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산 , 산행

고창의 고인돌따라 질마재길을...

제봉산 2009. 12. 3. 08:44

고창 ‘고인돌과 질마재 따라 100리 길’

선운사 동백·복분자·꽃무릇·고인돌…
고창의 명물 두루 꿰는 43.7km 낭만 길
강둑 길, 호반 지나 국가지정 명승 선운산 계곡으로
고창엔 유명인사와 명소, 맛집 등이 너무 많다. 가장 아름다운 시어를 썼다는 미당 서정주 선생은 그의 시집 <질마재 신화>에서 “나를 키운 건 8할이 바람”이라고 할 정도로 서해에서 질마재로 넘어오는 코끝 찡한 바람이 부는 고창을 사랑했다. 지난 2000년 유네스코로부터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고인돌 고분군이 있는 곳도 고창이다. 또 지난 9월 말 국가지정 문화재 명승으로 지정된 선운산도 여기 있다.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곳에서 특유의 맛을 내는 풍천 장어로도 유명하다. 그 외에도 판소리 신재효 선생의 생가, 고창읍성, 인촌 김성수 선생과 LG 창업주의 묘지, 복분자 등 고창의 명물들은 어디 내놔도 손색없는 자랑거리들이다. 

이 모든 것을 한꺼번에 볼 수 있는 길이 있다. 방법으로서의 길이 아니라 실제의 길이다. 단절된 옛길을 ‘고인돌과 질마재 따라 100리 길’로 연결시켰다. 전체 길이가 무려 43.7㎞에 달한다. 길이 긴 만큼 유적과 볼거리, 먹을거리도 가득하다. 제1 코스는 고인돌박물관~생태습지~원평마을로 8.8㎞에 이르는 ‘세계문화유산 고인돌길’이다. 2코스는 원평마을~연기마을의 7.7㎞ 구간 ‘인천강 풍천장어와 복분자길’이다. 3코스는 연기마을~검당소금전시관으로 14.5㎞ 거리의 ‘시와 차와 국화꽃이 있는 질마재길’이다. 4코스는 검당소금전시관~선운산관광안내소 12.7㎞ 거리의 ‘천오백년 화염(火鹽)의 역사가 살아있는 선운산 보은길’이다. 전부 수백 년 이상 된 옛길이다.

▲ 1 고인돌박물관 인근에 있는 고인돌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고인돌”이라고 칭송 받았고, 교과서에도 실렸다. 2 매산마을에 있는 고인돌 고분군. 3 선운사 보은길로 가는 길에 있는 참당암 녹차밭. 안개가 서린 듯한 밭과 햇빛에 반짝이는 찻잎이 운치를 자아내고 있다.

어느 길로 먼저 돌아도 상관없다. 각 길마다 고유의 특색을 지닌 길이 있기 때문이다. 가장 쉬운 방법은 고창읍에서 가장 가까운 고인돌박물관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고인돌박물관에는 넓은 주차장이 있어 누구나 쉽게 방문할 수 있도록 했다.

고인돌은 지석묘(支石墓)로서 수천 년 전 청동기시대의 사람 무덤이다. 고창 죽림리 일대는 ‘고인돌 떼무덤’일 정도다. 죽림리 매산마을에 있는 크고 작은 바윗덩이는 전부 고인돌이다. 고창군에 분포돼 있는 고인돌의 정확한 수는 현재 대략 85곳에 2000기 이상 되는 것으로 파악된다. 바둑판형인 남방식, 탁자형인 북방식 등 그 형태도 다양하다. 고인돌마다 각각의 번호를 붙여 관리하고 있다.

인근 지동마을 외딴 집에 있는 고인돌은 전형적인 북방식 지석묘로 미국의 고인돌 전문가가 와서 감탄하며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고인돌”이라고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실제 가 보니 교과서에서 본 아름답고 제단 같은 그 고인돌이었다. 매산마을의 고인돌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으니 모양도, 크기도 제각각이라 하루 종일 살펴봐도 다 못 볼 것 같았다. 갈 길이 멀어 바쁜 걸음을 재촉했다.

오베이골로 넘어가는 매산재를 넘었다. 재 넘어 운곡마을 사람들이 닥나무를 재배해서 고창읍에 내다 팔기 위해 한지를 지고 넘나들었다는 고개다. 매산재를 서낭재, 쥐겁재라고 부르기도 했다. 서낭은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이 있었다고 불렀을 법하지만 쥐겁재는 또 뭘까?

▲ 1 나무가 우거진 고인돌길을 김동식 문화관광해설사가 설명하며 걷고 있다. 2 옛날 운곡마을 사람들이 한지를 팔러 다니던 길에 운곡저수지가 들어서 한지는 사라지고 길만 남아 있다. 3 운곡 용계마을 사람들이 수몰 이후 실향의 아픔을 달래기 위해 운곡저수지 옆에 망향정을 세웠다. 4 가로·세로 5m 크기에 달하는 동양 최대의 고인돌을 김동식 해설사가 가리키고 있다.

고인돌박물관이 1구간 출발지점

동행한 김동식(60) 문화관광해설가는 “지금 고인돌박물관이 있는 자리가 과거엔 더 넓은 평야라 아마 쥐들이 많았을 것 같다. 사람들이 고개를 넘으면 그 소리에 쥐들이 겁을 내 소란스럽게 울어 그렇게 부르지 않았나 여겨진다”고 했다. 김동식 해설가는 30년간 교직생활을 하다 지난해 교장으로 퇴직한 분이다. 8년간의 교장 생활을 명퇴하고 문화해설가와 숲해설 겸 등산안내인을 하고 있으니 오히려 교직생활할 때보다 더 시간 가는 줄 모른다고 했다. 보람 있는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고 한다.

“오베이골은 오방곡의 전라도 사투리로, 다섯 방향으로 고개를 넘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오베이재(운곡~아산), 백운재(운곡~부안 사창), 행정재(운곡~고창 송암), 쥐겁재(운곡~고창고인돌), 해암골(운곡~신림 해암)로 빠져나가는 오거리 역할을 한 골짜기지요. 지금은 지난 1981년 운곡댐이 생긴 이래 사람들 통행이 뜸해졌어요.”

옛날 오베이골 사람들이 한지를 팔러 장에 다닌 길로 걷고 있다. 작은 돌길로 만든 걷기 좋은 길이다. 조금 더 가니 흙길이다. 맨발로 걸으면 더 좋겠다. 외국인들이 조깅하러 자주 찾는다고 했다. 1구간 8.8㎞를 왕복하더라도 4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다.

갑자기 눈앞에 그림 같은 연못이 펼쳐졌다. 생태습지연못이다. 운곡댐이 생긴 이래 30여 년간 거의 사람이 다니지 않아 물이 고여 좋은 습지가 형성됐다. 환경부에서 생태조사를 나와 습지보존지구로 지정할 것을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

수양버들과 연꽃·습지식물이 붉나무·얼음나무·참나무와 적절히 조화를 이뤄 향긋한 숲 냄새가 코를 찌른다. 숲 향기를 가장 많이 내는 나무가 비목이라 한다. 비목 잎을 잘라 비벼서 코에 갖다댔다. ‘아하, 이 향기였구나!’ 숲속에 나는 그 냄새보다 더 진하다. 비목이 눈에 자주 띄었다.

수많은 실향민을 만든 운곡댐에 이르렀다. 운곡, 용계리 158세대가 운곡댐으로 인해 고향을 떠났다. 운곡마을은 원래 아름다운 지역이었다. 예로부터 심산유곡이라 마을 주변이 봉우리로 둘러싸여 아침저녁으로 안개가 덮여 운곡이라 불렸다고 한다. 청정 골짜기에 수질이 좋아 영광 원자력발전소가 건설되면서 용수로 쓰기 위해 운곡댐을 만들었다.

수백 명의 실향민을 만든 운곡댐은 두루미 등 새들의 낙원으로 변해 있었다. 실향민들은 가슴 아프겠지만 175만㎡(53만 평)의 면적을 자연에 양보했다고 하면 어떨까.

적적한 운곡마을엔 수백 년 된 보호수가 1세대만 남은 마을을 지키고 있었다. 보호수에서 250m 동쪽으로 올라가면 동양에서 제일 큰 고인돌이 나온다. 가로·세로 약 5m 크기에 무게는 300t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규모다. 이곳 주변에서는 수백 년 전부터 닥나무를 재배해 7개의 한지공장에서 생산한 한지를 쥐겁재를 통해 내다 팔았으나 수몰 이후 흔적도 없이 모두 사라졌다. 흔적만이라도 남겨 유산으로 보여줄 수 있었을 텐데….

운곡서원과 운곡샘을 지나 망향정에 다다랐다. 운곡, 용계리 주민 수백 명이 실향의 아픔을 달래기 위해 지난 1987년 지은 정자와 비석이 있다. 여기서부터 734번 군도로 잠시 연결된다. 운곡저수지 끝 지점에 있는 원평마을이 1코스 마지막이다.

2코스는 고창의 대표적 먹거리인 인천강 풍천장어와 복분자길이다. 서해로 흘러가는 인천강을 따라 걷는 길이다. 고창의 수많은 역사를 담고 흐르는 인천강은 고창의 대표적인 참게, 가물치 등 민물어종이 풍부하여 왜가리, 백로, 두루미, 청둥오리 등 다양한 철새들이 날아든다.

▲ 1 페교가 된 초등학교를 리모델링해서 미당 시문학관으로 만들었다. 2 미당 서정주 선생의 생가. 3 선운사 뒤편에 있는 500년 이상 된 동백나무 숲. 4 코스모스 우거진 인천강 강둑길을 김동식 해설사가 걷고 있다. 이 주변이 명당으로 꼽히는 지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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