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산 , 산행

산악인"오은선"

제봉산 2010. 5. 28. 14:20

8000m 高峯선 아무 생각 안나… 오직 오를 뿐”

▲ “안나푸르나 정상 직전에 피켈을 박고 마지막 발걸음을 떼는데, 뼛속까지 시리던 바람이 갑자기 시원하게 느껴지면서 잠깐이지만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어요. 이제 끝내는구나.” 오은선이 14좌 완등의 마지막 순간을 회고하며 눈을 반짝이고 있다.
여성 최초 히말라야 14좌 완등 오은선

등반가들의 실화를 소재로 한 영화나 소설이 적지 않다. 고산 등반은 그 자체가 드라마틱하다. 목숨을 건 상황이 전개될 수밖에 없으니 인간드라마가 펼쳐지게 된다. 이번에 히말라야의 8000m급 14좌 완등에 성공한 오은선(44·블랙야크)의 스토리도 한 편의 영화나 소설로 다룰 만하다는 생각을 해봤다. 여전히 남성중심적인 산악계에서 여성으로서 고산 등반을 뚫고 나간 과정, 그 과정에서 만난 수많은 죽음들, 같은 여성 산악인 고미영과의 치열한 기록 경쟁과 실족사, 칸첸중가 등반에 대한 국내외의 의혹 제기, 마침내 14좌 완등…, 한 편에 담기엔 벅찰 수도 있겠다.

‘여성 세계 최초’라는 언론의 화려한 수식에 가렸지만, 오은선의 성공을 놓고 다른 한편에선 목숨을 건 고산 등반 기록 경쟁이 과연 알피니즘에 부합하는지, 등반과 연결된 상업성이 옳은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들이 제기되기도 했다. 11일 귀국 이후 청와대 방문과 방송 출연 등으로 말도 못하게 지쳐있을 오은선과 이런 내용을 포함할 인터뷰를 주어진 1시간 내에 한다는 게 솔직히 부담이 됐다.

오은선을 만난 건 지난 19일이었다. 인터뷰 장소인 서울 금천구 블랙야크 본사에는 이미 여러 언론사 기자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는 피곤하지만 행복해 보였다. 전날 KBS2의 연예오락 프로그램인 ‘승승장구’에 출연한 것을 보니 ‘종합연예인’을 해도 되겠더라고 먼저 말을 꺼내자 웃음으로 답을 대신했다.

― 어린 시절 얘기부터 하죠. 부모님 중에 체력적으로 강질인 분이 계셨나요.

“조부모님 모두 건강하셨어요. 직업군인이었던 아버지도 술, 담배를 안하고 규칙적인 생활과 운동에다 특별히 욕심 없는 분이어서 건강하셨죠.”

전북 남원 출신으로 2녀1남 중 장녀였던 그는 아버지의 직업 탓에 어릴 적부터 강원도로, 서울로 이주를 자주 했다. 부친은 자식들을 데리고 여행이나 등반하는 걸 좋아했다.

“초교 5학년 때 쯤인데, 북한산 인수봉에 붙어있는 까만 점들을 보게 됐어요. 바위를 타는 사람들이었죠. 이다음에 어른이 되면 꼭 해봐야지, 생각했으니까 어릴 적부터 싹수가 보인 건가요? 수원대에 가서 본격적으로 기본기를 배우게 됐어요.”

―‘가족에게 돌아갈 때만 그 등반은 성공이다’고 했었는데, 히말라야를 돌아다니면서 부모님과 갈등은 없었나요.

“두 분은 일찌감치 ‘이제 말릴 수 없다’고 마음의 정리를 해주셨어요. 다만 항상 제가 넉넉하지 못하게, 또 혼자 떠나니까 ‘짠’하게 여기셨죠. 떠날 때 저의 인사는 ‘잘 다녀오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뿐이었어요. 저의 14좌 완등을 가장 기뻐해주셨고, 이제 목숨 걸 일은 없겠다고 안심하고 계세요.”

오은선은 지난 20일부터 1주일 동안 부친의 칠순을 기념해 가족과 해외여행을 다녀왔다. 그로선 히말라야 14좌 완등의 출발인 1997년 7월 가셰르브룸Ⅱ(8035m) 등정 이후 처음 가족의 품에서 가진 달콤한 휴식이었을 게다.

― 자신의 등반 재능을 언제 발견했나요. 특히 심폐기능이 대단한 걸로 나왔는데.

“타고났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어요. 그걸 안 게, 지난해 가을 안나푸르나로 떠나기 전에 체육과학연구원에서 체력 측정을 했을 때예요. 다른 신체 능력은 일반인보다 나을 게 없는데 심폐기능은 철인 3종경기 남자 선수와 같다고 하더군요. 이것 때문에 무산소 등반이 가능했구나 생각했어요.”

말이 나온 김에, 산소와 무산소 등반의 차이가 어느 정도인지 궁금했다. 그러자 14좌 중 여섯번째로 올랐으면서 가장 힘들었던 마칼루(8463m)에 대해 얘기를 꺼냈다.

“무산소 등정의 힘겨운 첫 경험이 2008년 5월 마칼루였어요. 세번 공격 끝에 성공했는데, 첫번째는 8200에서 8300 사이까지 갔다 돌아왔어요. 당시에 무산소로 가본 최고 고도였죠. 허파가 찢어질 듯 아프고, 걷지 못하고, 무기력해지고…, 아래 캠프에서 텐트까지 100m 정도를 남기고 다른 팀 셰르파에게 돈을 주고 배낭을 옮길 정도였어요. 사흘 후에야 걸었어요. 하지만 도저히 안될 줄 알았는데 시간이 지나니 회복이 되더라고요. 그때 힘겨움을 이겨내고 성공한 게 나머지 산들을 죽 무산소로 밀어붙일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된 것 같아요. 마칼루에서의 처음 극심했던 고통이 이후로는 없었으니까요. 최고봉인 에베레스트를 산소를 쓰며 올랐을 때는 걷는 것 자체가 힘들었지 산소 부족으로 인한 고통은 없었고요. 산소를 쓰면 일단 호흡이 원활하니까 등반이 수월하다고 봐야죠.”

다시 하던 얘기로 돌아갔다. 그는 수원대 졸업후 전자계산학과의 전공을 살려 서울과학교육원에서 공무원 생활을 하다가 그만두고 산에 전념하게 된다.

“취직 전엔 학원 강사도 했어요. 공무원 생활을 하던 1991년 겨울에 여성 에베레스트 원정대를 모집했어요. 겨울과 여름에 설악산에서 장기간 등반을 하는 1~2차 선발 과정이죠. 조를 짜서 심판이 1명씩 들어오고 등반 능력뿐 아니라 팀워크 자질을 중요하게 판단해요. 사람들하고 어울리지 못하면 극한상황에서 장기간 지내기 어렵잖아요. 1993년 원정을 떠나기 직전에 직장엔 사표를 냈어요. 원래 휴가를 내보려 했는데 여직원에겐 출산휴가 외에 긴 휴가를 줄 수 없다고 했죠.”

고 지현옥 대장이 이끌었던 한국 첫 여성 에베레스트 원정대의 14명 중에 당당히 뽑힌 것이다. 그는 식량 담당으로 정상 공격조에 들진 못했지만 지현옥, 최오순, 김순주 등 3명이 등정에 성공하게 된다. 그의 인생을 확 바꾼 원정이었고 히말라야로의 긴 여정이 시작되는 계기가 됐다.

14좌 중 첫번째로 가셰르브룸Ⅱ를 오를 때만 해도 오은선에게 7대륙 최고봉이나 히말라야 14좌에 대한 계획이 있었던 것은 물론 아니다. 박영석(동국대 산악부 OB) 대장이 이끄는 대학산악연맹 원정대 18명 중에 4명의 여성대원 중 1명으로 따라간 것이었다.

“정상공격은 생각도 안했고, 마지막 캠프에서 아침에 아이젠을 착용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릴 정도로 힘들었어요. 너무 추워서 영석 형한테 ‘나, 안가면 안돼요?’라고 했는데, ‘저기만 넘어가면 해가 쫙 들어오고 아주 따뜻하다’는 말에 속아(?) 따라갔어요. 앞사람 뒤꿈치가 안보이면 그만둬야지 하고 갔는데 끝까지 보이더군요. 아, 나만 힘든 게 아니구나, 위안이 됐죠. 맨 마지막 칼날 능선에서 영석 형이 ‘제일 힘든 사람 손 들어라’해서 내려가고 싶어 손을 번쩍 드니 ‘너, 제일 앞에 나와’ 하더군요. 형 바로 뒤에서 정상을 밟았죠. 얼떨결에 첫 8000m를 한 거죠.”

오은선이 14좌 중 등반대와 함께한 건 가셰르브룸Ⅱ와 K2 두개뿐이다. 그 외에는 등반대장이자 유일한 등반대원으로 ‘나홀로 등정’을 했다.

“K2는 저하고 후배 김선애(33·홍익대 산악부 OB), 행정을 볼 다른 여자 1명, 여성 닥터 1명 등으로 꾸린 여성 등반대로 갔어요.”

그가 나홀로 등정을 택한 데는 두가지 정도의 이유가 있어 보였다. 그 중 중요한 하나는 30여차례가 넘을 고산 등정에서 갖게 된 죽음에 대한 그의 기억 때문 같았다. 이런 얘기를 듣고 싶어 ‘그동안 인터뷰에서 했던 얘기들 말고, 마음 깊은데, 내면의 얘기를 좀 해달라’고 부탁했더니 “내면? 그런 거 없어요”라며 말을 이었다.

“나홀로 산행을 선호한다기보다는 그냥 그렇게 돼온 것 같아요. 등정대를 따라간 1999년 브로드피크(8047m)와 마칼루 때 한번은 대원이 죽고 한번은 셰르파가 죽었어요. 2001년 K2 때 또 동료의 죽음을 보았고요. 같이 밥먹고 등반했던 사람들 중에 누구는 죽고 누구는 살고 하는 것을 보면서 히말라야가 너무 비장한 곳이라고 생각했어요.”

2001년 K2에서의 사고 충격은 오은선이 ‘히말라야는 나와 인연이 없다’며 7대륙 최고봉 등정으로 목표를 바꾸게 만들었다. 2004년 에베레스트 단독 등정에서 전날 먼저 오르던 한국인 박무택씨의 주검을 보고도 등반을 마쳤다 해서 그에게 붙은 별명이 ‘독한 년’이었지만 그의 내면은 그게 아니었다. 등반대장으로 누군가의 삶과 죽음을 결단해야 하는 순간을 피하고 싶은 것이 아닐까?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지 않았지만 분명히 잠재의식 속에 그게 있었을 거예요. 제가 대장이었던 2007년 K2 때 C4에서 C3로 내려가야 하는데 김선애가 나타나지 않는 거예요. 다른 원정대의 한국인 동료와 둘이 중간에 슬립을 먹었다(추락했다)는 얘기를 내려온 사람들에게 들었죠. 화이트아웃 상태로 기상이 나빴는데 저는 하산할 수 없었어요. 무조건 기다렸죠. 날씨가 개고 5시간 정도 지나자 두 사람이 나타나는 거예요. 아! 그때 기분으론 죽여버리고 싶더라고, 진짜로. 소리밖에 지를 수 없더군요. 그런 고통을 겪고, 이건 내가 감당하기 어렵겠다, 그렇게 생각한 것 같아요.”

또 한가지 이유는 히말라야 등반 생활의 적나라함 때문이라고 했다. 짐작이 간다. 기본적인 생리현상조차 처리하기가 힘겨운 곳 아닌가.

“누군가 같이 가고 싶은데 가급적이면 동성이면 좋겠고. 김선애를 하나 건졌지만 K2에서 같이 슬립을 먹었던 남자하고 결혼을 해버렸죠. 그래서 여자대원은 지속성을 갖기가 어려워 한계가 있고…, 이도저도 안되니 혼자 가는 것이 편해진 거죠.”

2004년 12월 남극 최고봉인 빈슨매시프(4897m) 등정으로 7대륙을 완등한 지 얼마 안된 2005년 초 오은선은 스키를 타다 오른쪽 다리가 복합골절되는 중상을 입고 1년8개월 정도의 공백을 갖게 된다. 다른 사람 같으면 좌절했을 법한 이 시기에 오은선은 ‘K2를 향한 4단계 계획’을 세운다. 14좌 완등의 밑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저는 좌절이란 걸 몰라요. 7대륙은 2002년부터 2004년 사이에 예상보다 빨리 끝냈죠. 부상을 당하고는, 짧은 시간에 너무 많은 등반을 해서 쉬라는 뜻이라고 생각했죠. 저는 아주 안좋은 일이 벌어져도 긍정적으로 생각해요.”

2006년 시샤팡마(8046m), 2007년 5월 초오유(8201m)에 이어 7월 14좌 중 가장 어렵다는 ‘마(魔)의 산’ K2를 정복하면서 1차 계획은 완성된다. K2 등정 이후 오은선은 14좌 완등 목표를 공식적으로 천명하게 된다. 이듬해 블랙야크가 후원을 하면서 2008~2009년 각 4개씩 봉우리를 정복해나갔다. 오은선보다 한살 아래인 고미영과 경쟁이 불붙은 게 이즈음이다. 고미영은 2006년부터 14좌 완등을 목표로 삼아 2007~2008년에 각 3개씩 올랐다. 지난해 3개를 오른 뒤 이어 7월에 네번째인 낭가파르바트를 정복한 다음 하산하다 실족사를 하고 만다. 소속사가 다른 둘의 경쟁을 소속사간 과열경쟁으로 보며 우려했던 눈길들은 싸늘해졌다.

―스페인의 경쟁자 에두르네 파사반이 칸첸중가(8586m) 의혹을 제기하기 전에 지난해 말 국내에서 먼저 고미영의 매니저였던 산악인 김재수(49)씨가 의문을 던졌지요. 아마 그동안 14좌 등정 과정에서 심리적으로 가장 힘들었던 때가 아닌가 싶네요.

“그 얘기를 듣기 전의 제 상태가 몸이 마비돼서 병원에 실려갈 정도로 건강이 좋지 않고 에너지가 없을 때였어요. 처음엔 내 일 같지도 않고, 내가 공격을 받고 있다는 그런 생각도 안들고. 내 얘기를 들으면 이런 생각을 안할 거야, 라며 기자간담회에서 그대로 말했는데, 기사는 그렇지 않고…. 일단 제가 살아야겠더라고요. 부모님에겐 알리지 않고 회사에는 쪽지만 남기고 2주동안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쉬었어요. 주로 산보를 하면서 생각을 정리하는데, 처음부터 직접 그들을 만나 해명하지 못한 데 대한 반성을 하면서 마음을 가라앉혔다가도 주체할 수 없이 화가 치밀어오르는 게 반복됐어요. 이렇게 에너지를 소모해선 안되겠다, 안나푸르나 등반이 망가질 수 있겠다, 자신을 관리해야겠다. 그 다음부터 마음과 몸을 추슬렀어요. 회사에 방송이 따라오건 오지 않건 제가 등반을 진행하겠다, 한마디만 남기고 혼자 떠났습니다.”

이번 안나푸르나에서 오은선이 체력적으로 지난해 공격때보다 몹시 힘들어한 것도 이때 받은 충격 때문으로 보면 될 듯하다. 안타푸르나로 화제를 돌렸다.

― 8000m 이상 고봉에서는 정신의 끈을 놓지 않는 게 가장 힘들고 중요하지 않을까요. 거기서 혼미해지면 잠재의식의 모든 트라우마가 올라올 것이란 상상도 해봤는데.

“아무 생각도 없어요. 오로지 오른다, 다시 내려간다, 그 생각뿐이에요. 그 생각에만 깊이 빠져있다고 할까요.”

― 이번엔 TV방송 때문에 집중하는 데 어렵거나 하진 않았습니까. 사실 외국 언론 보도를 보면 TV로 안나푸르나 등정이 생중계된 데 대해 놀라움을 표하면서도 다소 냉소적인 뉘앙스도 풍겼거든요.

“저는 등반에 원칙이 있어요. 내가 정한 시간 내에 정상에 오르지 못하면 백(back)을 한다는 거죠. 이번에도 중간에 날씨가 나빠져서 방송 때문에 조금 갈등은 했지만 내려가야겠다고 했죠. 그 순간 베이스캠프는 완전히 초상집이 됐다고 하더군요. 그때 내 옆으로 폴란드에서 온 여성 산악인이 너무 한심하게 걸어가는 거예요. 저 걸음으로 어떻게 정상을 가나, 말도 안된다, 하는 순간 아차 싶었어요. 저거다 바로. 내가 왜 포기부터 생각할까. 다시 내려갔다 올라올 생각을 하니까 너무 끔찍하기도 했고요. 다시 올라가겠습니다, 말했죠. 그때부터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몰라요. 제 안에 완전히 빠져서…. 정상 아래에서 태극기를 딱 꺼내는데 몸과 마음이 차분해지고 밑에서 기운이 솟아났어요. 지금도 그것이 태극기의 기운이라고 생각해요.”

다른 고산 등반가와 달리 오은선이 동상에 의한 손가락이나 발가락 부상이 없는 것도 자신의 등반 원칙에 충실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 보통 정상에서는 얼마나 머물고 뭘 하나요.

“저는 통상 5~10분을 넘지 않아요. 사진 찍는 게 전부예요. 주변을 둘러보긴 하는데 대부분 날씨가 나쁘니까 볼 것이 없어요. 빨리 살아서 돌아가야 한다는 데 집중할 뿐이죠.”

‘피겨여왕’ 김연아가 동계올림픽 금메달로 자신의 목표를 모두 이룬 뒤 일종의 허탈감에 빠져 진로를 놓고 고민하듯, 오은선도 그런 허전함을 느끼지 않을까.

“저도 그런 게 올 줄 알았어요. 왜냐하면 과거에 장기 산행을 힘들게 다녀와 서울의 번쩍이는 네온사인을 보면 반갑다가도 집에 돌아와 혼자 짐 정리를 하다 보면 굉장히 허탈했거든요. 이번에도 심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어요. 아직은 정신이 없어 그런지…. 오히려 또 다른 새로운 인생의 출발점에 선 것 같은 마음이에요.”

솔직히 누구나 아는 남성 산악인들이 앞서 오은선과 같은 기록을 세우고는 TV나 광고에 나오고 대중 연예인처럼 사는 게 그다지 좋아 보이진 않았다. 함께 등정했다가 희생된 사람들도 떠오르고…. 앞으로 뭘 할 것인지를 물으며 그런 얘기를 해보았다.

“생활인인데 일정한 수입은 있어야지요. 그걸 뭐랄 순 없지요. 저는 지금은 무조건 쉬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거창하게 그림을 그려 제시하고 싶은 생각도 없지만 그럴 시간도, 에너지도 지금 없어요. 미래에 몰입할 틈이 없었어요. 지금의 환호가 얼마나 가겠어요. 우선 쉬면서 미래를 설계할 에너지를 축적하는 게 지금 제가 할 일이죠.”


약력

▲1966년 3월5일 전북 남원 출생 ▲수원대 전자계산학과 졸업 ▲한국산악회 등산지원센터 한국대학산악연맹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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