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산 , 산행

지리산둘레길마지막구간.

제봉산 2010. 3. 25. 18:33

***마지막 구간 산청군 단성면 어천마을~금서면 수철리 15.2km
걷기여행에서 순례·성찰의 길로 거듭나

아주 가까이 봄이 오고 있다. 섬진강 하구에서부터 매화가 피기 시작하면 경칩이 오기도 전에 성질 급한 산개구리가 울고, 섬진강 물빛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남해에서부터 힘차게 올라온 황어떼가 꽃이 피는 속도로 북상하고 있다.

봄은 그렇게 소리로, 향기로, 빛깔로, 온몸으로 오고 있는 것이다. 아니 이미 세상 도처에 도착하고 있으니, 고로쇠나무의 수액처럼 우리 몸속에도 봄물이 오르고 있음을 어찌 알아채지 못하겠는가.

그리하여 달큼한 고로쇠물만 탐하지 말고 한발 앞서 봄마중을 나가자. 온몸으로 봄을 맞이하고, 마침내 온몸 그 자체가 봄이 되어보자.   

올해도 어김없이 섬진강 첫 매화는 2월 초에 피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광양시 진월면 문암마을 앞의 첫 봉오리는 1월 31일에 피었다. 2월 5일쯤 일곱 송이가 눈을 떴으니 ‘설중매’가 아닐 수 없다.

하동군 악양면 동매리 박남준 시인의 집 뒤에도 아주 빨리 피는데, 올해는 2월 7일쯤 첫 송이가 피었다. 섬진강 첫 매화가 막 피어난 뒤 열흘에서 보름은 지나야 본격적으로 매향의 꽃물결이 번지기 시작하며, 3월 초중순은 되어야 절정을 이룬다.

지난해 5월부터 지리산숲길(둘레길)을 연재하기 시작했으니 어느새 10개월이 지났다. 기존의 개통구간을 제외하고 매월 20km 정도를 새로 개척하고, 제안하며 연재하다보니 마침내 한 바퀴를 다 돌았다. 봄에서 시작해 다시 이 길 위에서 봄을 맞았다. 그동안 답사했던 숲길·고갯길·옛길·마을길·임도·들길·강길 등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13년 동안 지리산에 들어와 살면서 지리산 850리 길을 세 바퀴 이상 걸어서 돌아봤지만, 그 길들의 사계를 제대로 다 보려면 대체 몇 년이나 더 걸릴까. 어쩌면 남은 생마저 이 길 위에서 함께할 생각을 얼핏만 해도 끔찍하지만 사실은 내심으로 더없이 행복하다.


▲ 1 어느새 봄이 아주 가까이 왔다. 섬진강변에는 매화가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2 푸르른 청솔 너머로 지리산 산정이 흰 눈을 덮어쓰고 있다. 3 감나무 위의 까치집이 운무 속에서 봄비를 맞고 있다. 4 들판의 청보리가 푸릇푸릇 봄기운을 부르고 있다.
오지마을이 별장과 펜션으로 변신

자, 마지막 구간의 지리산길을 떠나보자. 지리산 태극종주의 종점이자 시작점인 웅석봉 아래 자리한 어천마을은 산청군 단성면과 산청읍의 경계에 있는 경호강변의 오지마을이다. 피서지로도 꽤 알려진 어천계곡이 마을을 지나는데, 지금은 작은 마을 전체가 별장과 펜션으로 변신을 거듭해 예전의 오지마을 모습은 거의 사라진 셈이다.

어천마을을 지나 오르막 임도를 오르면 산청읍 내리의 아침재가 나온다. 이름도 멋지지만 참으로 한적한 아침재를 넘어 구불구불 내리막길에 몸을 맡기면 경호강이 눈앞에 펼쳐진다. 이 경호강은 산청뿐만 아니라 인근의 남원·함양에서 내려오는 강물이 모여 흐른다. 덕천강과 더불어 진주 남강을 이루고 마침내 낙동강의 이름을 얻는다.

이 강의 지류와 하류에 지금 ‘물싸움’이 한창이다. 함양군 휴천면의 용유담에 계획 중인 ‘지리산댐’ 논란과 진주 남강댐의 ‘부산으로의 물 공급’ 문제의 진원지인 것이다. 낙동강의 본류를 살려서 부산에 물을 공급하는 것을 포기하고, 지리산의 물을 부산으로 바로 끌어가는 ‘물의 고속도로’를 놓겠다는 의도다.

지역 주민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만무하다. 진주 남강댐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10년 동안이나 남원·산청·함양이 시끄럽다. 해결방안은 단 한 가지다. 낙동강 본류를 포기하지 말고 살리는 방법뿐이다.

‘낙동강 페놀 사태’ 이후 낙동강에 많은 공을 들이면서 마침내 부산의 물금취수장이 2급수를 유지하는 등 낙동강은 매우 빠르게 되살아나고 있었다. 본류를 포기하는 것은 결국 ‘물부족 국가’를 자처하는 것인 동시에 지류를 포기하는 것이고, 이는 칠선계곡과 백무동 입구가 물에 잠기는 지리산댐 계획처럼 급기야 계곡을 거느리는 산을 포기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늦겨울 얼음이 풀리는 경호강은 유려하게 흐르고 있었다. 성심교에서 잠시 경호강 아래 위를 둘러보며 쉬었다가 프란체스코 수도회의의 산청 성심원을 둘러본다.

이곳은 1959년 설립된 ‘한센인들의 집’이다. 설립목적에서 ‘그리스도 복음의 정신과 프란체스코 성인의 모범에 따라 가족과 사회로부터 소외받은 한센인을 한 가족으로 받아들여 보호와 치료에 헌신함으로써 인간의 존엄성을 되찾아주며 복지증진을 통한 사랑의 공동체를 만들어 나간다’고 밝히고 있듯이 소위 ‘문둥이’라 불리며 멸시받던 한센인들의 안식처로서 50여 년 이상을 유지해왔다. 지금은 그 역할을 넓혀 ‘성심인애원’이라는 1·2급 중증장애인들의 요양시설까지 운영하고 있다.

성심원을 나와 경호강의 왼쪽을 거슬러 오르는데 봄비와 더불어 끝없는 안개가 자욱하게 밀려온다. 한센인도 아니요 장애인도 아닌 나의 눈앞이 자꾸 흐려진다. 빗물인지, 안개인지, 눈물인지 굳이 분별하지 않아도 좋을 날씨니 그나마 다행이 아닌가.


▲ 1 꽃샘추위에 눈발이 몰아쳐도 해는 날마다 떠오른다.2 지리산숲길 답사 중에 ‘움직이는 선원’으로 지리산을 세 바퀴째 걷고 있는 도법스님 등 순례자들을 만났다.3 금서면 원각사 해동선원의 통일대불. 조계종에서 지금은 폐교된 매촌초등학교에 세웠다.4 산청군 매촌리 대장마을에서 평촌리로 가는 길. 봄비가 촉촉하게 내리고 있다.

‘물싸움’ 아랑곳 않고 경호강 유려히 흘러

무거운 발길로 강변길을 따라 걷다가 바람재 안쪽으로 돌아 산청읍 내리 내동마을 앞에서 35번 고속도로(대전-통영) 아래를 지나 내리교까지 내쳐 걷는다. 산청 주변 곳곳에 광고간판이 붙어 있을 정도로 경호강 래프팅은 이미 오랫동안 유명세를 타고 있다. 내리교를 건너 왼쪽길로 들어서면 체육공원이 잘 만들어져 있다. 강변 산책로와 더불어 지붕이 덮여 있는 반실내 족구장이 있을 정도다.

체육공원을 지나 휘도는 경호강을 따라 오르면 경호1교가 나온다. 이를 건너자마자 왼쪽 아래로 강변길이 이어진다. 멀리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아주 가까이서 언제든 경호강에 발을 담글 수 있는 호젓한 길이다.

이 강변길을 걸어 다시 35번 고속도로 아래를 지나 왼쪽 대장교를 지나면 금서면 매촌리 대장마을이 나온다. 이 마을을 지나 농로와 금서천을 따라 오르면 시냇가가 참으로 아름다운 평촌마을이 나온다. 적당한 깊이의 물웅덩이와 산등성이의 상수리나무 등 참나무과의 나무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어 어릴 적 물장구치던 날들이 떠오른다.

그런데 이 마을에서 더욱 눈길을 끄는 것은 폐교된 매촌초등학교에 세워진 원각사 해동선원(海東禪源)이다. 처음 얼핏 보았을 때는 솔직히 무슨 석재공장인 줄 알았다. 뛰어난 석수장이(石工) 혹은 돌장사(石商)가 이 폐교에 둥지를 틀었거니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런 어림짐작은 빗나가도 엄청 빗나간 선입견이었다. 

운동장에 세워진 거대한 석불은 통일대불이었고, 이 폐교에 대한불교 조계종 원각사 해동선원을 세운 이는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선지식으로 수많은 수좌들의 존경을 받는 조계종 전계대화상인 활산(活山) 성수(性壽) 스님이었다.

1994년 성수 스님은 “지금 고찰(古刹)들은 죽은 땅이라 새 땅에서 사자새끼를 키우겠다”며 지리산 자락인 경남 함양 황대마을로 들어가 황대선원을 세운 뒤 2002년 바로 이곳에 해동선원을 열었다.

***

폐교에 해동선원 세워 통일기원

해동선원이라는 말은 신라 고승 원효 스님을 중국에서 ‘해동불’이라 불렀다는 데서 따와 지은 것이며, 불교 정신문화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근원으로 삼겠다는 뜻에서 원(院)이 아니라 원(源)자를 붙였다고 한다. 또한 이곳에 통일대불을 세운 것도 동족상잔의 비극이 서린 지리산의 영령들을 위로하고 평화통일을 발원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함양의 황대선원의 조실로 머물고 있는 성수 스님은 “불살생(不殺生)은 ‘죽이지 말라’가 아니고 부처님이 우리 중생을 위해서 ‘죽지 말라’고 간곡히 설한 뜻이니 ‘불살생’ 석 자가 바로 선법(禪法)”이라며 “이 선법만 확실히 서면 생로병사의 노예가 아니 되고, 그리하여 자기 마음대로 놀다가 자기 마음대로 가는 것이 바로 아는 선이요, 바로 실행하는 선”이라고 일갈했다고 한다.

폐교가 된 매촌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아니 통일대불과 여러 불상 및 십이지신상 등이 가득히 들어선 해동선원에서 정신이 얼얼하도록 뒤통수를 얻어맞은 꼴이 되었다. 정신을 가다듬고는 통일대불에 합장을 한 뒤에 해동선원 뒷문을 나와 다시 길을 나선다.

금서천의 아주 작은 다리인 평촌교를 건너 농로를 따라 신촌마을에 다다르면 59번 국도를 만나는데, 향양교 건너 삼거리에서 큰길 왼쪽으로 올라가 향양마을 앞에서 다시 왼쪽으로 꺾어지면 수철교 건너 수철리가 보인다.

수철리의 아주 작은 나무 이정표가 반갑다. 다시 봄이 오고 마침내 지리산을 또 한 바퀴 돌았다. 지난 겨울에는 도법 스님 등의 ‘움직이는 선원’ 순례자들이 100일 동안 지리산을 걸어서 세 바퀴나 돌았으며, 또한 2월 28일부터 ‘지리산 만인보’가 격주 주말로 1년 동안 지리산을 한 바퀴 돌 것이다.

바야흐로 지리산 숲길 혹은 지리산 둘레길은 단순히 건강을 위하거나 여행을 위한 것만이 아니라 ‘순례의 길’ ‘성찰의 길’로 거듭나고 있는 것이다. 


▲ 1 산청군 어천마을 풍경. 별장들이 들어선 가운데 마을 뒤로 아침재가 보인다.2 현재 개통된 지리산숲길의 동쪽 끝인 수철리 마을회관. 3 밀렵꾼들의 총에 맞아 왼쪽 날개를 다친 말똥가리. 얼마 전부터 지리산에서 나의 식구가 되었다. 4 얼음이 서서히 녹고 있는 경호강. 여름엔 래프팅의 명소로 꼽혀 많은 이들이 찾는다. 5 곶감이 먹음직스럽게 잘 익었다.

 


산청군 단성면 어천마을 - 2.5km(아침재, 임도 고갯길) 산청읍 성심원 - 5.0km 산청읍 내리교 - 2.2km(강변길) 경호1교 - 1.2km 금서면 매촌리 대장마을 - 1.7km  평촌마을 원각사 해동선원(매촌초교 폐교지) - 1.5km 향양교 - 1.1km 수철리



 [ 한 편의 시 ]



고로쇠나무의 항변
           
저도 한 소식 전하고 싶은 것이다
지리산의 봄이 오기도 전에
빨대 꽂고 쪽쪽 피를 빠는 인간들에게
단풍나무과의 고로쇠나무도
한 말씀 전하고 싶은 것이다


무간지옥이 따로 있간디
차라리 죽여달랑께, 할 법도 한데
고로쇠, 고로쇠는 말이 없었다
담황색 꽃을 피우고
아기 손바닥 같은 잎을 내저으며
고로쇠는 고로쇠 아무 말이 없었다


다만 그해 늦가을
단풍놀이 온 인간들에게
말라비틀어진 검은 잎을 보여줄 뿐
단풍잎 하나 없는 지리산이 곧
아비지옥이란 것을 깨우쳐줄 뿐

 



/ 글·사진 이원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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