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시라이 사건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래 최대 정치 스캔들로 기록될 듯싶다. 한 남자의 정치적 야망에서 시작된 드라마가 소설보다 더 드라마틱한 요소를 너무나 많이 갖고 있기 때문이다. 심복의 배신, 아내의 영국인 사업가 독살, 아들의 방탕한 유학 생활, 올가을 10년 만의 지도부 교체를 앞두고 벌어지는 격렬한 권력 투쟁 등 각종 사건이 국내외적으로 난마(亂麻)처럼 얽히고설켜 있다. 두 달 넘게 지속되고 있는 보시라이 스캔들의 본질은 무엇인가. 그리고 향후 중국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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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전 포인트 1: 보시라이 사건, 왜 세계적 화제가 되나
스타 정치인 보, 갑작스러운 낙마에 주목
1971년 린뱌오 이후 최대 정치 스캔들
크게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보시라이 개인이 갖는 스타성 때문이다. 출신 성분이 좋아 일찍부터 주목을 받았다. 부총리를 역임한 아버지 보이보(薄一波)는 덩샤오핑(鄧小平) 시절 중국의 8대 원로 중 하나로 불렸다. 후광 효과가 컸다. 그 자신도 잘생긴 외모로 호감을 샀다. 또 다롄(大連) 시장→랴오닝(遼寧) 성장→상무부 부장→충칭시 당서기 등을 거치며 여러 ‘튀는’ 실적을 보여 국내외적으로 인정받는 유명 인사이기도 했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늘 관심의 대상이었다.
둘째는 권력 투쟁과 연계돼 있기 때문이다. 그는 올해 초까지만 해도 차세대 최고 집단지도부 진입이 확실시되던 인물이다. 그런 그의 갑작스러운 낙마이기에 중국 정가의 판도가 송두리째 뒤흔들리고 있다. 1971년 마오쩌둥(毛澤東)에 도전했던 린뱌오(林彪) 사건 이래 최대 정치 스캔들로 불릴 정도다. 올가을 예정된 18차 당 대회를 앞두고 세간의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특히 베일에 가려진 중국의 권력 암투가 이번엔 거의 실시간대로 세상에 알려지면서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셋째는 소설보다도 더 흥미진진한 소재가 많이 포함된 점이다. 보시라이의 심복으로 1m80cm의 거구를 자랑하는 중국의 조폭 퇴치 영웅이 여장을 하고 미국 총영사관에 들어가 망명 신청을 하는가 하면, 영국인 사업가가 의문의 독살을 당하고, 또 이 외국인과 보시라이 부인이 로맨틱한 관계였는지 등 웬만한 드라마 내용을 뺨치는 메가톤급 스토리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전형적인 태자당(太子黨·고위관료 자제 출신)인 보의 아들 보과과(薄瓜瓜)의 방탕한 유학 생활이 조미료로 들어가 있다.
관전 포인트 2: 사건의 본질은 무엇인가
태자당 대 공청단의 치열한 암투
덩샤오핑 같이 통제할 인물 없어
보시라이 사건의 막이 오른 건 2월 6일. 보의 측근인 왕리쥔(王立軍) 전 충칭시 공안국장이 청두(成都) 미국 총영사관에 노부인으로 변장을 하고 들어가 망명 신청을 하면서다. 왕은 왜 망명을 기도했을까. 배경엔 지난해 11월 충칭에서 발생한 영국인 사업가 닐 헤이우드의 사망사건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당초 헤이우드의 사인은 과음으로 알려졌고, 서둘러 화장됐다. 그러나 왕은 이 죽음이 자연사가 아닌 타살이며, 그 혐의자가 보시라이의 부인 구카이라이(谷開來)라는 점을 확신하게 됐고, 이를 보에게 보고했다가 오히려 생명을 위협받을 정도로 미움을 사게 됐다는 것이다. 이 같은 줄거리는 미국에 서버를 둔 보쉰(博訊)과 둬웨이(多維) 등 인터넷 매체가 먼저 보도했다.
놀라운 점은 중국 당국이 나중에 이 같은 보도의 일부 내용을 확인해 주는 발표를 한 것이다. 이어 헤이우드는 왜 살해됐는가, 금전 문제인가 아니면 보시라이 부인과의 치정 때문인가, 누가 독살을 지시했는가 등과 관련된 온갖 새로운 뉴스가 영국과 미국·홍콩 언론 등을 중심으로 거의 매일 쏟아져 나오고 있다. 헤이우드가 뒤를 봐주었던 보과과의 방탕한 유학 생활이 사진과 함께 까발려지고 있기도 하다.
현재 중국 당국은 보시라이 사건과 관련해 공식적으로 세 차례 언급했다. 첫째는 3월 14일 원자바오(溫家寶) 총리가 충칭시 간부들은 “반성해야 한다”며 보시라이를 비난한 것이다. 당시 원자바오는 문화대혁명의 잔재를 씻어내야 한다고 말했다. 보가 추진했던 문혁을 연상시키는 충칭 발전 모델을 부정한 것이다. 둘째는 이튿날 중국 당국이 보시라이를 충칭시 당서기에서 해임한다고 발표한 것이다. 셋째는 4월 10일이다. 이날 중국 당국은 보시라이의 엄중한 기율 위반에 대해 조사하기로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왕리쥔 사건은 정치사건, 헤이우드 사건은 형사사건으로 규정하면서 이 두 사건과 관련해 보시라이의 행위가 당 기율을 엄중하게 위반해 당과 국가에 큰 손해를 끼쳤다고 말했다. 아울러 그의 정치국원과 중앙위원 직무를 정지시킨다고 밝혔다. 또 헤이우드가 타살됐으며 구카이라이와 보시라이의 측근인 장샤오쥔(張曉軍) 등이 혐의가 있어 사법기관에 넘겨졌다고 말했다.
중국 당국의 발표에선 권력투쟁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이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건 너무 순진하다. 보다 본질적인 배경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보시라이 사건은 바로 올가을 당 대회를 통해 새롭게 탄생할 정치국 상무위원 자리를 둘러싼 격렬한 권력투쟁의 소산이라는 것이 대다수 차이나 워처의 분석이다. 정통한 소식통에 따르면 당 기율검사위원회는 헤이우드가 죽기 전부터 이미 보시라이와 왕리쥔에 대한 내사에 착수한 상태였다.
관전 포인트 3: 권력투쟁이 노리는 칼끝은
보시라이 정법위 서기 될 듯하자
후, 퇴임 후 정치보복 우려 선공
중국 정가는 현재 크게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이 이끄는 공청단(共靑團)과 장쩌민(江澤民) 전 국가주석 및 쩡칭훙(曾慶紅) 전 국가부주석이 미는 태자당이 양립하고 있다. 싸움은 중국에서 무소불위의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9명으로 구성되는 정치국 상무위원회를 둘러싼 것이다. 이 정치국 상무위원회에 누가 더 많이 자리를 확보하느냐, 또 누가 더 요직을 차지하느냐의 다툼인 것이다.
태자당인 보시라이가 공청단의 타깃이 된 건 그의 약점이 많았고, 특히 그가 요직 중 요직인 중앙정법위원회의 서기를 맡을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정법위 서기는 서열 9위로 정치국 상무위원 중 가장 낮다. 그러나 공안(公安·경찰)과 검찰·법원·국가안전부 등을 장악해 전시가 아닌 평시에 가장 강력한 힘을 갖는다. 이 가장 낮은 자리에 가장 힘이 센 자를 포진시키는 건 중국식 정치 셈법에 따른 결과다.
이 같은 자리에 보시라이가 발탁돼 시진핑(習近平) 국가부주석이 총서기에 오르면 그를 도와 부패 척결 등 강력한 사정작업을 벌일 것으로 관측돼 왔다. 태자당인 시진핑이 1인자 자리에 오르는 걸 공청단파가 받아들일 수 있었던 데는 시진핑이 정치 보복을 한 적이 없다는 점이 작용한 것으로 알려진다. 그러나 보시라이는 전혀 그렇지 않다. 충칭에서의 인정사정 없는 조폭 퇴치 과정이 말해주듯이 무서운 공안정국이 예상되고 있었다.
후진타오 입장에선 2002년 총서기에 오른 이래 줄곧 장쩌민의 견제를 받아왔다. 당 중앙군사위 주석 자리를 2004년에야 물려받았고, 경호실장에 해당하는 경위국장과 비서실장에 해당하는 중앙판공청 주임을 모두 장의 심복인 요우시구이(由喜貴)와 왕강(王剛)이 계속 맡아 집권 1기 5년 내내 장의 감시를 받아야 했다. 2007년 시작된 집권 2기에서도 당 감찰기구인 기율검사위원회와 정법위원회 서기 자리 둘을 모두 장쩌민 측근에게 넘겨줘 ‘절름발이 10년’을 보내고 있다는 말까지 들어야 했다.
이번에는 어떻게 해서든 정법위 자리를 차지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 퇴임 후가 편하다고 본 것이다. 이 부분에서 원자바오 총리와도 이해가 맞는다. 후진타오나 원자바오 모두 보시라이가 중앙정법위 서기에 오르면 그 가족들의 경제 활동과 관련해 안심할 수 없는 입장인 것이다. 권력투쟁의 칼끝은 바로 정법위 서기 자리를 겨냥하고 있었다.
관전 포인트 4: 보시라이 낙마시킨 비결은?
후, 당 기율검사위 내세워 보 조사
측근 꼬투리 잡히자 보 진영 내분
보시라이를 실각시키는 건 쉽지 않았다. 서열 9위로 현재 정법위원회 서기인 저우융캉(周永康)의 강력한 반발이 있었기 때문이다. 애초 왕리쥔이 청두의 미국 총영사관에 들어갔을 때 이 사실을 비밀리에 보시라이에게 알려준 인물로 저우융캉이 지목되고 있다. 후진타오 측이 파견한 인사가 왕의 신병을 확보하기 전에 먼저 손을 쓰라는 이야기에 다름 아니었다. 또 전인대 기간 보에게 자제를 권했던 인물도 저우로 알려진다. 저우는 마지막까지 보시라이를 자신의 후계자로 강력하게 밀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3월 19일 밤 저우를 포함한 정치국 상무위원 전원이 베이징의 모처에 모여 보시라이 문제를 토론했다. 이게 바로 일부 인터넷 언론이 베이징 내란설을 전하게 된 배경이다. 이처럼 저우의 강력한 지원을 받는 보시라이를 낙마시키기 위해 후진타오 측은 당 기율검사위 서기인 허궈창(賀國强)과 손을 잡은 것으로 알려진다. 원래 허궈창과 저우융캉 모두 장쩌민 및 쩡칭훙 계열의 사람이다. 쩡칭훙이 2007년 정치국 상무위원 자리에서 물러나는 조건으로 정치국 상무위원에 진입시킨 게 이 둘이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 몇 해 전부터 금이 가기 시작했다. 발단은 석유산업 분야의 모 고위 인사 처리 문제를 둘러싼 갈등으로 알려진다. 이어 충칭시 당서기가 된 보라시이가 저우융캉을 등에 업고 전 충칭시 사법국장인 원창(文强)을 부패 혐의를 빌미로 사형시키면서 허궈창과 저우융캉 두 사람의 관계가 극도로 악화됐다. 원창은 왕양(汪洋) 광둥(廣東)성 당서기가 충칭시 당서기로 있을 때 왕양을 보좌하기도 했지만, 왕양에 앞서 충칭시 당서기를 역임한 허궈창의 심복이었던 것이다.
허궈창의 기율검사위는 이미 오래전부터 보시라이 조사를 위해 그 주변 인물을 캐기 시작했다. 그런 기율검사위의 그물망에 헤이우드나 왕리쥔이 걸렸을 것이란 분석이 조심스럽게 나온다. 이들로부터 보시라이에게 불리한 사실을 하나 둘 챙기는 식이다. 구카이라이가 내부에 배신자가 있다는 말을 하게 된 배경이다. 헤이우드는 사망하기 전 친구에게 “내가 그 배신자로 의심받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가 피살된 건 금전이나 치정 문제가 아니라 보시라이 집안을 배신했다는 의심을 사게 된 결과일 수 있는 것이다. 왕리쥔 또한 마찬가지다. 과거 보와 왕의 밀접한 관계로 볼 때 구카이라이의 독살 혐의를 갖고 둘이 대립했을 가능성은 적다. 오히려 둘은 이 문제를 어떻게 원만하게 해결할 수 있을까를 상의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 때문에 왕리쥔 또한 기율검사위에 꼬투리를 잡혀 보를 배신하게 되고, 이게 들통이 나 보시라이의 보복을 받을 위험에 처하자 미국 총영사관으로 목숨을 건 망명 시도를 했을 가능성이 거론되고 있는 것이다.
관전 포인트 5: 권력 암투가 어떻게 실시간대로 알려졌나
왕리쥔 미 망명시도·헤이우드 독살
미·영 개입할 수밖에 없는 상황
마오쩌둥에게 도전했다 실패하고, 소련으로 도망가다 비행기 추락사고로 숨진 린뱌오 사건은 이듬해야 비로소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그 정도로 중국의 권력 암투는 베일에 싸여 있다. 한데 이번 보시라이 사건을 둘러싼 권력투쟁은 거의 실시간으로 알려지고 있다. 왜 그럴까. 크게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서방 측에서 이번 사건과 관련된 자료를 일부 확보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미국은 시인하고 있지 않지만 왕리쥔이 청두 미국 총영사관에 자료를 건넸을 가능성이 크다. 이 자료의 내용 일부가 매일 조금씩 서방 언론으로 흘러 들어가면서 계속 추문이 터지고 있는 것이다. 지난 3월 서울 핵안보정상회의 때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이 후진타오 주석과 만났다. 오바마는 “집에 별일 없냐”는 의미심장한 인사를 던졌다. 중화권 언론에선 이를 ‘집안이 편할 리 없지 않냐’는 비아냥으로 해석하고 있다.
둘째는 인터넷 언론의 활약이다. 보쉰 등 일부 인터넷 매체가 왕리쥔으로부터 자료를 제공받은 것으로 알려진다. 보쉰은 보시라이를 ‘최대 간신’이라 욕한 왕리쥔의 공개 서한을 처음 보도하기도 했다. 셋째는 이번 권력투쟁을 둘러싸고 각기 자기 편 언론을 내세워 대리전을 펼치고 있기 때문이다. 후진타오 측에선 인민일보와 신화사 등 당 중앙의 매체를 이용한다. 반면에 보시라이 지지 세력은 3월 31일 베이징일보에 ‘우리 당이 언제 최고 영도자를 총서기라 불렀나’는 제하의 글을 실었다. 총서기가 당의 영도적 직무를 수행할 뿐 당의 최고 영도기관이 아니라고 지적해 후진타오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과거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또 두 세력은 친분 관계가 있는 인터넷 매체에 소식을 흘리는 방식을 이용해 상대방 흠집내기에 나서고 있다. 문제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소문이 사실로 둔갑하는 경우가 많아 세상을 놀라게 하고 있는 것이다.
관전 포인트 6: 향후 중국 정가는 어떻게 재편될 것인가
후, 일단 자리싸움 유리한 고지 올라
장쩌민파 당하고만 있을지도 관심
먼저 보시라이의 개인적 운명을 보자. 그는 충칭시 당서기에서 해임된 데 이어 정치국원과 중앙위원 자리에서도 쫓겨났다. 그러나 아직은 ‘동지’로 불리고 있어 공산당원으로서의 당적은 유지하고 있는 상태다. 그러나 조사가 끝나 그에 대한 처벌이 확정되면 당적마저 박탈당할 것으로 보인다. 그의 정치적 운명은 끝났다. 정치국원에서 해임할 때는 후진타오 측에서 이미 과거 그를 후원했던 장쩌민과 시진핑의 동의를 구한 것으로 봐야 하기 때문이다. 장과 시 모두 보의 분명한 잘못을 보고도 끝까지 변호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현재 관심은 헤이우드 독살 혐의의 불똥이 그에게까지 튈 것인가 하는 점이다. 중화권 여러 매체는 보시라이가 헤이우드 외에도 여러 살인 혐의가 있다고 주장한다. 정치적 사형은 내려졌고 이젠 육체적 사형선고마저 나올 것이냐 하는 점이 관심인 것이다.
이번 사건의 본질인 권력투쟁의 결과는 어떻게 될 것인가. 현재 당 대회 연기설마저 나오고 있으나 이는 좀 더 두고 볼 일이다. 일단 자리 싸움에서 후진타오 세력이 유리한 고지를 차지할 것으로 보인다. 대신 시진핑의 총서기 자리는 변함이 없을 것이란 조건이 붙었을 것이다. 중국에 ‘구경거리는 뒤에 있다(好戱在後頭)’는 말이 있다. 앞으로 당 대회가 열리기 전까지 또 어떤 반전이 전개될지 모른다. 장쩌민 세력이 그냥 맞고만 있을까.
관전 포인트 7: 중국 사회가 받게 될 충격은 무엇인가
고위 관료 추문에 중국 인민들 싸늘
공산당 일당 체제에 도전 나올 수도
중국 공산당 이미지가 크게 먹칠됐다. 보시라이는 정치국원으로 13억 인구 중 서열 25위 안에 드는 거물이다. 그런 그와 그의 가족이 외국인 살해와 부패 등 심각한 범죄 혐의에 휩싸여 있다. 당의 이미지가 이만저만 손상된 게 아니다. 그러잖아도 시장경제 도입 이후 공산당의 정통성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고위 관료의 추문은 민심을 이반시키고 있다.
이 때문에 중국 당국이 보시라이의 죄상을 낱낱이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그럴수록 소문은 증폭되면서 집권당으로서의 공산당의 합법성에 의문을 제기하게끔 만들고 있다. 과거 문화대혁명이 끝난 뒤 마오쩌둥의 과오로 인해 공산당 이미지가 크게 추락했다. 이때 중국 공산당은 마오로 인해 야기된 민심 이반을 막기 위해 저우언라이(周恩來)를 신격화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이번 풍파 뒤 새로운 캠페인이 예상되는 이유다.
문제는 이번 사태로 드러난 지도부의 치부에 대해 가해지는 중국 인민의 싸늘한 시각이다. 현재와 같은 지도부 선출 방식이 옳은가, 권력의 부패 사슬을 끊기 위해선 민주제도 도입이 필요한 게 아닌가 등 중국 공산당 일당 체제에 대한 도전이 터져나올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인민들이 이번 사건을 통해 고위 관료의 재산 해외 밀반출, 태자당이라 불리는 자녀들의 방탕한 유학 생활 등을 알게 되면서 공산당 지도부에 갖는 환멸은 치명적인 독이 될 수 있다. 보시라이 사건은 현재 중국 사회가 안고 있는 갖가지 고질적인 병폐를 농축해 보여주는 한 단면이라 할 수 있겠다.
중국 공산당 정법위 서기
법원·검찰·공안 통제하는 권력의 핵심
공산당 중앙정법위의 멍젠주 부서기, 저우융캉 서기, 왕러취안 부서기(왼쪽부터).중국에서 법원·검찰·공안·정보 등 사법 계통은 공산당 정법위(政法委)가 관련 기관을 지도·협조하는 방식으로 통제한다. 중앙정법위 서기는 인사를 총괄하는 조직부장, 사정기관인 기율검사위 서기 등과 함께 중국 권력의 핵심이다. 정법위의 핵심 임무는 사회 안정이다. 1980년대 중반 당정을 분리하는 개혁으로 한때 철폐됐다가 89년 천안문 사건 이후 다시 부활했다. 형식적으로 정법위의 지위는 법원·검찰과 대등하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선 정법위 서기가 정치국 상무위원을 겸하기 때문에 우위에 선다.
정법위 서기는 종종 공안국장을 겸임했다. 법의 감독을 받아야 할 공안 부문이 사법 전반을 감독한 셈이다. 위젠룽(于建嶸) 중국사회과학원 교수는 “정법위가 안정 유지를 명목으로 직권을 확장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며 “정법위 서기가 공안국장을 겸임하면서 사법을 지휘하게 되면 억울한 사건, 허위조작 사건, 오심 사건을 피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사회 안정과 사법 독립 사이에서 평형을 이루는 것이 정법위 개혁의 본질이라는 말이다. 18대 당대회를 앞두고 정법위 개혁은 현재 아래로부터 시작되고 있다.
중국 정치의 차세대 스타로 불리며 승승장구하던 보시라이 전 충칭시 당서기(가운데) 가족의 단란했던 모습이다. 왼쪽이 부인 구카이라이, 오른쪽이 아들 보과과다.
중국의 정치는 ‘헤이샹(黑箱:블랙박스)조작’이라는 말을 듣는다. 무엇이든지 은밀하게 행해져서다. 보시라이 사건도 마찬가지다. 집권 당국이 정보를 공개하지 않아 여러 억측이 난무한다. ‘권력투쟁’의 시나리오는 여전히 인기 최고다. 그럼에도 꼭 그렇게만 볼 수 없다. 낙마한 보시라이의 혐의 내용이 너무 뚜렷하고, 깊으며, 많다. 낙마할 충분한 조건을 모두 갖췄다. 네 가지 키워드를 뽑았다. 전통적인 중국 정치가 보였던 특징이다. 그를 따라 중국 건국 뒤 최대 정치스캔들이라고 부르는 이번 사건의 맥락과 의미를 짚어 본다.
1. 천자 vs 제후
‘하늘은 높고 황제는 멀리 있다(天高皇帝遠)’는 중국말이 있다. 땅에서 한참 높이 있는 하늘, 영향력을 미치기 힘든 먼 곳의 황제를 일컫는 말이다. 바꿔 말하자면, 국가의 권력이 제대로 미치지 않는 먼 변두리를 말한다. 어떤 일을 하더라도 황제의 간섭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곳, 또는 그곳에서 자의적으로 권력을 행사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요즘 세계적으로 큰 주목을 받고 있는 중국의 권력 스캔들, 이른바 ‘보시라이(薄熙來) 사건’의 주인공 보시라이가 꼭 그 경우다. 그는 공산당 중앙이 있는 베이징(北京)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서남부 직할시 충칭(重慶)의 ‘권력 1인자’였다. 그래서 그에게 붙었던 별명의 하나가 ‘서남왕(西南王)’이다.
보시라이는 2007년 중국 서남쪽의 충칭시 당서기를 맡은 뒤 포퓰리즘 성격이 농후했던 ‘혁명 가요 다시 부르기’의 ‘창훙(唱紅)’과 조직폭력배 소탕을 의미하는 ‘다헤이(打黑)’를 주도했다. 서민을 위한다는 명분을 내걸었지만, 그 실질적인 내용은 과거 공산당의 급진 좌경화 노선이었던 문화대혁명(1966~1976년)의 이념성을 복원하자는 것이었다. 따라서 현재의 중국 공산당 지도부가 유지하는 ‘지속적인 개혁·개방’의 실용주의 노선에 정면으로 반기(反旗)를 든 셈이었다.
중국 공산당 중앙, 그중에서도 9명이 이끄는 정치국 상무위는 과거의 틀로 설명하자면 곧 현대 중국의 ‘황제’다. 보시라이는 그런 황제가 추진하는 노선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었고 급기야 9인 집단지도체제의 전격적인 결정으로 낙마했다. 그러나 보시라이의 ‘튀는’ 성격은 일찌감치 나타났다는 게 정설이다.
보시라이는 1992년부터 7년 동안 시장으로 재직했던 다롄(大連)에 ‘화표(華表)’라는 기둥을 세웠다. 지금의 베이징 자금성(紫禁城) 앞에서나 볼 수 있는 건축물의 하나다. 황제가 자신이 거주하는 황궁이나 죽어서 묻히는 황릉 앞에 세우는 일종의 상징이다. 그것도 자금성 앞의 화표가 9m 남짓인 데 비해, 다롄의 화표 높이는 19m가 넘는 크기였다.
이 화표에 대해 1999년 다롄을 방문한 당시 국가주석 장쩌민(江澤民)은 “중국 어느 도시에도 베이징을 제외하곤 화표를 세운 데는 없다”며 혀를 찼다고 한다. 자신의 측근이었던 공안국장 왕리쥔(王立軍)을 시켜 충칭을 방문한 중국 최고위 지도자를 감청한 사실, 나중에 중앙의 공안계통을 무시한 채 전격적으로 그를 해임한 사건 등은 모두 표적대에 올랐다.
제후가 황제의 권력을 탐하는 일은 참월(僭越)이라고 불렸다. 반역에 버금가는 죄였다. 지도부가 표방하는 ‘지속적인 개혁·개방’에 반기를 들었던 보시라이의 여러 행동에는 분명히 그런 요소가 들어 있었다는 게 중평이다.
2.사자후(獅子吼)
중국에서는 아주 무서운 안주인을 말할 때 ‘하동의 사자가 울부짖다(河東獅子吼)’란 말을 쓴다. 성격이 사납고 무서운 아내를 일컫는다. 권력자의 여인들이 대개 이런 모습으로 역사의 무대에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쑹메이링(宋美齡), 장칭(江靑)이 대표적이다. 쑹메이링은 1920~30년대 중국 대륙 권력자였던 장제스(蔣介石)의 부인, 장칭은 현대 중국을 건립한 마오쩌둥(毛澤東)의 부인이다.
‘중화민국의 영원한 퍼스트레이디’라는 별명의 쑹은 장제스 권력의 이면을 관리했다. 친정과 인척(姻戚)인 공씨(孔氏) 집안의 막대한 권력과 부를 축적하는 데 실질적인 주도자였다. 국민당이 공산당에 패배해 대만으로 쫓겨간 뒤인 1949년 이후에도 막대한 재산을 운용하며 대만 최고 권력자인 장제스의 정치활동을 뒷받침했다.
장칭은 노쇠한 마오쩌둥을 대신해 권력을 휘둘렀다. 1966년의 문화대혁명을 주도하며 중국 전역에 숱한 피바람을 뿌린 인물이다. 결국 복권한 덩샤오핑(鄧小平)에 의해 그녀가 주도했던 4인방이 꺾이면서 감옥에서 생을 마감했다.
보시라이의 아내 구카이라이(谷開來)의 행적도 마찬가지다. 해외 재산 관리를 맡았던 영국인 닐 헤이우드를 살해한 혐의, 남편의 권력을 활용해 각종 이권에 개입한 뒤 막대한 부당수입을 올린 혐의에 싸여 있다.
구카이라이의 ‘사자후’는 결국 큰 문제를 빚었다. 영국인 독살 혐의와 그를 둘러싼 잡음으로 보시라이의 최측근인 왕리쥔이 미국 영사관에 망명을 시도하면서 일이 꼬이기 시작해 결국 남편이 낙마했다. 현 총리 원자바오(溫家寶)의 부인 장페이리(張培莉), 차기 최고 지도자로 꼽히는 시진핑(習近平)의 부인 펑리위안(彭麗瑗)은 잘 알려진 권력자의 아내들이다. 이들이 ‘사자후’의 안주인인지, 아니면 현숙한 내조(賢內助) 스타일인지를 중국인들은 관심 있게 지켜보는 중이다.
3. 막료(幕僚)
동진(東晋·316~420년) 때 중국에서는 ‘장막 안의 손님’을 뜻하는 ‘입막지빈(入幕之賓)’이라는 성어가 탄생하면서 ‘막료’의 개념이 처음 선을 보였다. 그 뒤 줄곧 중앙이나 지방 고관들에게는 참모가 따라다니면서 그룹을 형성했다. 막부(幕府)란 단어도 그래서 생겼다. 이를테면 중국은 막료, 막부의 생산지다.
보시라이 사건에서 드러나는 특징 중 하나가 이 막료다. 미국 영사관에 망명을 신청한 왕리쥔은 보시라이가 다롄시 시장으로 재직할 때부터 측근으로 행세했던 막료 중의 막료다. 돈줄을 댔던 경제계의 대표적인 막료는 다롄에 근거지를 둔 스더(實德)그룹 회장 쉬밍(徐明)이다. 왕리쥔과 쉬밍 모두 당국으로부터 조사를 받고 있다. 군부에서도 혁명원로 후세인 태자당 그룹의 류위안(劉源·전 국가주석 류사오치의 아들)과 장하이양(張海陽·전 중앙군사위 부주석 장전의 아들)이 보시라이와 정치적 명맥을 함께했던 막료 그룹이다. 그러나 군부 내의 보시라이 인맥은 그가 낙마함과 동시에 중앙의 지도부에 충성 맹세를 하면서 등을 돌렸다. 보시라이 막료 그룹이라고 볼 수 있는 정·관·재계의 39명은 모두 당국의 조사를 받고 있다.
4.비단 바지(紈袴)
중국은 예부터 아무나 못 입는 비단 바지, 환고(紈袴) 차림의 아이들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봤다. 귀족의 자제들이라서 늘 말썽을 부리는 젊은이쯤으로 여겼던 것이다. 보시라이의 아들 보과과는 전형적인 고관의 말썽 많은 자녀, 즉 ‘비단 바지’였다.
미 하버드대에 유학하면서 파티광에 초호화 생활을 하며 일찌감치 매체의 관심을 끌었다. 12세 때 영국으로 건너가 한 해 학비가 4만5000달러에 이르는 고등학교를 다녔다. 영국 옥스퍼드 대학 재학 때는 학과시험에 낙제해 1년 정학 처분을 받기도 했는데, 영국 주재 중국대사 등이 특사단으로 학교를 다녀가기도 했다는 후문이다.
하버드 대학 재학 때 그는 ‘큰손’으로 통했다고 한다. 친구들과 함께 몰려간 술집 계산서는 그의 몫이었다는 얘기다. 2008년 베이징 여름올림픽 때는 비싼 입장권을 친구들에게 마구 뿌려 화제를 낳기도 했다.
‘비단 바지’의 현대판 계승자들이 중국 혁명원로, 또는 고관의 자제들을 일컫는 ‘태자당’이다. 그들이 모두 보과과처럼 ‘막 나가는’ 행동으로 주목을 받지는 않았으나, 각종 이권에 개입해 경제적 실력을 쌓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장쩌민 전 국가주석의 아들 장몐헝(江綿恒)은 중국 IT업계의 실력자로 성장했고, 리펑(李鵬) 전 총리의 자녀들은 중국 전력(電力)산업의 가장 큰 실력자로 컸다.
‘권력 투쟁’의 시각으로 이 사건을 보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보시라이가 저지른 과오는 매우 명백하다. 지도부가 추진하는 노선에 반기를 든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부정과 비리, 심지어는 외국인 독살 등의 씻을 수 없는 과오를 범했다. 중국 지도부가 신속하게 그의 낙마를 결정한 데 이어 정치국원과 중앙위원의 자격을 박탈한 이유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앞에서 소개한 대로 중국 공산당은 중앙과 지방의 전통적인 대립, 직위에 있지 않은 처와 인척 등의 발호와 부정 축재, 막료 시스템을 통해 쌓는 집단 비리, 자제들의 사치 등 부정적 현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다. 과거 봉건 왕조의 암울했던 현상들이 현대 공산당 집권의 중국에서 다시 버젓이 나타나고 있는 점에 중국인들은 큰 실망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보시라이 사건은 중국 공산당에 커다란 역풍을 불러들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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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전 포인트 1: 보시라이 사건, 왜 세계적 화제가 되나
스타 정치인 보, 갑작스러운 낙마에 주목
1971년 린뱌오 이후 최대 정치 스캔들
크게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보시라이 개인이 갖는 스타성 때문이다. 출신 성분이 좋아 일찍부터 주목을 받았다. 부총리를 역임한 아버지 보이보(薄一波)는 덩샤오핑(鄧小平) 시절 중국의 8대 원로 중 하나로 불렸다. 후광 효과가 컸다. 그 자신도 잘생긴 외모로 호감을 샀다. 또 다롄(大連) 시장→랴오닝(遼寧) 성장→상무부 부장→충칭시 당서기 등을 거치며 여러 ‘튀는’ 실적을 보여 국내외적으로 인정받는 유명 인사이기도 했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늘 관심의 대상이었다.
둘째는 권력 투쟁과 연계돼 있기 때문이다. 그는 올해 초까지만 해도 차세대 최고 집단지도부 진입이 확실시되던 인물이다. 그런 그의 갑작스러운 낙마이기에 중국 정가의 판도가 송두리째 뒤흔들리고 있다. 1971년 마오쩌둥(毛澤東)에 도전했던 린뱌오(林彪) 사건 이래 최대 정치 스캔들로 불릴 정도다. 올가을 예정된 18차 당 대회를 앞두고 세간의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특히 베일에 가려진 중국의 권력 암투가 이번엔 거의 실시간대로 세상에 알려지면서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셋째는 소설보다도 더 흥미진진한 소재가 많이 포함된 점이다. 보시라이의 심복으로 1m80cm의 거구를 자랑하는 중국의 조폭 퇴치 영웅이 여장을 하고 미국 총영사관에 들어가 망명 신청을 하는가 하면, 영국인 사업가가 의문의 독살을 당하고, 또 이 외국인과 보시라이 부인이 로맨틱한 관계였는지 등 웬만한 드라마 내용을 뺨치는 메가톤급 스토리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전형적인 태자당(太子黨·고위관료 자제 출신)인 보의 아들 보과과(薄瓜瓜)의 방탕한 유학 생활이 조미료로 들어가 있다.
관전 포인트 2: 사건의 본질은 무엇인가
태자당 대 공청단의 치열한 암투
덩샤오핑 같이 통제할 인물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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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점은 중국 당국이 나중에 이 같은 보도의 일부 내용을 확인해 주는 발표를 한 것이다. 이어 헤이우드는 왜 살해됐는가, 금전 문제인가 아니면 보시라이 부인과의 치정 때문인가, 누가 독살을 지시했는가 등과 관련된 온갖 새로운 뉴스가 영국과 미국·홍콩 언론 등을 중심으로 거의 매일 쏟아져 나오고 있다. 헤이우드가 뒤를 봐주었던 보과과의 방탕한 유학 생활이 사진과 함께 까발려지고 있기도 하다.
현재 중국 당국은 보시라이 사건과 관련해 공식적으로 세 차례 언급했다. 첫째는 3월 14일 원자바오(溫家寶) 총리가 충칭시 간부들은 “반성해야 한다”며 보시라이를 비난한 것이다. 당시 원자바오는 문화대혁명의 잔재를 씻어내야 한다고 말했다. 보가 추진했던 문혁을 연상시키는 충칭 발전 모델을 부정한 것이다. 둘째는 이튿날 중국 당국이 보시라이를 충칭시 당서기에서 해임한다고 발표한 것이다. 셋째는 4월 10일이다. 이날 중국 당국은 보시라이의 엄중한 기율 위반에 대해 조사하기로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왕리쥔 사건은 정치사건, 헤이우드 사건은 형사사건으로 규정하면서 이 두 사건과 관련해 보시라이의 행위가 당 기율을 엄중하게 위반해 당과 국가에 큰 손해를 끼쳤다고 말했다. 아울러 그의 정치국원과 중앙위원 직무를 정지시킨다고 밝혔다. 또 헤이우드가 타살됐으며 구카이라이와 보시라이의 측근인 장샤오쥔(張曉軍) 등이 혐의가 있어 사법기관에 넘겨졌다고 말했다.
중국 당국의 발표에선 권력투쟁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이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건 너무 순진하다. 보다 본질적인 배경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보시라이 사건은 바로 올가을 당 대회를 통해 새롭게 탄생할 정치국 상무위원 자리를 둘러싼 격렬한 권력투쟁의 소산이라는 것이 대다수 차이나 워처의 분석이다. 정통한 소식통에 따르면 당 기율검사위원회는 헤이우드가 죽기 전부터 이미 보시라이와 왕리쥔에 대한 내사에 착수한 상태였다.
관전 포인트 3: 권력투쟁이 노리는 칼끝은
보시라이 정법위 서기 될 듯하자
후, 퇴임 후 정치보복 우려 선공
중국 정가는 현재 크게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이 이끄는 공청단(共靑團)과 장쩌민(江澤民) 전 국가주석 및 쩡칭훙(曾慶紅) 전 국가부주석이 미는 태자당이 양립하고 있다. 싸움은 중국에서 무소불위의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9명으로 구성되는 정치국 상무위원회를 둘러싼 것이다. 이 정치국 상무위원회에 누가 더 많이 자리를 확보하느냐, 또 누가 더 요직을 차지하느냐의 다툼인 것이다.
태자당인 보시라이가 공청단의 타깃이 된 건 그의 약점이 많았고, 특히 그가 요직 중 요직인 중앙정법위원회의 서기를 맡을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정법위 서기는 서열 9위로 정치국 상무위원 중 가장 낮다. 그러나 공안(公安·경찰)과 검찰·법원·국가안전부 등을 장악해 전시가 아닌 평시에 가장 강력한 힘을 갖는다. 이 가장 낮은 자리에 가장 힘이 센 자를 포진시키는 건 중국식 정치 셈법에 따른 결과다.
이 같은 자리에 보시라이가 발탁돼 시진핑(習近平) 국가부주석이 총서기에 오르면 그를 도와 부패 척결 등 강력한 사정작업을 벌일 것으로 관측돼 왔다. 태자당인 시진핑이 1인자 자리에 오르는 걸 공청단파가 받아들일 수 있었던 데는 시진핑이 정치 보복을 한 적이 없다는 점이 작용한 것으로 알려진다. 그러나 보시라이는 전혀 그렇지 않다. 충칭에서의 인정사정 없는 조폭 퇴치 과정이 말해주듯이 무서운 공안정국이 예상되고 있었다.
후진타오 입장에선 2002년 총서기에 오른 이래 줄곧 장쩌민의 견제를 받아왔다. 당 중앙군사위 주석 자리를 2004년에야 물려받았고, 경호실장에 해당하는 경위국장과 비서실장에 해당하는 중앙판공청 주임을 모두 장의 심복인 요우시구이(由喜貴)와 왕강(王剛)이 계속 맡아 집권 1기 5년 내내 장의 감시를 받아야 했다. 2007년 시작된 집권 2기에서도 당 감찰기구인 기율검사위원회와 정법위원회 서기 자리 둘을 모두 장쩌민 측근에게 넘겨줘 ‘절름발이 10년’을 보내고 있다는 말까지 들어야 했다.
이번에는 어떻게 해서든 정법위 자리를 차지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 퇴임 후가 편하다고 본 것이다. 이 부분에서 원자바오 총리와도 이해가 맞는다. 후진타오나 원자바오 모두 보시라이가 중앙정법위 서기에 오르면 그 가족들의 경제 활동과 관련해 안심할 수 없는 입장인 것이다. 권력투쟁의 칼끝은 바로 정법위 서기 자리를 겨냥하고 있었다.
관전 포인트 4: 보시라이 낙마시킨 비결은?
후, 당 기율검사위 내세워 보 조사
측근 꼬투리 잡히자 보 진영 내분
보시라이를 실각시키는 건 쉽지 않았다. 서열 9위로 현재 정법위원회 서기인 저우융캉(周永康)의 강력한 반발이 있었기 때문이다. 애초 왕리쥔이 청두의 미국 총영사관에 들어갔을 때 이 사실을 비밀리에 보시라이에게 알려준 인물로 저우융캉이 지목되고 있다. 후진타오 측이 파견한 인사가 왕의 신병을 확보하기 전에 먼저 손을 쓰라는 이야기에 다름 아니었다. 또 전인대 기간 보에게 자제를 권했던 인물도 저우로 알려진다. 저우는 마지막까지 보시라이를 자신의 후계자로 강력하게 밀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3월 19일 밤 저우를 포함한 정치국 상무위원 전원이 베이징의 모처에 모여 보시라이 문제를 토론했다. 이게 바로 일부 인터넷 언론이 베이징 내란설을 전하게 된 배경이다. 이처럼 저우의 강력한 지원을 받는 보시라이를 낙마시키기 위해 후진타오 측은 당 기율검사위 서기인 허궈창(賀國强)과 손을 잡은 것으로 알려진다. 원래 허궈창과 저우융캉 모두 장쩌민 및 쩡칭훙 계열의 사람이다. 쩡칭훙이 2007년 정치국 상무위원 자리에서 물러나는 조건으로 정치국 상무위원에 진입시킨 게 이 둘이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 몇 해 전부터 금이 가기 시작했다. 발단은 석유산업 분야의 모 고위 인사 처리 문제를 둘러싼 갈등으로 알려진다. 이어 충칭시 당서기가 된 보라시이가 저우융캉을 등에 업고 전 충칭시 사법국장인 원창(文强)을 부패 혐의를 빌미로 사형시키면서 허궈창과 저우융캉 두 사람의 관계가 극도로 악화됐다. 원창은 왕양(汪洋) 광둥(廣東)성 당서기가 충칭시 당서기로 있을 때 왕양을 보좌하기도 했지만, 왕양에 앞서 충칭시 당서기를 역임한 허궈창의 심복이었던 것이다.
허궈창의 기율검사위는 이미 오래전부터 보시라이 조사를 위해 그 주변 인물을 캐기 시작했다. 그런 기율검사위의 그물망에 헤이우드나 왕리쥔이 걸렸을 것이란 분석이 조심스럽게 나온다. 이들로부터 보시라이에게 불리한 사실을 하나 둘 챙기는 식이다. 구카이라이가 내부에 배신자가 있다는 말을 하게 된 배경이다. 헤이우드는 사망하기 전 친구에게 “내가 그 배신자로 의심받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가 피살된 건 금전이나 치정 문제가 아니라 보시라이 집안을 배신했다는 의심을 사게 된 결과일 수 있는 것이다. 왕리쥔 또한 마찬가지다. 과거 보와 왕의 밀접한 관계로 볼 때 구카이라이의 독살 혐의를 갖고 둘이 대립했을 가능성은 적다. 오히려 둘은 이 문제를 어떻게 원만하게 해결할 수 있을까를 상의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 때문에 왕리쥔 또한 기율검사위에 꼬투리를 잡혀 보를 배신하게 되고, 이게 들통이 나 보시라이의 보복을 받을 위험에 처하자 미국 총영사관으로 목숨을 건 망명 시도를 했을 가능성이 거론되고 있는 것이다.
관전 포인트 5: 권력 암투가 어떻게 실시간대로 알려졌나
왕리쥔 미 망명시도·헤이우드 독살
미·영 개입할 수밖에 없는 상황
마오쩌둥에게 도전했다 실패하고, 소련으로 도망가다 비행기 추락사고로 숨진 린뱌오 사건은 이듬해야 비로소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그 정도로 중국의 권력 암투는 베일에 싸여 있다. 한데 이번 보시라이 사건을 둘러싼 권력투쟁은 거의 실시간으로 알려지고 있다. 왜 그럴까. 크게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서방 측에서 이번 사건과 관련된 자료를 일부 확보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미국은 시인하고 있지 않지만 왕리쥔이 청두 미국 총영사관에 자료를 건넸을 가능성이 크다. 이 자료의 내용 일부가 매일 조금씩 서방 언론으로 흘러 들어가면서 계속 추문이 터지고 있는 것이다. 지난 3월 서울 핵안보정상회의 때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이 후진타오 주석과 만났다. 오바마는 “집에 별일 없냐”는 의미심장한 인사를 던졌다. 중화권 언론에선 이를 ‘집안이 편할 리 없지 않냐’는 비아냥으로 해석하고 있다.
둘째는 인터넷 언론의 활약이다. 보쉰 등 일부 인터넷 매체가 왕리쥔으로부터 자료를 제공받은 것으로 알려진다. 보쉰은 보시라이를 ‘최대 간신’이라 욕한 왕리쥔의 공개 서한을 처음 보도하기도 했다. 셋째는 이번 권력투쟁을 둘러싸고 각기 자기 편 언론을 내세워 대리전을 펼치고 있기 때문이다. 후진타오 측에선 인민일보와 신화사 등 당 중앙의 매체를 이용한다. 반면에 보시라이 지지 세력은 3월 31일 베이징일보에 ‘우리 당이 언제 최고 영도자를 총서기라 불렀나’는 제하의 글을 실었다. 총서기가 당의 영도적 직무를 수행할 뿐 당의 최고 영도기관이 아니라고 지적해 후진타오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과거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또 두 세력은 친분 관계가 있는 인터넷 매체에 소식을 흘리는 방식을 이용해 상대방 흠집내기에 나서고 있다. 문제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소문이 사실로 둔갑하는 경우가 많아 세상을 놀라게 하고 있는 것이다.
관전 포인트 6: 향후 중국 정가는 어떻게 재편될 것인가
후, 일단 자리싸움 유리한 고지 올라
장쩌민파 당하고만 있을지도 관심
먼저 보시라이의 개인적 운명을 보자. 그는 충칭시 당서기에서 해임된 데 이어 정치국원과 중앙위원 자리에서도 쫓겨났다. 그러나 아직은 ‘동지’로 불리고 있어 공산당원으로서의 당적은 유지하고 있는 상태다. 그러나 조사가 끝나 그에 대한 처벌이 확정되면 당적마저 박탈당할 것으로 보인다. 그의 정치적 운명은 끝났다. 정치국원에서 해임할 때는 후진타오 측에서 이미 과거 그를 후원했던 장쩌민과 시진핑의 동의를 구한 것으로 봐야 하기 때문이다. 장과 시 모두 보의 분명한 잘못을 보고도 끝까지 변호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현재 관심은 헤이우드 독살 혐의의 불똥이 그에게까지 튈 것인가 하는 점이다. 중화권 여러 매체는 보시라이가 헤이우드 외에도 여러 살인 혐의가 있다고 주장한다. 정치적 사형은 내려졌고 이젠 육체적 사형선고마저 나올 것이냐 하는 점이 관심인 것이다.
이번 사건의 본질인 권력투쟁의 결과는 어떻게 될 것인가. 현재 당 대회 연기설마저 나오고 있으나 이는 좀 더 두고 볼 일이다. 일단 자리 싸움에서 후진타오 세력이 유리한 고지를 차지할 것으로 보인다. 대신 시진핑의 총서기 자리는 변함이 없을 것이란 조건이 붙었을 것이다. 중국에 ‘구경거리는 뒤에 있다(好戱在後頭)’는 말이 있다. 앞으로 당 대회가 열리기 전까지 또 어떤 반전이 전개될지 모른다. 장쩌민 세력이 그냥 맞고만 있을까.
관전 포인트 7: 중국 사회가 받게 될 충격은 무엇인가
고위 관료 추문에 중국 인민들 싸늘
공산당 일당 체제에 도전 나올 수도
중국 공산당 이미지가 크게 먹칠됐다. 보시라이는 정치국원으로 13억 인구 중 서열 25위 안에 드는 거물이다. 그런 그와 그의 가족이 외국인 살해와 부패 등 심각한 범죄 혐의에 휩싸여 있다. 당의 이미지가 이만저만 손상된 게 아니다. 그러잖아도 시장경제 도입 이후 공산당의 정통성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고위 관료의 추문은 민심을 이반시키고 있다.
이 때문에 중국 당국이 보시라이의 죄상을 낱낱이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그럴수록 소문은 증폭되면서 집권당으로서의 공산당의 합법성에 의문을 제기하게끔 만들고 있다. 과거 문화대혁명이 끝난 뒤 마오쩌둥의 과오로 인해 공산당 이미지가 크게 추락했다. 이때 중국 공산당은 마오로 인해 야기된 민심 이반을 막기 위해 저우언라이(周恩來)를 신격화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이번 풍파 뒤 새로운 캠페인이 예상되는 이유다.
문제는 이번 사태로 드러난 지도부의 치부에 대해 가해지는 중국 인민의 싸늘한 시각이다. 현재와 같은 지도부 선출 방식이 옳은가, 권력의 부패 사슬을 끊기 위해선 민주제도 도입이 필요한 게 아닌가 등 중국 공산당 일당 체제에 대한 도전이 터져나올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인민들이 이번 사건을 통해 고위 관료의 재산 해외 밀반출, 태자당이라 불리는 자녀들의 방탕한 유학 생활 등을 알게 되면서 공산당 지도부에 갖는 환멸은 치명적인 독이 될 수 있다. 보시라이 사건은 현재 중국 사회가 안고 있는 갖가지 고질적인 병폐를 농축해 보여주는 한 단면이라 할 수 있겠다.
중국 공산당 정법위 서기
법원·검찰·공안 통제하는 권력의 핵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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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후·사자후·막료·비단바지 … 왕조정치 구태 그대로
보시라이 사건을 통해 본 중국 정치 4대 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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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정치는 ‘헤이샹(黑箱:블랙박스)조작’이라는 말을 듣는다. 무엇이든지 은밀하게 행해져서다. 보시라이 사건도 마찬가지다. 집권 당국이 정보를 공개하지 않아 여러 억측이 난무한다. ‘권력투쟁’의 시나리오는 여전히 인기 최고다. 그럼에도 꼭 그렇게만 볼 수 없다. 낙마한 보시라이의 혐의 내용이 너무 뚜렷하고, 깊으며, 많다. 낙마할 충분한 조건을 모두 갖췄다. 네 가지 키워드를 뽑았다. 전통적인 중국 정치가 보였던 특징이다. 그를 따라 중국 건국 뒤 최대 정치스캔들이라고 부르는 이번 사건의 맥락과 의미를 짚어 본다.
1. 천자 vs 제후
‘하늘은 높고 황제는 멀리 있다(天高皇帝遠)’는 중국말이 있다. 땅에서 한참 높이 있는 하늘, 영향력을 미치기 힘든 먼 곳의 황제를 일컫는 말이다. 바꿔 말하자면, 국가의 권력이 제대로 미치지 않는 먼 변두리를 말한다. 어떤 일을 하더라도 황제의 간섭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곳, 또는 그곳에서 자의적으로 권력을 행사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요즘 세계적으로 큰 주목을 받고 있는 중국의 권력 스캔들, 이른바 ‘보시라이(薄熙來) 사건’의 주인공 보시라이가 꼭 그 경우다. 그는 공산당 중앙이 있는 베이징(北京)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서남부 직할시 충칭(重慶)의 ‘권력 1인자’였다. 그래서 그에게 붙었던 별명의 하나가 ‘서남왕(西南王)’이다.
과거 봉건 왕조 시절의 권력 최고 정점은 황제였다. 그 황제의 권력에 대항하는 사람은 반역의 죄로 다스렸다. 그러나 중국의 땅은 넓고 크다. 그 권력이 제대로 미치지 않는 변두리에 머물고 있던 지방의 권력자 제후(諸侯)는 따라서 늘 경계의 대상이었다. 보시라이에게 ‘왕(王)’이라는 별명이 붙은 이유는 그가 서남의 변방에 자리 잡고 황제를 위협하는 제후 식의 행동을 벌였기 때문이다.
보시라이는 2007년 중국 서남쪽의 충칭시 당서기를 맡은 뒤 포퓰리즘 성격이 농후했던 ‘혁명 가요 다시 부르기’의 ‘창훙(唱紅)’과 조직폭력배 소탕을 의미하는 ‘다헤이(打黑)’를 주도했다. 서민을 위한다는 명분을 내걸었지만, 그 실질적인 내용은 과거 공산당의 급진 좌경화 노선이었던 문화대혁명(1966~1976년)의 이념성을 복원하자는 것이었다. 따라서 현재의 중국 공산당 지도부가 유지하는 ‘지속적인 개혁·개방’의 실용주의 노선에 정면으로 반기(反旗)를 든 셈이었다.
중국 공산당 중앙, 그중에서도 9명이 이끄는 정치국 상무위는 과거의 틀로 설명하자면 곧 현대 중국의 ‘황제’다. 보시라이는 그런 황제가 추진하는 노선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었고 급기야 9인 집단지도체제의 전격적인 결정으로 낙마했다. 그러나 보시라이의 ‘튀는’ 성격은 일찌감치 나타났다는 게 정설이다.
보시라이는 1992년부터 7년 동안 시장으로 재직했던 다롄(大連)에 ‘화표(華表)’라는 기둥을 세웠다. 지금의 베이징 자금성(紫禁城) 앞에서나 볼 수 있는 건축물의 하나다. 황제가 자신이 거주하는 황궁이나 죽어서 묻히는 황릉 앞에 세우는 일종의 상징이다. 그것도 자금성 앞의 화표가 9m 남짓인 데 비해, 다롄의 화표 높이는 19m가 넘는 크기였다.
이 화표에 대해 1999년 다롄을 방문한 당시 국가주석 장쩌민(江澤民)은 “중국 어느 도시에도 베이징을 제외하곤 화표를 세운 데는 없다”며 혀를 찼다고 한다. 자신의 측근이었던 공안국장 왕리쥔(王立軍)을 시켜 충칭을 방문한 중국 최고위 지도자를 감청한 사실, 나중에 중앙의 공안계통을 무시한 채 전격적으로 그를 해임한 사건 등은 모두 표적대에 올랐다.
제후가 황제의 권력을 탐하는 일은 참월(僭越)이라고 불렸다. 반역에 버금가는 죄였다. 지도부가 표방하는 ‘지속적인 개혁·개방’에 반기를 들었던 보시라이의 여러 행동에는 분명히 그런 요소가 들어 있었다는 게 중평이다.
2.사자후(獅子吼)
중국에서는 아주 무서운 안주인을 말할 때 ‘하동의 사자가 울부짖다(河東獅子吼)’란 말을 쓴다. 성격이 사납고 무서운 아내를 일컫는다. 권력자의 여인들이 대개 이런 모습으로 역사의 무대에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쑹메이링(宋美齡), 장칭(江靑)이 대표적이다. 쑹메이링은 1920~30년대 중국 대륙 권력자였던 장제스(蔣介石)의 부인, 장칭은 현대 중국을 건립한 마오쩌둥(毛澤東)의 부인이다.
‘중화민국의 영원한 퍼스트레이디’라는 별명의 쑹은 장제스 권력의 이면을 관리했다. 친정과 인척(姻戚)인 공씨(孔氏) 집안의 막대한 권력과 부를 축적하는 데 실질적인 주도자였다. 국민당이 공산당에 패배해 대만으로 쫓겨간 뒤인 1949년 이후에도 막대한 재산을 운용하며 대만 최고 권력자인 장제스의 정치활동을 뒷받침했다.
장칭은 노쇠한 마오쩌둥을 대신해 권력을 휘둘렀다. 1966년의 문화대혁명을 주도하며 중국 전역에 숱한 피바람을 뿌린 인물이다. 결국 복권한 덩샤오핑(鄧小平)에 의해 그녀가 주도했던 4인방이 꺾이면서 감옥에서 생을 마감했다.
보시라이의 아내 구카이라이(谷開來)의 행적도 마찬가지다. 해외 재산 관리를 맡았던 영국인 닐 헤이우드를 살해한 혐의, 남편의 권력을 활용해 각종 이권에 개입한 뒤 막대한 부당수입을 올린 혐의에 싸여 있다.
구카이라이의 ‘사자후’는 결국 큰 문제를 빚었다. 영국인 독살 혐의와 그를 둘러싼 잡음으로 보시라이의 최측근인 왕리쥔이 미국 영사관에 망명을 시도하면서 일이 꼬이기 시작해 결국 남편이 낙마했다. 현 총리 원자바오(溫家寶)의 부인 장페이리(張培莉), 차기 최고 지도자로 꼽히는 시진핑(習近平)의 부인 펑리위안(彭麗瑗)은 잘 알려진 권력자의 아내들이다. 이들이 ‘사자후’의 안주인인지, 아니면 현숙한 내조(賢內助) 스타일인지를 중국인들은 관심 있게 지켜보는 중이다.
3. 막료(幕僚)
동진(東晋·316~420년) 때 중국에서는 ‘장막 안의 손님’을 뜻하는 ‘입막지빈(入幕之賓)’이라는 성어가 탄생하면서 ‘막료’의 개념이 처음 선을 보였다. 그 뒤 줄곧 중앙이나 지방 고관들에게는 참모가 따라다니면서 그룹을 형성했다. 막부(幕府)란 단어도 그래서 생겼다. 이를테면 중국은 막료, 막부의 생산지다.
보시라이 사건에서 드러나는 특징 중 하나가 이 막료다. 미국 영사관에 망명을 신청한 왕리쥔은 보시라이가 다롄시 시장으로 재직할 때부터 측근으로 행세했던 막료 중의 막료다. 돈줄을 댔던 경제계의 대표적인 막료는 다롄에 근거지를 둔 스더(實德)그룹 회장 쉬밍(徐明)이다. 왕리쥔과 쉬밍 모두 당국으로부터 조사를 받고 있다. 군부에서도 혁명원로 후세인 태자당 그룹의 류위안(劉源·전 국가주석 류사오치의 아들)과 장하이양(張海陽·전 중앙군사위 부주석 장전의 아들)이 보시라이와 정치적 명맥을 함께했던 막료 그룹이다. 그러나 군부 내의 보시라이 인맥은 그가 낙마함과 동시에 중앙의 지도부에 충성 맹세를 하면서 등을 돌렸다. 보시라이 막료 그룹이라고 볼 수 있는 정·관·재계의 39명은 모두 당국의 조사를 받고 있다.
4.비단 바지(紈袴)
중국은 예부터 아무나 못 입는 비단 바지, 환고(紈袴) 차림의 아이들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봤다. 귀족의 자제들이라서 늘 말썽을 부리는 젊은이쯤으로 여겼던 것이다. 보시라이의 아들 보과과는 전형적인 고관의 말썽 많은 자녀, 즉 ‘비단 바지’였다.
미 하버드대에 유학하면서 파티광에 초호화 생활을 하며 일찌감치 매체의 관심을 끌었다. 12세 때 영국으로 건너가 한 해 학비가 4만5000달러에 이르는 고등학교를 다녔다. 영국 옥스퍼드 대학 재학 때는 학과시험에 낙제해 1년 정학 처분을 받기도 했는데, 영국 주재 중국대사 등이 특사단으로 학교를 다녀가기도 했다는 후문이다.
하버드 대학 재학 때 그는 ‘큰손’으로 통했다고 한다. 친구들과 함께 몰려간 술집 계산서는 그의 몫이었다는 얘기다. 2008년 베이징 여름올림픽 때는 비싼 입장권을 친구들에게 마구 뿌려 화제를 낳기도 했다.
‘비단 바지’의 현대판 계승자들이 중국 혁명원로, 또는 고관의 자제들을 일컫는 ‘태자당’이다. 그들이 모두 보과과처럼 ‘막 나가는’ 행동으로 주목을 받지는 않았으나, 각종 이권에 개입해 경제적 실력을 쌓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장쩌민 전 국가주석의 아들 장몐헝(江綿恒)은 중국 IT업계의 실력자로 성장했고, 리펑(李鵬) 전 총리의 자녀들은 중국 전력(電力)산업의 가장 큰 실력자로 컸다.
‘권력 투쟁’의 시각으로 이 사건을 보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보시라이가 저지른 과오는 매우 명백하다. 지도부가 추진하는 노선에 반기를 든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부정과 비리, 심지어는 외국인 독살 등의 씻을 수 없는 과오를 범했다. 중국 지도부가 신속하게 그의 낙마를 결정한 데 이어 정치국원과 중앙위원의 자격을 박탈한 이유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앞에서 소개한 대로 중국 공산당은 중앙과 지방의 전통적인 대립, 직위에 있지 않은 처와 인척 등의 발호와 부정 축재, 막료 시스템을 통해 쌓는 집단 비리, 자제들의 사치 등 부정적 현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다. 과거 봉건 왕조의 암울했던 현상들이 현대 공산당 집권의 중국에서 다시 버젓이 나타나고 있는 점에 중국인들은 큰 실망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보시라이 사건은 중국 공산당에 커다란 역풍을 불러들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