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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역사가 흐르는 청계천 이야기

제봉산 2013. 7. 29. 21:20

 

 

 

역사가 흐르는 청계천 이야기

 

 

사람과 허리우드실버극장에서 흘러간 영화를 보고 종편채널A ‘이영돈 PD의 먹거리 X파일’에서 ‘착한식당’ 으로 선정한 낙원동 지하상가1층에 있는 ‘일미식당’에서 때 늦은 점심을 먹었다. 주변이 좀 지저분하기는 하지만 이 식당은 손님 테이블이 5개에 불과한 작은 식당으로 작은 밥솥을 여러 개 사용하며 금방 만든 밥을 주는데 청국장과 해물찌개가 일미다.

 

허리우드 실버극장은 입장료가 2000원인데 흘러간 명화를 볼 수 있어 연애 시절 옛 추억을 더듬는데는 제격이고, 부부 간의 대화에 촉매제가 된다. 얼마전 명보극장에도 실버극장이 생겼는데 여기도 입장료가 2000원이다.

 

 

폭우에 물에 잠겼던 청계천을 깔끔하게 물청소하였다기에 오랫만에 청계천 산책을 하기로 하였다. 아직도 장마가 그치지 않았지만 오늘은 하늘이 청명하고 태양은 뜨거워 모자를 준비하지 못한 나는 속알머리 없는 대머리로 따가운 햇살을 받아 내느라 고생 좀 했다.

 

청계천의 상류는 자하문 터널 근처에서 시작되어 세종로사거리 근처까지 흐르는 백운동천이다. 여기에 북악산, 인왕산, 남산 등으로 둘러싸인 서울 분지의 모든 물이 모여 동쪽으로 흐르다가 왕십리 밖 살곶이다리[箭串橋] 근처에서 중랑천과 합쳐 서쪽으로 흐름을 바꾸어 한강으로 빠진다. 본래의 명칭은 '개천(開川)'이었는데 일제강점기 때 청계천(靑溪川)으로 부르게 되었다

 

 

조선의 한양정도(漢陽定都) 당시 청계천은 자연하천 그대로여서 홍수가 나면 민가가 침수되는 물난리를 일으켰고, 평시에는 오수가 괴어 매우 불결하였는데, 제3대 태종이 개거공사(開渠工事)를 벌여 처음으로 치수사업을 시작하였다. 그후 영조 때에는 준설·양안석축(兩岸石築)·유로변경 등 본격적인 개천사업을 시행하였다. 이 공사로서 내의 흐름이 비로소 직선화하였다.

산책은 복원된 청계천 입구인 광화문 동아일보사 옆에서 부터 시작했다. 우리를 맞이하는 것은 스웨덴출신의 미국 팝아티스트 올덴버그가 설계한 20m에 달하는 달팽이 모양의 "스프링"이었다. 스프링은 끝이 뾰죽하게 솟은 나선형의 모양으로 꼭 다슬기 또는 소라가 연상되었다.

 

500년 역사가 깃든 청계천에 왠 생뚱맞은 초현대적인 조형물인가 했으나 올덴버그는 "한국을 상징하는 파랑색과 빨간색 그리고 도자기를 상징하는 노란색을 아울려 우주와의 조화를 표현했다"고 한다.

 

 


광교에 위치한 청계광장에서 시작해 정릉천이 합류되는 고산자교까지 약 5.8㎞에 이르는 구간 내에는 꼭 둘러봐야 할 ‘청계팔경’이 있다. 제1경은 분수대와 야외 공연장이 있는 청계광장으로 청계천 산책로의 시작점이 되고 제2경은 광통교(줄여서 광교라 부른다)로 태조 이성계의 비(妃), 신덕왕후의 묘지석을 거꾸로 쌓아 만든 다리다.

 

 

광통교는 씁씁한 사연이 있는데, 태종 이방원은 제1차 왕자의 난 때 죽인 방석(당시 세자로 이복동생)의 어머니 신덕왕후를 지극히 미워하여 신덕황후 능의 석물을 광통교의 석축으로 꺼꾸로 세워 사용했다. 그것도 모자라 정월 대보름날에는 한양의 많은 사람들에게 한 해의 액운을 없게 해 준다며 다리밟기 놀이를 하게 했다.



정조의 화성 행궁 모습을 그린 단원 김홍도의 그림을 도자벽화로 재현한 정조 반차도가 제3경, 패션분수와 벽화작품을 볼 수 있는 패션광장이 제4경, 옛날 아낙네들이 빨래하던 자리를 꾸며 놓은 청계천 빨래터가 제5경이다. 서울 시민 2만 명이 직접 쓰고 그린 타일로 꾸며 놓은 소망의 벽이 제6경, 철거된 청계고가도로의 교각 세 개를 기념으로 남겨 놓은 존치교각과 터널 분수가 제7경이다. 청계천 복원 구간 제일 끝의 버들습지가 제8경으로 수생식물을 심어 놓은 자연생태 공간이다.

청계천에는 22개의 다리가 있는데, 과일가게가 모여있던 모전교, 조선조 도성안의 중심 통로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던 광통교, 개천의 수위를 측정하기 위해 수표석을 세운 수표교, 배오개다리, 새벽다리, 마전교, 오간수문 위로 통행을 편하게 하기 위해 가설한 오간수교, 맑은내다리, 황학교, 세종 때 청백리 유관이 살았던 비우당교 , 무학교, 두물다리, 고산자교 등 많은 다리가 북촌과 남촌을 연결하고 있었다.



 

조금 더 가니 1725년 남다른 효자로 알려진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맞이하여, 비운으로 숨진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인 현륭원이 있는 화성으로 행차하는 모습을 단원 김홍도 등 여러 화원들이 그린 <화성능원반차도>를 4,960매의 타일을 이어 붙혀 재현한 총길이 186m, 높이 2.4m의 벽화는 장엄하면서 웅장한 위용을 뿜어내고 있었다.



임금과 왕실가족, 문무백관과 호위병사, 나인, 음악과 춤으로 흥을 돋구는 궁녀, 예악과 취악대 등 1,779명의 사람과 779필의 말이 정확하고 치밀하면서도 아름답게 그려져 있었다. 그러나 실제는 6,000여명이 동원되었다 하니 그 규모가 얼마나 위풍당당하고 화려했을가. 이 반차도에는 벼슬명칭이 부기되어 있는데 총리대신이라는 직함이 있어 좀 생소했다.



이 능차도는 청계천을 찾는 외국인들에게 한국은 유럽 못지 않은 유구한 역사를 가진 문명국가임을 각인 시키는 데 큰 몫을 하리라 믿는다. TV를 통해서 본 영국 윌리암왕자의 결혼행차도 이만큼 화려하고 장엄하지는 않았다.



인구 천만명에 이르는 대도시 한복판에 역사이야기가 흐르고, 팔뚝만한 잉어떼가 뛰놀며 각가지 야생화와 개천이면 자생하던 수양버드나무 그리고 이팝나무 등 한국고유의 식물들이 자라고 있는 도시가 또 있을까. 문뜩 "아름다운 서울에서~~~"라는 가요가 생각이 난다. 정수라가 이 노래를 불렀던 1970년대의 서울은 결코 아름답지 못했다.

 

 

청계천이야말로 한국의 근대화 과정을 생생하게 대변하는 역사의 현장이라 하겠다. 이름 그대로 맑은 물이 흐르고 목가적인 빨래터가 있던 청계천이 고종때 인구 25만명의 한양이 일제강점기 시절 인구가 점점 늘어나 도심인 청계천에 초라한 판자집이 서서히 형성되어 인구 100만명에 이른 한국전쟁 휴전후에는 수상건물의 형태를 이룬 무허가상가, 염색공장, 주점, 음식점 등이 우후죽순으로 난립하여 생활하수로 오염될대로 오염되어 악취가 진동하는 시궁창으로 전락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서울 한 복판에 시원한 물줄기가 흐르는 시민들의 쉼터로 없어서는 안될 유명한 명소로 자리매김을 하였다. 그야말로 면모일신한 것이다. 해마다 봄과 겨울에 색다르게 등불축제와 빛축제 펼쳐져 청계천을 더 아름답게 하고 수상패션쇼도 열려 한국의 다양한 전통문화를 알리고 있다.

 


도시미관의 정비로 1961년에 복개되고 1970년에는 교통체증의 완화책으로 흉물스런 고가도로가 설치되어, 미군차량은 붕괴될 위험이 있다 하여 통해금지령이 내렸던 청계천2003.7.1에서 2005.9.30에 걸친 공사로 고가도로를 철거하고 복개를 걷어내어 오늘에 이르렀다.


 

노동운동의 발화점이 된 전태일의 동상 그리고 서울이 세계 6대 패션도시로 도약하게 되는데 큰 역활을 하고 있는 평화시장이 보인다. 전태일이 열악한 환경과 저임금으로 일했던 이 시장의 근로자는 이제 합당한 대우를 받고 있는지...



청계천으로 내려오면,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공구상들은 보이지 않고 도시미각을 자랑하는 초고층 빌딩들이 스카이 라인을 이루고 있어 서울이 아름다운 현대도시임을 말해 주고 있다. 고가도로를 타고 갈 때 보이던 스럼화된 아파트들도 대부분 철거되었다.



서울은 더 이상 인구증가도 없고 서서히 문화도시로 진화하고 있으며 생태적 환경도시, 도시미각과 디자인에 눈 뜬, 세계가 주목하는 도시로 변모하고있다.

 

 


출처 : 演好마을
글쓴이 : 淸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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