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흔적

[스크랩] 신복룡, 8. 당쟁과 식민지사학

제봉산 2008. 11. 6. 13:53

[신복룡 교수의 한국사 새로 보기 8] 당쟁과 식민지사학

기사입력 2001-05-18 18:48

 

TV드라마가 끼친 가장 큰 폐단은 시청자들에게 당쟁에 대한 오해를 유발한 점일 것이다.

역사극에 등장하는 우리 선조들의 정치하는 모습이란 음모를 꾸미고, 복수하고, 귀양을 가거나 사약을 받고, 피를 토하며 죽는등

역사에 대한 긍지보다는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데 한 몫 하고 있다.

그러나 당쟁을 바라보는 이같은 시각은 일제시대 식민사학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일본은 한국을 병합한 후 이를 합리화시키기 위해 한국인에게 자치 능력과 자질이 없다는 논리를 전개해야 했는데,

그 가장 적절한 논거를 당쟁에서 찾으려 했다.

그리하여 시데하라 아키라(幣原坦), 오다 쇼코(小田省吾), 호소이 하지메(細井肇), 하야시 야스스케(林泰輔) 등 일본 학자와

한국의 친일 사학자들이 이에 가세해 ‘조선은 당쟁 때문에 멸망했고, 일본이 통치하지 않으면 스스로의 힘으로 국가를 이끌어 갈 수 없다’는 논리를 전개했다.

식민사학자들이 당쟁을 비난하는 논리에 따르면

한국인의 민족성이 본래 싸움을 좋아하고, 잔혹하고 사람의 목숨을 경시하기 때문에 당파 싸움이 가열되었다는 것이다.

▼"피가 더러운 민족" 주장까지▼

특히 호소이 하지메는 한국인이 생리학적으로도 일본인과 달라서 피(혈액)가 ‘거무칙칙하고 더럽다’라고 썼다.

그러니 어찌 피를 속일 수 있으며, 어찌 이 민족을 개량할 수 있겠느냐고 주장했다.

이러한 논리에 한국인들이 장단을 맞추어 ‘민족개조론’이 등장했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소설가 이광수(李光洙)였다.

해부학자도 아닌 호소이가 한국인의 혈액을 거론한 것은 반론할 가치조차 없다 하더라도,

한국인이 그토록 싸움만 좋아하는 민족인가에 대해서는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조선시대의 한국은 하천을 중심으로 하는 농경 시대의 자연주의가 풍미하고 있었다.

민족 심리학의 입장에서 본다면 종교나 학문 또는 심성에 관계없이 인애(仁愛)를 중시하는 유교적 영향, 그리고 자비와 업보(業報)를

기본 관념으로 하는 불교적 영향을 심층 심리에 깔고 있어 매우 평화주의적이고 인도주의적인 성향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런 한국인이 싸움을좋아하는 민족이라는 것은 맞지 않는 주장이다.

뿐만 아니라 식민사학자들은 당쟁의 투쟁기간을 터무니 없이 길게 잡았다.

이 점은 너무도 집요하게 우리를 세뇌했기 때문에 알 만한 사람들조차도 조선왕조 500년이 온통 당쟁으로 지고 샌 줄로 알고 있다.

▼집요한 세뇌 현재까지 영향▼

조선조에 당쟁이 발생한 것은 선조 초기인 1575년이다.

그러나 당쟁이 역사적으로 비난받는, 즉 무고하게 인명을 살상하는 양상으로 변질된 것은 기껏해야 50년 정도의 세월일 뿐이다.

정확히 말하면 숙종(肅宗) 6년(1680) 남인인 허적(許積)과 윤휴(尹�)가 사약을 받은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에서부터

영조(英祖)가 탕평책(蕩平策)을 실시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정미환국(丁未換局·영조 3년 1727년)까지에 불과하다.

식민사학자들은 또 당쟁으로 인한 참극을 과장하고 있다.

무수히 칼을 맞아 죽고 사약을 받았다는 것으로 부풀리고 있으며 일반 사람들 사이에도 이것이 통념으로 되어 있다.

이는 일차적으로 당쟁과 사화(士禍)를 구분하지 못한 데서 온 결과가 아닌가 싶다.

당쟁에 관한 한 비교적 중립적 입장에서 썼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이건창(李建昌)의 ‘당의통략(黨議通略)’을 살펴보면

당쟁 때문에 죽었다고 분명히 판단되는 인명은 79명이다. 1년에 1.6명이 죽은 셈이다.

누구에게나 인명은 존귀한 것이요, 이 기간에 집중적으로 80명에 가까운 인명이 희생된 것을 미화할 수는 없다.

그러나 역사상 정치를 하는 곳에 인명의 희생이 없는 예란 일찍이 없었다. 소위 민주주의의 발상지라고 하는 서양에서도 그렇다.

예컨대 프랑스혁명 당시인 1792년 8월 10일 하루에만도 죽은 희생자가 1300명이었다. 1795년 7월 21일 하루에 처형된 왕당파가 718명이었다.
파리 코뮌 기간인 1871년 5월 21일부터 28일까지 소위 ‘피의 주간’이라고 하는 일주일 동안에 피살된 사람은 2만 5000명이며,

제정러시아 시대였던 1905년 1월 22일 ‘피의 일요일’에는 150명에게 사형이 집행됐다.

왜 저들의 역사는 민주주의의 투쟁사이고, 우리의 역사는 당쟁의 역사가 되어야 하는가?

멀리 남의 얘기 할 것 없이 한국의 경우를 보더라도 해방 이후 현재까지 정치적인 이유로 사형된 사람이 한 해에 평균 7.5명이나 된다.

▼인명희생 年 1.6명꼴 불과▼

결국 당쟁이란 조선조에 존재했던 정당(政黨)의 중세적인 형태였을 뿐이다. 다시 말해 당쟁이란 조정에서 벌어진 정치적 토론 과정이었다.

그러한 토론을 가리켜 우리 선조들은 당의(黨議)라고 불렀다.

당쟁이라는 용어 자체도 일본 학자들이 당의를 악의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지은 명칭이지, 우리의 용어가 아니다.

이상과 같은 식민사학의 당쟁사에 대해 우리가 주목해야 할 몇 가지 측면이 있다.

첫째, 조선조에서 당쟁이 가장 심했던 시절은 숙종 연간인데 바로 그 숙종은 조선조의 성군(聖君)으로 추앙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는 역설적으로 당쟁이 가장 첨예했던 시절일수록 백성들이 살기 편했음을 의미한다.

정적이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는 상황에서 정치인들은 부패할 수가 없었고, 백성의 삶에는 억울함이 생길 수 없었다.

숙종은 당쟁덕분에 성군이 될 수 있었다.

둘째, 탕평책의 실시와 더불어 당쟁이 없어지면서 조선조가 기울어지기시작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정언(正言) 한현모(韓顯謨)의 상소문(‘영조실록’ 4년 6월)에 나타나고 있는 바와 같이,

탕평책과 함께 사람들은 ‘뒤로 물러나 입을 다물고 혀를 묶어놓음으로써’ 조정에 정론(正論)이 없어지고

조선 왕조에 황혼을 알리는 낙조(落潮)가 드리우기 시작했다.

셋째, 그렇다면 영조는 왜 탕평책을 실시했을까?

그것은 그가 당쟁의 폐단을 절실히 느끼고 이를 없애기 위해 취한 조치가 아니라 그의 정치적 술수였다.

그는 본시 왕위 계승의 서열에 들어 있지 않았다.

그런 그가 노론의 지원으로 왕위에 올랐을 때 그는 노론에게 정치적 부채를 안게 되었고 이를기화로 노론을 등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같은 배경을 이용해 그들이발호하자 이를 제어하기 위해 다시 소론을 등용할 명분으로 탕평을 제시했던 것이다.

결국 당쟁이란 동서고금의 모든 정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보편적인 정치 현상이었다.

율곡(栗谷) 이이가 지적한 바와 같이 동인에 속한 사람들은 나이가 젊고 적극적이었으며,

서인에 속한 사람들은 나이가 많고 사려깊은 사람들이었다.

▼정책대안 제시는 칭송할일▼

이같은 현상은 결국 현대적 용어를 빌려 표현한다면, 동인이란 당시 진보주의자들이었고 서인은 보수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이 같은 목소리를 내지 않고 정책 대안을 제시했던 것은 어느 모로보나 칭송할 일이지, 비난받을 일은 아니었다.

인생살이란 묘한 것이어서, 지금의 삶이 행복하면 과거의 아픔이 추억이 되고, 지금의 삶이 불행하면 과거의 아픔이 회한(悔恨)으로 남는다.
결코 욕된 것이라고만 볼 수 없는 당쟁을 우리의 불행한 유산으로 치부하는 것은

지금의 정치가 불행하기 때문에 그것이 더욱 부정적인 것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일 뿐이다.

건국대 교수(정치외교사)

출처 : keiti
글쓴이 : 세발까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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