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쟁점.

언제까지 자식들을 끼고 살것인가?

제봉산 2009. 12. 17. 21:34

서른 살 넘은 아이

 



이번 주 시사 주간지에 눈길을 끄는 기사가 있었다. ‘이건 아니잖아요’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기사의 내용은 이랬다. 대학병원에서 환자를 간호하는 봉사활동을 하는 여성, 개중 극히 일부이긴 하지만 아이를 위해 자원봉사를 하는 엄마들이 있다, 사정인즉 대학 수시모집에서 높은 점수를 얻을 수 있는 병원 봉사활동은 지원자가 많은데 엄마가 자원봉사자이면 아이도 봉사활동의 기회를 얻을 확률이 높아진다. 그러니까 엄마들은 장차 아이의 봉사활동 점수를 위해 미리 길을 닦고 있다는 얘기였다. 대한민국 엄마의 부지런함이야 세상이 다 알아주는 바이지만 이쯤 되면 문득 무서워지지 않을 수 없다.

딸아이 하나가 예술계통의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닌 덕분에 엄마의 극성이라면 나도 좀 아는 편이다. 초등학교 시절, 아이가 다니는 화실에 출근하는 엄마가 적지 않았다. 엄마들은 연필을 깎아주고 물통을 비워주고 간식거리를 챙겨주고 혹 산만한 아이가 있으면 선생님을 대신해 야단을 치고 눈을 부릅뜬 채 제 아이의 그림을 살폈다. 고등학교 진학 후로는 하루에도 몇 차례 강을 건너면서 아이의 바라지를 하다 급기야 엄마와 아이 둘만 학교 인근으로 이사하는 사례도 있었다.

한 학기에 한 번, 전공 선생님과 식사하는 날이면 엄마들이 꿰고 있는 아이의 학교생활과 그림에 대한 세세한 정보가 홍수처럼 쏟아졌다. 비싼 등록금 내니 학교에서 알아서 해주어야지, 어려운 공부 시켜주니 제가 열심히 해야지 하는 자세의 엄마는 나 이외에는 찾기 어려웠지만 애를 좀 내버려두면 좋을 텐데 싶었지만 그런 말을 할 만큼 어리석지는 않았으므로 나는 그저 조용히 귀를 열고 묵묵히 음식을 먹었다.

엄마가 교수 찾아가 학점 애걸도

어렵사리 대학에 보낸 후에도 엄마의 활약은 끝나지 않는다. 명문 대학의 교수님에게 들은 이야기를 보태면 수차례 학사경고를 받은 끝에 휴학과 복학을 거듭하다 드디어 제적당할 위기에 처한 학생의 엄마가 지도교수인 자신을 찾아와 눈물로 선처를 호소했다는 거였다. 이즈음의 세태로 보자면 새삼스러울 점이 없으나 학생의 나이가 서른둘이라는 대목에서는 하, 절로 한숨이 나왔다. 딱하다는 말조차 민망한 그 심정이라니.

사실 부모 마음이란 다 같아서 내 아이가 편하게, 조금이라도 수월하게 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려는 걸 나무랄 수는 없다. 게다가 출중한 재능이 있다 믿어 의심치 않는 내 아이의 방황을 바로잡는 데 도움이 되겠다는 데야…. 학기 초와 기말이면 이 아이가 계속 학교를 다닐지, 그간 다니기는 했는지 노심초사해본 경험이 있는 나로서는 그 엄마의 심정을 이해 못할 바도 아니다. 아이의 일과를 도무지 짐작할 수 없던 시절, 아침에 눈 뜰 때마다 나는 결심하곤 했다. 오늘은 절대 아이에게 전화하지 말아야지. 관심을 끊어야지, 내버려둬야지….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간섭 또한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그즈음 나는 간신히 깨친 터였다.

아이의 학업을 결정하는 세 요소가 할아버지의 경제력, 엄마의 정보력, 아빠의 무관심이라는 우스갯소리는 더는 농담일 수 없다. 수험생이 있거나 있어 본 사람은 누구나 안다. 집안의 모든 시계는 아이를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사실. 그 절대적 과업 이외의 만사는 일시 정지된다는 사실. 아이의 공부와 생활 전반을 통째로 꿰고 관리하자니 자연히 남편에게는 소홀해질 수밖에 없고 그런 남편은 그저 무관심으로 일관해주는 것이 도와주는 일이라는 사실. 행여 “공부 잘돼?”라고 묻기라도 할라치면 아이도 엄마도 무슨 큰 잘못이라도 저지른 양 아빠를 쳐다본다는 사실….

실제로 대학수학능력시험 성적이 발표된 최근 주변의 화제는 단연 대학입시지만 “애 시험은?” 하고 물었을 때의 반응은 동료가 남성인가, 여성인가에 따라 판이하다. 내 아이의 성적이 이만이만하니 상향은 어디, 안정은 또 어느 곳 해가면서 그래프로 그리기라도 할 듯 입시 전문가 못지않은 브리핑을 하는 엄마에 비해 아버지는 아이가 정확히 어느 수준인지 알지 못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내 생활을 제쳐두고, 남편도 버려두고 오로지 아이를 위해 정보를 수집하고 아이를 위해 시간을 바치고…. 그렇게 키운 아이, 그렇게 돌본 아이이니 서른이 되어도, 직장을 잡아도, 결혼을 해도 어찌 놓아둘 수가 있겠는가 말이다.

엄마가 교수 찾아가 학점 애걸도


기실 드라마마다 나오는 결혼을 반대하는 어머니, 아들의 여자를 만나 협상을 시도하는 어머니의 정경은 멀쩡한 손 가진 아이의 연필을 깎아주고 지도교수를 찾아 눈물 바람을 하는 엄마의 연장선에 있다. 소중하고 귀하고, 잠결에도 잊을 수 없는 내 아이. 그 아이를 영원히 자라지 않는 아이로 묶어두는 일. 엄마가 진정 원하는 바가 그것이 아니라면 이제 엄마가 할 일은 정보수집이 아닌 무관심 배우기라고 한다면 지나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