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월의 태양
아프리카 동부 에티오피아에서는 '13월의 태양'이 뜬다. 이 나라는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13월이 있는 율리우스력을 쓴다.
12월이 끝나도 한 달이 더 있다. 1~12월은 한 달이 30일씩이고, 13월은 닷새다. 3000년 역사의 문명을 가졌고, 가장 오래된 인류의
뼈가 발견된 곳이다. '아프리카의 뿔'이란 별명을 가진 장거리 육상 강국이기도 하다. 배고픔에 허덕이는 아이들이 거리에 가득해도 13월의 태양이
뜰 때면 새로 힘을 돋운다.
세밑에 김승희 시인이 아홉 번째 시집 '희망이 외롭다'를 냈다. "남들은 절망이 더 외롭다고 말하지만
나는 희망이 더 외로운 것 같다"고 운을 뗀다. "절망에는 중력의 평안이라고 할까 비애의 따스함이 있다"고 했다. 김 시인의 가족 중에는 그녀가
오래도록 돌봐온 중환자가 있다. "도망치고 싶고 그만두고 싶어도 이유없이 나누어주는 저 찬란한 햇빛"이 있기에 그녀는 "'13월의 태양'처럼
다시 한 번 세상을 산 위로 들었다 놓을 마음"을 품는다.
흥겹고 들뜬 섣달 그믐에도 "가장 낮은 곳에, 젖은 낙엽보다 더 낮은
곳에, 그래도 살아가는 사람들, 사랑의 불을 꺼뜨리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부도가 나 길거리로 내몰려도, 뇌출혈로 쓰러져 말 한마디 못하는
가족 곁에 밤을 새우면서도, 힘을 내 웃어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 김 시인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목숨은 끊지 말고, 그래도 부둥켜안고, 그래도
손만 놓지 않는다면, 언젠가 강을 다 건너 빛의 뗏목에 올라서리라"는 온기 어린 다짐을 건넨다.
올해는 1월 대만 총통 선거를 시작으로 12월 한국 대선까지 60개 나라에서 선거가 치러졌다. 지구촌 권력 지도는 완성됐지만
희망 지도는 아직 아리송하다. 나라마다 사정은 다르다. 당장 "열매부터 나눠달라"고 외치며 '과실(果實)의 분배'를 부르짖는 사람이 있다.
그들을 다독이며 우선 "짐부터 나눠져야 한다"고 '부담의 분배'를 타이르는 목소리도 들린다.
칼바람 무릅쓰고 철탑에 올라가야 했던
비정규직 농성자도 떠오른다. 연예인이나 작가들이 정치 소신을 말할 때 잘 알지도 못하는 노동 현장을 제멋대로 들먹이지 말았으면 좋겠다던 어느
노동 활동가의 인터뷰가 가슴을 찌른다. 오늘 밤 세계 도시마다 새해맞이 카운트 다운 행사가 열린다. 뉴욕 타임스퀘어에서, 파리 샹젤리제에서,
서울 보신각에서 다정한 사람끼리 눈을 맞출 것이다. 아무리 춥고 외로워도 따뜻한 마음을 잃지 않는 이에게 13월의 태양은 뜬다.
- 조선일보 만물상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