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야흐로 ‘숲길’ 혹은 ‘걷기’ 대유행의 시절이 왔다. 제주도 올레길과 지리산 둘레길의 치솟는 인기와 더불어 전국 곳곳에 숲길·산길·옛길·강길 등이 되살아나고, 이 열기와 더불어 ‘걷기 여행’ 관련 단행본들도 봇물처럼 쏟아지고 있다. ‘걷기중독(워킹홀릭)’이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물론 백번 천번 지당하고도 바람직한 일이다. 지난 시절의 먹고 퍼마시며 자연 속에서 인간 스스로 분리되던 관광의 행태가 잦아들고, 자연과 인간이 한몸이 되려는 성찰의 여행으로 그 패턴이 바뀌고 있다. 21세기의 새로운 패러다임인 ‘생명 평화’의 사상이 걷기로부터 전파되는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바람이 일시적인 ‘냄비 근성’을 새삼 떠올리게 하거나 오로지 육체적 건강만을 위한 ‘자연의 또 다른 이용’으로 전락할지도 모른다는 우려 또한 지울 수 없다.
- ▲ 지리산의 가을이 익어가면서 저녁 노을과 풀씨가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다.
‘느림의 미학’의 핵심은 가벼운 산책에서부터 도보 순례라는 말 사이에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존재한다. 산업혁명 이후 자연과 인간의 대립과 투쟁으로 성취한 경제적 성과들의 후폭풍이 결국 지구의 위기를 불러오고, 이 위기의 경계경보에 대한 일단의 반응들이 지금의 열기를 북돋우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성찰과 반성보다 그 과정이 너무 빠르다는 데 있다. 전국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는 다양한 숲길 등이 막대한 예산을 들여 또 다른 ‘개발’의 표정을 짓는가 하면 그 이용자들 또한 ‘민원’을 야기할 정도의 행태를 보이거나 매스컴의 호들갑과 출판상업주의 또한 역기능의 한몫을 거들고 있다.
그리하여 나 또한 다시금 초심을 잃지 않으려 애를 쓰며 길을 찾아 나선다. 만물동근(萬物同根)이라 ‘세상 모든 것은 하나의 뿌리’라는 말을 되새기며 산책을 하듯이 천천히, 그리고 이 땅 곳곳의 성지를 순례하듯이 참회와 성찰의 마음으로 청학동의 전설이 깊이 스며 있는 하동군 악양면을 바라본다. 아직 내가 들어갈 빈 집이 마땅치 않아 살아보지는 못했지만 언제나 바라보는 그 자체만으로도 왠지 눈물겹고 고맙고 또 꼭 그만큼 아름답다.
대하소설 <토지>의 무대 악양, ‘슬로 시티’ 악양, ‘동네밴드’와 ‘지리산학교’의 악양, 평사리 무딤이들녘과 악양천과 취간림과 대봉감과 매실의 악양…. 바야흐로 전설이 아니라 당대의 ‘청학동’으로 거듭나는 살맛 나는 악양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형제봉과 고소성, 그리고 한산사를 지나 드라마 <토지> 세트장과 최참판댁 등이 자리한 평사리로 행복한 발길을 옮긴다.
생가를 복원하거나 사라진 문화유적을 복원하는 것과는 달리 아마도 최참판댁은 소설 속의 허구를 그대로 현실화한 세계 최초의 시도라 할 만하다. 처음에는 나 또한 기존의 아름다운 마을을 훼손하는 것 같아 반감도 없지 않았으나 다행히도 악양동천의 절경과 어우러지게 꾸밈으로써 여느 세트장의 실패와는 달리 지리산의 명소가 되었다.
- ▲ 지리산 하동호 가는 길에서는 대나무숲을 자주 만난다.
돌담길 둘러보면 마치 고향에 온 듯
그러나 이보다 더 소중한 평사리의 자산은 역시 오래된 돌담길이다. 마을마다 대봉감나무와 더불어 마삭줄이 온몸을 감싸고 있는 돌담은 그 자체만으로도 참으로 멋진 문화유적이 아닐 수 없다. 최참판댁을 둘러보고 매표소와 주차장 쪽으로 내려가다 보면 왼쪽으로 골목이 있는데, 그 길을 따라 200m 정도의 왼쪽 돌담길에 정원이 잘 꾸며진 ‘지리산학교’가 있다. 이곳은 교장을 맡은 사진가 이창수씨가 잠시 빌려준 공간인데, 사실 10원도 없이 시작한 지리산학교는 지리산과 악양면 전체를 ‘움직이는 학교’로 삼아 새로운 실험을 하고 있다. 이 학교에 대해서는 이미 많이 소개되었으니 그냥 넘어가자. 다만 언제라도 열려 있으니 누구나 차 한 잔 얻어 마실 수 있는데, 이곳을 나와 돌담길을 둘러보면 마치 옛 고향에 온 듯하다. 돌담 위의 마삭줄과 호박덩굴이 서로의 몸을 감싸고, 탱자나무와 감나무 등이 돌담길의 나그네를 굽어보고 있다.
구불구불 돌담길을 둘러보다 하평마을이나 대촌마을을 빠져나오면 평사리 무딤이들녘이 반긴다. 토지문학제(10월 10일)를 전후해서 황금 들녘을 배경으로 온갖 허수아비들이 들어서는데, 이 무딤이들의 사진 포인트인 ‘부부소나무’와 더불어 장관을 이룬다. 잘 익은 벼이삭들이 고개를 숙여 허수아비들에게 절을 하는 코스모스 길을 걸어 부부소나무를 경배하듯이 휘돌아 황금 들판을 빠져나가면 젖줄인 악양천을 만난다. 봄이면 은어 떼가 오르는 악양천 둑방길을 따라 오르며 형제봉과 구재봉 등 악양면을 감싸며 섬진강까지 뻗어 내린 산줄기를 감상하며 축지교를 지나쳐 조금 더 걷다 보면 잠수교 같은 작은 다리가 나온다. 이곳을 건너 직진하면 신대리 상신마을이 나온다. 이제 상신마을 오른쪽 임도를 따라 신대고개를 넘어 적량면 동점마을까지 이어지는 오르막 산길을 올라야 한다.
여기서 잠깐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악양면에서 청암면과 산청으로 가는 길은 몇 갈래가 있다. 우선 제일 빠른 길은 회남재를 넘어 청학동이나 묵계로 가는 임도가 있고, 다른 길은 중대리에서 논골로 올라가 하동호로 내려가는 임도, 그리고 미점마을에서 구재봉 가까이 오르다 먹점마을로 넘어가 먹점에서 적량면 우계리 신촌마을에서 옥산재를 넘어 하동읍 서재골로 가는 길과 우계저수지 왼쪽 임도로 올라 동점마을로 가는 길이 있으며, 그 중간에 바로 상신마을에서 동점마을로 가는 임도가 있다.
그 모든 길이 사실은 꽤나 큰 고개를 넘어야 한다. 달리 방도가 없다. 다만 악양면에서 섬진강을 따라 하동 읍내로 가는 19번 국도가 있으나 이는 아주 위험한 길이다. 구례에서 화개장터를 지나 악양면까지가 그렇듯이 차량도 많을 뿐 아니라 섬진강에 접근해 걸을 수 있는 인도나 비포장길이 제대로 연결되지 않는다.
- ▲ (위) 하동 평사리 들녘에 허수아비축제가 열리고 있다. (아래) 하동 청암면에 있는 하동호의 아름다운 풍경.
무딤이들녘 부부소나무와 장관 이뤄
아직도 ‘뜨거운 감자’인 19번 국도 4차선 확·포장 계획이 하동 읍내에서 악양면까지는 결론이 나 이미 보상이 이뤄지고 일부는 공사 중이다. 이 도로에 자전거와 인도가 생긴다니 다행이지만 악양면에서 구례까지가 문제다. 아름다운 섬진강 라인과 벚꽃 길을 훼손하지 않고서는 도무지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사실 애초에 ‘지리산 순례길’ 혹은 ‘지리산 둘레길’에 대한 발상을 처음 하게 된 것도 바로 이 19번 국도 때문이다. 벚꽃 길을 지키자며 자생적으로 생겨난 하동의 ‘섬진강과 지리산 사람들’(공동대표 박남준 시인, 사무국장 이상윤)이 활동을 시작하고, 바로 그 무렵인 2004년에 도법·수경 스님과 내가 시작한 ‘생명평화탁발순례단’이 이 길 위에서 결합하면서 비롯된 것이다. 벚꽃 길을 지키는 동시에 ‘아름다운 19번 국도를 어찌할 것인가’ 고민을 거듭한 끝에 건교부 장관과 합의한 것이 바로 4차선 확·포장을 예외적으로 포기하고 섬진강변 19번 국도에 사람이 다닐 수 있는 비포장 ‘순례길’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지리산 순례길’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으며, 우여곡절 끝에 산림청과 함께 하는 ‘지리산 둘레길’이 탄생한 것이다.
돌이켜보면 아쉬움도 적지 않지만 다 지나간 일이니 차치하더라도 악양면에서 구례군 토지면까지의 19번 국도 섬진강 꽃길은 보전되어야 하며, 다만 애초의 합의처럼 비포장 인도 혹은 자전거길은 계속 모색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지리산 둘레길 또한 애써 산과 고개를 넘지 않고 섬진강과 호흡을 함께 할 수 있는 온전한 둘레길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