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흔적

[스크랩] 신복룡, 10. 전봉준과 동학 / "전봉준은 동학의 접주가 분명하다"

제봉산 2008. 11. 6. 13:55

[신복룡교수의 한국사 새로 보기-10]전봉준과 동학

기사입력 2001-06-01 21:29

 

우리는 동학혁명의 주역 전봉준(全琫準)을 거론할 때면 아무 생각 없이

그가 동학교도로서 고부(古阜)의 접주(接主·동학교도들의 지역 책임자)였다는 것을 전제로 해 논리를 전개한다.
그러나 그가 동학교도였다거나 접주였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는 일차 사료(史料)는 어디에도 없다.

 

전봉준을 동학교도로 기록한 최초의 저술은 아마도 장도빈(張道斌)의 ‘갑오동학란과 전봉준’(덕흥서림·1926)인 것으로 보이며,

천도교 측 기록으로서는 이돈화(李敦化)의‘천도교창건사(天道敎創建史)’(천도교중앙종리원·1933)가 전봉준을 동학교도로 서술하고 있다.

지금도 학계에서는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종교학자인 폴 존슨에 따르면, 한 인간이 어떤 종교의 신자가 되기 위해서는

(1)종교적 체험을 겪은 후 (2)그 종교에 귀의(歸依)하고 (3)기도하고 헌신하면서

(4)예배(ceremony)에 참석한 연후에야 완전한 신자라고 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전봉준의 경우에는 이 네 단계의 어느 경우도사실로 입증되지 않는다.

전봉준이 진실로 열렬한 동학교도였다면 고부민란 이후 그가 체포될 때까지

그의 손으로 작성된 그 숱한 격문과 대정부요구서(對政府要求書·폐정개혁안)에는 왜 동학을 옹호하는 구절이 한 마디도 없을까?

▼종교 옹호 논리적 비약▼

어떤 인물이 어떤 종교를 믿었다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그가 그 종교를 절대 진리로 받아들인다는 신앙 고백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있는가? 그의 입교 의식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확인되는가?

이러한 의문들은 전봉준을 동학교도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던지는 질문이다.

이러한 나의 물음에 대해 전봉준이 동학교도였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공통된 논리는

전봉준이 문초를 받으면서 동학을 ‘몹시 좋아했다’고 대답한 것으로 보아 이는 곧 그가 동학교도임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비약된 해석이다. 왜냐하면 ‘좋아하는 것’과 ‘믿음’은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어떤 종교를 믿는 사람은 그 종교를 좋아할 수있다.

그러나 그 종교를 좋아한다고 해서 그가 그 종교를 신봉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우리나라의 학자 중 박종홍(朴鍾鴻)이나 조지훈(趙芝薰)만큼 동학을 좋아한 사람도 없었으나, 그들이 천도교도는 아니었다.

성서를 읽고 감동을받았다고 해서 모두 기독교인이 되는 것도 아니다.

논리적으로 말할 때 ‘A는 B이다’라는 설명이 가능하다고 해서 ‘B는 A이다’라는 논리가 반드시 성립되는 것은 아닌 것이다.

전봉준에 대한 논의는 한술 더 떠서 그가 고부 접주였다는 주장도 나왔다.

본시 접(接)이라 함은 동학교문의 고유 용어가 아니라 그 당시의 서당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그 서당의 선생(훈장)을 접장(接長) 또는 접주라고 했다.

오늘날까지도 우리 사회에서 교사를 접장이라고 부르는 용어가 일부 통용되고 있기도 하다.

▼접장은 '서당의 훈장'을 의미▼

전봉준이 동학 접주였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전가의 보도처럼 내세우는 논거는 그가 법정에서 신문받을 때,

“너는 고부에 주접(住接)할 때에동학을 가르쳤는가?(汝住接古阜時 不行敎東學乎)”라는 구절이다.

동학 교단과 일부 학자들은 위의 구절에서 ‘여주접고부시(汝住接古阜時)’를 “네가 고부의 접주로 있을 때”라고 해석하면서,

이미 그가 접주임을 전제로 해 재판이 진행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치명적인 오류다. ‘여주접고부시(汝住接古阜時)’란 말은 “네가 고부에 머물러 살 때”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대목을 해독하기 위해 자전(字典)을 펴볼 것이 아니라 국어사전을 보았어야 했다.

‘주접(住接)’이라는 단어는 ‘한때 머물러 산다’는 뜻으로 한글중사전에도 나온다.

영국의 역사학자 E H 카의 지적처럼 역사학자가 문헌을 정확히 해석한다는 것은 하나의 미덕이기 이전에 신성한 의무이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위의 질문에 대해 전봉준이

“나는 서당의 선생으로서 아동을 가르쳤을 뿐 동학의 교리를 준행하거나 가르친 바가 없다(矣身訓導 如干童蒙 無東學行敎之事)”고

대답했다는 사실이다.

그가 동학교도도 아니고 접주도 아니었다는 사실에 대해 이보다 더 확실한 대답이어디에 있겠는가?

▼문헌해석 치명적 오류▼

아버지인 전창혁(全彰赫)이 고부 군수 조병갑(趙秉甲)에게 매맞아 죽은개인적인 원한과

탐관오리의 압제 밑에서 신음하는 백성들에 대한 연민에서 비롯되어 무장 봉기를 일으킨 전봉준으로서는

당시 엄청난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동학의 조직과 세력을 외면하고서는 봉기가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가 법정 진술에서 고백하고 있듯이, “남들의 등에 밀려” 동학농민군의 지도자로 부상했을 때 그는 이를 거절할 수가 없었겠지만,

동학을 하나의 종교로 받아들일 생각은 없었다.

그리고 전봉준이 마음 속에서 우러나는 신자요 접주였다면 그의 직업을 묻는 법정 진술에서 ‘접주’라고 대답했어야지 ‘선비’라고 대답했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전봉준이 동학 교도가 아니었다거나 접주가 아니었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나는 이 점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갑오혁명은 농민들의 봉기▼

왜냐하면 1894년의 일련의 사건들, 즉 갑오농민혁명의 성격을 규정하는과정에서 전봉준의 교도 접주를 인정한다는 것은

이 일련의 투쟁이 농민혁명이 아니라 종교 투쟁이라고 주장하는 호교론(護敎論)으로 변질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갑오농민혁명에서는 민란의 요소가 독립 변수였고 종교는 종속 변수일 뿐이다.

요컨대 전봉준은 접주이기는 커녕 동학교도였다는 것이 사료로 입증되지 않는다.

그는 후세 사가들의 곡필(曲筆)에 의해 동학도로 규정되었을 뿐이다.

 

전봉준이 동학도였다거나, 아니면 고부의 접주였다는 주장은

그가 동학을 주요 변수로 해 전개된 혁명의 지도자라는 사실을 지나치게 의식한 선입견에서 나온 성급한 단정이라고 본다.

아니면 영웅과 자신들의 동일시(同一視)를 통해 효과를 얻으려는 교단 측과

학문적 수련이 철저하지 못한 몇몇 학자들의 일방적인 해석에 지나지 않는다.

신복룡 건국대 교수(정치외교사)

 

 

 

"전봉준은 동학의 접주가 분명하다"

기사입력 2001-06-21 18:39

 

◇한양대 윤석산교수 기고

신복룡 교수는 “전봉준이 동학 교도가 아니었다”라는 주장의 근거로,‘전봉준 공초’ 등의 사료를 중심으로 여섯 가지를 거론하고 있다.

그러나 신 교수가 개진한 주장은 사료에 대한 해석을 통해, ‘그럴 수 있다’라는 주장 정도에 그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결정적인 근거가 되지 못한다는 말이다.

신 교수의 주장대로 ‘접’이라는 말이 유교의 용어라는 것은 이에 관심을 조금만 지닌 사람이면 누구나 알고 있는 일이다.

그러나 동학의 ‘접’은 정신적인 조직을 일컫는 말로 쓰인 것으로, 유교의 그것과는 다르다.

특히 공초(범죄 사실을 진술하는 것)의 앞머리에 “동도 죄인 전봉준초초문목(東徒罪人全琫準初招問目)”이라고 명기했듯이,

이미 전봉준을 ‘동도(東徒)’, 즉 ‘동학도’임을 상정하고 시작하는 공초에서 무슨 명목으로 유학의 ‘접’을 논하겠는가.

따라서 전봉준 공초에 쓰인 ‘접’은 모두 동학의 ‘접’을 지칭하며 쓰였다.

또한 전봉준의 진술에서 직업을 묻는 말에 “선비로서 업을 삼고 있다”라고 대답한 것을 통해

신 교수는 ‘전봉준은 동학의 접주가 아니다’라고 단언하고 있다.

‘동학의 접주’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동학의 정신 조직의 한 단위인 ‘접’의 우두머리라는 뜻이지

결코 직업, 곧 생업(生業)을 뜻하는 말은 아니다.

오늘 동학을 이은 천도교 조직에 교구별 조직과 연원(淵源) 조직이 있다. 이 연원 조직이 곧 당시의 접 조직과 같은 것이다.

본인도 연원조직의 한 직책인 ‘신훈(信訓)’이다.

누가 나에게 직업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내가 ‘신훈’이라고 대답하기 보기보다는 ‘교수’라고 대답할 것은 당연한 일이다.

특히 이들 공초 중에서 “동학교도 중 접주를 뽑는 것은 누가 하느냐?(東徒中差出接主 是誰之爲)”는 물음에

전봉준은 “모두 최법헌(해월 최시형을 말함)으로부터 나왔다(皆出於崔法軒)”라고 답하고 있으며,

이어 “네가 접주가 된 것도 역시 최(崔)가 뽑은 것이냐?(汝之爲接主 亦崔之差出乎)”라는 물음에

전봉준은 “그렇다(然矣)”라고 단호하게 대답하고 있다.

이는 곧 전봉준 스스로 ‘동학의 접주’임을 분명하게 밝히는 대목이다.

이러한 부분에 관해 신 교수는 거론조차 하지 않고 있다.

이는 신 교수가 사료를 엄밀하게 검토하지 않았기 때문에 파생된 결과인지, 혹은 매우 의도적으로 누락시킨 결과인지는 알 수가 없다.

 

여하튼 상정되는 이 두 가지의 경우 중 어떤 경우가 된다고 해도,

신 교수는 자신이 거론한 “후세 사가들의 곡필(曲筆)”이나

“학문적으로 철저하지 못한 몇몇 학자”들의 대열에 스스로가 들 수밖에 없음이 분명하다.

 

 

[특별기고]신복룡/동학군 순국선열 지정을

기사입력 2001-08-14 18:41

 

1894년 동학농민혁명군들은 기울어가는 나라를 바로잡기 위해 목숨을바쳐 싸웠다.

그러나 독립운동이 아니라는 이유 때문에 정부의 서훈을 받지 못하고 있다.

광복절을 맞아 건국대 신복룡 교수가 동학농민군에 대한 명예회복과 서훈을 촉구하는 글을 보내왔다.<편집자>》

국도 1번(서울-목포)을 타고 전북 김제를 들어서면 원평이라는 작은 마을이 나오고 그 끝자락에 학수대(鶴壽臺)라는 누정(樓亭)이 있다.

마당에는 동학군을 지휘한 금구 접주로서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최경선과 함께 혁명 오걸(五傑)로 꼽히는 김덕명 장군의 추모비가 있다.

비석 바로 너머에는 잡초가 무성한 들판이 나오고 그 가운데 띄엄띄엄 무덤이 보인다.

이 무덤들은 갑오혁명 당시에 마지막 항전을 하다가 장렬하게 전사한 동학농민군의 무연고 묘지이다.

암울한 제국주의 시대에 옥창 너머 푸른 하늘에 영광된 조국의 미래를 그리던 애국 선열은 자신의 영예나 자식들의 부귀를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호국 전선에 일신을 바치느라 가정을 돌보지 못했고, 그래서 그 후손들은 가난하고 학업을 계속할 수 없어 이 시대의 낙오자처럼 살아가는 것은 우리 모두가 책임지고 보듬어야 할 문제이다.

복지 국가로 가는 정책이 아무리 화려하다 해도 그 애국 지사의 유족들이 음습한 그늘 속에 살아가고 있다는 것은 역사의 방기(放棄)일 수

밖에 없다.

세월이 좋아져 다소의 포상금을 받고 애국지사로 추서된 분의 후손들은그래도 나은 편이다.

순국 선열의 후손으로서 아직도 소외 받고 아무런 영예도 받지 못한 사람들은 아마도 1894년 갑오동학농민군의 후손들일 것이다.

서훈이나 연금은 커녕 묘소도 없이 멸문의 화를 당한 후손들은 조상에 대한 긍지를 느끼지도 못한 채 당장의 삶을 걱정하며 살아가고 있다.

남들은 국립묘지에 묻혀 있는데 왜 동학농민군들은 아직도 원혼이 되어구천을 헤매고 있는가?

그것은 ‘독립운동자 예우에 관한 법률’의 해석상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이 법에는 순국 선열의 범위가 ‘국권 침탈 전후로부터 독립운동을 한 분’으로 명시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동학농민군이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이 정부의 해석이다.

갑오혁명 이듬해인 1895년의 을미의병에 참여한 유인석 안병찬 이강년 허위 등은 애국지사이고

을미의병의 중요한 뿌리를 이루고 있는 동학농민군을 순국선열에서 제외한다는 것은 불합리하다.

1년 앞서 있었던 동학농민군의 살육도 국권 침탈로 보아야 한다.

더구나 서훈의 신청은 유족만이 할 수 있다(동법 3조 1항).

그러나 그 후손 중에 서훈 신청서를 작성할 의지와 학식을 갖춘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런즉 정부가 나서서 특별법을 제정해 이 문제를 풀어야 한다.

그들의명예회복뿐만 아니라 정읍, 고창, 삼례, 공주 등지의 동학농민혁명 관련지역에 대한 유적화 작업을 서둘러야 한다.

‘국립4·19묘지 규정’이나‘5·18민주화운동에 관한 특별법’이 좋은 선례가 될 것이다.

정부에서는 이들을 추서할 경우에 발생하는 재정을 걱정할 수도 있으나그것은 그리 심각하지 않다.

‘법률’에 따르면 금전적 수혜자는 손자 대에서 그치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동학농민혁명은 이미 백여년 전의 일이어서 손자가 살아 있는 경우도 극히 드물다.

문제는 명예 회복이다. 그들은 ‘동학란 수괴’의 자식이 아니라 순국선열의 후손으로 살아가고 싶을 뿐이다.

유림이나 기독교계의 정서를 탓해서는 안 된다.

그들의 행적이 독립운동사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은 이미 학계가 합의한 사항인데 정부는 무엇을 더 망설이는가?

신복룡 (건국대 교수·한국정치사)

출처 : keiti
글쓴이 : 세발까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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