그런 휴머니스트도 있었다. 더러는 담배를 몰래 던져주는 헌병도 있었다.

 

처음에는 좌익 동정자가 아닌가도 생각했으나 그것은 아니고 순수한 인간적인 동정심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날밤 누룽지의 주인공은 누룽지를 먹어치우고 나서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고 있는 사형수들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이었다.

 

“여러분, 주 예수를 믿으십시오. 그러면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사복동이 초점없는 시선으로 앉아 있다가 그 소리에 소스라치듯 일어났다.

 

“구원이라면 살려주는 거에유?”

 

동료 사형수들이 그 판국에도 낄낄대며 웃었다. 헌병은 조용히 설교조로 말했다.

 

“마음의 구원을 찾으십시요. 그리하면 영생하실 겁니다.”

 

“그게 무슨 말이래요?”

 

사복동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푹석 주저앉았다.

 

크리스챤 헌병이 사라진 뒤 김민호는 눈을 감고 누워서 생각에 잠겼다. 그에게는 다섯 살 때 집을 나간 아버지의 기억은 거의 없다. 사진 한 장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어쩌다 머릿속에 그려보는 아버지의 모습은 허상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 아버지의 허상은 스물 다섯이 된 오늘날까지 끈질기게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철이 들어갈 무렵 민호에게 아버지는 불가사의한 존재였다. 어머니는 아버지에 관해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냥 돈벌러 만주에 가 계시다고만 말햇지만 아버지로부터돈을 부쳐온 기색은 한 번도 없었다.

 

따라서 집안 살림은 말할 수 없이 가난해서 감자 몇 개로 끼니를 이은 기억이 허다했다. 그러나 가난보다도 더 그를 곤혹스럽게 한 것은 소학교에 들어간 후 학년 초마다 적어 내는 가정환경 조사서의 아버지의 직업란이었다.

 

어머니는 언제나 그냥 ‘무’라고만 써주었으며 민호는 어린 마음에도 좀 어색함을 느끼면서 그것을 제출했다. ‘무’의 의미를 이제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저학년때는 담임선생도 거기에 대해 별로 관심을 두는 것같지 않았다.

 

그러나 소학교 5학년 때 태평양 전쟁이 터지면서 ‘무’의 의미는 민호 앞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기 시작했다. 민호의 재능을 아끼는 친척 아저씨의 도움으로 그는 중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으나 ‘무’의 의미는 이제 절벽처럼 그의 앞을 가로막아 섰다. 어느날 일본인 담임선생이 그를 직원실로 불러서 넌지시 물었다.

 

“가네야마군, 자네는 공부도 우등이고 어느 모로 보나 우수한 학생이다. 나는 자네에게 촉망하는 바가 크다. 그래서 자네를 아끼는 마음으로 하는 말인데 지금은 비상시국이다. 자네는 여느 학생과 달라 언사에 조그만 실수가 있어도 공연한 오해를 받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겠지?”

 

“네.”

 

“알고 있었으면 됐어. 그래, 자네는 장래 무엇이 되고 싶은가?”

 

“네, 군인이 되어 천황폐하를 위해 목숨을 바쳐 싸우겠습니다.”

 

‘가네야마’ 김민호는 차려자세를 하고 힘차게 대답했다.

 

“좋아, 아주 좋아! 훌륭하다 가네야마.”

 

소년 김민호에게 언제나 그리움과 두려움이 교차되는 이름이었던 아버지는 그 무렵부터 점차 저주의 이름으로 바뀌어 갔다. 그는 남보다 앞장 서 근로봉사대열에 나섰고 충성스런 ‘황국신민’이 되고자 했다. 그게 가면이었는지 진심이었는지 지금도 분명치 않다. 어쩌면 ‘생존본능’이었을지도 모른다.

 

열여섯 살 되던 해 해방이 됐다. 긴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어리둥절하는 사이에 그는 영광스런 혁명가 유자녀가 돼 있었다. 열아홉에 중학교를 마치고 대학생이 될 때까지 아버지는 자랑스런 이름으로 항상 그의 곁에 있었다. 학우들은 선택되고 앞날이 약속된 그를 부러워했다.

 

자연히 여학생 사이에서도 그는 인기의 초점이었다. 많은 여학생들이 그와 교제하기를 원했다. 김민호는 민청의 학급 위원장이 되어 열성적으로 활동했다. 생각하면 그 몇 해 동안이 김민호에게 가장 행복했던 시기였다. 캄캄한 무대의 어느 한 점이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그런 시간이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6.25 전쟁이 터졌다. 민청 학급 위원장인 김민호는 당연히 앞장서서 입대를 지원했다. 김민호는 학도병들이 지원입대하던 날의 열띤 분위기를 기억한다. 모두들 격앙된 표정으로 ‘조국전쟁’의 승리를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을 맹세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를 떠나 보내면서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나는 네가 영웅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희생은 아버지 하나만으로 충분하지 않겠니? 너무 비열해서도 안되겠지만 너무 앞장서지도 말아라. 부디 몸성히 이 에미 곁으로 돌아오기를 축수하고 있겠다.”

 

그 어머니의 원초적인 소망은 진정이었을 것이다. 학도병들의 열띤 맹세도 진정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평화를 염원하면서 포악무도의 상징이 되어 총살대 앞에 섰던 이욱의 모순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돼야 할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어머니의 소망도 그날의 열띤 맹세도 이제는 모두 아득한 백일몽일 뿐이다. 내일 당장 사형을 집행당할지도 모른다. 시간이 얼마 없다. 깨어 있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증좌다. 그 아까운 시간에 잠을 잘 수는 없다. 몽롱한 의식속에서 그런 생각을 하면서 김민호는 얕은 잠에 빠져들었다.

 

 

 

1954년 1월 14일, 새벽 3시 경. 사형수 막사는 깊은 적막에 싸여 있다. 네 사람의 보초만이 졸음을 쫓으면서 이중 철조망 울타리 바깥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같은 시각에 열하나의 검은 그림자가 서북릉 쪽에서 바람처럼 내려왔다. 그들은 고양이처럼 발자국 소리를 전혀 내지 않고 막사에서 1백 미터쯤 되는 밭두렁까지 접근해서는 한동안 보초들의 움직임을 관찰했다. 이윽고 검은 그림자들은 셋씩 조가 되어 보초를 향해 돌진했다.

 

정문의 보초 둘이 순식간에 총창에 쓰러졌다. 나머지 동초(動哨) 둘도 졸지에 들이닥친 6, 7명의 습격대에 둘러싸여 한 사람은 발포할 사이도 없이 자살(刺殺: 찔러 살해)되고 한 사람만이 겨우 두 발을 쏘며 대항하다 어둠 속으로 도망쳐버렸다.

 

이것이 모두 십여 초 사이에, 보초들의 외마디 비명과 두 발의 총성 이외에는 완전한 무언극으로 진행된 것이다. 일곱 명의 사형수들은 난데없는 총성에 조건반사처럼 일제히 일어났다.

 

“동무들, 빨리 나와! 빨리!”

 

밖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미 대여섯 명의 습격대가 각목과 철조망으로 된 정문을 열어 젖혀놓고 있었다. 사형수들은 미친 듯이 뛰어나왔다. 김민호는 뛰면서 정문 옆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보초 두 사람을 봤다.

 

그중 한 사람은 조금전에 누룽지 보따리를 던져준 크리스챤 헌병이었다. 사형수들에게 영생을 설교하던 그가 먼저 가버린 것이다. 김민호는 뛰면서 다시 한 번 ‘운명’의 불가사의를 생각했다.

 

-왜 하필 사형수들에게 친절하던 그가....... 그는 결국 우리와 생명을 맞바꿔버렸다. 하지만그는 그가 소망한 대로 하늘나라에 가서 영생할지도 모른다.

 

습격대원 한 사람이 보초의 주머니에서 찾아낸 열쇠로 사형수들의 수갑을 하나하나 풀어줬다. 사형수들은 손목을 흔들흔들 흔들어 ‘자유’를 확인해 보고는 헌병들의 칼빈총을 주워들고 습격대의 뒤를 쫓아 칠흑같은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한 시간 가량을 그렇게 달려 서북릉 중턱쯤에 이르렀을 때 18명이 된 일행은 잠시 숨을 돌렸다.

 

“동무들 참 고생 많았지요? 우린 전북 소속의 ‘남소부대’입니다. 국방군 5사단의 겨울공세 이후 지리산의 우리 잔존세력은 거의 작살나 버렸고 초모사업(招募事業)도 전혀 안되고 해서 지금 전사 하나하나가 금싸라기처럼 소중한 형편에 있어요. 동무들의 대열복귀를 환영합니다.”

 

남소부대장이라는 20대의 청년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 무렵 얼마남지 않은 서남지구의 잔존 빨치산들은 열 명 안팎의 단위로 나뉘어 지휘자의 성을 붙여 김소부대니 박소부대니 하는 소조(小組)활동을 하고 있었다.

 

남소부대는 남씨성의 청년이 지휘하는 유격소조인 것이다. 만일 이때 이들에게 투쟁의 목적 또는 목표를 설명할려면 ‘살기 위해서’라는 말 이외는 찾지 못했을 것이다. 지휘부에서는 정전투쟁이니 지하당투쟁이니 그럴싸한 구호를 외치고 있었지만 사실상 그들은 방향감각을 상실한 지 오래였다.

 

그들을 남한 산중에 유기한 채 전쟁은 벌써 반 년 전에 끝났다. 그렇다고 고립무원인 2백명 남짓의 무장세력으로 독자저긴 혁명투쟁을 계속해도 승산은 없었다. 그들은 이제 어떤 목표를 설정할 방책이 없을 만큼 절대절명의 수렁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집행날만 기다리고 있던 사형수들에게는 하늘의 구원이 아닐 수 없다.

 

“오늘 내일 죽을 목숨이 동무들 덕분으로 살아났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일반 수용소의 동지들은 모두 전의를 잃고 있어서 구출해야 소용이 없다는 상부의 결론이래요. 작년에 전남부대의 공작원 한 사람이 광주수용소에 위장 췸투해서 집단탈출을 기획해 봤는데 호응이 없어서 실패했대요. 한 번 여염의 물을 먹으면 그렇게 되는가봐요.”

 

소부대장이 씁쓸하게 웃었다. 그래서 죽음을 무릅쓰고 항쟁할 수 밖에 없는 사형수 구출에 초점을 맞추게 됐다는 뜻이었다. 그러고보니 18명의 일행도 완전히 같은 운명공동체는 아니었다. 남소부대원은 만일 생포된다 해도 일반수용소로 보내지겠지만 확정 사형수는 그대로 총살장으로 끌려갈 뿐이다. 그들에게는 산에서 죽든지 총살되든가 어차피 죽음 이외의 길은 남아 있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우선 당장 거기에까지 생각이 미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일곱 명의 사형수는 오랜만에 맛보는 산의 분위기, 남소부대원들의 활기찬 동작을 보면서 잊었던 고향에 돌아온 것같은 안온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들에게 ‘산’은 그야말로 무한한 자유의 천지였다. 한동안 잊었던 야성이 젊은 육체에 금세 되살아나는 듯했다. 남한 빨치산의 운명이 이제 경각에 달렸다는 인식조차 그들 앞에는 없었다. 다만 극단적인 영양실조와 졸지에 맞는 산속의 추위 때문에 남소부대의 뒤를 따르는 것이 힘겹고 고통스러울 뿐이었다.

 

 

 

 

 

6

 

 

18명의 일행이 눈에 묻힌 서북릉 능선을 넘어섰을 무렵에 동이 트기 시작했다. 심원골 너머로 백설을 인 반야봉의 듬직한 모습이 아침 안개 속에 서서히 드러나고 있었다. 사형수들에게는 참으로 오랜만에 바라보는 눈익은 위용이었다. 무의식중에 아아....... 하는 탄성이 조용히 일었다.

 

그들은 잠시 약속의 땅, 자유와 평화가 충만한 천지에 들어선 것같은 환각에 빠졌지만 그러나 죽음의 신은 여전히 그들 뒤를 바짝 뒤따르고 있었다.

 

사실 수용소의 경비가 다소 허술했던 것은 그 무렵에는 빨치산의 활동이 거의 없었고 수용자의 숫자도 적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새벽의 돌발사건으로 즉각 비상태세로 들어간 위수지구의 군경부대는 이미 기동력을 이요해서 탈옥수들의 예상 도망 루트를 철통같이 에워싸고 있었다.

 

서북릉에서 지리산 주능선으로 들어서려면 반드시 거쳐야 할, 노고단 무너미고개에서 심원골, 달궁골, 오얏골로 연결되는 골짜기가 우선 완전 차단됐다.

 

남소부대와 탈옥수 일행은 산죽숲을 이용해서 발자욱을 숨겨가며 조심조심 심원마을터로 접근해 갔다. 심원의 계류를 건너 반야봉 기슭으로 들어서야 일단 ‘안전지대’가 되는 것이다.

 

탈옥수들은 오래간만에 걷는 산길의 야행군이 육체적으로 힘겨웠지만 서북릉을 넘는 동안에 어느덧 몇 년 동안 몸에 밴 빨치산의 습성들이 되살아나서 정확한 4보간격과 음밀행동을 견지하며 남소부대원의 뒤를 따랐다.

 

그 시각 심원마을터 부근에 매복중인 군토벌대의 수색중대는 서북릉 만복대 쪽 사면의 산죽숲 한 지점이 약간 술렁이는 것을 발견하고 바짝 긴장하며 관찰했다. 이윽고 산죽숲이 끝나고 묵밭터가 시작되는 언저리에 검은 그림자 몇이 나타났다. 그림자들은 아직 아침안내가 서려 있는 계류 쪽을 향해 소리없이 접근해 왔다.

 

그들이 시냇가에 이르렀을 때, 수색대장의 수신호와 함께 일제사격이 시작됐다. 태고처럼 고요하던 깊은 골짜기가 일시에 뇌성벽력에 휩싸였다. 완벽한 기습이었다.

 

빨치산들은 대항할 겨를도 없이 몇은 그 자리에 고꾸라지고 몇은 만복대 쪽으로 되돌아 달아나고 일부는 시냇물을 건너 뛰어 반야봉 쪽으로 자취를 감췄다.

 

수색대는 여섯 구의 유기시체 중 넷이 저고리 앞 뒤에 페인트로 P자 표시를 한 탈옥수라는 것을 확인했지만 ‘공비 6명 사살’이라는 전과 보고를 하는 것으로 그쳤다. 새벽의 탈옥사건을 구태여 공표해서 책임을 추궁당할 필요가 없다는 부대장의 배려 때문이었다.

 

지리산지구의 공비소탕작전은 그로부터 한달 후인 1954년 2월 말에 완전히 종결됐다. 그 이후 빨치산의 조직적인 저항은 한 건도 없었다. 그후로도 선떨어진 빨치산 잔당이 한두 명씩 산악주변 마을에 출몰한 일은 있으나 그것도 그해 7월경에는 자취를 감췄다. 산중에서 폐사했거나 하산해서 사람 사는 마을에 숨어들어버린 것이다.

 

 

 

48년, 5.10단선(南韓單獨選擧)반대투쟁을 전후해서 시작된 서남지구 산악의 ‘빨치산투쟁’은 여순 반란사건, 6.25전쟁 등 몇 차례의 성쇠기를 거치면서 실로 70개 월의 처절한 기록을 남기고 영원히 역사의 장으로 사라지고 만 것이다.

 

그로부터 약 7, 8년간 지리산에 공백기간이 왔다. 빨치산이 없어지고 따라서 토벌군경의 모습도 볼 수 없게 됐지만 그렇다고 지리산을 찾아드는 등산객도 약초캐는 사람도 없었다. 상당기간 동안 사람들의 머릿속의 지리산은, 죽음의 산, 공포의 산이라는 기억으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산마루와 골짜기에는 여전히 봄이 오면 진달래가 피고 겨울에는 눈이 쌓였지만 지리산은 사람 없는 산역으로 태초의 적막을 간직한 채 남아 있었다. 그 원시 속에 반달곰을 비롯한 산짐승들과 두 인간이 ‘서식’하고 있었다.

 

54년 1월 14일 아침, 토벌대의 탄막을 뚫고 반야봉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한 빨치산 사형수는 김민호, 박건식, 사복동의 세 사람이었다.

 

그러나 불과 두어 달이 지나 그들은 지리산에 남아 있는 것이 자기들뿐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사형집행만이 남아 있는 그들은 마지막 세 사람이 될 때까지 투항이나 귀순같은 것은 생각할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세 사람도 처음에는 무주공산이 된 지리산을 탈출할 것을 시도해 본 적이 있었다. 하산해서 어느 도시에 숨어들던가 잘 하면 밀선을 타고 일본으로 밀항할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그들은 인근 마을에서 바지 저고리를 훔쳐 입고 가위를 입수해서 서로 간단한 이발도 했다. 빨치산의 특이한 몸냄새를 지우기 위해 계류물로 목욕도 했다. 그럭저럭 어수룩한 농부차림이 된 세 사람은 휴대하고 있던 총기를 추성동 뒷산 바위틈에 묻어 놓고 어느날 함양읍을 목표로 어슬렁어슬렁 걸어 내려갔다.

 

읍내에 들어서기만 하면 트럭 적재함에 몰래 숨어 타고 지리산에서 멀리 떨어진 어느 도시로 숨어들 수 있을 것같았다. 남해안 쪽으로 가면 일본으로 가는 밀선이 있을지 모르지만 밀선을 타려면 상당한 돈이 필요하겠으니 가망없는 일이었다.

 

먼 낯선 도시에 숨더들기만 하면 날품팔이를 해서라도 굶어죽지는 않겠지 하는 막연한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당시 사회를 살아 나가자면 도민증, 병역수첩 등 갖가지 ‘증명서’라는 게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들은 5, 6년 전의 대한민국만을 기억하는 타임머신 속의 인간이었던 것이다.

 

함양읍 가까이 다가갔을 때, 그들은 길모퉁이에 줄서 있는 사람들을 봤다. 당시 도처에서 볼 수 있던 경찰의 검문소였다. 특히 산악지대 주변의 통행인 검문은 삼엄했다. 본능적으로 위험을 직감한 세 사람은 슬그머니 방향을 바꿔 오던 길을 되돌아 가려 했으나 선두에 섰던 박건식이 걸려들고 말았던 것이다.

 

“여보세요. 어디로 가십니까?”

 

박건식이 얼떨결에 걸음을 멈췄다.

 

“왜 검문소를 피합니까? 어느 동네 사시죠? 도민증 좀 봅시다.”

 

“도민증.......?”

 

김민호와 사복동은 옆눈으로 그것을 보면서 오던 길을 되돌아 태연스럽게 걸어갔다. 어깨에 칼빈총을 걸친 순경 하나가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지만 박건식의 일행으로 보이지 않았던지 불러 세우지는 않았다. 박건식은 그대로 어디론가 끌려가버렸다.

 

식은 땀을 흘리며 허겁지겁 야산을 타고 추성동으로 돌아온 두 사람은 다시는 야지로 내려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산은 아무 말 없이 그들을 받아들였다. 결국 그들에게 자유로운 천지는 산 뿐이었다. 두 사람은 백무골의 어느 목기막 터에 산죽을 덮어 아지트를 만들었다.

 

그 무렵까지 백무골 언저리에는 해방 전에 지리산 명산 나무그릇을 다듬던 목기막 자리가 여기저기 남아 있었다. 목기의 자재가 되는 통나무를 운반하는 번거로움을 피해서 목기장이들은 이른 봄에 생나무를 베어서 가을까지 말려 놓았다가 겨우내 목기막에 들어앉아 목기를 깎는다.

 

땅을 대접골로 판 움집에 화덕을 만들어 장작을 펑펑 지펴대기 때문에 한겨울에도 웃통을 벗어젖히고 작업을 할 만큼 훈훈했었다고 한다.

 

영낙없는 석기시대의 수혈주거다. 그 무렵에는 반쯤 메워진 흙구덩이만 남아 있었지만 두 사람은 그것을 치우고 산죽지붕을 얹어 비와 이슬을 가릴 수 있게 만든 것이다. 토벌대의 위협은 일단 사라졌지만 지리산에 서식한다는 반달곰에 대한 대비도 필요했고 또 언제 나무꾼들 눈에 뜨일지도 모르기 때문에 아지트는 탄탄한 말목과 산죽으로 완벽하게 위장했다.

 

식량은 되도록 감자나 고구마, 외 따위의 밭작물을 서리해서 충당했지만 겨울에는 가끔 밤중에 수 십 리 밖의 마을에 내려가서 훔쳐오기도 했다. 시일이 흘러 마을 사람들의 빨치산에 대한 기억이 흐려질수록 양곡저장이 허술해져서 두 사람쯤의 식량조달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김민호에게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이 있었다. 지능지수가 워낙 얕은 사복동과 단 둘이서 생활하다보니 어느덧 자신까지도 바보가 돼버리는 것같았다. 그와는 서로 어울릴 수 있는 대화도 거의 없었다. 저능아라 해도 생에 대한 본능적인 애착은 마찬가지여서 가끔은 혼잣말처럼 신세한탄을 하기도 했다.

 

“김동무, 인제 토벌대도 안오는 것같은데 그래도 고향에 돌아가면 안되겠지? 붙들리면 총살당할 테니까. 대체 사람들이 왜 나를 잡아 죽이려 하는지 암만 생각해도 모르겠어. 난 어릴적부터 바보소리만 들어왔거든. 김동무는 높은 학교도 다녔고 군관이니까 왜 그런지 알거 아냐?”

 

그 해답은 김민호에게도 불가능했다. 그것은 지식이 가르쳐 줄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구태여 말한다면 ‘운명’이라고나 치부해 둘까. 대화가 불가능하다는 것은 혼자 있는 거나 마찬가지이다. 김민호는 언제나 고독했다. 그러나 그런 동료라도 있다는 것은 정말 마음 든든한 일이었다.

 

사복동은 이미 ‘동지’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있음으로 해서 김민호는 자기가 인간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의 모습을 보고 인간의 언어를 듣는 것으로 해서 자기가 아직은 원시림에 서식하는 야생동물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김민호는 어느덧 세월이라는 것을 잊어버렸다. 춘하추동 계절의 바뀜이야 모를 리 없지만 그게 몇 번 바뀌었는지는 기억할 수 없었다. 따라서 자기가 어느덧 서른 고개를 넘었다는 인식도 그에게는 없었다.

 

백무골에 정착한 지 7, 8년쯤 되던 해에 김민호는 그 유일한 인간 동료인 사복동까지 잃었다. 초여름의 어느날, 김민호는 어두워지는 것을 기다려 산전의 하지감자를 캐러 가기 위해 옆에서 잠을 자고 있는 사복동을 깨웠다. 그런데 사복동은 이상한 신음소리를 내며 일어서려 하지 않았다.

 

“사동무, 왜 그래? 어디 아픈가? 식량이 떨어졌으니까 감자라도 캐와야지.”

 

“응, 내가 뭘 잘못 먹었는지 몸이 나른한 게 통 맥을 못추겠어. 난 고향에 가야 하는데 걸을 수가 있어야지.”

 

두서가 분명치 않은 말이었으나 아무튼 어딘가 몸이 불편한 것같아서 김민호는 그를 남겨두고 혼자서 산전의 감자밭을 찾아 껴우 여물기 시작한 하지 감자를 얼마큼 흔적이 안나게 캐가지고 돌아왔다. 사복동은 아까 그 자리에 그대로 누워 있었으나 김민호가 들어서도 움직이는 기척이 없었다.

 

사복동은 그 사이 싸늘한 시체로 변해 있었던 것이다. 무슨 독초를 잘못 먹은 중독사가 아닌가 하는 짐작 외에는 사인도 알 수 없었다.

 

고독이 일시에 몸을 조여오는 것같았다. 비록 저능아였지만 사복동이라는 존재가 차지하는 자리가 그렇게 컸었는지를 김민호는 미쳐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저능아였지만 순박했던 사복동이 왜 이 인기척 없는 깊은 산중에서 외롭게 죽어 가야 했던가? 왜 인간사회가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던가? 김민호는 얼굴 없는 ‘힘’을 향해 절규하며 저주했다.

 

그 무렵부터 지리산에서 사람 그림자가 띄엄띄엄 보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심마니들이, 다음에는 등산객들이 점차 금단의 산역 지리산을 찾아들었다. 지리산이 국립공원 제1호로 지정되면서 등산객들의 수는 부쩍 늘었다.

 

등산객들의 옷차림도 해마다 달라졌다. 형형색색의 화려한 등산복들이 지리산 능선을 장식하기 시작했다. 신비의 영역이던 천왕봉 마루터기까지 휴일이면 장마당처럼 북새겼다. 비극의 산 지리산은 마침내 낭만의 산으로 바뀌어갔다.

 

김민호는 사복동이 소리 없이 죽은 날 백무골을 떠났다. 그후로도 한두 해에 한 번쯤은 백무골의 목기마 아지트를 찾아보기는 했다. 사복동의 시신은 비바람 속에 풍화되어 몇 년 후에는 흔적도 보이지 않게 됐다.

 

사복동과 둘이서 공들여 만들었던 산죽지붕도 이태 후에는 썩어 내려앉았고 몇 해 더 지나가서는 삭아 없어져 자취조차 남지 않았다. 움막 구덩이도 무너져 내려서 마침내 잡초가 무성한 평지로 변해버렸다. 추성동에 셋이서 묻었던 총기도 시뻘겋게 녹이 슬어 형태를 분간하기 어렵게 돼 있었다.

 

십여 년의 세월은 그렇게 만물을 바꿔버렸지만 김민호는 여전히 산중 고아가 되어 지리산맥을 떠돌며 살아갔다. 식량 걱정은 이제 없어졌다. 계절을 가리지 않고 등산객들이 먹다버린 음식 찌꺼기가 도처에 버려져 있었다.

 

어쩌다 젊은 남녀 등산객의 재잘거림을 듣는 수도 있었다. 화려한 옷차림으로 봐서 모두가 부르주아지의 자녀들만 같았다. 어떤 때는 이상한 곡조의 노래들을 부르기도 했다. 김민호는 숲 속에 숨어서 먼 다른 혹성에서 온 사람들을 보는 것처럼 그들을 구경했다.

 

모든 정보로부터 완전 차단된 김민호의 의식은 1954년 현재로 정지돼 있었으나 시간은 정지하지 않고 흘렀다. 정권이 두 번 세 번 바뀌고 그 숱한 세월 속에 지리산을 찾는 사람들의 연륜도 의식도 자꾸만 바뀌었다.

 

지리산의 피비린내 나는 역사는 지리산을 찾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아득한 전설일 뿐이었지만 그 전설의 화석, 김민호는 밀림의 로빈슨 크루소오가 되어 외로이 산마루와 골짝들을 방황하고 있었다. 그에게 있어 살아 있는 모든 사람들은 죽음을 몰고 오는 마귀일 뿐이었다.

 

어느덧 세상에서 말하는 환갑이 됐지만 그는 자신의 나이를 모른다. 사람들이 말하는 언어도 거의 잊어버렸다. 자신의 이름조차 기억이 아득할 때가 있다. 김민호- 그것은 이미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이름이었다. 40년을 안 본 자신의 얼굴도 잊어버렸다. 그것은 1954년 1월 중순 어느날 남원 교외에서 총살됐을 망령의 얼굴이다. 그러니까 그는 살이 있는 망령이었다.

 

김민호는 가끔 인적없는 밤중에 천왕봉을 찾았다. ‘목동’과 마지막 대화를 나눴던 산장의 폐허는 흔적조차 없어졌지만 사람 사는 마을과 도시들의 불빛은 다름없이 아득하게 바라보였다. 나는 거기에 갈 수 없다.

 

왜 저 넓은 천지에 나만은 살 권리가 없는가? 어린 시절 자신에게 두려움과 그리움을 함께 주었던 아버지의 이름, 그 이름으로 해서 누렸던 전쟁 전 겨우 몇 해 동안의 영광의 댓가로 나는 망령이 돼서 40년을 살아야 했다. 아아 아버지, 당신은 제게 대체 무엇이었습니까?

 

지리산 주변 사람들 사이에 이따금씩 떠돌던 ‘산신령’이야기는 86년 이후 일체 들리지 않게 됐다. 다만 91년 여름, 휴식년에 들어간 칠선계곡을 몰래 등반하던 세 사람의 학생 그룹이 삼층폭포 근처 산죽 숲 속에서 삭아 문드러진 넝마조각과 풍화된 짐승의 뼈 부스러기같은 것을 발견한 일이 있는데, 그것이 사람의 것이라는 확증도 없고 또 입산금지 구역을 등반했다는 약점도 있어 어디에도 신고하지 않고 말았다는 말이 있었다. 물론 그것이 ‘산신령’의 마지막 흔적이었다는 증거는 없다.

 

(인생과 운명과 죽음을 생각해 보는 소설이라 생각하여 올려봤습니다. 특히 625때 김일성의 적화야욕에 의해 소련 스탈린에게 48번이나 전쟁 요구하여 마침내 소련의 허락을 얻어 전쟁을 일으킨 김일성이가 진짜 저주받아 마땅한 자라고 생각합니다. 해방이후 공산당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북괴의 편이 된 많은 이 땅이 젊은이들이 있습니다. 그때 수없이 죽어간 북괴뢰 동조 젊은이들의 이야기도 생각해보고 또 그자들에게 억울히 죽음 당하신 많은 젊은 남한 국군님들도  함께 생각해보고  또 625전쟁의 참화도 잊지 말자는 뜻으로 소설 천왕봉을 옮겼으니 조갑제 닷컴 애국님들의 너그러우신 마음으로 소설을 읽어 주셨기를 바랍니다. 단편소설이지만 분량이 좀 길어서 읽으시기 많이 힘드셨을 것입니다.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옮긴이 하늘계단님 (조갑제회원)

 

 

 

 

출처 : 대한민국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글쓴이 : 오늘도기쁘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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