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걷기 하는 ‘탈아론’
메이지 태생의 ‘탈아론’은 올 봄에 122살이 되었지만, 아직도 건재하다. 인터넷으로 검색하면 수만 건이 히트된다.
이번에는 알고 있을 것 같으면서도 사실은 잘 모르고 있는 ‘탈아론’을 해부해 본다.
당시의 신문이 게이오의숙(慶応義塾) 도서관에 보존되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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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조선과의 ‘절교 선언’
‘탈아론’은 1885년 3월 16 일자, 일간지였던 “지지(時事)신보” 1면에 게재된 사설 제목이다.
특별히 이날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당시 일간지의 상당수는, 사설을 1면에 싣는 스타일이었다.
서명은 없었지만, 필자는 후쿠자와 유키치(福沢諭吉)로, 오늘날로 치자면 주필 겸 논설 주임이라 할 수 있다.
분량은 2,000자 정도. 별권까지 포함해 22권인 『후쿠자와 유키치 전집』에 실린 것은 3페이지의 짧은 문장이다.
요점은 이러하다.
▽ 서양 문명은 ‘홍역’이 유행하는 것처럼, 막을 방법이 없다. 일본은 문명화를 받아 들여, 아시아에서 새로운 축을 마련했다.
그 주의는 ‘탈아’이다.
▽ 일본에 있어서 불행한 점은 근린의 중국, 조선이라는 국가가 근대화를 거부하고 있다는 점이다.
서양 문명이 밀려오는데, 변혁을 거부하고 옛것에 집착하고 있다. 즉, 국가의 독립을 유지할 방법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 양국이 메이지 유신과 같이 정치 체제를 변혁할 수 있다면 모르되,
그렇지 않으면 몇 년 이내에 ‘망국’하여, 서양 제국에 분할되어 버릴 것이다.
▽ 지금의 중국, 조선은 일본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서양에서는 3개국이 지리적으로 가깝기 때문에, 일본도 중국이나 조선과 같은 취급을 받게 되어 버린다. 그것은 ‘일본의 큰 불행’이다.
▽ 중국과 조선이 서양 문명을 받아들일 때까지 기다려 함께 아시아를 진흥시킬 여유가 없다.
오히려 그들과 헤어져 서양 열강과 함께 움직이자. 중국, 조선은 근린 국이라고는 하지만 특별 취급을 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마지막 끝맺음은 이러하다.
“악우와 친하게 지내는 사람은 함께 악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우리는 마음속으로부터 아시아 동방의 나쁜 친구를 사절해야 할 것이다”.
나쁜 친구와 사이좋게 지내면 평판도 나빠지기 때문에 ‘이제는 안녕’ 이라는 ‘절교 선언’이었다.
당시는 평판을 얻지 못하다
그럼, 이 사설이 어떻게 해서 태어났는가.
1884년 12월, 조선의 근대화를 목표로 하는 김옥균 등 친일파가 서울에서 쿠데타를 결행하였다.
일본군의 지원을 받아 한때는 왕궁을 점거하고 반대파를 숙청했다.
그런데 3일째 되던 날, 청나라 군에 진압되어 쿠데타는 실패하였다. 일본 공사관도 소실되었다. 일본인 사망자도 있었다.
이 큰 사건을 일본의 신문들이 앞 다투어 알리는 와중에, “지지(時事)신보”의 지면은 특별히 더 열을 내었다.
후쿠자와(福沢)는 김옥균 등과 친교가 있었고, 활동 지원을 위해서 게이오의숙(慶応義塾)의 문하생들을 조선에 보내고 있었다.
‘탈아론’은 친일파의 쿠데타 실패에 대한 실망에서 쓰인 것이었다.
그러나 게재 당시는, 그다지 평판을 얻지 못한 것 같다.
“지지(時事)신보”의 역사를 잘 아는 무사시노(武蔵野) 학원대의 도쿠라 타케유키(都倉武之) 강사에 의하면,
“지지신보”는 당시 , 창간 3년 만에 7천 부 이상 부수가 급증했다. 인텔리 층을 대상으로 하는 신문으로서는 톱클래스로 성장하고 있었다.
조선에 관한 보도로 더 한층 신뢰를 높였지만, ‘탈아론’이 단독으로 주목 받은 적은 없는 것 같다.
후쿠자와도 이후에는 ‘탈아론’에 대해 한 번도 거론하지 않았고, 탈아라는 말도 사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도쿠라씨는 “ ‘지지(時事)신보’ 사내에서도 인용된 적이 없었으며, 그 존재는 잊혀졌다”라고 보고 있다.
침략의 논리로서 전후에 부활
잊혀졌던 ‘탈아론’이 재발견된 것은 제2차 대전 이후이다.
그 과정을 자세하게 밝힌 시즈오카(静岡) 현립대의 히라야마 요우(平山洋) 강사에 의하면, 최초로 인용된 것은 1951년이었다.
역사학자 토오야마 시게키(遠山茂樹)가 쓴 「청일 전쟁과 후쿠자와 유키치」라는 논문이었다고 한다.
후쿠자와 유키치(福沢諭吉)의 외교 론이 재검토되는 가운데, 중국과 조선에 강경 자세를 취하는 ‘탈아론’이 연구 대상이 되어,
그에 따른 지명도가 올라갔다.
1983년에는 야마카와(山川) 출판사의 고등학교 일본사 교과서에서도 다루어 졌다.
중국과 한국에서도 ‘탈아론’은 차츰차츰 퍼져 나갔다. 서울대 국제 문제 연구소의 강상규(姜相圭) 연구원에 의하면,
한국에서 연구 논문에 ‘탈아론’을 인용한 예는 1970년 이후라고 한다.
80년대에 일본의 역사 교과서 문제가 일어나면서 ‘탈아론’은 일본의 침략 논리로서 재차 클로즈업 되었다.
현재는 고등학교 세계사 교과서에도 인용된다. 중국에서도 2003년, 장쑤성(江蘇省) 등에서 대학 입시 문제에 나왔다.
일본어 인터넷에서도 ‘탈아론 ‘이라는 말은 난무한다.
야스쿠니 참배 등이 계기가 되어 시작된 근린 외교의 알력을 둘러싸고, 혹은 동아시아 공동체 만들기에 관한 논쟁 중,
중국이나 한국에 강경 자세를 요구하는 의견들 중에서 등장하는 경우가 눈에 띈다.
토오쿠라(都倉) 씨는 “탈아라는 말이 후쿠자와(福沢)로부터 떨어져 나가 독보하고 있다.
아시아와의 관계에서, 자신의 생각에 권위를 부여하거나 보강하려 할 때에 이용하기 좋게 사용되어 버린다”라고 말한다.
(요시자와 다쓰히코(吉沢龍彦))
▼기억을 만드는 것/지폐
![]() 중국, 한국, 대만, 일본의 지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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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자와 유키치(福沢諭吉)라고 하면 만 엔 지폐의 초상화이다. 1984년에 쇼토쿠 태자(聖徳太子)로부터 그 자리를 계승하였다.
“지폐에 어울리는 품격이고, 국민 각층에게 잘 알려진 인물이며 국제적으로도 지명도가 높다”고 (일본 재무성 통화 기획 조정실)
선택한 이유를 설명한다.
그 말대로라면, 지폐의 초상화는 ‘나라의 얼굴’이며, 국가 이미지를 어느 정도 담당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중국은 어떠한가.
‘건국 50년’인 1999년에 디자인을 일신하여, 1원(元)에서 100원(元)까지를 모두 ‘건국 초기의 마오쩌둥(毛沢東)’의 초상화로 통일했다.
이전까지는 저우언라이(周恩来)의 초상화나, 소수 민족도 사용되었다. 왜 통일했는지의 공식 설명은 없다.
한국은 만원에는 한글의 창시자인 세종대왕을, 5천원과 천원에는 각각 유학자 이율곡과 이퇴계의 초상화를 사용한다.
2009년에는 10만원, 5만원 지폐를 발행할 예정으로, 누구의 초상화로 할까에 관심이 모여 진다.
정부와 한국은행은 여론 조사 등을 통해 선정할 방침이다.
일본은 일찍이 쇼토쿠 태자(聖徳太子)외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와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 등,
메이지 유신기의 정치가의 초상화를 사용했지만, 84년 이후에는 오로지 문화인이다.
재무성은 “다른 외국에서도 문화인 초상의 이용이 증가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대만은 ‘나라의 아버지’라 칭해지는 쑨원(孫文)이 100원(元)에, 국민당 지도자 장제스(蔣介石)가 200원(元)이다.
보다 고액의 지폐에는 소년 야구팀이나 지구의를 보는 아이 등의 도안을 사용하고 있다.
“쑨원(孫文)과 장제스(蔣介石)의 지위를 유지하면서 정치적인 메시지를 약하게 했다”(대만중앙은행) 고 말한다.
▼후쿠자와 유키치((福沢諭吉) (1834~1901년)
근대 일본을 대표하는 계몽 사상가이다.
나카쓰(中津)번의 하급 무사의 집에서 태어나 오가타 코안(緒方洪庵)의 데키주쿠(適塾)에서 난학(蘭學)을 공부했다.
에도에 나와 영어를 배워 1860년에는 간린마루(咸臨丸)를 타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막부가 유럽에 파견한 사절단과 미국 견학 사절단에도 수행하였다.
처음에는 번(藩)의 요청으로 시작된 사설 교육시설을 1968년에 게이오의숙(慶応義塾)로 고쳐, 현재의 게이오(慶応) 대학이 되었다.
정부의 요직을 맡은 일은 없다. 언론과 교육계에서 활약했다.
『서양 사정』을 비롯하여 많은 저작이 있다.
“하늘은 사람 위에 사람을 만들지 않는다”라는 글을 쓴 『학문의 권장』은 메이지 시대 초의 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1982년에는 일간지, “지지(時事)신보”를 창간하였다.
이 신문은 후쿠자와(福沢)의 사후에도 1936년까지 존속되었으며, 제2차 대전 후에도 일시 복간되었다.
수상함이 감도는 바다
청일 전쟁(중국에서는 갑오 중일 전쟁)으로 일본과 중국은 어떤 싸움을 펼쳤는가.
그 결과는 중국과 대만에게 무엇을 가져 왔는가. 그 대답을 찾아서, 일본군이 일찍이 쳐들어 간 중국과 대만의 두 개의 해변을 방문했다.
[역사는 살아있다]제2장 청일전쟁과 대만할양(하)
유리로 된 설명 판에는 상륙 시 사진의 설명이 새겨져 있었다. 해변으로 상륙해 오는 일본군의 망령을 보는 듯하다=이소가와(五十川)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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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바다가 여름 햇살에 빛난다.
황해에 돌출한 산둥(山東) 반도의 끝에 위치한 웨이하이시(威海市).
선창과 만 안의 작은 섬들, 류공다우(劉公島) 사이를 많은 관광객을 태운 페리가 왕래한다.
웨이하이웨이(威海衛)로 불리던 19 세기, 이곳에는 청의 북동부 바다를 지키는 북양 함대의 기지가 있었다.
바다를 둘러싸고 포대가 만들어 지고, 류공다우(劉公島)에 사령부가 설치되었다.
1880년대까지는 동양 제1의 함대라고 불렸지만, 청일 전쟁에서 패배한다. 일본 함대가 이 바다를 내습하여, 북양 함대는 투항했다.
페리 선창으로부터 몇 분 걸었다. 선창에 낡은 군함이 보였다. 북양 함대의 기함이었던 전함 ‘딩위안(定遠)’이다.
실물과 거의 같은 형태와 규모로 만들어져 길이는 91미터이다. 2005년 4월에 선을 보였다. 군함 내에 역사 자료를 전시하고 있었다.
이 배를 소유하는 웨이하이 북양수상 웨이하이발전유한공사(威海 北洋水師旅遊発展 有限公司)의 짱페이치(姜培旗) 사장을 만났다.
“중일 관계에 영향을 줄 생각은 없습니다. 역사를 객관적으로 반영하는 것이 목적입니다”라고 말했다.
2년 간, 약 60만 명이 방문해 관광 진흥에도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고 한다.
17세기가 되면서 네들란드가 남부를, 스페인이 북부에 거점을 구축했다. 네들란드가 스페인을 격퇴하고 지배하였으나, 명나라 왕조의 재건을 목표로 삼은 쩡청공(鄭成攻)이 네들란드 세력을 축출하여, 쩡씨 일족의 통치로 넘어갔다.
이 시기부터 대만 건너편 해안인 복건성(福建省)을 중심으로 대륙으로부터의 이민이 급증했다. 청일 전쟁으로 일본이 대만 서방의 펑후(澎湖)섬을 점령하였다. 1895년의 시모노세키(下関) 조약으로 일본으로의 대만 펑후섬의 할양이 결정되면서, 반세기에 이르는 식민지 시대가 시작된다. 이로 인해, 잇달아 대륙에서 건너 온 사람들(외성인)과 원래의 주민(본성인) 사이에 골이 깊어져, 1947년 2월 28일부터 계속된 정권과 주민의 충돌(2ㆍ28사건)로, 다수의 주민이 희생되고, 균열은 결정적이 되었다.
49년, 대륙이 내전 끝에 공산당이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을 선언하였다. 중화민국정부는 타이베이(台北)로 수도를 옮기고, 수백만 명이 대만으로 피했다. 국민당정권이 계속 되지만, 80년대부터 서서히 민주화가 진행되어, 96년에는 총통 직선제를 도입하고, 2000년, 본성인의 지지가 높은 민진 당이 정권을 잡았다. |
서로 경계하는 일본과 청 / 겨루어 해군을 증강
딩위안(定遠)은 일본에 있어서, 복잡한 사연이 있는 배다.
1886년에 다른 함선과 함께 나가사키(長崎)에 기항했다.
그 때, 수병들이 거리에서 소란을 피워, 경찰과의 대난투가 벌어져 쌍방에 사망자가 나왔다.
일본 측은 청나라 함대의 위용을 보게 되는 한편, 수병들의 행동에 ‘국가의 치욕이다’라는 반발도 나와,
해군 증강에 박차를 가하는 요인이 되었다.
그러나 먼저 청나라 정부에 경계심을 갖게 한 것은 일본이었다.
12년 전, 일본의 대만 출병을 경험한 청나라 정부는 해군 증강에 거액을 쏟아 부었다. 일본과 청은, 군비 확장 경쟁에 여념이 없었다.
딩위안(定遠)의 내부를 안내해 준 공사의 연구자에 의하면, 전쟁 당시에는 일본 해군이 우위에 있었다.
“일본 배는 대포의 수가 많은데다가, 발사 속도도 좋았다”라고 말한다. 한편, 북양 함대의 증강은 1880년대 말경부터 멈추어 있었다.
현지 전문가들의 저서 『북양 함대와 류공다우(北洋海軍と劉公島)』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청나라 정부는 1891년, 재정난으로 인해서 북양, 남양 함대의 함선과 대포 구입을 2년 간 금지해, 북양 함대는 한 척도 증가하지 않았다.
청나라 정부가 해군력을 자만하고 있던 것이나,
최대의 실력자인 서태후(西太后)가 별궁 보수건축 등에 거액을 소비하여 재정난을 부른 것이 배경이라고 한다.
그렇다고 하면, 정부의 자만심이나 서태후(西太后)의 이기심이 패전의 원인이 된다.
물론, 그 외에도 이유는 있다. 광서제(光緒帝)와 서태후(西太后)의 옹고집, 두 사람의 세력에 줄을 선 고관들의 대립 등,
여러 가지 요소들이 음으로 양으로 대일 전략과 관련되었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대체로 정치적 근대화의 지연을 원인으로 보는 것이 보통이다.
백수십년 전의 군비 확장의 역사를 보면서, 동지나해에서 서로 견제하고 있는 지금의 일본과 중국의 모습이 겹쳐졌다.
중국의 군비가 19년 연속해서 2자리 수 증가한 것이나, 착실하게 잠수 함대의 능력을 높이는 것 등을 지켜보며,
일본은 동지나해에서의 경계를 강화하고 있다.
한편, 중국은 일본이 헌법을 개정하여, 해외에서의 무력행사의 방법을 모색하고, 일•미 공동 미사일 방위 망을 대만에까지 넓히지나 않을까 걱정이다.
물론, 약육강식의 제국주의 시대와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이 바다에서 멀지 않은 장래에 일본과 중국이 다시 싸우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하지만, 몇 차례나 상호 불신에 빠져, 상대 군사 동향에 신경을 쓰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서로의 내셔널리즘에 불이 붙기 쉬운 것도 신경이 쓰인다.
중국의 청일 전쟁 연구의 제1인자는 청나라의 패배 원인의 하나로 외교의 실패를 든다.
산둥성(山東省) 역사학회 명예회장인 치치장(戚其章) 씨를 만나기 위해, 성도(省都)의 찌난시(済南市)로 향했다.
치씨에 의하면, 북양 함대의 책임자인 리훙장(李鴻章)은 전쟁을 회피하려고, 영국과 러시아의 알선에 기대를 하고 움직여 보았지만,
생각했던 대로 되지 않았다.
대만 할양에 관해서도, 영국에 대만의 권익을 주는 것으로써 일본으로의 할양을 막아 보려 하였지만, 영국 측에 거절당했다고 한다.
“일본은 열강의 관계를 잘 알고 있었다. 청나라보다 스스로가 러시아의 진출을 막을 수 있다고 영국에 선전했다”라고 치씨는 말한다.
열강의 태도도 간파하지 못하고 있었던 청의 전략이 잘못이었다고 본다.
또 하나의 해변으로 향했다.
젊은 황제의 옥좌 뒤로 늘어뜨린 발 안쪽에서 정치에 관여했다. 동치제가 사망한 후, 여동생의 아들인 광서제(光緒帝)를 세운다. 약 반세기에 걸쳐 권력을 잡았다. 여름의 별궁인 이화원(頤和園)을 타이베이(北京)에 수리・건축하고, 탄생 60주년 축하 행사 등에 거액을 쏟아 부어 재정을 압박했던 것이, 청일 전쟁의 패배로 이어졌다는 비판을 받는다. 1898년에는 정치 개혁 ‘무술변법(戊戌変法)’을 시작한 광서제를 유폐하는 등, 청조 멸망 직전까지 영향력을 가졌다. |
본성인과 외성인 / 부딪치는 대만인의 역사관
대만 북동부에 있는 아우디(澳底). 해수욕장에 작은 물결이 일고 있었다.
태풍의 영향으로 수영은 금지되고 해변에 마련한 풀장에서, 아이들이 장난치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1895년 5월, 이 바닷가에 일본군이 상륙했다.
대만은 일본과 청의 강화조약에 의해서 일본에 할양 되었지만, 식민지 지배가 순조롭게 시작된 것은 아니다.
대만의 관료와 명사들이 만든 ‘대만 민주국(台湾民主国)’군이나 지주 세력 등과의 싸움이 가을까지 계속 되었고,
그 후에도 무장 봉기가 자주 일어났다.
해변에는 항일기념비가 서 있었다. 이전에는 일본군의 상륙 기념비가 있었지만, 70년대에 바꾸었다.
대만 할양 역사에 대한 대만인들의 생각은 복잡하다.
국민당 정권 전부터 있었던 사람들은 대만인이란 의식이 강하고, 그 이후에 해협을 건너 온 사람들은 중국인이란 의식이 강한 경향이 있다. 양자 간에는 역사관에도 정치적 입장에도 차이가 있다.
민진 당(民進党)은 계속해서 대만인 의식을 호소한다. 국민당은 중국인 의식이 강하여 중국 대륙과의 통일도 시야에 넣는다.
타이베이(台北) 교외의 국사관은 대만사를 편집하는 총통부의 직속 기관이다.
민진당 정권이 들어선 이래, 관장을 맡고 있는 장옌시엔(張炎憲) 씨는
“대만인에게는 청나라에 버림을 받았다는 슬픈 정서가 있습니다”라고 한다.
청에서 대만으로 파견된 오늘날의 지사에 해당되는 관료가 일본군이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대륙으로 돌아간 것을 지적한다.
하지만, 한편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청일 전쟁 이후, 대만은 중국과는 다른 길을 걸어 왔습니다.
자본주의 경제를 발전시켜, 민주와 자유를 포함한 현대 사회화를 목표로 해 온 일관된 흐름이 있습니다”.
한때는 일본의 통치를 받으면서도, 대륙과는 별도로, 독자적으로 발전해 왔다는 자부가, 중국과 대만 문제에 영향을 준 것은 틀림이 없다.
한편, 국민당 안에서는, 대만할양의 실상이란 일본이 무력으로 청으로부터 대만은 잡아뗀 것으로, [일본의 침략]이라는 시각이 있다.
국민당 중앙당사위원회의 전 주임 위원이었던 첸펑옌(陳鵬仁) 씨는 타이베이(台北) 사무소에서 이렇게 말했다.
“일본은 남진을 하기 위한 징검돌이라는 군사적 이유와 차와 방충제등으로 쓰인 장뇌(樟脳)의 생산지이며,
더불어 일본의 시장을 확보하려는 경제적 이유에서 대만을 요구했겠지요”.
“일본이(제2차 대전) 패전했을 때, 60세 이상의 사람들은 다시 중국으로 돌아간다고 기뻐했습니다”
대만을 할양한 청에 대해서는 “일본과 계속 싸울 실력은 없었다. 어쩔 수 없었겠지요”라고 이해를 한다.
대만에서는 내년 3월로 임박한 총통 선거의 열기가 높아지고 있다.
7 월 초순에는 일본 통치시기의 대만인 활동가를 주제로 한 심포지엄 ‘역사와 정치의 대화’가 타이베이(台北)에서 열려,
민진 당의 셰창팅(謝長廷)후보와 국민당의 마잉주(馬英九) 후보가 불꽃을 튀겼다.
일본에게 저항한 활동가를 마 씨가 평가하면, 셰 씨는 일본도 국민당도 외래 정권이었다, 라고 언급했다.
당장 역사관에서 부딪치고 있다.
이러한 대만사회의 행방을 중국이 주시하고 있다. 만약, 독립의 움직임을 보이면, 중국은 무력행사도 불사할 자세다.
대만 쪽 해안에 다수의 미사일을 배치하고 견제하며, 해군도 증강한다. 대만군도 중국과의 전쟁을 상정한 연습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내가 방문한 아우디(澳底)는 한가로운 풍경이었다. 하지만, 11년 전 이곳 가까운 바다에 미사일이 날아 왔다.
첫 총통 선거를 앞두고, 중국이 ‘연습’이라는 명목으로 발사를 했던 것이다.
이 바다가 왠지 수상한 것은 110년 전과 그다지 변함이 없다.
(이소가와 토모요시(五十川倫義))
청일 전쟁은 일본인이 가진 중국과 조선의 이미지를 크게 바꾸어 놓았다.
예를 들면, 후쿠자와 유키치(福沢諭吉)가 이끄는 “지지(時事)신보”에,
개전 직후인 1894년 7월 29일 ‘청일 전쟁은 문야(文野)의 전쟁’이라는 제목으로 사설을 게재했다.
‘문야’란 ‘문명’과 ‘야만’이다. 전쟁을, ‘문명개화의 진보를 도모하는’ 일본과 ‘진보를 막으려는’ 청나라의 싸움이라고 평가했다.
11월에는 조선에 대해서도, ‘문명류’ 개혁을 위해서는 ‘협박’이라는 수단도 불사하며, ‘국무의 실권’을 일본이 잡아야 한다고 사설을 실었다.
반전 주의자로 유명한 우치무라 간조(内村鑑三)조차, 그 시점에서는 같은 인식이었다.
같은 해 8월, 일본은 ‘동양의 진보주의의 전사’이고, 중국은 ‘진보의 강적’이라 주장하는 영어 논문을 구미 잡지에 발표했다.
일중 관계를 연구하는 지바(千葉)현 소재 게이아이(敬愛) 대학의 이에치카 료코(家近亮子) 준 교수는
“청일 전쟁의 승리로 일본에서는, 아시아는 뒤떨어져 있다는 인식이 뿌리 내렸다.
멸시 감정도 퍼졌다”고 지적한다. 그 의식은 10년 후의 러일 전쟁으로 한층 더 강해져, 중국 침략이라는 행위로 이어진다.
이런 의식은 지금도 어디엔가 남아 있지는 않을까.
이에치카씨는 7월, 학생들에게 “당신은 아시아인이라고 의식했던 적이 있습니까”라는 앙케트 조사를 했다.
교실의 반 정도를 차지하는 아시아인 유학생들은, 86%가 ‘있다’라고 대답했다.
이에 비해, ‘있다’라고 대답한 일본인은 63%에 머물렀다. ‘오히려 구미인 이라면 좋았겠다’라고 적은 학생도 있었다.
(요시자와 다쓰히코(吉沢龍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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