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규슈 남단 '야쿠시마'***
7천살짜리 나무가 지키는 '원령공주의 숲'
물보라와 이끼의 트레킹, 원시림(原始林)을 따라 걷는 길, 모노노케 히메(원령공주·1997년 개봉)의 트레킹. 일본 최초의 UN 세계자연유산(1993)으로 등록된 섬, 야쿠시마(屋久島) 트레킹은 붙일 수식어가 너무 많아 걱정입니다. '숨은 서울걷기' '청산도 슬로길' '왕의 길을 걷는 경주 트레킹' 등 대한민국 구석구석을 걷고 있는 조선일보 주말매거진팀이 세계 전체로 그 트레킹 코스를 확대합니다. 매월 연재할 '세계의 트레킹' 첫회는 특유의 원시림과 생태계 덕분에 '동양의 갈라파고스'로 불리는 규슈 남단의 작은 섬, 야쿠시마입니다. 당신이 꿈꾸는 지상 최고의 트레킹, 주말매거진이 제안합니다.
애니메이션 '모노노케 히메'를 아느냐, 그렇지 않으냐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아직 무명이었던 젊은 시절의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태고의 원시림에 반해 이 섬을 찾았던 때부터 무려 1만년을 거슬러 올라가더라도, 야쿠시마의 주인은 여전히 물과 이끼, 그리고 야쿠스기라 불리는 삼(杉)나무들이었으니까. 350년이 안 된 삼나무는 아예 어린이 취급을 받고, 1000년은 되어야 어른 행세를 할 수 있는 숲의 국가, 사람(2009년 기준 1만3406명)보다 사슴과 원숭이가 더 많다고 어림하는 자연의 나라다. "일본인들에게는 최고 인기의 생태트레킹 코스"(규슈관광 추진기구)로 꼽히지만, 한국인들에게는 상대적으로 낯설었던 야쿠시마. 생각보다 가깝고, 트레킹 코스도 안전하다. 두 가지 코스를 추천한다.
- ▲ 이 완벽한 녹(綠)의 세계. 사진은 애니메이션‘원령공주’의 모태가 된 시라타니운수계곡.
◆원령공주를 따라 걷는 길-시라타니운수(白谷雲水) 계곡
다리 아래로 볼기 빠알간 야쿠시마 원숭이가 자줏빛 철쭉을 입으로 꺾어 물었다. 카메라 플래시에 당황한 원숭이와의 간격은 불과 3m. 곤두박질하는 흰 포말에 두들겨 맞은 녀석이 부르르 떨며 철쭉을 삼킨다. "물이 날아가는 것 같다"고 해서 히류가시(飛流橋)라는 이름이 붙은 다리 옆이다. 여기가 바로 백색 물보라와 "영험하다"는 운무(雲霧)로 이름난 시라타니운수(白谷雲水) 계곡. 해발 800m의 원생림이다.
- ▲ 철쭉을 먹고있는 야쿠시마 원숭이.
산전수전 다 겪은 외모의 트레킹 가이드 데라다(63)씨가 "미야자키 하야오가 애니메이션 '원령공주'의 영감을 받은 곳이 바로 이곳"이라고 덧붙인다. 영화 속 풍광 그대로, 완전한 녹(綠)의 세계다. 바위와 숲을 완벽하게 덮은 이끼는 말 그대로 압도적. 그 중 바위 하나에 앉았다. 그런데 이건 '바위 위의 이끼'가 아니라, '바위 모양의 초록 쿠션'이다. 스펀지 위에 앉은 듯 푹신하다. 30분쯤 흙길을 걸으니 니다이오스기(二代大杉)라는 이름의 2000년 된 삼나무가 서 있다. 이대가 한 나무에 사는 독특한 풍경. 수령 1000년 정도의 1대 삼나무가 벌채된 뒤, 그 그루터기 위에 다시 제2대 삼나무가 뿌리를 내린 것이라고 했다. 수많은 풍상을 겪었을 니다이오스기만큼이나 주름 많은 데라다씨는 "야쿠시마는 일본에서 강수량이 가장 많은데, 일조시간도 가장 많은 기이한 지역. 이끼와 나무가 무성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한 일본 소설가는 야쿠시마의 비에 대해 "일년 365일 중 367일 비가 온다"고 했다던가. 물론 애교 섞은 허풍. 하지만 상대적으로 화창한 저 아래 바닷가와 달리 숲의 정령들이 살아 숨쉬는 시라타니운수는 영험한 음기와 습기로 가득하다.
- ▲ 미야노우라다케 정상이 눈앞이다. 열대부터 툰드라까지 하루에 겪는 체험.
'원령공주'의 소녀와 정령(精靈)들이 그토록 지키고 싶어했던 것도 바로 이 훼손되지 않은 세계였지. 별로 유명하지 않은 영화 촬영지라도 부풀려 홍보하는 한국의 지자체와 달리, 이곳에는 미야자키 하야오든, 작품 원령공주든 간에 그 흔한 표지석이나 안내판 하나가 없다. 규슈관광추진기구 기타지마 차장은 "시라타니운수 계곡을 포함한 야쿠시마 국립공원 내에는 어떠한 인공적 표지와 상징물도 세울 수 없다"고 잘랐다. 그 염결성, 그 청렴결백함에 경배.
■ 산행안내
시라타니운수 계곡에서 등산로를 따라 서쪽으로 8시간을 더 걸어가면 지금까지 확인된 가장 큰 삼나무, 조몬스기(繩文杉)가 나온다. 학자에 따라서는 무려 7200년까지도 보고 있는 추정 수령이다.
그 8시간이 부담스럽다면, 시라타니운수 계곡 내의 트레킹도 물론 가능하다. 시간에 따라 야요이스기 코스(1시간), 원령공주의 숲 코스(2시간), 원생림 코스(3시간) 등이 있다. 입구 매표소(1인 300엔)에서 영문 지도와 안내문을 받을 수 있다. 모두 초·중급 난이도다.
◆바다 위의 알프스-규슈 최고봉 미야노우라다케(宮之浦岳·1935m)
새벽 4시 30분. 평상시라면 동의할 수 없는 시각에 호텔문을 나섰다. 총 왕복 9시간, 16㎞의 산행이다. 차량으로 이동해야 하는 시간을 합친다면 12시간의 여정. 처음 1시간가량 달린 길은 좁은 임도(林道). 움츠린 길 양쪽에 호위무사처럼 도열한 나무들이 빈번하게 미니버스의 사이드미러를 건드리더니, 급기야는 90도로 휘게 만들었다. 그 정도로 빽빽한 수림, 좁은 도로다. 나이 지극한 장년의 드라이버가 "언제나 그랬듯이"라는 표정으로 사이드미러를 툭툭 치며 원위치로 돌려놓는다.
야쿠시마 최고봉이자 일본 규슈 최고봉인 미야노우라다케 트레킹은 요도가와 등산로 입구에서 시작한다. '원령공주'를 따라 걷는 시라타니운수 계곡 트레킹과 우열을 가리긴 힘들지만, 야쿠시마 트레킹의 정석은 그래도 역시 미야노우라다케 종주(縱走)다. 한라산(1950m)과 난형난제(難兄難弟)의 높이. 야쿠시마 한가운데에 말 그대로 우뚝 솟았다. 1400만년 전, 지각 융기로 솟은 야쿠시마의 송곳이다. 이 산을 중심으로 해발 1000m 넘는 30여개의 봉우리가 오밀조밀 모여 있다. 푸른 바다와 깊은 계곡, 그리고 찌를듯 솟은 봉우리의 유쾌한 산행이다.
- ▲ 미야노우라다케 정상이 눈앞이다. 열대부터 툰드라까지 하루에 겪는 체험.
미야노우라다케 산행은 일본열도 전체의 기후를 같은 산에서 만날 수 있는 이색적 체험이기도 하다. 뿌리와 가지를 구분하기 힘든 열대수종 벵골보리수부터 툰드라 이끼류까지, 해발 고도에 따라 미야노우라다케는 얼굴을 바꿨다. 봄의 초록은 시간에 따라 일곱 번 얼굴을 바꾼다는데, 규슈 최고봉은 높이에 따라 변하는 연둣빛 카멜레온이다.
야쿠시마는 화강암이 지배하는 바위섬. 등산로 초입에는 삼나무 뿌리가 지면 위로 노출되어 겁 많은 이방인을 윽박지르지만, 중턱 이후에는 야쿠시마 진달래(샤쿠나게)와 연둣빛 덤불이 '신들의 정원'이 되어 지친 발길을 위로했다. 키가 작고 뒤틀려서 심술 많은 영감처럼 보였던 야쿠시마 삼나무도 몇 시간이 흐르자 인심 좋은 동네 할아버지로 변신하는 마법을 부린다. 무려 1시간을 당겨 4시간 만에 도착한 정상, 멀리 태평양과 발아래 구름을 굽어보며 탄성을 지른다. 우리는 지금 바다위의 알프스에 서 있다.
■ 산행안내
짧은 시간이 아닌 만큼 아주 쉽지는 않지만, 북한산을 오르내릴 정도의 체력이라면 충분히 해 낼 수 있다. 별 셋 정도 난이도. 주말매거진팀은 정상등정 후 같은 길로 하산했다. 하지만 욕심을 부린다면 시라타니운수 계곡 쪽으로 1박 2일 산행에 도전할 수도 있다.
■ 강추
9시간 산행 동안 단 하나의 쓰레기도 발견할 수 없었다. 일본인들의 결벽증이 놀랍다. 등산로 초입의 무인산장인 요도가와 산장을 제외하면 화장실도 없다. 등산로 초입에서 개당 400엔의 휴대용 밀폐변기를 판매한다. 지퍼백에 기저귀를 넣은 형태. 가이드 요시하라(38)씨가 "마트에서 파는 요실금 방지용 성인용 기저귀를 비닐봉지에 넣으면 개당 20엔에 만들 수 있다"고 추천한다. 놀랍다가 문득 피곤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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