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정 의혹도 첩첩산중
●'인증샷'이 없어서 - 1984년 안나푸르나 간 김영자 카메라 가진 셰르파가 추락사
●그 산이 아니었다 - 1988년 브로드피크 원정대 알고보니 다른 봉우리 올라
●다시 오르면 되지 - 로체 등정 의혹 시달린 박영석 4년 뒤 보란듯이 재등정 성공
대한산악연맹(회장 이인정)이 26일 오은선(44)씨의 히말라야 8000m급 14좌 완등을 부정하는 입장을 밝혔다. 연맹은 이날 오은선씨의 지난해 5월 칸첸중가(8586m) 등정 의혹과 관련된 회의를 열고 "자료를 심도 있게 검토한 결과 정상에 올랐다고 보기 어렵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밝혔다. 8월 27일 본지한국이 처음으로 히말라야 원정에 나선 것은 1962년 다울라기리2봉(7751m) 원정이었다. 이후 수많은 등정이 시도되면서 원정 의혹 시비도 점점 늘어났다. 이번이 처음은 아니라는 얘기다.
한국 최초로 등정 의혹을 받은 건, 1970년 추렌히말(7371m·최고봉 동봉)에 도전한 한국산악회 원정대였다. 이들은 4월 28일 최정상인 동봉 세계 첫 등정을 발표했으나 6개월 뒤 같은 산을 등반한 일본 산악인들이 '그렇게 험한 길로는 갈 수 없다'며 한국 팀의 등정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다. 그러나 이 의혹은 1988년 중동(고교)산악회 원정대가 풀어줬다. 중동산악회는 정상을 등정하고 나서, 한국산악회가 오른 봉이 동봉 아래 무명봉일 가능성이 크다고 결론을 내렸다.
1984년 안나푸르나(8091m)에서는 세계 산악계를 놀라게 한 등반이 이뤄졌다. 은벽산악회 원정대 김영자(여·당시 31세) 대원의 여성 최초, 겨울철 최초의 등반이었다. 그러나 김 대원은 하산길에 동행한 셰르파 4명 중 2명이 추락사하면서 그들의 배낭 속에 있던 카메라를 회수하지 못해 등정 사진을 내놓지 못했다. 이후 명확한 해명이나 항의 없이 시간을 넘겨 국제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게 됐고, 3년 뒤인 1987년 2월 2일 폴란드팀의 예지 쿠쿠츠카가 정상에 올라 동계 첫 등정으로 공식기록됐다.
등정 대원의 폭로로 진실이 밝혀진 등반도 있었다. 1990년 봄 대구경북산악연맹팀의 초오유(8201m) 원정 당시 대원 두 명은 등정을 발표했으나 5년 뒤인 1995년 말 대원 중 한 명이 진실을 털어놓았다. 등정자들이 짙은 안갯속에서 오른 곳은 정상에서 약 1시간 못 미친 무명봉이었다.
1989년 한국 에베레스트 서릉 원정대의 성공은 여러 기록을 깨는 등반이었다. 이들은 에베레스트에서도 험하기로 이름난 서릉(西稜) 루트를 통해, 10월 23일 오후 2시 30분 정상을 밟고 다시 서릉을 따라 하산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그러나 그들의 사진은 눈에 익은 에베레스트 정상이 아니었고, 루트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못해 지금까지도 등정 의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1991년 한국-홍콩 합동 낭가파르바트 원정도 당시 대장이 고소적응을 제대로 못한 상태에서 2차 공격에 나선 점, 굳이 야간등반을 택해 확실한 정상 사진을 만들지 않았다는 점 등의 이유로 의혹이 제기됐다.
2007년 에베레스트 실버원정에서도 등정시비가 일어났다. 당시 원정대는 대원 두 명이 정상을 밟았다고 발표했으나 그 1년 후 뒤, 대원 중 하나가 정상에서 한참 못 미친 지점에서 되돌아선 것으로 확인됐다.
유명 산악인들도 등정의혹에 휩싸이기는 마찬가지였다. 한국 최초로 8000m급 14개 거봉 완등자인 엄홍길은 1993년과 1994년 시샤팡마 주봉(8027m)과 중앙봉(8008m)을 올랐다고 발표했으나 두 차례 모두 중앙봉 등정으로만 인정됐다. 엄홍길은 2000년 봄, K2 원정을 앞두고 동반한 대원의 증언을 통해 앞선 등정 의혹을 풀려고 했으나 해외의 히말라야 관련 웹사이트에는 2001년 가을 재등정한 시샤팡마 등정을 정식으로 기록하고 있다.
박영석도 로체(8516m)를 1997년과 2001년 두 차례 등반했다. 첫 번째 등반 당시, 네팔의 영웅 대접을 받는 가지 셰르파는 정상에서 무전기를 통해 네팔 국영라디오방송과 인터뷰를 하면서 등정을 발표했다. 가지는 "박영석도 함께 올라왔다" 했다. 그러나 당시 발가락 동상에 걸렸던 박영석은 약 50m 아래 지점에 있었고, 무전기를 통해 그 얘기를 듣고 그대로 하산했다. 이후 의혹에 시달린 박영석은 사실을 시인하고 2001년 봄 재등반에 나서 정상에 올라섰다.
등정 의혹이 극적으로 해소된 경우도 있다. 세계 두 번째로 14좌 완등에 성공한 폴란드의 예지 쿠쿠츠카는 마칼루 등정에 성공했으나 어떤 증거물도 내놓지 못해 의혹을 받았다. 이걸 풀어준 게 한국 산악인 허영호였다. 허영호는 1982년 마칼루 정상에 올라 눈이 녹으면서 모습을 드러낸 무당벌레 인형을 들고 하산했다. 그 인형은 쿠쿠츠카가 정상에 묻어두었던 증거물이었다.
등정을 주장하다 끝내 산악계를 떠나고 만 사람도 있다. 세계적인 등반가인 슬로베니아의 토모 체센은 히말라야에서 가장 험난한 거벽으로 꼽히는 로체 남벽 세계 초등을 발표했다가 각종 의혹을 받았고, 이에 대응하지 못했다. 이후 토모 체센은 히말라야 등반에서 모습을 감췄다.
히말라야 고봉 등정이 특히 시비에 휘말리는 것은 등반 루트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얻지 못한 채 등반에 나서거나, 셰르파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여기에 셰르파들의 거짓말, 후원사에 대한 부담이 거짓을 부르기도 한다. 성공만을 중시하는 사회적 분위기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외국 산악계는 우리와 달리 일단 '등정 의혹'이란 딱지가 붙으면 결정적인 증거를 제시하기 전에는 딱지를 떼어주지 않는다. 국내에서 '국내 최초의 14좌 완등자'로 알려진 엄홍길씨의 경우, 외국 유명 히말라야 등반 웹사이트에는 대부분 엄씨(세계 9번째)보다 박영석(8번째)씨가 먼저인 것으로 기록됐다. 오은선이 분명한 증거를 제시하지 않는 한, '최초의 14좌 여성 등정자'는 스페인의 에두르네 파사반이으로 굳어질 가능성이 그래서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