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들은 10가지 코스 요리로 된 연회음식을 즐겼고, 내리 한 달을 베이징에 머물며 즐겼다. 주최자인 황제 영락제는 외국 사절을 중국 배에 태워 제 나라에 모셔다 주는 친절까지 기꺼이 베푼다. 300척 보물선단의 함대사령관 정화(鄭和)는 이때 등장한다.
이런 정보를 담은 『1421-중국, 세계를 발견하다』를 쓴 영국인 저자 개빈 맨지스는 좀 짓궂은 사람이다. 당시 ‘잘 나가는 중국’과 ‘딱한 처지의 유럽’을 대비시키기 위해 자금성 낙성식 3주 뒤 열린 영국 헨리 5세의 초라한 결혼식 이야기를 꺼낸다. 당시 내빈은 고작 600명. 이들이 대접받은 것은 소금에 절인 대구 요리 한 접시다. 진짜 충격은 그 다음인데, 디테일에 강한 요즘 역사책의 변화를 염두에 두고 읽어보시라.
“왕비 카트린은 여성용 속옷도, 스타킹도 걸치지 않았다. 그에 반해 영락제의 애첩은 최고급 비단옷에 페르시아·스리랑카의 다이아몬드에 비취로 치장했다. 애첩은 태평양산 용연향 등의 향수도 뿌렸다.”(64쪽)
지난 주 서울대 교수 주경철의 신간 『문명과 바다』를 리뷰하면서 19세기 초 중국·인도의 GDP 총생산은 전 세계 50%라고 했는데, 15세기에는 더했으리라. 때문에 영락제는 자금성 이벤트에 영국·포르투갈 군주나 신성로마제국 황제 따위를 안 불렀다. 가난한 나라라서 아예 끼워주지 않은 것이다. 지금은 세상이 달라졌다. 대항해 시대 이후 서유럽은 팔자가 폈다. 역사를 쓰는 것도 그들이다. 우리는 그걸 ‘소비’한다. 정화라는 이름도 아직은 낯선 대신 콜럼버스나 바스코 다 가마만을 들입다 외운다.
그런 편향된 역사는 유럽 중심주의가 분명한데 궁금한 것은 또 있다. 왜 중국은 폼만 잡다가 쇄국으로 돌변했는가? 왜 난쟁이 유럽이 대항해시대 최후 승리자일까? 우리가 소비해온 상식은 이런 식이었다.
“유럽은 합리적 문명이다. 반면 아시아 전제국가들은 동양적 정체성(停滯性)의 늪에 빠져 허우적댔다”…. 알고 보니 학문적 근거가 거의 없다. 때문에 막스 베버도 틀렸고, 칼 마르크스도 실수했다는 게 요즘 역사학의 주류다.
실제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은 밖으로 나오지 않으면 안 됐다. 왜? 안에는 아무 것도 없었으니까. 그들은 중세 이래로 물질생활 면에서 자기완결성을 결여한 문명이다. 고기 먹을 때 뿌리는 향신료까지 부족했다. 19세기까지 형편이 그러해서 아편 팔다가 중국과 한 판 붙지 않던가? 그에 비해 아시아는 안정됐고 풍요로웠다. 역설이다. 그게 지금의 역전된 동서문명의 상황을 만들었으니 역사, 거 참 재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