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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pga의 최고의 명승부

제봉산 2012. 7. 4. 19:02

1998년 US오픈 당시 연장 20홀 접전 끝에 우승한 박세리(오른쪽)과 준우승한 추아시리폰. /조선일보DB

지금으로부터 14년 전인 1998년 7월 7일, 한국의 새벽은 이 소녀가 깨웠다. 미국 위스콘신주 콜러의 블랙울프런골프장에서 열린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 US오픈 경기서 연장까지 가는 접전 끝에 커다란 우승컵을 들어올린 박세리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스무살 동갑내기였던 박세리와 미국 명문 듀크대에 재학 중이었던 태국계 아마추어 제니 추아시리폰의 20홀까지 이어진 경기는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 시청자들을 TV 앞으로 불러모았다.

공이 해저드 러프에 걸리자 연못으로 들어가 침착하게 샷을 하는 박세리. /조선일보 DB

◇14년 전 ‘뽀얀 발로’ 세계의 시선을 사로잡은 박세리, 또 같은 장소서 US오픈에 도전하다.
박세리는 당시 연장 18홀에서 위기를 맞았다. 공이 물에서 20cm쯤 떨어진 해저드 경사면 러프에 걸린 것이다. 동타를 이룬 상황에서 자칫 잘못하면 우승이 눈앞에서 날아갈 수도 있는 순간. 골프로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던 20세 소녀가 맞닥뜨리기엔 절대 쉬운 상황이 아니었다.

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박세리는 물가 러프에 있는 공을 그대로 치기로 하고 그 자리에서 골프화와 양말을 벗고 물속으로 들어갔다. 시커멓게 탄 종아리와 달리 양말 속에 감춰졌던 그녀의 맨발은 너무나 하얗고 연약해 보였다. 연못에서 기적적인 샷으로 기사회생한 박세리는 연장 20번 홀에서 마침내 우승컵을 안았다. 박세리의 영광이었고, 당시 IMF 외환위기로 암울한 상황에 처해있던 한국사람들에게 희망을 안겨준 눈물의 샷이었다.

공을 치기 위해 신발과 양말을 벗는 박세리. 시커멓게 탄 종아리와 달리 그녀의 뽀얀 발이 눈에 띈다.

LPGA 역사상 최고의 명승부로 꼽히는 그 경기가 14년이 지난 뒤 또다시 회자되고 있다. 박세리가 6일 오전(한국시각) 14년 전과 같은 장소, 같은 코스에서 개막하는 67회 US여자오픈에 또다시 출전해 우승에 도전하기 때문이다. 박세리는 미국 현지 외신들과의 인터뷰에서 “그 당시 우승 이후 많은 사람의 주목을 받으며 영웅으로 떠오른 뒤 많은 부담감이 있었다”며 “후배들이 모두 ‘박세리 언니 때문에 골프를 하게 됐다’고 말하는 데 나야말로 제대로 된 길을 가고 있는 지 갈피를 잡지 못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하지만 이렇게 다시 도전을 하게 돼 정말 기쁘고, 후배들과 우리나라가 자랑스럽다”며 “많은 사람이 꿈꾸던 것을 했다는 점에서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고 당당하게 밝혔다.

박세리의 우승 이후 대한민국에선 ‘세리 키즈’라고 불릴 정도로 많은 어린 여자 아이들이 박세리를 모델 삼아 골프에 뛰어들었다. 이후 이 세리 키즈가 LPGA에서 수십 차례 우승을 일궈내면서 해외 언론에는 ‘왜 한국 여성들이 LPGA를 휩쓰는가’에 대한 분석 기사들이 잇달았다. US오픈에서도 박세리 이후 김주연(2005년), 박인비(2008년), 지은희(2009년)가 우승컵을 들어올렸고, 지난해에는 유소연(21·한화)이 깜짝 우승을 차지해 한국 골프의 명성을 세계 곳곳에 알렸다.

‘국민 영웅’이 된 박세리는 이후 승승장구했고, LPGA 투어 25승을 올린 뒤 2007년 11월 골프선수 최고의 영예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2007년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박세리. /AP

◇스타가 된 박세리-슬럼프 뒤 간호사가 돼 새로운 삶을 살고 있는 추아시리폰
박세리의 ‘아름다운 도전’이 다시 한 번 세계의 시선을 끄는만큼 못지않게 또다시 주목받는 이가 있다. 박세리와 막판까지 접전을 벌였던 추아시리폰이다. 박세리와 추아시리폰의 이후 14년 인생을 추적하는 기사들이 쏟아지고 있다.

미국 ESPN은 3일 ‘세계의 시청자들을 사로잡았던 박세리와 추아시리폰’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1977년생 동갑에 너무나도 비슷한 삶을 살았던 두 소녀가 1988년 US 오픈 이후 전혀 다른 삶의 길을 걷게 됐다”며 둘의 인생을 조명했다.

1998년 우승을 거머쥔 박세리가 승승장구했던 반면 추아시리폰에겐 ‘골프가 인생의 모든 것’이 되기 어려운 순간들이 찾아왔다. 듀크대로 다시 돌아간 추아시리폰은 대학골프왕 타이틀을 3번이나 거머쥐면서 1999년 결국 LPGA 무대에 데뷔했지만, 골프는 그녀의 생각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추아시리폰은 ESPN과의 인터뷰에서 “대학을 졸업하자 사람들은 모두 내가 프로 골퍼가 되길 원했어요. 부모님은 말할 것도 없고요. 하지만 프로 생활은 대학 때와는 천지차이였죠. 대학 때는 끈끈한 팀원들과 함께 희로애락을 나눴는데, 프로의 생활은 정말 철저히 자기 중심적이고 경쟁이 치열했어요. 이것이 제 길인가 정말 고민이 컸죠”라고 말했다.

현재 간호사가 돼 있는 추아시리폰. 지난해 듀크대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듀크대-ESPN

그녀의 부모는 그녀가 골프선수로 성공하길 바랐다. 식당에서 일하면서 어렵게 번 돈을 모아 딸 뒷바라지에 쏟아부었다. “어느 날이었어요. 아버지가 4000달러 수표를 주시더라고요. 기죽지 말고 하라고요. 하지만 전 그 돈이 어떤 돈인지, 어떻게 버신 건지 알았기 때문에 ‘받을 수 없다’고 사양했죠.”

안팎으로 부담이 컸던 그녀는 프로 전향 뒤 몇 차례 대회에 나갔지만, 부진에 시달렸다. 2000년 2부 투어인 퓨쳐스 투어와 유럽여자골프투어에서 활동하면서 아시안 투어에도 도전했지만, 성적은 여의치 않았다. 버지니아대 보조 골프코치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간호사로 일하던 친구를 만났다. 장래에 대해 고민하던 추아시리폰에게 그녀는 한 줄기 빛 같았다. “몇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눴어요. 그녀가 제게 드리워진 어둠의 장막을 걷어주는 듯했죠. 이 길(간호사)이 내가 진정 원하는구나. 내 성격엔 이게 제일 잘 맞는구나 하고 깨닫게 됐어요.”

결국 그녀는 골퍼로서의 삶을 청산하고 간호사가 됐다. 현재 버지니아의 한 병원에서 심장 수술전문 병동 간호사로 일하고 있다. “전 제 생애에서 제가 가장 골프를 잘했던 때를 기억해요. 그건 프리샷 루틴(pre-shot routine·골프 치기 전 콘트롤 하기 위해 연습 샷을 하는 것) 때였죠. 정신을 집중했던 그때처럼 지금도 일에 집중하고 있어요.”

지난해 추아시리폰은 듀크대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그녀는 ESPN과의 인터뷰에서 “그때로 다시 돌아가서 그때처럼 할 수 있을 거라 생각들 하지만 아마 그렇게 못 할 것”이라고 단호히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전혀 후회나 거리낌이 없었다. 아픈 사람이 낫는 걸 도와주면서 더 나은 삶을 맛보고 있으니까.

“물론 그 경기(1998 US오픈)에서 우승하길 바랐죠. 하지만 만약 그랬다면 내 삶은 정말 미치광이 그 자체가 됐을 거에요. 결국은 골프가 내게 맞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을 텐데 그 시간이 좀 오래 걸렸겠죠. 저도 그 당시 제가 자랑스러워요. 하지만 난 지금이 훨씬 더 자랑스러워요. 그리고 박세리는 정말로 대단한 선수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쉬운 일 아니거든요. 하지만 그녀는 해냈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