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

[스크랩] 다정가 : 梨花에 月白하고 - 李兆年(1269 ~1343)

제봉산 2008. 11. 11.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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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박종순 / 장구:유흥복 / 대금:우종실

 

 

梨花에 月白하고 銀漢이 三庚인 제
 一枝春心을 子規야 알랴마는
 多情도 病인양하여 잠못들어 하노라

 

 

 

출처 : 청구영언, 해동가요

 

[현대어 풀이]

하얗게 핀 배꽃에 달은 환히 비추고 은하수가 삼경(자정 무렵)을 가리키는 한밤중에
배나무 가지에 어린 봄의 정감을 소쩍새가 알겠느냐마는
다정다감함도 병인 듯하여 잠을 이룰 수가 없노라.

[창작 배경]

고려 25대 충렬왕의 계승문제로 당론이 분열되었을 때, 이조년이 주도파의 모함으로 귀양살이를 하던 중,

임금에 대한 걱정과 유배지에서의 은둔 생활의 애상을 이 시조로 표현하였다.

[이해와 감상]

" 배꽃이 하얗게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데, 거기에 휘영청 달이 밝으니

하얀 배꽃과 밝은 달이 서로 어울려 배꽃은 더욱 희고,

달빛은 더욱 환상적인 분위기를 만든다.

더욱이 밤은 깊어 은하수가 기운 삼경이라, 온 천지가 쥐죽은 듯이 고요하여 신비의 세계를 이루고 있다.

그 고요를 깨듯이 소쩍새가 구슬프게 울어대는구나.

배꽃 가지에 서려 있는 봄날의 애틋한 애상을 소쩍새 네가 어찌 알겠는가마는

이렇듯 다정다감한 내 마음도 병인 듯하여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구나. "

이화의 청초와 순백, 월백의 환상과 낭만, 삼경 은한의 신비감, 자규의 처절과 애원, 이것들이 뒤범벅이 되어 빚어 내는

봄밤의 애상적이면서도 낭만적인 분위기는 사람으로 하여금 우수에 잠겨 전전반측(輾轉反側) 잠 못 이루게 하고 있다.

의인법과 직유법의 표현으로 '배꽃과 달빛',

'소쩍새'의 이미지를 통하여 봄밤의 애상과 우수에 잠겨 잠을 이루지 못하는 작자의 심정이 잘 나타나 있다.

한가닥 지향할 수 없는 애상적인 봄밤의 정서는 '이화, 월백, 은한' 등의 백색 언어와 자규(소쩍새)에 연결되어

작자의 충정이 청빈, 고독함을 나타내면서 모든 시상이 일지춘심에 집중되고 있다.

 

이 시조는 고려시대 시조 중에서 문학성이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된다.


휘(諱)

조년(兆年)

세수(世數)

2세

생년~졸년

1269(고려 원종 10)∼충혜왕 4년(1343년) 5월 5일 卒(향년 75세)

종 파

문열공파 파조(文列公派 派祖)

 

중시조(中興始祖)농서군공(隴西郡公)의 五男(오남)
고려시대의 문신.
자(字) : 원로(元老).호(號) : 매운당(梅雲堂)·백화헌(百花軒).
시호(諡號) : 문열(文烈), 성산군(星山君), 관직 : 정당문학(政堂文學)
1269년(고려 충렬왕 10) 성주 용산리에서 출생

공(公)은 몸이 작은 편이었지만 의지가 굳건하여 뜻한 바가 있으면 반드시 이를 성취 하였고,
풍채가 특별히 빼어나고 자질이 비상하여 도량이 지극히 넓어서 사람들의 흠모를 한몸에 받았다.
참찰대부(監察大夫)정윤의(鄭允宜)가 부사(府使)로 있으면서 한번 보고는 됨됨이 특이한 사람임을
알고 그의 딸을 공(公)에게 시집 보냈다.


회헌 안유(安裕)의 제자로 1285(충렬왕 11) 진사(進士)로 문과에 급제,
1294년(충렬왕 20년) 향공進士로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안남서기(安南書記)로 발탁 되었
다가 진주목 통문서(晋州牧 通文署)에서 사록(司錄:정8품)과 록사(錄事:정8품)를 지냈고 강릉부
(江陵府)의 전첨(典籤)을 지내고 예빈내급사(禮賓內給事:정6품)를 거쳐 합주지사(陜州知事:
합천군수:종4품)로 나갔다,내직으로 들어가 비서랑(秘書郞)이 되었다.

1306년(충렬왕 32) 비서승(秘書丞)으로 왕(王)을 원(元)나라에 호종(扈從)했을 때 왕유소(王惟紹),
송방영(宋邦英)등이 충렬왕(忠烈王) 부자( 父子)를 이간시키고 충선왕(忠宣王)을 모함하여 서흥후
(瑞興侯) 전(琠)을 충렬왕의 후계로 삼으려고 획책 하다가 충선왕의 세력이 커지자 처벌되었는데
그는 어느 파에도 가담하지 않고 최진(崔晉)과 충렬왕을 보필 하였으나 모함사건에 연루되어 무고
하게 귀양갔다.

그 후 풀려 나와 13년간 고향에서 은거했고, 심양왕(瀋陽王) 고(暠)가 원(元)나라에
왕위(王位)의 찬탈을 음모하자 원(元)나라에 가서 중서성(中書省)에 그 부당함을 상소(上疏)하였다.
1330년 충숙왕(忠肅王)이 귀국 후 감찰·장령(監察掌令)이 되고 사헌장령겸 전리총랑(典理摠郞/차관)
으로 관동지방( 關東地方)에 가서 백성을 안무(按撫)하고 많은 치적(治績)을 쌓았다.
이어 군부판서(軍簿判書/현 국방장관)에 승진,그 후 여러 차례 충혜왕(忠惠王)을 따라 원(元)나라에
다녀왔다
1340년 충혜왕이 복위하자 왕이 「조년(兆年)은 늙었지만 그 뜻이 훌륭하다」하면서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승진시키고 다시 정당문학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정2품)이 되어
성산군(星山君)에 봉(封)하였다.


그는 인품이 근엄하고 곧아서 충심으로 간언하는 일이 많았고 매일 입조(入朝)할 때가 되면 왕이
공(公)의 신발 소리만 듣고도 [이모(李某)가 온다]고 말씀하시며 용모를 단정하게 고치고 난 뒤에
대면 하기를 기다렸다 한다.
강직하고 사리에 밝은 성품으로 충혜왕의 황음(荒淫)을 간하다가 받아 들여 지지 않으므로
이듬해인 1341년(충혜왕 2)공의 73세에 벼슬을 내놓으시고 사직 하였는데 후에 성근익찬경절공신
(誠勤翊贊勁節功臣)이 되어 벽상(壁上)에 도형(圖形:큰 공신의 화상을 왕실 벽에 모시는 일) 되었다.
충혜왕 복위 4년(1343년)5월5일에 돌아 가시니 향년 75세이시고 문열(文烈)이란 시호(諡號)를
받았다.


공민왕(恭愍王) 때 성산후(星山侯)에 추증(追贈)되고,
충혜왕(忠惠王)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공로 있는 신하를 죽은 뒤에 종묘에 신위를 모시고
제사 지냄)되었다.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그의 인품(人品)을 논평(論評)하기를 「그는 난세(亂世)에 태어나서
수많은 변고와 험난을 겪으면서도 혼미(昏迷)한 임금을 받들어 지조가 금석과 같았고 충직한
기풍이 당시에 있어서나 후세에 있어서도 우뚝하여 고려 500년 역사의 제 1인자」라고 찬양하였다.

저서(著書) : 나려랑림고(羅麗琅琳考), 육교고략:(六橋稿略)

공(公)께서 살아 계실 때에 공(公)의 묘지명(墓之銘)을 쓰기로 윤허를 받아 놓았던
익제 이제현(益齊 李齊賢)은 그를 다음과 같이 명(銘)하였다.
膽偉於身 質愈於文 담은 몸보다 크시오며 자질은 문무(文武)에 뛰어 나시고
勤以從政 誠以事君 부지런히 정무에 종사 하시고 정성것 군주를 섬기셨네
旣爵而壽 有子有孫 벼슬 두루 하신데다 수 하시고 자손 들도 기리오니
謂天不賚 來視里門 하늘이 주신복 아니라면은 와서 보라 향리의 정문(旌門)을 !

시 모 음

또한 시문(詩文)에 뛰어났으며, 시조 이화조.백화헌 시(梨花操, 百花軒 詩)가 유명한 문장가이다.
"
대표적인 시조
「이화(梨花)에 월백(月白)하고 은한(銀漢)은 삼경(三更)인제 일지춘심(一枝春心)을
자규(子規)야 알랴마는 다정(多情)도 병(病)인양 하여 잠못들어 하노라.」는
특히 유명하다.

 

출처 : keiti
글쓴이 : 세발까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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