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북한은...

북한화폐계획은 통제경제로 회기...

제봉산 2009. 12. 8. 09:17

북한 화폐개혁은 통제경제로 회귀 위한 극약 처방

고질적인 공급 부족에 당국 무분별한 화폐 남발
극심한 인플레이션 오자 통화량 줄이려 전격 실시

북한이 지난달 30일 전격적으로 화폐 개혁을 단행했다. 1원부터 100원까지 5종의 지폐를 폐지하고, 새로 100원에서 5000원까지의 지폐 6종과 1전~1원까지의 동전 5종류를 내놨다.

우리나라도 1950년·1953년·1962년 세 번에 걸친 긴급통화조치를 통해 화폐를 개혁한 적이 있다. 또 2004년에는 '1달러=1000원'이 넘는 통화 단위를 '1달러=1원' 혹은 '1달러=10원' 수준으로 낮추는 화폐명목가치조정(re-denomination)도 검토했었다. 지난 2002년에는 유럽연합(EU)이 총 15개 회원국 중 12개 회원국의 화폐를 폐지하고 새로 유로(Euro)를 사용하는 화폐 개혁을 단행했다.

하지만 북한의 화폐 개혁은 이전의 다른 화폐 개혁과 상당히 다른 성격을 갖고 있다. 우선 현금과 예금의 교환 비율이 현금은 100 대 1로 100원이 1원으로 바뀌지만, 예금은 10대 1로 10원이 1원으로 대체된다. 예금자보다 현금을 대량으로 손에 쥐고 있는 사람들이 절대적으로 손해를 보게 되는 구조다. 또 1가구당 15만원(새 돈 1500원)으로 교환 한도를 두어, 15만원을 넘어가는 돈은 1000대 1로 바꿔주고, 모두 은행에 예치하도록 했다. 부(富)의 재분배와 은닉자금의 노출을 동시에 노린 조치다. 북한 전문가들은 북한 금융당국이 1달러당 136~140원인 환율은 1달러당 1.3원이 아닌 1원 수준으로 낮출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북한의 화폐 개혁은 단순히 옛 돈을 새 돈으로 교체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사회적·경제적 후폭풍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지하경제에서 돈을 벌어 현금을 보유하고 있던 북한 주민들은 정부 조치에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또 물가 급등과 외화 사재기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왜 북한은 세계 경제에서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화폐개혁에 나설 수밖에 없었을까. 그 배경에는 지난 20여년간 기형적으로 변화해 온 북한 경제의 여러 문제점이 도사리고 있다.

생산력 부족이 인플레이션 초래

북한의 경우 1980년대까지 정부의 배급 시스템과, 국영 상점을 통해 화폐로 재화를 사고파는 통제된 시장이 복합된 '계획 경제'가 비교적 원활하게 작동되어 왔다. 막대한 군비와 경찰력을 유지하기 위해 민생 부문에 투자가 이뤄지지 못하는 와중에도 구소련과 중국의 원조를 기반으로 북한 정부의 배급 시스템이 어느 정도 기능을 발휘했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 옛 소련이 무너지고, 원조가 끊기면서 북한 경제는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특히 1990년대 중반 김일성 주석의 사망과 잇따른 자연재해로 상품과 서비스의 만성적인 공급 부족으로 신음하던 경제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았다. 1980년대 말 1000달러에 달했던 1인당 국민소득은 1990년 중반 500~600달러 수준으로 급락했다.

2000년대 들어서는 쌀이나 옥수수 같은 기본 식량마저 배급이 끊어졌다. 그 결과 북한의 계획 경제 시스템은 붕괴했다. 북한 주민들은 암시장을 통해 식량을 거래하면서 시장 경제가 배급 시스템을 대체하기 시작했다. 시장의 압력에 밀린 북한 정부는 결국 2002년 7월 '7·1 경제관리개선조치'를 통해 공식적으로 개인의 상거래를 일부 허용하고, 기업의 독립채산제를 도입했다.

북한 당국의 이 조치는 억압되어 있던 북한 내 시장 경제 욕구가 '농민 시장'과 같은 형태로 확산되는 계기가 됐다. 하지만 상품에 대한 수요는 증가한 반면, 생산시설과 기술의 부족으로 공급이 수요에 미치지 못하면서 물가가 폭등했다. 2002년 1㎏당 40원이었던 쌀값은 2009년에 2000원으로 40배나 올랐다.

무분별한 화폐 남발로 사태 악화

북한에서는 재산의 사적 소유가 제한되어 있다. 그래서 돈을 번 사람들은 현금을 '장롱 속'에 쌓아두기 시작했다. 기은경제연구소 조봉현 박사는 "북한에도 우리나라의 은행과 같은 '저축소'가 있지만, 연 금리가 3% 수준에 불과하고, 정부가 저축한 재산을 몰수할 수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주로 집에 현금을 보관한다"고 말했다. 경제학적으로 '화폐 퇴장'이라고 불리는 이 현상 때문에 중앙은행은 더 돈을 찍어 내야 했고, 시중에 통화량이 늘면서 물가 상승을 부추겼다.

북한에 극단적인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면서 국영기업이나 농장에서 일해서는 생계를 이을 수 없는 상황이 이어졌다. 국영기업의 한 달 월급은 3000~4000원 수준인데, 가구당 한 달 생활비는 4만~5만원에 달한다. 이 때문에 정부가 정해준 일터를 팽개치고 시장에 나가 자영업을 하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계획 경제는 더욱 망가지고, 시장 경제가 커질 수밖에 없다.

북한 정부는 인플레이션에 미숙하게 대처했다. 화폐를 마구 찍어낸 것이다. 북한경제에 정통한 국가정보원 관계자는 "북한이 발권력을 동원하면서 화폐 가치가 더욱 떨어지고 물가는 더욱 올랐다"고 말했다. 지난 7년 새 정부가 지급하는 근로자 임금은 30배가량 인상됐다. 하지만 정부가 그렇게 많은 돈을 풀었지만 실제로 유통되는 통화는 전체의 10% 수준으로 짐작되고 있다. 최근에는 기업들마저 돈을 쓰지 않고 쌓아두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공급 부족 문제 해결이 핵심

지난달 30일의 화폐 개혁은 결국 이러한 경제의 악순환에 '리셋(reset·처음으로 되돌림)' 버튼을 누른 것으로 해석된다. 당장 북한 내의 화폐 거래가 멈추면서 시장 기능은 마비됐다. 시장 경제의 산물인 인플레이션 현상도 일시적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화폐 개혁과 함께 가구당 10만~15만원 이상의 현금 재산이 증발하자 주민들의 불만은 매우 커진 상태다.

향후 과제는 북한 정부가 어떻게 계획 경제를 재건하고 고질적인 공급 부족 문제를 해소할 수 있을지 여부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조명철 박사는 "화폐 개혁을 통해 회수된 자금을 인프라 및 산업재건 등의 경제개발에 투입해 실물경제 회복에 전력을 기울여야 성공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서울대 윤영관 교수(외교학)는 "이번 화폐 개혁은 북한 정부와 시장 간 대결의 첫 라운드로, 이런 대결은 앞으로도 수차례 반복될 것"이라며 "그 과정에서 시장 세력의 불만은 누적되고 북한 정부의 통제능력은 약화되어 북한의 정치·경제 상황은 더욱 불안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 화폐개혁 (currency reform)

화폐 개혁은 정부가 인위적으로 화폐의 가치를 조절하는 조치다. 대체로 화폐의 단위를 바꾸거나, 기존 화폐의 사용을 금지하고 새 화폐를 도입하게 된다. 대부분 지하경제의 양성화, 부의 재분배, 극심한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화폐 단위 조정 등이 이유였다.

☞ 리디노미네이션 (re-denomination)

'다시 이름 붙인다'는 뜻으로, 화폐의 명목가치(액면가)를 조정하는 것을 뜻한다. 화폐 개혁 조치의 일종이지만, 국내에서는 돈의 단위가 '억' '조'대로 지나치게 높게 나오는 것을 해소하기 위해 단순히 돈의 단위만 떨어뜨린다는 의미로 널리 쓰이고 있다.
 
***"北화폐개혁은 포퓰리즘"
북한이 최근 단행한 화폐개혁은 실제 인플레 해소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시장 확대과정에서 소외돼 박탈감을 느낀 다수 주민을 달래기 위한 포퓰리즘 성격이 강하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이조원 중앙대 북한개발협력과 교수는 11일 `북한 화폐개혁의 의미와 전망'을 주제로 북한민주화네트워크가 주최한 토론회 발제에서 이 같이 주장했다.

이 교수는 먼저 "이번 화폐교환 비율이 100대 1이어서 북한 노동자들의 임금이 구권 기준으로 유지되면 형식적으로는 북한 당국의 공언대로 실제 임금을 100배 인상하는 효과가 나타난다"고 지적했다.

그는 "그러나 갑자기 높아진 구매력에 비해 상품 공급이 충분치 않으면 물가 폭등이 불가피해 현재 북한의 소비재 공급력을 고려할 때 실효성이 크지 않을 수 있다"며 화폐 개혁 후 북한에서 추가 인플레가 발생할 가능성을 경고했다.

이 교수는 "이런 점에서 화폐교환은 무엇보다 북한 사회를 잠식한 시장을 축소 또는 통제하려는 의도가 가장 주된 것이고 장사꾼과 `신흥 부유층'에 대한 타격은 결국 북한 주민의 상대적 박탈감을 없애려는 조치"라며 이번 화폐개혁을 `북한판 포퓰리즘'이라고 규정했다.

이 교수는 또 북한 당국이 화폐개혁을 시행하면서 구권 반납과 상관없이 모든 사람에게 `배려금' 명목으로 신권 500원씩을 주기로 해 "수중에 돈이 한푼도 없었던 주민들은 환영을 표하고 있다"는 소식을 거론하며 이 또한 포퓰리즘의 근거로 주장했다.

정광민 국가안보전략연구소 연구위원도 발제에서 "화폐개혁 후 북한 주민들은 허탈감을 느끼고 소극적인 저항을 하는 사람들과 당국 주장대로 평등사회론에 동조하는 사람들 두 집단으로 나뉘고 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