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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5세대지도부구성...시진평 최고지도자 등극

제봉산 2012. 11. 15. 20:34

***시진핑 중국 국가부주석이 15일 중국공산당 총서기로 공식 선출됐다.

시진핑 총서기는 이와 함께 인민해방군을 지휘하는 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에도 선임돼 당권과 군권을 동시에 장악한 중국의 최고지도자로 등극했다.

지난 6일 재선에 성공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함께 세계를 이끌어갈 `G2` 지도자가 최종 확정된 것이다. 미ㆍ중 양국의 권력교체가 마무리됨에 따라 향후 글로벌 경제의 불확실성이 걷힐 수 있을지 주목된다.

중국공산당은 15일 오전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18기 당 중앙위원회 1차 전체회의(18기 1중전회)`를 열어 지도부 구성을 완료했다. 이날 회의에 참석한 당 중앙위원 205명은 총서기와 함께 중앙정치국 위원 25명과 상무위원 7명을 선출했다.

시진핑 총서기와 함께 중국의 집단지도체제를 구성할 상무위원에는 권력 서열 순으로 리커창 부총리, 장더장 부총리 겸 충칭시 당서기, 위정성 상하이시 당서기, 류윈산 당 중앙선전부장, 왕치산 부총리, 장가오리 톈진시 당서기가 선출됐다.

시진핑은 내년 3월 개최되는 제12기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1차 전체회의에서 정부 수반에 해당하는 국가주석에, 리커창은 국무원 총리에 오를 예정이다.

이어 장더장은 전인대 상무위원장, 위정성은 정협 주석, 류윈산은 국가부주석, 왕치산은 중앙기율검사위 서기, 장가오리는 상무부총리를 맡게 된다.

시진핑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먼저 "책임이 태산보다 무겁고, 갈 길은 아직 멀었다"고 소감을 밝혔다. 그는 이어 "일부 간부 당원들에서 발생한 부패와 민심 이반, 형식주의, 관료주의 등 문제를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며 부패척결을 최우선과제로 제시했다. 시진핑은 동시에 "우리의 책임은 개혁ㆍ개방을 견지하고 민생의 어려움을 해결하는 것"이라며 "공동부유의 길을 확고하게 걸어가야 한다"며 경제적 비전을 제시했다.

이날 회의의 압권은 후진타오 주석이 당 중앙군사위 주석직에서 바로 물러나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10년 전 장쩌민 전 주석과 다른 선택이다.

시진핑 총서기가 군부에 대한 장악력을 높임으로써 집권 초기부터 권력기반을 공고히 다질 수 있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 중국 시진핑 시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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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 중국 공산당 총서기는 흡인력이 강하다. 인생의 고난을 약으로 삼키고, 정치적 맞수를 아군으로 바꾸는 힘을 가졌다. 대단한 포용력이다. 드라마틱한 삶을 살면서도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았다. 젊은 시절 경험한 문화대혁명의 아픔이 그에게 인내심을 선물한 덕분이다. 공직에 발을 들여놓은 뒤에는 늘 겸손해하며 주변 사람들과 화합을 추구했다. 개방적인 마인드와 글로벌 감각은 지방 지도자로서 성공의 밑거름이 됐다. 시진핑의 리더십과 인생을 핵심 키워드로 풀어본다.

◆ 시진핑 말말말

"책임은 태산과 같고, 갈 길은 멀기만 하다."(策任重于泰山 事業任重道遠)

-2012년 11월 15일 총서기 취임 일성

"일본이 댜오위다오를 사들이는 코미디를 연출하고 있다. 미국도 말을 삼가라."

-2012년 9월 방중한 리언 패네타 미국 국방장관에게

"나는 권력과 꽃, 영광의 박수 소리만 본 게 아니었다. 그 속에서 수용소도 봤다."

-2000년 아버지가 16년 만에 복권된 데 대해

"곰 발바닥과 생선은 함께 얻을 수 없다. 정치 하려면 돈 벌 생각 말라."

-1999년 터진 중국 최대 부정부패 스캔들을 두고

◆ 포용 - 원로들 "누구도 거부 못할 사람" 리커창과 차기다툼서 대역전극

오늘의 시진핑이 있기까지 고비의 순간이 많았지만 그중에서도 압권은 2007년 `17차 당대회` 직전이었다.

당시 중국 공산당은 후진타오 국가주석의 뒤를 이을 차기 지도자를 선정하기에 앞서 치열한 권력 다툼을 벌였다. 가장 유력한 후보는 리커창 부총리였다. 후진타오는 자신의 공청단파 후배를 지명하기 위해 몇 해 전부터 세심하게 공을 들였다.

그러나 당대회 직전 당 고위 간부를 대상으로 실시한 선호도 투표에서 시진핑이 리커창을 누르고 1위를 차지했다. 의외의 결과에 모두가 놀랐지만 시진핑을 밀었던 태자당(혁명원로 자제그룹)의 맏형 쩡칭훙 전 부주석은 미소를 머금었다.

당시 쩡칭훙이 전ㆍ현직 고위 지도자들을 설득한 논리가 바로 `포용력`이었다. "리커창은 의심할 여지없는 경제 전문가다. 그러나 차기 지도자는 다른 사람의 능력까지 결집할 수 있는 포용력이 있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시진핑은 정치권의 누구도 거부하지 못할 것이다."

이 논리는 장쩌민에게 그대로 수용됐고, 다른 원로들도 이견을 달지 못했다. 불과 몇 달 새 이뤄낸 대역전 드라마였다.

실제로 그의 인생 좌우명이 `후덕재물(厚德載物)`이다. 덕을 두텁게 하고 만물을 포용한다는 뜻의 주역 문구다. 산시성 푸핑현에 있는 그의 부친 시중쉰 생가에 가면 대문 현판에 이 말이 쓰여 있다.

◆ 인내 - 부친 숙청으로 시골처 토굴생활 "그때 인민을 알고 자신감 얻었다"

1953년 산시성 푸핑현에서 시중쉰 전 부총리(1913~2002) 장남으로 태어나 유복한 생활을 하던 시진핑은 9세가 되던 1962년 큰 시련을 맞았다. 시중쉰이 반혁명 분자로 몰려 감옥에 들어간 것. 류즈단 사건이 발단이었다.

마오쩌둥과 류샤오치 간 권력 투쟁 과정에서 마오쩌둥 편에 선 캉성이 류즈단을 주인공으로 한 장편을 반당 소설로 몰아 책 출간에 간여한 시중쉰을 숙청한 사건이다.

설상가상으로 문화대혁명까지 터졌다. 시진핑은 1969년 중학교를 졸업한 직후인 16세 때 사상비판을 받은 뒤 산간벽지인 산시성 옌안으로 쫓겨가 7년을 보냈다. 토굴에서는 벼룩 때문에 도무지 잠을 잘 수 없었다. 가려움 때문에 죽고 싶을 지경이었다.

거친 잡곡밥도 적응하기 힘들었다. 배급받은 돼지고기를 날것으로 입에 물고 있는 자신의 모습에 놀란 적도 있다. 베이징 생활이 그리울 때는 눈물로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

어느 정도 농촌 생활에 적응하자 그는 낮에는 노동을 하고, 밤에는 마르크스ㆍ레닌주의와 마오쩌둥 저작을 읽었다. 고행을 인내로 극복한 것이다. 시진핑 자신도 훗날 이때 많은 것을 배웠다고 토로했다. 그는 "농촌 생활에서 실사구시와 대중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다"며 "어떤 일도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도 이때 얻었다"고 말했다.

◆ 개방 - 푸젠성 공직생활때 진가발휘, 외자유치해 부자도시 만들어

시중쉰이 1978년 복권되자 기회가 찾아왔다. 시진핑은 칭화대를 졸업한 뒤 국무원 판공청에서 겅뱌오 부총리 겸 중앙군사위원회 비서장의 비서로 배치됐다. 모두가 부러워하던 자리였지만 그는 3년 만에 농촌으로 가겠다고 자청했다. 허베이성 스자좡시 정딩현 부서기를 맡았다.

당시로서는 고위 간부 자제가 기층으로 내려가 실무를 경험하겠다고 나선 것은 그가 처음이었다. 열린 마음을 갖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에게 지도자로서 날개를 달아준 것은 1985년 푸젠성 샤먼시 부시장으로 옮긴 것이었다. 이후 18년간 이어진 푸젠성 공직 생활에서 그는 많은 성과를 냈다. 빈곤 지역이던 닝더시 서기 시절에는 시 간부들이 부정하게 사택을 지은 것을 발견하고 관련자를 모두 처벌했다. 지역민들 항의가 뒤따랐지만 밀어붙였다.

동부 연안지역에서 상대적으로 뒤떨어진 푸젠성은 시진핑이 대만 자본을 대거 끌어들인 덕분에 빠르게 발전했다. 그가 저장성 서기로 옮겨간 2002년에는 푸젠성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전국 최고 수준인 3000달러까지 상승했다.

그는 국유기업보다 민간기업 육성을 중시한 지도자였다. 중국 전자상거래 대표 기업인 알리바바도 그의 지원이 성장의 밑거름이 됐다는 후문이다.

시진핑은 "민간기업은 개혁개방의 중요한 동력으로 막대한 일자리를 제공한다"고 자주 말한다.

◆ 겸손 - 자신을 한없이 낮추는 관료, 중앙 정치무대 진출 `디딤돌`

시진핑이 중앙 정치 무대로 진출할 수 있도록 날개를 달아준 계기는 의외의 정치적 사건에서 찾아왔다.

2006년 9월 천량위 상하이시 당서기가 비리 혐의로 낙마한 사건이다. 후임자 선정을 놓고 공청단파와 상하이방 간 세력 다툼이 벌어졌다.

후진타오는 부패 척결의 적임자로 공청단파 인사를 내세웠다. 장쩌민도 20년간 상하이시 출신이 차지해오던 서기 자리를 놓칠 수 없는 한판 승부였다.

결국 공청단파와 상하이방의 타협 산물로 시진핑이 등장했다. 그의 겸손이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시진핑은 어떤 지역이든 부임하자마자 먼저 원로 당원부터 찾아가 인사를 했다.

2007년 3월 시진핑이 상하이시에 부임했을 때 저장성으로 출장 일정이 잡히자 시 간부들이 항저우까지 가는 직행 전용열차를 준비했다. 그러나 시진핑은 7인승 미니버스로 바꿔타고 항저우로 출발했다. 최고지도자가 자신을 한없이 낮추는 모습에 부패 사건으로 뒤숭숭하던 상하이시는 점차 안정을 되찾아갔다.

시진핑은 중앙정부에도 겸손한 태도를 보였다. 그는 첫 간부 모임에서 "상하이는 중국 중앙정부 정책과 전국적인 발전계획에 보조를 맞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중앙정부에 반기를 들기 바빴던 상하이시 지도자들과 다른 행보였다. 시진핑이 중앙 정치 무대로 진출할 것을 알리는 신호탄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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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의 부인 펑리위안(49ㆍ사진)에게는 `중국판 브루니`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모델 겸 가수이며 니콜라 사르코지 전 프랑스 대통령 부인인 카를라 브루니처럼 펑리위안도 중국 퍼스트레이디이기에 앞서 국민 가수이기 때문이다. 펑리위안은 현역 소장(한국의 준장)이기도 하다. 인민해방군 총정치부 산하 문예선전부인 문공단에 재직 중인 그는 미모와 노래 실력으로 중국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시진핑은 첫 데이트 때 펑리위안에게 수입이 얼마나 되느냐, 히트곡이 뭐냐고 묻는 대신 "성악 창법은 몇 가지로 구분되나요"라고 물어 펑리위안이 순수한 면모가 있는 시진핑에게 호감을 가진 것으로 전해진다. 결혼 직후 푸젠성에 있던 시진핑과 베이징에 있던 펑리위안은 떨어져 지내기 일쑤였다. 하지만 펑리위안은 시진핑이 베이징 정계에서 잊히지 않도록 물밑에서 교제를 주선했다. 내조의 여왕을 자처한 셈이다. 특히 펑리위안은 쩡칭훙의 동생인 쩡칭화이와 중국 공산당 최고급 인문 서클에서 친하게 지내며 시진핑과 쩡칭훙이 인연을 맺는 데 직간접적으로 도왔다. 쩡칭화이는 중국 예술문화계 대부로 통한다.

또 문화예술에 관심이 많은 장쩌민과 시진핑의 연결 고리도 펑리위안을 통해 이뤄진 것이란 해석도 있다. 펑리위안은 앞으로 조용한 내조를 할 것으로 보인다. 실제 2월 시진핑이 미국을 방문할 당시 시진핑보다 더 두드러질까봐 동행하지 않았고, 2007년부터는 가수 활동도 자제해 온 것으로 전해진다. 외동딸 시밍쩌는 지난해 하버드대에 입학했다.

*** 시진핑 당 총서기를 중심으로 한 중국의 집단지도체제 인선안을 보면 앞으로 중국이 추구해 나갈 정치노선이 그대로 드러난다. 장기간의 권력투쟁 끝에 탄생한 상무위원 인선안을 바탕으로 `5세대` 중국의 미래 정치코드를 읽어봤다.

① 글로벌마인드 지도부 대거 입성…개혁 탄력받을듯

새로 선임된 상무위원들은 대부분 동부 연안에서 지도자 수업을 받았다. 시진핑은 푸젠성ㆍ저장성ㆍ상하이시를 돌았고, 리커창은 랴오닝성, 장더장 부총리는 저장성과 광둥성, 위정성 상하이시 당서기는 산둥성, 장가오리는 광둥성과 산둥성, 왕치산은 광둥성ㆍ하이난성ㆍ베이징시 순으로 근무했다. 이들 동부연안 지역은 외자유치를 중심으로 한 중국 경제 성장의 중심지였다. 이들은 지방 지도자 시절 외자유치를 위해 전 세계를 누볐다. 리커창은 중국 지도자들 가운데 영어가 가장 유창하다. 이들의 뛰어난 글로벌 감각은 `G2`로 부상한 중국의 세계화 과정에서 상당한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② 정치개혁 신호탄 - 상무위원 줄고 공안서 손 떼

중국 공산당이 차기 지도부에서 상무위원을 9명에서 7명으로 줄일 것이라는 신호는 일찌감치 감지됐다. 그만큼 상무위원 수를 둘러싼 내부 논쟁이 초기부터 치열했다는 방증이다. 권력자를 줄이는 작업은 기득권의 반발이 크다는 점에서 파격적인 조치다.

이는 중국의 정치개혁 신호탄으로 읽어야 한다는 분석이다. 상무위원 2명이 줄어들면서 배제된 분야가 당 선전담당과 중앙정법위 서기 자리이기 때문이다. 리창춘 상무위원이 맡고 있는 선전담당은 언론과 인터넷을 통제하는 자리다. 저우융캉의 중앙정법위는 사법ㆍ검찰ㆍ공안을 통솔한다. 두 요직을 상무위원 업무에서 제외한다는 것은 언론ㆍ인터넷ㆍ사법ㆍ검찰 분야에 대한 간섭을 줄이고, 독립성을 강화하겠다는 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해석된다.

③ 원로정치 약화 후진타오 군사위 주석 용퇴

당 원로가 상무위원 인선에 개입하는 것은 이번이 마지막으로 기록될 가능성이 있다. 후진타오 주석이 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에서 물러나기로 결정함에 따라 막후 원로정치 관행이 위축될 것이기 때문이다.

후진타오의 용퇴 결정은 장쩌민 전 주석을 염두에 둔 결단이다. 지난 10년간 `상왕` 장쩌민을 모시면서 나타난 폐단을 자신이 절실하게 경험했기 때문이다. 이에 5년 뒤 새 상무위원 선임에 대한 관심이 벌써부터 높아지고 있다. 시진핑과 리커창을 제외한 5명은 `19차 당대회` 때 나이 제한으로 물러난다. 차기 경쟁에서는 후진타오 계열의 공청단파가 약진할 가능성이 제기된다. 젊은 잠룡이 많기 때문이다.

④ 지한ㆍ친한파 부상 - 잦은 스킨십 한국 이해 높아

시진핑은 1995년 푸젠성 부서기 시절 투자설명회를 열기 위해 한국을 방문하는 등 총 세 차례 우리나라를 다녀갔다.

위정성은 상무위원 중에서 가장 많은 4차례 한국을 방문했다. 외자유치의 최일선에서 뛰던 이들은 한국 기업인들과 교류가 많았다. 한국과는 평소 스킨십을 유지해온 것으로 볼 수 있다. 지한파 내지 친한파로 분류되는 인사가 많다는 뜻이다. 이들은 한국전쟁에 대한 기억이 없는 세대다. 이전 지도부들과 달리 북한을 보다 이성적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셈이다. 한ㆍ중관계 개선은 물론 남북관계를 재설정하는 데 있어서 중국의 차기 지도부를 적극 활용할 수 있는 이유다.

⑤ 기술관료 축소 - 법학ㆍ경제학 등 인문학도가 주류

이공계 출신 기술관료가 득세하던 4세대 지도부와 달리 이번에는 법학과 경제학 전공자들이 대거 상무위원 반열에 올랐다. 시진핑은 법학박사, 리커창 부총리는 법학과를 졸업한 뒤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왕치산 부총리는 경제학 교수 출신이고, 장가오리 톈진시 당서기도 경제학을 전공했다. 인문관료가 늘어난 것은 중국의 변화된 시대상을 반영한 것이다. 지금까지 전문 분야 발전으로 중국의 경제 성장을 이뤄내는 데 성공했지만 고도성장 부작용으로 확대된 사회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보다 종합적인 식견이 필요하다는 판단이 감안된 것이다. 문일현 중국 정법대 교수는 "고구마 줄기 캐듯 나오는 사회적 모순을 기술관료가 풀기에는 한계가 있다"며 "고도의 경제ㆍ정치적 감각으로 국가를 경영하겠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5세대 새 지도부가 전면에 부상한 가운데 6세대 선두주자들도 그에 못지않은 주목을 받고 있다.

6세대를 보면 시진핑 시대가 저무는 2022년 이후 권력을 쥐게 될 `포스트 시진핑`의 밑그림을 그려볼 수 있기 때문이다.

6세대는 `리우링허우(60년대 이후 출생자)`로 불린다. 어린 시절 문화대혁명과 가난을 겪었지만 중학교를 다닐 즈음엔 사회ㆍ교육환경이 전 세대에 비해 월등히 좋아져 혜택을 본 사람들이다. 대표적인 6세대로는 `리틀 후진타오` 후춘화 네이멍구 자치구 당서기(1963년생), 최연소 농림부 장관을 지낸 쑨정차이 지린성 서기(1963년생) 등이 꼽힌다.

본래 후춘화의 성은 왕씨였다. 아버지 왕밍쥔은 큰딸이 일찍 죽자 슬퍼하는 아내를 위로하려고 7남매 중 넷째인 춘화의 성을 후로 바꿨다. 어머니 성을 따르게 한 것이다. 아버지의 결정이 오늘날 후춘화에게 리틀 후진타오로 불리는 전기를 마련해줬는지도 모를 일이다. 소수민족인 투자족의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중학교 때 6.5㎞를 매일 걸어 통학하면서 공부해 고향마을에서 최초로 베이징대에 입학하는 기염을 토했다. 베이징대에서 중문학을 전공한 그는 시짱 티베트족 자치구 근무를 자청해 20년이나 근무했다. 후춘화가 6세대 지도부의 핵심으로 급부상한 것은 티베트에서 후진타오를 만났기 때문이다. 후진타오가 시짱 자치구 당서기로 있을 때 후춘화는 그 밑에서 공청단 요직을 맡았고 1989년 티베트 폭동 진압 때도 후진타오를 거들면서 눈에 들었다. 후진타오가 다후(大胡), 후춘화가 샤오후(小胡)가 되는 순간이었다.

쑨정차이는 역대 최연소인 43세에 농림부장(장관)으로 발탁됐으며 원자바오 총리가 점찍어둔 총리감 1순위다. 그는 베이징 농림과학원에서 옥수수 대가로 불리는 천궈핑 교수 밑에서 석ㆍ박사 학위를 받으며 옥수수 전문가로 성장했다. 농림부장을 지낸 뒤 2009년에는 원자바오 총리의 배려로 지린성 서기로 승진했다. 워낙 정치적으로 잘 풀리다보니 `이름이 정차이(政才)라서 정치(政)에 재능(才)이 있다`는 말까지 나왔다. 쑨정차이는 베이징 현대차 공장이 있어 한국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순이구 구청장을 지내기도 했으며 현재는 옌볜 조선족 자치구를 관할하는 지린성 당서기를 지내고 있다. 최대 경쟁자인 후춘화에 비해 다소 지방행정 경험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2인 외에도 소수민족인 위구르족이 낳은 스타인 누얼바이커리 신장웨이우얼 자치구 주석, 가난한 농민의 자녀로 태어나 중국 최대석유기업인 시노펙의 회장이 된 쑤수린 푸젠성 성장, 중국 최대 항공우주 공기업인 중국항천과기그룹에서 우주개발 프로젝트를 이끈 장칭웨이 허베이성 성장, 중국판 실리콘밸리인 중관춘 조성에 기여한 루하오 공청당 중앙서기처 제1서기도 6세대 지도자다.
***시진핑 시대 세계 2위 중국 경제를 이끌 경제팀 진용도 대폭 개편된다.

후진타오 정부에서 경제정책을 총괄한 원자바오 총리의 역할은 리커창 부총리가 맡게 된다. 그는 동부 연안에 비해 상대적으로 낙후한 서부 개발을 비롯한 지역 균형발전에 관심이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리커창은 내년 3월 취임에 맞춰 주요 경제 포스트에 측근들을 대거 기용할 전망이다.

지난 10년간 중국 중앙은행인 인민은행을 이끌어온 저우샤오촨 행장도 곧 교체될 전망이다. 그는 지난 14일 확정된 공산당 중앙위원 명단에서 빠져 퇴진이 기정사실화된다. 각료급인 인민은행장이 되려면 중앙위원 명단에 들어야 하기 때문. 월스트리트저널은 15일 이같이 전하면서 저우 행장의 후임으로 세 사람이 거명된다고 전했다.

이번에 중앙위원에 진입한 궈수칭 증권감독위원회 주석과 러우지웨이 중국투자공사(CIC) 회장, 샤오강 중국은행 이사장이다. 개혁파인 궈 주석이 새로 인민은행장이 되면 시진핑 정부의 금융개혁이 가속화될 것이라는 전망을 낳고 있다. 러우지웨이 CIC 회장의 경우 유로존 채무위기 이후 유럽 국영기업에 대한 투자를 주도해 국내보다 서방에서 이름이 알려진 인물이다.

하지만 중국 인민은행은 미국이나 유럽 국가 중앙은행장에 비해 정부와 당에 대한 독립성이 떨어져 정책변화는 크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부장(우리나라 장관)급 경제관료들도 물갈이될 전망이다. 특히 원자바오 총리의 측근으로 분류되던 관료들이 이번에 대거 중앙위원에서 탈락해 내년 3월 새 경제팀이 꾸려질 전망이다. 탈락한 경제관료는 천더밍 상무부장과 셰쉬런 재정부장 등이다.

특히 천더밍은 한때 부총리로 승진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왔지만 결국 원자바오와 함께 퇴장할 운명에 처해졌다. 원자바오의 두터운 신임을 받으며 차기 발전개혁위원회 주임 후보로 꼽히던 주즈신 발개위 부주임도 중앙위원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후진타오와 원자바오가 지원한 왕양 광둥성 서기는 상무위원 진입에 실패했지만 경제 분야 중책을 맡아 리커창을 보좌할 것으로 전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