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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태항산(太行山)은 하남성, 하북성, 산서성 3개 성에 걸쳐 남북 600km, 동서 250km로 뻗어 있는 거대한 산군이다. 예로부터 ‘태항산 800리’라 불려온 이 산맥을 현지인들은 미국의 그랜드캐년을 빼닮아 ‘중국의 그랜드캐년’이라 부르기도 한다. 한자 ‘行’은 ‘걷다, 가다’라는 의미일 때는 ‘행’으로 읽지만 ‘줄’이나 ‘항렬(行列)’의 뜻일 때는 ‘항’으로 읽는다. 태항산맥은 커다란 산이 줄지어 있다는 의미인 것이다.
- ▲ 미국의 그랜드캐년을 연상케 하는 태항산 대협곡. 답사단원이 구련산 천제 계단길 위에서 진입로 주변의 대협곡을 촬영하고 있다.
- ▲ 왕망령 관일대에서 만선산 계곡으로 내려서다 안개가 걷히면서 드러난 선경에 모두 넋을 잃은 채 바라보고 있다.
그 중 하남성과 산서성 경계 남단에 위치한 남태항의 구련산(九蓮山)과 왕망령(王莽嶺·1,655m)~만선산(万仙山·1,672m) 일원은 거대한 협곡으로 이름난 곳으로 특히 올해 들어 우리 등산인들로부터 관심을 얻고 있는 지역이다.
태항산은 덩치가 큰 만큼 명소와 절경지가 곳곳에 널려 있으나 위동항운과 하남성여유국·청도중국여행사가 공동주최한 태항산 답사는 세 개 지역으로 나뉘어 진행되었다. 천길 낭떠러지의 8부 능선 길을 따르는 구련산(九蓮山) 탐승, 장쾌한 조망을 만끽하며 능선을 따르다 선경이 펼쳐지는 계곡으로 내려서는 왕망령(王莽嶺)~만선봉(萬仙峰) 트레킹, 그리고 설악산 비선대나 비룡폭포를 오르내리듯 가벼운 분위기 속에서 비경을 엿보는 도화곡(桃花谷)~왕상암(王相岩) 트레킹이 그것이다.
위동항운의 3만 톤급 여객선인 뉴골든브리지호를 타고 밤새 서해를 가로질러 청도에 도착한 일행은 고속도로를 7시간 가까이 달려 하택(河澤)에 도착해 하룻밤 묵은 이튿날에도 새벽부터 서둘러 버스를 타고 4시간을 달리다 보니 산을 보기도 전에 엉덩이가 뻐근할 정도로 지루한 느낌이 들었다.
- ▲ 1 황감두를 향하다 바위절벽 위에 올라 멋진 포즈를 취하는 박주열씨. 2 전동승합차로 연결되는 후정궁. 도교사원이다. 3 120m 높이의 절벽에서 물줄기를 쏟아붓는 천호폭포. 4 거대한 절벽을 끼고 황감두로 이어지는 임도길. 5 100여m 높이의 바위벼랑은 섬뜩함과 함께 멋진 풍광을 보여주었다.
200~300m 높이의 절벽 길 따르는 구련산 트레킹
그런 상황에서도 답사단원들은 구련산 대협곡으로 들어서는 순간 탄성이 터져 나오고 딱딱한 표정은 흥분된 모습으로 바뀌었다. 수백 미터 높이의 바위 절벽이 양옆으로 펼쳐진 대협곡을 따라 산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우선 천호폭(天壺瀑)이 감동을 주었다. 120m 높이의 거대한 절벽을 타고 구련담(九蓮潭)으로 떨어지는 수직폭은 무엇보다 그 규모에서 입이 벌어지게 했다.
“산서성에서 물을 끊으면 물이 말라 버립니다.”
천호폭포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물줄기 같은 분위기를 풍겼으나 실상은 하북성 멀리서 흘러오는 물이었고, 하북성에서 물 공급을 끊는 순간 마른 절벽으로 변해 버릴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폭포 탐승로는 곧바로 천제(天梯·하늘 사다리)라 불리는 999개 계단으로 이어졌다. 계단 길을 올라서자 뜻밖에 널찍한 도로가 나 있고, 전동승합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승합차를 타고 절벽 길을 5분쯤 달린 뒤 내린 곳은 후정궁(后靜宮) 도교사원 앞. 소녀 기사는 후정궁을 지나 산 임도로 접어드는 우리를 보더니 그리 가면 안 된다는 의미의 손짓을 보냈다. 탐승객들은 대개 예서 다시 되돌아가는가 싶었다.
아찔하리 만큼 높고 웅장한 바위 절벽이 길게 이어지는 홍암협곡(紅岩峽谷), 날개 활짝 펼친 독수리처럼 살벌한 외모의 유수성(劉秀城)이 올라앉은 석애구(錫崖헓句)로 이어지는 구련산 트레일은 말 그대로 하늘 길이었다. 발아래는 천길 낭떠러지요, 눈높이로는 거대한 협곡이 한없이 펼쳐졌다.
하늘 길은 그냥 밋밋한 산림도로만 따르지 않았다. 간간이 널찍한 테라스나 바위 돌출부가 나타나 멋진 조망처가 돼 주었고 답사단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조망처에 올라 학과 같은 우아한 포즈를 취해 보았다. 그러다 똑같은 풍광에 지루해질 즈음 모퉁이를 돌아서면 데빌스 타워(Devils Tower·미국 와이오밍주)를 연상케 하는 기암이 우뚝 솟구치고, 손오공의 다섯손가락을 보는 듯한 기암이 앙증스런 모습으로 봉긋 솟아올라 있었다.
이렇게 거대한 기암절벽과 기암괴봉은 예로부터 격전의 장소로 이용되어 왔다. 전한(前漢)을 멸망시키고 신(新)나라를 세운 왕망(王莽)과 후한(後漢)을 세운 유수(劉秀)가 치열한 싸움을 벌였고, 그로부터 20세기 이상 지난 일제강점기에는 우리 광복군이 중국의 팔로군과 힘을 합쳐 일본군과 맞서 전투를 벌였던 곳이다. 지금 일행이 따르는 허릿길의 막판을 장식하는 대암벽 석애구 위에 지금도 남아 있다는 성이 약 2000년 전 후한을 세운 세조 광무황제(광무제) 유수(25~57년)가 왕망령의 신나라와 맞서기 위해 쌓았던 유수성(劉秀城)인 것이다.
후정궁을 출발한 지 1시간쯤 지났을까. 허름하고 집 주변이 쓰레기와 오물로 어수선한 민가가 나타났다. 황감두(黃龕頭) 마을이었다. 집 앞으로 몇 발짝 나아가면 천길 낭떠러지이건만 민가 주변은 개암나무와 산사과나무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려 오히려 도원경 속 신선의 그것처럼 느껴졌다. 출출한 배를 채우기 위해 사과를 따는 모습에 답사팀을 인도하는 양걸석(산악투어 대표)씨는 “이래서 트레커가 지나가는 길에 남아나는 게 없다” 했지만 선경 속의 도인이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에서인지 모두 사과 따먹기에 바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