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쟁점.

도시재개발...뉴타운의 그림자.

제봉산 2009. 1. 23. 11:14

21세기 '난쏘공<도시 철거민>'들
재개발에, 고층빌딩에 밀려나는 세입자들
달동네서 더 먼 곳으로… '도시 난민' 전락
넉달치 임금의 이전비용 임대 아파트 '그림의 떡'
달동네마저 점점 사라지고 철거 과정서 폭력도 다반사

 

철거민 박모(여·56)씨는 22일 서울 관악구 청룡동에 있는 보증금 1000만원, 사글세 20만원짜리 지하 단칸방에 몸져누워 있었다. 박씨의 남편(71)이 고철과 폐지를 주워서 벌어오는 돈은 하루 5000원~1만원이다. 박씨는 "한푼이라도 더 벌려면 나도 나가야 하는데 허리가 아파서…" 했다.

서울 흑석동에서 2000만원짜리 전셋집에 살던 박씨 부부는 3년 전 흑석6구역 재개발이 시작되면서 작년 9월 철거민이 됐다. 흑석동을 떠날 때 부부가 손에 쥔 돈은 전세 보증금에 '주거 이전비' 1000만원을 합쳐서 3000만원이었다. 간신히 청룡동에 사글세 방을 구했지만 이르면 내년 초에 다시 한번 이삿짐을 싸야 할지 모른다. 청룡동 일대가 재개발구역으로 지정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박씨는 "옷 가게 다니던 딸들도 불황으로 일을 쉬고 있다"며 "손 벌릴 곳도 없는데 내년엔 또 어디로 가야 하냐"고 했다.
▲ 22일 오후 5시, 철거가 예정된 서울 마포구 공덕동 공덕5구역에서 한 주민이 빈집투성이 골목길을 지나고 있다. 이태경 기자 ecaro@chosun.com
◆가난한 사람 밀어내는 도시, 서울

서울 시내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살 수 있는 동네가 사라지고 있다. 꼬불꼬불한 골목을 끼고 사글셋집과 구멍가게와 선술집이 늘어선 달동네들이 재개발된 자리에 고층 빌딩과 주상복합 아파트가 속속 들어서고 있다. 막일로 먹고사는 사람들이 고단한 몸을 누일 수 있는 공간이 줄어들면서 삶의 터전을 잃은 철거민들이 이 달동네에서 다음 달동네로 옮겨가고, 그곳마저 재개발되면 다시 더 먼 곳으로 밀려나는 현상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김진수 주거환경연합 사무총장은 "현재 서울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는 뉴타운 사업 지역에 원래 살던 세입자들의 경우, 지금 받는 보상비로는 살던 곳 근처에 집을 마련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했다.

서울시는 재개발 사업을 할 때 일정 비율을 소형 평수의 임대아파트를 짓도록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실효성이 적다는 지적이다. 세입자들이 임대 아파트 입주권을 받아도 임대 보증금 500만~1700만원과 관리비는 스스로 마련해야 하는데, 상당수가 그럴만한 경제력이 없다는 것이다. 가령 '길음 뉴타운'으로 재개발된 서울 성북구 길음4구역의 경우 원래 이곳에 주택을 보유했던 재개발 조합원들 가운데 아파트에 입주한 사람은 15.4%라고 서울시는 밝혔다.

◆대형 아파트 중심 재개발

서울 도시재개발은 낡은 주택가를 헐고 고층 아파트를 올리는 '주택 재개발'과 대로변 상업지역에 주상복합건물이나 업무용 고층빌딩을 세우는 '도시 환경정비'로 나뉜다.

용산 철거민 참사가 벌어진 용산4구역에는 최고 40층 높이의 아파트 7개 동(493가구)이 들어설 예정이었다. 오래된 소형 단독주택이 밀집해 서울의 대표적인 달동네로 꼽히는 서울 금호동 일대에도 아파트 건설 공사가 한창이다.

그러나 용산도, 금호동도 새로 들어설 아파트 가운데 원주민이 들어가서 살 수 있는 소형 아파트의 비율은 원래 주민을 모두 흡수하기엔 부족하다. 용산구에 따르면 용산4구역에 들어설 아파트는 임대 물량으로 나온 40㎡대의 84가구를 빼면 대부분 127.14~ 244.48㎡(38~73평)의 중대형 아파트다. 성동구 금호동의 경우 최근 완공된 금호11구역 아파트 888가구가 상대적으로 작은 73~136㎡(22~41평)로 구성돼 있지만 서민들이 들어가기엔 벅찬 집값이라는 지적이다.

◆한 달동네에서 다른 달동네로…

철거민 가운데 재개발로 가장 혹독한 대가를 치르는 사람은 세입자들이다. 서울시에 따르면 재개발로 터전을 잃는 세입자들은 재개발조합에서 32만~102만원의 이사비와 함께 도시 근로자 평균 임금 넉 달치에 해당하는 주거 이전비를 받는다. 작년 1분기 기준으로 5인 가족은 1481만원, 4인 가족은 1439만원, 1인 가구는 888만원이다.

이 돈으로 살던 곳 주변에 방을 구하지 못한 철거민 세입자들은 수소문 끝에 서울의 다른 달동네나 수도권 도시에 셋방을 구한다. 그곳마저 철거되면 또 쫓겨나는 식으로 '재개발 난민'으로 몰락해간다고 한다.

서울 왕십리에서 1400만원짜리 전셋집에 혼자 살아온 강경희(83) 할머니는 작년 4월 집 주인에게 방을 빼달라는 통보를 받았다. 전세 보증금에 주거 이전비 550만원을 받았지만 뉴타운 계획 때문에 주변 집값이 치솟아 방을 구할 수 없었다. 할머니는 결국 조카가 권하는 대로 서울보다 방값이 싼 충남 아산으로 내려갔다. 아무 연고가 없는 곳이다.

1990년대 이후 벌어진 극렬한 철거민 점거 농성 시위들은 대부분 재개발 시행사들이 용역업체 직원들을 대거 동원해서 주민들을 쫓아내다시피 퇴거시킨 지역에서 나타났다.

서울 공덕동에서 보증금 200만원에 월세 25만원짜리 구멍가게(16㎡·5평)를 12년째 운영해온 나승국(74)씨는 작년 6월 재개발 시행사와 건물주인으로부터 오는 30일까지 가게를 비우라는 통보를 받았다.

나씨는 "장사가 안돼서 7개월째 월세를 못 냈다"며 "재개발 시행사가 주는 주거 이전비로는 아무데도 갈 데가 없다"고 했다. 이사 날짜는 다가오는데 새 가게를 구할 수 없으니 지금 가게에 있는 물건을 뺄 데도 마땅치 않다는 것이다.

◆"없는 사람 몰아내는 방식 피해야"

전문가들은 "주거권과 생활권에 대한 최소한의 보장 조치, 이른바 '마지노선 플러스 알파'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일본의 경우 공식 용어 '도시계획' 대신 '마치츠쿠리'(마을 만들기)라는 낱말이 두루 쓰이고 있다.

특정지역 전체를 한꺼번에 철거하는 '일괄 재개발' 방식 대신 갈 곳 없는 원주민에게 주거 대책을 마련해주면서 차근차근 사업을 진행하는 '순환 개발' 방식이 보편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서울시의 도시 재개발 사업에 참여해온 한 도시공학 전문가는 "일본 방식을 따르면 재개발하는 데 시간은 오래 걸리지만 없는 사람이 대책 없이 쫓겨나는 개발방식에서 오는 부작용은 덜 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