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 말 비운의 황제 광서제 독살 사실 100년 만에 밝혔다 [중앙일보]
유해에서 비소 성분 검출
청(淸)나라의 변법자강(變法自强)운동을 후원한 개혁 군주 광서제(光緖帝·1871~1908·
그림)가 독살된 사실이 사후 100년 만에 법의학적으로 규명됐다.
그동안 야사에서는 독살설이 분분했던 광서제의 사인이 밝혀지면서 누가 황제를 독살했는지가 역사학계의 새로운 연구과제로 떠올랐다.
인민일보(人民日報) 자매지 경화시보(京華時報)는 3일
광서제의 유해와 두발 성분 검사를 통해 체내에서 g당 2404㎍
(마이크로그램:100만 분의 1g)의 비소 성분을 검출했다고 밝혔다.
비소는 궁중에서 독살에 주로 사용됐던 비상(砒霜)의 주성분이다.
이에 따라 청사(淸史)편찬위원회 주도로 2003년부터 5년간 광서제 사인 규명 작업을 진행해온 중국중앙방송(CC-TV), 청 서릉(西陵) 문물관리처, 원자력과학연구원, 베이징(北京)시 공안국 법의학 감정센터 등 합동조사단은 사인을 독살로 결론 내렸다.
조사단은 “광서제와 생활 환경이 유사했던 부인 융유(隆裕) 황후의 유해에서
정상인(0.59㎍)보다 약간 높은 9.2㎍의 비소만 검출됐으나
광서제의 모발과 위에는 비정상적으로 많은 비소가 남아 있어
독살로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고 밝혔다.
광서제의 이모인 서태후(西太后)는 아들 동치제(同治帝)가 천연두로 요절하자
1875년 여동생의 네 살배기 아들을 청나라 11대 황제로 앉히고 실권을 휘둘렀다.
광서제는 33년간 재위하면서 기울어져 가는 청 황실을 살리기 위해
1898년 개혁파 캉유웨이(康有爲)가 주도한 변법자강운동을 지원했으나
서태후의 미움을 받아 장기간 연금 생활을 한 비운의 황제다.
베이징=장세정 특파원
2008.11.04 01:25 입력
淸 광서제, 비상에 독살됐다… 100년만에 과학적 입증돼
-
▲ 유해에 대한 독극물 실험을 통해 독살 사실이 100년만에 드러난 청나라 11대 황제 광서제의 생전 사진
/두산백과사전
청나라 말기 비운의 황제 광서제(光緖帝)가 독살(毒殺) 당해 숨졌다는 사실이 과학적으로 입증됐다고 홍콩 문회보(文匯報)가 2일 보도했다. 광서제는 1875년부터 1908년까지 청나라의 11대 황제였던 인물.
문회보는 “고도의 과학기술이 100년 수수께끼를 풀다. 광서제가 비상(砒霜·비소로 만든 극약)으로 독살 입증돼”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청나라 말기의 광서황제의 사망 원인에 대해 ‘정상적으로 병사(病死)했다’는 설과 ‘음모에 의해 살해됐다’는 설이 많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았었는데,
그의 사망 100년 기일(忌日)을 며칠 앞두고 과학기술에 의해 그 수수께끼가 풀렸다”고 보도했다.
문회보는 “중국의 국가중점문화공정팀이 현대의 과학기술을 이용해 광서제의 유골과 모발에서 독극물 화학실험 결과,
광서제의 모발과 위(胃)에서 치명적인 분량의 비소 성분(예전엔 비상·砒霜으로 불림)이 검출됐다”고 밝혔다.
이를 토대로 ‘국가 청사(淸史·청나라 역사)편찬위원회’가 금명간 ‘청(淸)광서황제 사인 보고회’를 가질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자연사가 아닌 독살로 확인됨에 따라 과연 누가 독살에 가담했는지에 대한 역사적 의문이 새로 생기게 된 것.
<다음은 문회보 요약>
1871년 8월14일 태어난 광서제는 1908년 11월 14일 저녁 37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
바로 그 다음날 서태후(慈禧太后)도 74세를 일기로 숨졌다.
하루 사이에 나이 차이가 두 배인 두 핵심 인물이 죽자 세상에는 추측이 난무했다.
어떤 이는 “서태후가 자신이 죽은 뒤 광서제가 권력을 잡는 것을 원치 않아 사람을 보내 광서제를 독살했다”고 말하고,
어떤 이는 “무술년 변법 때 위안스카이(袁世凱)가 광서제를 배반했는데,
서태후 사후에 광서제에게 보복 당할 것이 두려워 환관을 시켜 독살했다”고 말하고,
또 어떤 이는 “환관 리롄잉(李蓮英)이 독을 탔는데,
그 이유는 광서제가 자신의 일기장에 ‘서태후가 죽고 나면 위안스카이와 리롄잉을 주살할 것이다’고 쓴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라고도 말한다.
또 어떤 이는 “광서제가 신체가 허약해 병사했다”고 말한다.
지난 100년간 광서제의 사인에 대해 장황하고 지루한 논문은 많았지만 정론이 되지는 못했다.
그런데 1980년대에 중국 국가문물국이 1930년대에 도굴된 채 방치됐던 유물들을 정리하다가
청서릉(淸西陵)의 창고 안에 있던 광서제와 융유(隆裕)황후의 관과 유해를 찾아냈다.
이후 두 사람의 모발과 유해를 추출해 최근 5년간 고도의 과학실험을 거쳤다.
곧 발표될 ‘광서제 사인 보고서’에는
최신의 법의학적 실험을 한 청서릉문물관리처, 중국 원자력연구원, 베이징시 공안국 법의(法醫)감정센터 관계자들이 서명했다.
이들이 최후에 낸 결론은
“광서제의 모발에서 높은 함량의 비소가 검출됐는데 이는 외부로부터 감염된 것이다.
다량의 비소화합물이 광서제 시신의 위(胃)에 잔류하고 있고, 시신의 부패 과정 등으로 인해 유골과 의류 등에도 녹아 내려 분포한다.
과학적으로 계산한 결과 광서제가 체내에 흡수한 비상(砒霜)의 총량은 치사량에 이르렀음이 명확하다”는 것이다.
병환으로 사망한 것으로 돼 있는 중국 정사(正史)도 독살 당한 것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얘기다.
광서제는 1898년 캉유웨이(康有爲) 등과 함께 변법유신을 일으켰지만 최종적으로는 수구파와 서태후의 역공을 당했고,
죽을 때까지 서태후에 의해 영대(瀛台)에 감금됐다.
비소 성분으로 이뤄진 극약인 비상은 냄새가 없고 맛도 없는 백색 가루다.
입력 : 2008.11.02 21:39
한성숙 기자 hansk@hk.co.kr
|
청나라 말기 의문 속에 사망한 광서제(光緖帝)가 독약에 의해 암살당한 사실이 100년 만에 밝혀졌다.
중국 전문가팀이 2003년부터
광서제의 사인을 둘러싼 조사를 벌인 끝에
그가 치명적인 독약인 비소 성분의 비상(砒霜)을 먹고 살해된 것을 확인했다.
유력 일간지 광명일보(光明日報) 온라인판을 비롯한 현지 언론매체는 3일
전문가팀이 광서제가 남긴 머리카락을 X선 촬영 등
최첨단 과학적 방법을 동원해 분석한 결과
대량의 비상이 검출됐다고 전했다.
사인 규명에는 중국원자력연구원과 베이징시 공안국 법의학감정센터, 청서릉(西陵) 문물관리처가 직접 참여했다.
광서제의 유골과 의복도 비상에 오염된 것으로 나타나 체내에 흡수된 독극물 총량은 치사량을 훨씬 초과했을 것으로 추정됐다.
이에 따라 중국 정부 산하의 국가청사(淸史) 공정편찬위는 2일 베이징에서
광서제가 공식문서에 기재된 것처럼 병사한 게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비상을 먹은 뒤 중독사했다고 발표했다.
이 같은 결론은 정사로서 현재 편찬작업이 집행 중인 '청사(淸史)'에 정식으로 실릴 예정이다.
1875년 네살의 어린 나이에 11대 황제로 즉위한 광서제는 이모인 서태후가 수렴청정으로 장기간 실권을 행사하면서
사실상 '꼭두각시' 역할을 맡는데 그쳤다.
그는 청일전쟁의 패전을 겪는 등 청조 말기에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가 재위 34년째인 1908년 11월14일 저녁 37세의 젊은 나이에
돌연 숨을 거뒀다.
공교롭게 서태후도 광서제가 죽은 다음날 74세를 일기로 사망해
그의 사인에 대해서도 독살설 등 여러 소문과 억측이 난무했으나 아직 규명되지 않았다.
현존하는 문헌을 보면 광서제는 친정에 나서기 위해 1898년 캉유웨이(康有爲) 등과 함께 변법유신을 일으켰다가 실패,
궁중과 영대(瀛台)에 10년간 유폐돼 있으면서 한약을 장기간 복용했다.
광서제가 복용한 한약에는 웅황과 자황, 주사 등 비소와 수은 성분이 다량 함유돼 있어 만성중독을 유발했으나
직접적인 사인은 아닌 것으로 확인됐다.
청사공정편찬위는 광서제를 독살한 주범에 관해선 앞으로 연구를 계속해야 한다고 언급하는데 그쳤다.
하지만 광서제를 죽여야 할 이유를 가진 서태후와 위안스카이(袁世凱), 서태후 측근인 환관 리롄잉(李蓮英) 가운데 한 명일 것이란 설이
유력하다.
서태후는 자신이 죽은 뒤 광서제가 친정에 나서 개혁정치를 구현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위안스카이는 변법유신 과정에서 광서제를 배반하고 수구파로 돌아서 보복을 걱정하고 있었다.
리롄잉도 서태후를 믿고 광서제를 핍박했기 때문에 광서제의 친정을 두려워했다.
입력시간 : 2008/11/04 03:16:07
[책갈피 속의 오늘]1875년 淸 광서제 즉위
[동아일보]
후진타오(胡錦濤) 중국 국가주석은 요즘 아시아에서 가장 각광받는 지도자 중 한 명이다.
그러나 그에게도 콤플렉스는 있다. 장쩌민(江澤民) 전 주석의 그늘에서 벗어나기 힘들다는 점.
그는 얼마 전 청나라 말 서태후(西太后)가 광서제(光緖帝) 배후에서 실권을 휘두르는 내용의 중국 TV 드라마를
압력을 넣어 조기 종영시켰다. 자신이 광서제와 비교되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후 주석이 그토록 닮고 싶지 않았던 광서제. 그는 1875년 1월 12일 동치제(同治帝)의 뒤를 이어 청나라 11대 황제로 즉위했다.
그는 동치제의 외사촌으로 혈통상 황제의 자격이 없었으나 동치제의 어머니였던 서태후의 강력한 후원으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당시 그의 나이 네 살.
광서제는 천자(天子)를 시켜준 것에 대한 보은으로 서태후에게 실권을 내주고 33년 즉위 기간 중 ‘허수아비’ 황제로 살았다.
청나라 역사상 최고 여걸로 통하는 서태후는 그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불같은 성미의 서태후가 다가오면 그는 기겁을 하고 달아났다.
그러나 실권이 없다고 마음까지 편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 정세는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혼란했다.
청은 아편전쟁에서 패한 후 서구열강 이권의 각축장이 됐고, 청일전쟁까지 패하면서 아시아의 ‘종이호랑이’ 신세가 됐다.
1898년 광서제는 정치적 승부수를 던졌다.
서양문물을 받아들이는 것만이 나라를 살릴 수 있는 길이라고 믿은 그는
서태후의 뜻을 거스르면서 ‘무술변법(戊戌變法)’이라고 불리는 개혁운동을 주도했다.
과거제 폐지, 신교육제도 도입, 화폐 통일, 철도 개설 등을 내건 무술변법의 기세는 초기에는 대단했지만 결국 100여 일 만에 실패로 끝났다. 목숨을 걸었던 개혁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광서제는 서태후에 의해 유폐됐고 1908년 죽음을 맞았다.
무술변법은 근대화를 이루려는 목적은 좋았으나 이상에 치우친 급진적인 개혁운동이었다.
광서제는 강유위(康有爲), 양계초(梁啓超) 등 정치 경험이 일천한 학자들이 제안한 개혁운동의 당위성을 널리 알리지 못했다.
운동은 기득권층은 물론 국민의 지지도 받지 못했다.
무술변법은 메이지유신을 흉내 낸 것이었지만 일본 개혁세력의 철저한 현실인식과 지도층의 일치단결만은 따를 수 없었다.
무술변법과 거의 같은 시기에 시도된 조선의 갑오개혁도 비슷한 이유로 실패로 끝났다.
개혁의 성패를 가르는 것은 결국 ‘구호’가 아니라 ‘방법론’이라는 것을 한중일 역사는 말해준다.
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
中 CCTV 대하사극 돌연중단…'관심 증폭'
중국 정부가 최근 청나라 말에서 중화민국 초기를 시대배경으로 하는 59부작 대하 TV사극의 방영을 중단시켜
그 배경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대만 중국시보는 27일 1894~1924년 중국 근현대사 30년의 정치적 격동을그린 ‘주향공화’(走向共和ㆍ공화제를 향하여)가
갑자기 방영금지 됐다며그 원인은 드라마의 정치적 함축성 때문이라고 보도했다.
4월12일부터 중국중앙TV(CCTV)에서 방영된 이 드라마는 4년간 4,100만 위안(62억원)을 들여 만든 대작.
서태후와 위안스카이(袁世凱), 쑨원(孫文)등이 주요 등장인물이다.
본래 이 드라마는 CCTV에서 방영이 완료된 뒤 각지방TV에서 재방영될 예정이었으나 당국은 이를 금지시켰다.
중국시보와 홍콩 언론은 중국 소식통을 인용해 원인을 2가지로 분석했다.
우선 공화제와 민주주의 이념을 강하게 담고 있어 현 체제에 대한 시청자들의 비판의식을 강화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서태후가 아들 동치제(同治帝)와 양아들 광서제(光緖帝)를 수렴청정하는 모습이 현재의 정치상황을 풍자하는 인상을 강하게 준다는 것.
언론들은 서태후의 수렴청정 모습에 대해
후진타오(胡錦濤) 당총서기와 장쩌민(江澤民) 중앙군사위 주석측이 모두 거부감을 표시했다고 전했다.
[책갈피 속의 오늘]1908년 청나라 서태후 사망
청나라 말기 중국을 지배한 서태후(1835∼1908)는 ‘권력욕의 화신’이었다.
1861년 자신의 다섯 살 난 아들 재순이 황제(동치제)에 오르자 수렴청정(垂簾聽政)을 시작해
무려 3번이나 이를 이어가며 47년간 집권했다.
그의 권력욕이 황제들의 수명을 단축시켰다고 후세의 역사가들이 평가할 정도였다.
동치제 즉위 후 표면적으로는 황후(동태후)와 함께 수렴청정에 나섰지만
동태후는 서태후에 대항할 뜻도 능력도 없는 인물이었다.
‘대권’을 잡은 서태후는 50세가 되던 1885년에는 해군 부대의 예산까지 빼돌려
별궁 ‘이화원’을 짓는 등 사치를 부렸다.
그가 자신의 권력만을 탐하던 당시 나라 안팎은 어지러웠다.
아편전쟁(1840∼1842년) 이후 기아로 허덕이는 농민이 늘었고
서구 열강의 유린도 날로 심해지던 때였다.
서태후는 짧은 기간에 ‘입신양명’을 한 여자다.
만주족 중급 관리의 4남 4녀 중 셋째로 태어난 서태후는 17세인 1852년에 함풍제의 후궁으로 궁궐에 들어갔다.
175cm의 당당한 체격과 사람을 압도하는 자태를 갖춘 그는 나약했던 함풍제의 관심을 끌었다.
후궁이 된 지 4년 만에 낳은 재순은 26세의 그녀에게 권력을 안겼다.
하지만 어머니에게 휘둘린 동치제는 결국 19세에 요절한다.
서태후를 잘 따르는 여자를 황비로 맞지 않은 것이 화근이었다.
동치제가 죽자 서태후는 네 살 난 조카 재첨을 황제(광서제)에 앉히고 2차 수렴청정을 시작한다.
광서제가 19세에 결혼을 하자 친정(親政)을 허락했지만 실권을 놓지는 않았다. 더 큰 욕심을 부르는 권력의 속성은 유효했다.
젊은 지식인들의 개혁운동인 무술변법(戊戌變法)으로 권력이 광서제로 기울 조짐이 보이자 서태후는 1898년 다시 수렴청정에 나선다.
권력을 위해 ‘동지’를 제거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함풍제가 죽은 뒤 쿠데타로 권력을 잡을 때 공을 세운 공친왕 혁흔을 축출했고, 당시 그에게 협력했던 동태후도 결국 죽음으로 내몰았다.
집요하게 권력을 유지한 서태후는 광서제가 죽은 다음 날인 1908년 11월 15일 73세로 생을 마친다.
죽기 직전 광서제의 세 살 된 조카 푸이(중국의 마지막 황제인 선통제)를 후계자로 지목했다. 마지막 순간에도 4차 수렴청정을 노렸을까.
최근 중국에서 그의 사치와 무능에 대한 재평가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지만 권력욕에 대한 다른 평가는 없는 듯하다.
권력 앞에서는 자식도 동지도 없었다.
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
'중국'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中 천하제일 `孔子 후손의 영광` (0) | 2008.11.11 |
---|---|
[스크랩] [역사는 살아있다] 청일전쟁 (0) | 2008.11.06 |
[스크랩] 고대 중국여성의 이상적인 발 싸이즈-전족 (0) | 2008.10.03 |
[스크랩] 중국여인들의 전족 (1890년대) (0) | 2008.10.03 |
[스크랩] 중국의 전족, 조선엔 없었던 까닭 (0) | 2008.10.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