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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정전의 상징, 비무장지대 설정의 전말

제봉산 2013. 6. 24. 19:29
정전의 상징 비무장지대 설정의 전말  

정전의 상징, 비무장지대 설정의 전말




새로운 국면으로 전개된 전쟁

중국의 사정도 좋지 않았다. 무기와 장비 모두 유엔군에 비해 보잘것 없었고, 게다가 제해制海·제공권制空權을 완전히 빼앗겨 보급물자 수송에도 어려움을 겪었다. 또한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으로 출범한 중국은 신생국으로서 3년 목표의 경제개발계획을 수립했지만 지원군 파병으로 큰 차질을 빚었다.

결국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는 5월, ‘38도선 부근에서 지구전과 회담을 병행하여 휴전을 매듭지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리지웨이 유엔군 사령관도 ‘대규모 공격 대신 아군의 관찰범위를 확대하는 중요한 거점을 점령한다’는지시를 내린다. 휴전협상은 급진전됐다.

유치한 신경전
7월 8일 예비접촉에 이어 이틀 뒤인 7월 10일 본회담이 진행됐다. 하지만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기 위한 양측의 신경전은 예비접촉 때부터 치열했다. 8일 열린 예비접촉에서 유엔군 측은 동양의 풍습에서 ‘황제와 승자의 자리’를 뜻하는 ‘남면南面(남쪽을 향해 앉는 것)’을 선점했다.

반격에 나선 공산군 측은 보드카와 맥주, 과일 캔디 등을 내놓았다. 승자의 아량으로 베푸는 하사품을 의미했다. 숨은 뜻을 알아차린 유엔군 측 연락장교단이 거절했다. 이틀 뒤(10일) 공산군 측 지역인 개성에서 열린 1차 본회담에서는 더욱 유치한 신경전을 벌였다. 양측은 예비회담에서 안전보장을 위해 유엔군 측 대표가 탈 지프에백기를 게양한다고 합의한 바 있다. 그 합의대로 유엔군 측 지프가 백기를 달고 개성에 도착했다. 그러자 공산군 측 트럭 3대가 이 백기를 단 유엔군 측 지프를 개성 시내로 천천히 안내했다.

마치 ‘항복사절’을 연상시켰다. 이 뿐이 아니었다. 회담장에 앉은 유엔군 측 대표들은 왠지 이상한 시선을 느꼈다. 키가 작은 남일 등 공산군 측 대표들의 얼굴이 아주 높아 보였다. 공산군 측이 유엔군 대표단 자리에 4인치(10㎝ 정도)나 낮은 의자를 놓았던 것이다. 유엔군 측이 항의하고 의자를 바꿨을 때는 이미 공산군 측 사진기자가 ‘높은 의자에 앉아 패자를 깔보는’사진을 충분히 찍은 뒤였다. 양측은 ‘군사분계선의 위치’를 두고도 한 치의 양보 없는 논쟁을 벌였다.



군사분계선 획정의 전말
공산군 측은 전쟁 이전의 38도선을 군사분계선으로 정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유엔군 측은 되레 휴전회담 당시(1951년 7월)의 전선보다 30~50㎞ 북쪽에 군사분계선을 설치한 군사지도를 공산군 측에 제시했다. 비록 유엔군 측이 지금의 전선에서 공산군 측과 대치하고 있지만, 전 한반도와 전 연안의 제해·제공권을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유엔군 측은 지상에서는 공산군 측이 마땅히 더 양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육해공군을 통합한 군사력의 우세로 협상의 목적을 달성하려는 것이었다. 유엔군은 ‘일본을 굴복시킬 때도 단 한 명의 미군이 일본 본토를 밟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공산군 측은 ‘일본을 굴복시킨 것은 조선인의 투쟁과 중국인의 인민전쟁, 그리고 소련의 저항이었다’고 반박했다. 공산군 측은 ‘반면 미국은 소련이 가담하기까지 패전을 거듭하지 않았느냐’고 쏘아붙였다. 군사분계선 획정을 두고 양측이 역사논쟁까지 벌인 것이다.

8월 10일에는 양측이 회담 테이블에서 무려 2시간 11분 동안 살벌한 눈싸움을 벌이는 진풍경을 연출하기도 했다.
협상은 이후 1년 9개월을 더 끌었다. 판문점에서는 159회의 회담과 575회의 공식회의를 열었고, 1800만 단어를 주고받은 끝에 휴전협정에 서명했다(1953년 7월 27일).

휴전회담의 댓가
그러나 지루하게 진행된 휴전회담의 댓가는 엄청났다. 한국전쟁 발발(1950년 6월 25일)~휴전(1953년 7월 27일)까지 전쟁의 전 기간(1127일) 가운데 무려 764일을 지금의 비무장지대 근방에서 싸웠다. 모두 휴전회담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한 국지적인 고지쟁탈전으로 전쟁 전 기간의 2/3를 소모한 것이다. 회담 기간 중 전선의 변화는 종심 20㎞ 정도에 불과했다. 소모적인 전투로 양측의 사상자는 늘어만갔다. 전쟁 당사자인 남북한은 물론, 유엔 16개국과 중국 등 모두 19개국 젊은이들이 비무장지대 일원에서 피를 흘렸다.

중국은 회담기간 중 한반도를 횡으로 가로지르는 250㎞의 모든 전선에 종심 20~30㎞의 두꺼운 방어선을 갖추고 지하갱도를 구축했다. 중국은 이를 ‘지하만리장성’이라 했다. 지하장성의 총연장만 해도 4000㎞에 육박했다. 그러니까 휴전회담의 와중에서 벌어진 지루한 국지전의 결과 지금의 비무장지대 일원은 이미 거대한 단일요새가 되었고, 그 요새에서 수많은 젊은 넋이 스러져 간 것이다. 향로봉과 피의 능선, 단장의 능선, 해안분지, 가칠봉, 백석산, 월비산, 불모고지, 백마고지, 저격능선, 삼각고지, 수도고지-지형능선, 351고지 등은 결코 잊을 수 없는 전장이다.

그렇게 맺은 휴전협정의 핵심은 ‘비무장지대 설치’였다. 쌍방의 접촉선을 군사분계선으로 하고, 동서 248㎞에 남북 2㎞씩 후퇴하는 비무장지대(총면적 992㎢)를 설치, 적대행위의 재발을 막도록 한 것이다.



잦은 무력분쟁
그에 따라 비무장지대에 출입하는 인원은 각각 1000명을 넘지 못하도록 했다. 민사행정 및 구제사업을 위해 출입하는 민사경찰도 보총과 권총만으로 무장하도록 했다. 철책과 같은 어떤 군사시설도 설치하면 안 된다. 하지만 현실은 ‘비무장지대’가 아니라 ‘중무장지대’다. 군사분계선을 기준으로 2㎞씩 떨어져 있어야 할 북방·남방한계선이 계속 ‘전진 앞으로!’했다. 1963년부터 북한이 군사분계선 북측초소들을 연결하는 진지를 구축하자 남한도 미군의 지원을 받아 남방한계선에 철책을 세우기 시작했다.

1972년 당시 문화공보부가 낸 자료를 보면 살벌한 내용을 담고 있다. ‘북괴는 비무장지대를 요새화함으로써 휴전선을 사실상 2㎞ 남진했다. 225곳의 민정경찰초소를 설치했으며, 따발총으로 무장한 8800여 명을 콘크리트로 완전 갱도화한 진지에 전격 투입했다.’

명색이 비무장지대인데도 무력분쟁이 잦았다. 군사정전위 자료에 따르면 북한이 군사정전위에서 철수한(1991년) 직후인 1992년까지 북한의 무장침투 및 공격사건은 1585건에 이른다. 이 가운데 굵직굵직한 사건은 ‘북한 124군 부대의 청와대 습격’및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이상 1968년)’와 ‘판문점 도끼만행사건(1976년)’등이다. 이외에도 초소습격, 해안포발사, 무장간첩 침투, 첩보기 격추 등 크고 작은 사건들이 일어났다.

비무장지대의 명예회복 필요
그러나 휴전협정과 그의 산물인 비무장지대는 한반도는 물론 세계평화의 마지막 보루 역할을 해왔음을 간과할 수는 없다. 사소한 사건이 전쟁발발로 확대될 수 있었지만, 전면전을 두려워한 양측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끝까지 넘지 않았기 때문이다. 2013년은 휴전협정이 체결된 지 만 60년이 되는 해다. ‘비무장지대의 명예회복’이 필요한 시점이 아닌가 싶다. 휴전협정에 명시된 그대로 비무장지대를 이름 그대로 ‘비무장화’하는 것이다. 휴전협정 제6항은 다음과 같이 명시했다. ‘쌍방은 모두 비무장지대 내에서 또는 비무장지대로 부터 또는 비무장지대로 향하여 어떠한 적대행위도 하지 않는다.’

1991년 남북한이 채택한 기본합의서 제5항 17조는 또 다음과 같이 ‘합의’했다.“남북군사분과위원회는 불가침의 이행과 준수 및 군사적 대결상태를 해소하기 위해 더 필요하다고 서로 합의하는 문제들에 대해 협의하고 구체적인 대책을 세운다.”그렇다면 비무장지대는 단순한 정전의 상징이 아니라 평화의 상징으로 거듭날 수 있지 않을까.


 



출처 : 월간 문화재 사랑(Vol 103) 2013년 06월호..........


글·사진. 이기환 (경향신문 문화에디터, 스포츠경향 편집국장)
사진. 연합콘텐츠


 

출처 : 演好마을
글쓴이 : jujub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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