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보 연재 '한국사 새로보기'시리즈에 제기된 반론들
《본보 기획시리즈 ‘신복룡 교수의 한국사 새로 보기’는 지난 4월2일자부터 8월18일자까지 총 20회에 걸쳐
우리 역사의 다양한 쟁점들을 조목조목 짚어 매 주말마다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신 교수는 4월2일자 ‘우리 민족이 단일 민족이 아니다’편에서부터 8월11일자 ‘미국이 한반도의 4대국 분할을 시도했다’편에 이르기까지
한국사 전반에 걸쳐 기존의 상식을 깨는 새 이론을 제시했다.
때마침 일본 역사교과서 파동 속에서 이 시리즈는 우리 역사에 대한 대중적 관심을 높이는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신 교수의 역사해석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학자나 독자들도 있었다.
‘화랑은 원래 여자였다’(4월7일자) ‘최만리는 역사의 죄인인가’(4월21일자) ‘명성황후의 사진은 없었다’(7월7일자) ‘3·1운동’(8월4일자) 등
많은 논란을 불러올 수 있는 글이 게재됐을 때 학계와 관련 당사자 후손들의 반론이 만만치 않았다.
‘한국사 새로 보기’를 마치면서 이 시리즈가 연재되는 동안 제기됐던반론들을 정리한다.
이를 통해 우리 역사학에 대한 활발한 토론 분위기가 조성되기를 기대해본다.
‘3·1운동’ 편의 경우 후손들이 생존해 있는 점을 감안해 이들의 입장을 별도로 싣는다.
후손들의 입장은 민족대표 33인의 후손들로 구성된 ‘33인 유족회’가 보내온 것이다.》
▽화랑은 원래 여자였다(4월7일자)〓
신 교수가 주장한 근거는 ‘삼국유사’에 화랑이 한자로 ‘花郞’이 아니라 ‘花娘’(郞은 남자, 娘은 여자의 뜻)으로 기록돼 있다는 것.
그러나 이 글이 나가자 여러 학자들은 화랑이 ‘花娘’으로 표기된 것은 오자(誤字)였다고 지적했다.
같은 ‘삼국유사’에서도 그 다음에 나오는 화랑의 대목에 ‘花郞’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점으로 미루어 ‘花娘’은 ‘花郞’의 오자가 분명하다는
논리였다.
◆ "조선시대에도 '花娘'이라고 써"
그러나 신 교수는 오자가 아니라는 입장이다.
‘삼국유사’의 다른 곳에서도 ‘花娘’이라는 단어가 나오고 있으며(권2 桃花女條),
조선시대에도 ‘花娘’이라는 단어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점(성종실록 3년 7월 10일자 예조의 상소) 등을 들었다.
일본인으로서 화랑을 연구한 미시나 아키히데도 여성으로서 ‘花娘의 시대’가 분명 있었음을 지적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 원로 역사학자 이기백 전 한림대 교수는
“관창(官倉)이나 사다함(斯多含) 등 화랑으로 공업을 이룬 영웅들의 행적을 부인하는 뜻으로 이 글을 썼다면 잘못된 논리”라고 밝혔다.
▽첨성대는 제단이었다(4월14일자)〓
신 교수의 이 같은 주장이 나가자 천문학계를 중심으로 많은 학자들이
첨성대는 천문을 관측했던 장소였거나 최소한 천문 관측과 관련된 축조물이었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우선 이들은 첨성대의 위치가 천문 관측을 위한 적지(適地)임을 역설했다.
우선 궁궐에서 가까워 천문 현상에 특이한 점이 발생하면 국가를 통치하던 왕이나 신하들에게 즉각 알릴 수 있는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는 점을 들었다.
언제든지 관측 전문가가 천문 관련 정보를 신속하게 알려줌으로써 천변(天變)으로 인한 민심의 동요에 대해 신속하게 대처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또 ‘삼국사기’에 나오는 천문 관측에 관한 기록이 첨성대 건립 이후 급격히 증가했는데
이는 첨성대 건립을 전후해 국가적 지원 아래 본격적인 천체 관측의 중요성이 강조되었음을 보여준다고 이들은 지적했다.
◆"최만리 한글 반대한 보수파 분명"
▽최만리는 역사의 죄인인가(4월21일자)〓
신 교수는 최만리의 행적으로볼 때 무능하거나 부도덕한 사람이 아니었으며, 그의 상소 첫머리에 한글을 창제한 세종의 업적을
‘지극히 신묘하다’고 하는 등 칭송했으므로한글 창제를 반대한 것은 아니었다고 지적했다.
이에 일부 학자들은 “상소 첫머리에 ‘지극히 신묘하다’고 칭송한 것은 단순한 수사였으며 바로 다음에
‘야비하고 상스럽고 무익한 글자를 왜 창조하시나이까’라고 하는 표현이 뒤따른다”며 최만리의 한글창제 반대 입장은 분명했다고 밝혔다.
이 학자들은 또 “최만리 개인의 무능을 탓하는 것은 아니지만
분명 당시 그는 한글창제에 반대한 정치·학문 세력의 중심에 서 있었으며 그런 보수세력의 시대인식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라고 반박했다.
최만리 등 보수세력에게 한글창제는
한문에 대항해 중국과 별개의 독자노선을 걷겠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져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다고 이들은 주장했다.
▽명성황후 사진은 없다(7월7일자)〓
현재까지 나온 명성황후의 얼굴사진으로 가장 설득력을 갖는 것은 1895년을 전후해 청일전쟁 종군특파원으로 활동한 프랑스 언론인
빌탈 드 라게리의 저서 ‘한국, 독립할 것인가 러시아 또는 일본의 손에 넘어갈 것인가’에 들어 있는 사진이다.
그러나 신 교수는 이 사진을 정밀하게 확대해 보면 사진이 아니라 펜화임을 알 수 있다고 밝혔다.
신교수는 드 라게리가 이 책을 출판할 당시인 1898년에는 이미 명성황후가 시해된 다음이어서 사진이 진짜일 가능성이 떨어진다고 주장했다.
◆ 사진을 삽화로 인쇄했을 가능성
그러나 국내에서 유일하게 이 책을 소장하고 있는 김준희 전 건국대 교수(정치학)는
드 라게리가 1895년 3월 제물포항에 도착해 약 1년 간 체류했다고 밝히면서 그 근거로 이 책 속에 들어 있는 자세한 내용을 최근 공개했다.
김 전 교수는
“저자가 서문에서 이 책에 실린 삽화들은 사진에 근거해서 작성된 것이라고 명시하고 있어 명성황후 얼굴이 틀림없다”고 강조했다.
한국사진사연구소 최인진 소장은 “당시 기술수준으로 사진을 바로 인쇄할 수 없어 사진을 삽화로 그려 인쇄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윤정국기자>jkyoon@donga.com
■'3·1운동'편에 대한 '33인의 유족회'입장 ■
2001년 8월4일자 ‘신복룡 교수의 한국사 새로 보기’ 3·1 운동 편은 사실과 다른 점을 기술함으로써 ‘33인 유족회’에 많은 아픔을 주었다.
첫째, 글의 표제어에서 ‘3·1 운동은 민족 대표 33인의 거사가 아니다’라고 한 것은
3·1운동사에서 차지하는 민족대표의 역할을 의도적으로 비하함으로써 사실을 왜곡했다.
역사의 주체가 그 시대의 지도자인지 아니면 민중인지의 문제는 사관의 차이로 받아들일 수 있지만
민족운동사를전적으로 민중운동만으로 해석하려는 것은 균형 있는 역사서술이 아니다.
지도층의 발화(發火)가 없는 자연발생적 민중 운동이란 존재할 수 없기때문이다.
둘째, ‘연행 이후에도 독립 소원의 지조를 지킨 이는 극히 일부분’이라는 대목과 지조를 지킨 분으로 한용운과 양한묵만을 지칭한 것은
여타의 모든 분들이 변절했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독립선언서에서 서명하고 약속장소에 나갈 때 민족 대표의 각오는 죽음을 무릅쓴 것이었고,
문초과정에서 독립 정신을 지킨 분들이 많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언급하지 않았다.
셋째,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은 네 분이 마치 현장 도피의 성격을 갖는 것처럼 기록된 것은 사실과 다르다.
태화관에 참석하지 않은 네 분은 각자 지방에서 만세운동을 지도하기 위한 책무가 있었기 때문에 다소 늦었거나 참석하지 못한 것이다.
넷째, 약속 장소를 태화관으로 변경한 것은
민족 대표가 파고다집회에 참석할 경우 흥분한 청년들이 일본경찰과 충돌함으로써 유혈 사태가 일어날 것을 걱정했기 때문이다.
특히 약속장소가 이완용의 별장이었다는 사실은 그러한 친일적 장소에서 민족정기를 표현하는 것이 더욱 의미 깊은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다섯째, 본문의 삽화에 기생들이 시중드는 장면을 그린 것은 애국정신을 훼손한 것이다.
태화관에 참석한 열두 분의 목사님들은 음식이 나오자민족을 위한 기도를 올렸고 기생의 시중을 받지 않았다.
그 당시의 분위기는 너무도 엄숙하여 차려놓은 음식조차 들지 못할 정도였다.
(33인 유족회)
출처:동아일보
비뚤어진 역사 바로보기 '한국사 새로보기'
한국사새로보기/신복룡 지음/285쪽 1만원 풀빛
‘한국인은 단일 혈통이 아니다’ ‘삼국통일은 허구다’ ‘조광조는 속도조절에 실패한 이상주의자다’….
올해 본보에 연재돼 뜨거운 논쟁을 불러 일으켰던 신복룡 교수(건국대)의 역사 에세이 모음집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있던 역사상식과는 판이하게 다른 시각을 담아 본보나 집필자나 곤욕을 치른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역사 비뚜루 보기’를 시작한 작가의 변부터 들어보자.
‘나는 역사의 패배자에 대한 연민을 강하게 갖고 있다.
역사가를 배출하지 못한 계급은 공적에 관계없이 역사의 주체가 되지 못하는 이 안타까운 현실을 나는 견딜 수 없었다.
그것이 묘청이든 신숙주든 원균이든 힘없는 소작농이든간에 역사의 패배자에 대한 변론을 해주는 것이 배운 값을 하는 것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저자는 어린시절 국사 시간에 원균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원씨성 가진 친구들이 어린 마음에 상처를 입는 것을 보면서 연민을 느꼈다고 한다.
그들을 웅변해주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가 많았다고 한다.
그렇게 시작한 연구작업은 많은 저항을 불러 일으켰고 필자에게도 힘든 싸움이었다.
이번 연재때도 마찬가지였다.
왕건의 훈요십조에 나타난 호남기피는 검증되지 않은 것이라고 했다가 “전라도 놈이냐”는 항의 전화에 시달려야했고
개화파 김옥균은 ‘그릇에 넘치게 물을 담은 경우’라고 했다가 “이 시대를 빗댄 말이냐. 다시는 그런 글을 쓰지마라”는 충고도 들었다고한다.
물론 지지와 성원도 많았다고 한다.
특히 ‘당쟁은 식민사학의 희생양이었다’ ‘구한말 망국의 책임을 내부요인에서 찾지 않는 안이한 역사학계는 반성해야 한다’등이 반향이 컸다고 한다.
신교수의 주장은 파격적이다.
수능시험을 앞둔 고 3생이 “선생님 말씀대로 답을 쓰면 틀리는데 어떻게 해야하느냐”고 물어올 정도라니 말이다.
그러나 이 책을 모두 읽고 난 한 사람의 독자로서 기자가 느꼈던 소회는
‘역사가 어차피 힘을 가졌던 사람 입장에서 쓰여진다는 현실을 인정한다면 그렇지 않았던 사람들의 입장에서도 한번 귀기울여볼 만 하다’는것이었다.
그만큼 고정관념과 선입견에서 자유로워짐을 느꼈기 때문이다.
<허문명기자>angelhuh@donga.com
국사와 관련한 책은 수없이 많다. 이 책도 한국사 책이다. 이 책은 기존의 한국사 책과 뚜렷한 차별성이 있다는 점에서 그 출간의 의의를 갖는다. 저자 신복룡 씨는 건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의 교수로서 대외 교섭사를 전공해 왔다. 교섭사 연구의 첫 걸음이 우리역사 연구여야 함은 당연한 일. 1950년대 말 우연히 친구의 집에서 조우하게 된 이가 한국 현대사의 전설적인 인물인 박창화 옹이었는데 박옹은 일본 궁내부 도서관의 촉탁으로 10여 년 동안 동경에서 생활하면서 일본이 약탈해 간 자료를 읽으며 식민지 사학으로 왜곡된 역사의 이면을 소상하게 밝혔던 인물이다. 1999년에는 {화랑세기}의 원본을 공개해 사학계에 파문을 던졌던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에게서 강렬한 영향을 받으며 신복룡 교수는 일제 식민사학으로부터 우리의 역사를 해방시켜야 한다는 사명감을 갖게 된다. 또 삼국시대를 조명하면서 신라 중심으로만 보려는 시각에 동의하지 못했으며, 왜 발해를 가르치지 않는지, 왜 백제는 저주받은 땅처럼 기술되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이 모두는 결국 '잘못 배운 한국사'에서 비롯하는 것으로 '잘못 배운 한국사'를 교수의 처지에서 가르치기가 더 어려워 학생들에 대한 미안함과 그 갈등 끝에 쓰기 시작한 책이 이 {한국사 새로 보기}이다. 이 책에는 예민한 대목들이 많다. '우리민족은 단일혈통이 아니다' '명성황후의 사진은 없다 ' '전봉준은 동학교도도 접주도 아니었다' '3.1 운동과 손병희' 등의 대목이 바로 그러하다. 이 글들은 동아일보에 "신복룡의 한국사 새로 보기" 라는 제목으로 연재되었던 것으로 연재되자마자 파란을 일으켰었다. 이 책에 실린 원고의 3분의 1은 신문사와의 입장 차이로 게재되지 못했던 것으로 이 책을 통해 새로 선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의 입장은 단호하며 구체적인 전거를 들어 다만 학자로서 사실만을 말할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국사학계에 보수적이고 권위적인 풍토가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 우리 학계의 현실이고 보면 이 노 교수의 주장은 매우 용기있고 신선하다고 하겠다. 우리가 철석같이 믿고 있던 부분이, 사실은 역사적 사실과 거리가 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는 책이 바로 이 {한국사 새로 보기}이다.
[출처] [펌] 한국사 새로보기|작성자 동이사람
목차
- 한국인은 단일 혈통이 아니다
- 서낭당은 원시 석전시대의 병참 기지였다
- 풍수지리설의 신비
- 화랑은 모계 사회의 궁남들이었다
- 의자왕과 3천 궁녀의 허구
- 삼국통일은 허구이다
- 첨성대는 천문대가 아니다
- 빗나간 신라중심사와 약소 민족의 논리
- 훈요십조 제8조 호남기피에 얽힌 비밀
- 묘청은 반역자가 아니다
- 최만리는 한글 창제를 반대하지 않았다
- 성삼문과 신숙주
- 조광조는 편집된 이상주의자
- 임진왜란과 김성일의 책임
- 이순신과 원균
- 환곡과 장리쌀
- 당쟁은 식민지사학의 희생양
- 광해군을 위한 변명
- 김옥균의 생애
- 전봉준은 동학교도도, 접주도 아니었다
- 대원군과 개혁 정치
- 명성황후의 초상은 없다
- 기미년 3월 1일에 있었던 일
- 망국의 책임을 묻지 않는 역사학
- 미국은 당초 4대국 분할을 획책했다
- 이승만과 김구
- 김일성의 진위 논쟁
- 두계학파와 실증주의 사학의 허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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