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쟁점.

통합진보당이라는 怪物

제봉산 2012. 5. 6. 09:19

 

* 진보당이란 '怪物' 감싸고 키운 세력은 누구인가? 

 

대다수 국민은 진보당 비례대표 경선 부정의 실상을 보고 아연했다. 21세기에 어떻게 이런 정당이 있을 수 있는가, 그러고서도 어떻게 천연덕스럽게 '진보'라는 문패를 달 수 있는가 놀라웠다. 더 놀라운 것은 진보당 선거 부정은 새로운 게 아니라는 진보당에 몸담았던 사람들의 증언이다. 국민만 모르고 있었던 셈이다.

80년대 주사파(主思派)에서 흘러나온 NL(민족 해방) 계열은 2001년 충북 괴산군 군자산에 집단으로 모여 '10년 내 연방 조국 건설, 3년 내 민족민주정당 건설'을 선언한 '군자산의 약속(9월 테제)'을 채택하고 그 이후 PD(민중 민주) 계열이 창당했던 민노당에 조직적으로 입당했다. 뒤늦게 제도권 정당에 합류한 NL 계열은 당권을 장악하기 위해 2001년 PD 계열이 장악하고 있던 서울 용산 지구당에 자기편 당원 수백명을 위장 전입시켜 지구당을 접수했다. NL 계열은 이후 인천, 광주, 경기 등에서 위장 전입, 당비 대납(代納), 유령 당원 심기 같은 불법(不法)·탈법(脫法)적 방법을 서슴지 않았다. 그렇게 세를 늘려 2006년에는 당권을 장악하고 민주노총, 전교조 등으로 영향력을 확대해왔다. 이번 비례대표 경선에선 전국 투표소 218곳 중 128곳에서 대리·부정 투표가 벌어졌다. 온라인 투표에서도 똑같은 컴퓨터에서 서울, 대구, 전주 등 다른 지역에 사는 40명 이상이 투표한 것으로 확인됐다.

2006년 진보당 NL파인 당 사무부총장과 중앙위원이 당원 명부를 북한에 넘긴 '일심회' 사건으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이번에 비례대표로 국회 진출에 성공한 이석기 당선자는 북한 지령을 받은 지하당 '민혁당' 경기 남부 책임자로 활동하다 징역 2년 6개월의 실형을 받았다. 그러나 이들 중 어느 누구도 과거의 종북(從北) 노선을 버리고, 앞으로 대한민국 헌법을 지키며 정치를 하겠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하지 않았다. 민주당과 진보 지식인들은 이번 경선 부정에 대해 "경악을 금치 못하겠다"며 이런 사실을 이제야 알게 됐다는 듯한 쇼를 하고 있다.

조직적 선거 부정이 밝혀진 다음 당권파인 이석기 비례대표 당선자는 유시민 공동 대표에게 당권을 넘겨줄 테니 이 정도로 넘어가자며 사태 무마를 시도했다고 한다. 이정희 대표는 4일 진상조사위의 조사 결과에 대해 "의혹만 있고 합리적 추론도 없다"며 지도부 총사퇴를 거부했다. 민주당은 이런 진보당을 야권 연대 파트너로 삼기 위해 진보당의 반미(反美) 정강·정책을 그대로 따라 했다. 4월 총선에선 34개 지역구를 진보당에 넘겨주고 그 덕에 진보당 의석은 5석에서 13석으로 늘었다. 21세기에 이런 괴물(怪物)이 정당이란 간판을 내걸고 제1 야당과 손을 잡고 집권을 꿈꾸고 있다는 사실은 한국의 불가사의(不可思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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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보정치의 재구성 :패권주의 조직 틀 깨야

"정말 충격이다. 새누리당이나 민주통합당과 다른 게 뭐냐. 진보의 목소리를 키워야 한다는 생각에서 통합진보당을 찍었는데, 이름만 진보인 것 같다. 반성도 제대로 안 하고, 수습책 놓고 싸우는 모습에 정이 떨어진다."

4·11 총선에서 통합진보당을 찍었던 30대 회사원 박아무개씨(경기 성남시)의 말이다. 박씨는 "(서울) 관악을 야권단일후보 경선 여론조사 조작 의혹이 터졌을 때만 해도 '경기동부연합' 운운하는 건 색깔 공세라고 여겼는데, 이젠 통합진보당도 부패한 게 아닌가 뼈저리게 느낀다"며 "대표단과 비례대표 후보 전원이 물러나고 당을 제대로 쇄신하지 않으면 더는 통합진보당을 지지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부정경선 지켜본 지지자들
"다수 앞세운 힘의 논리 안돼"
"쇄신 노력 안하면 지지철회"
뿌리깊은 패권주의 어디서
민노당 합류 자주파 세규합
평등파 중심 당 장악해 충돌
세력우위 앞세워 분파성 키워
참여와 소통의 조직문화로
정파적 기득권 고수론 한계
국민요구 부합한 정책 경쟁
민주적 의사결정 틀 만들때


경선 부정 파문과 4~5일의 전국운영위원회 파행을 지켜본 통합진보당 지지자들은 박씨와 비슷한 심경을 나타냈다. 대학 시절 자주파(NL) 쪽에서 학생운동을 했다는 대학원생 김아무개씨는 이렇게 말했다.

"당권파의 패권주의가 싫었지만, 그게 그들 나름대로 '풀뿌리 정치'의 노하우나 실력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전국운영위에서 당권파가) 부정경선 조사 결과를 두고 '부정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다'며 버티는 것을 보고 소름이 끼쳤다. 그게 국회 의석 13석의 제3당에서 할 수 있는 말이냐."

"민주당이 희망을 보여주지 못하니 통합진보당에 기대를 걸었다"는 지지자 이아무개(31·서울 대방동)씨는 "다수가 되면 뭐든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힘의 논리와 스스로를 돌아볼 줄 모르고 잘못해도 부끄러운 줄 모르는 구시대 운동권의 악습이 엮인 결과"라고 말했다.

통합진보당이 이런 모습을 보이는 이유에 대해 전문가들은 이 당이 총선을 앞두고 옛 민주노동당, 옛 국민참여당과 진보신당 탈당파가 모여 급조됐다는 점을 지적한다. 김윤철 경희대 후마니타스 교수는 "통합진보당은 야권연대라는 정치적 기회를 통해 교섭단체까지 만들 수 있다는 전망 아래 만들어졌다. 그러니 이념과 정책·가치를 공유하기보다, 파벌이 연합한 정당의 성격을 띨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근본적으로는 당권파의 뿌리 깊은 '패권주의'와 끼리끼리 모이는 정파주의가 원인으로 꼽힌다. 현재 통합진보당 당권파는 1991년 민중운동진영이 만든 연대체인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이하 전국연합)에서 출발한 경기동부연합과 광주전남연합 출신이 다수를 차지한다. 1997년 대선 당시 전국연합은 진보 후보인 권영길 '국민승리21' 선거운동본부에 참여했는데, 정작 선거에선 다수가 김대중 당시 새정치국민회의 후보를 지지했다. 이때 끝까지 권 후보를 지지하고, 평등파(PD)와 손잡고 민주노동당 창당까지 함께한 이들이 바로 경기동부연합이다.

그런데 창당 이후 전국연합이 뒤늦게 민주노동당에 참여하고, 당 규모가 커지면서 주도권 경쟁이 치열해졌다. 그 결과 패권주의와 정파 논란이 불거졌다. 추가로 입당한 자주파가 경기동부연합과 함께 빠르게 당을 장악하면서, 이전까지 다수였던 평등파는 6 대 4로 밀리게 된다. 경기동부연합의 근거지라 할 수 있는 민주노동당 수원지구당에서 활동했던 한 관계자는 "국가보안법에 의해서 언제든 붙잡혀 갈 수 있다고 생각했던 이들은 동료에 대한 애착이 무척 강했다. 하지만 같은 정파의 동료 이외에는 자신들의 사상을 지키기 위한 도구로 판단하는 경향이 있었고, 이것이 결국 다른 세력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 패권주의로 드러났다. 민주노동당 시절에도 자기 정파의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해 대리투표를 하거나 투표함을 옮기며 표를 모으는 일을 했었다"고 밝혔다. 패권주의와 정파에 대한 우려는 일찍부터 당 공식 기관지에서도 다뤄질 정도로 심각했다. 민주노동당 기관지 <진보정치>는 2003년 149호에서 "정파는 분명히 존재하는데, 그 실체가 불분명하다는 것, 즉 드러나지 않는 권력으로 작동함으로써 결정은 하나, 그 결과는 책임지지 않는다는 것이 민주노동당 내 정파문제의 핵심"이라고 지적했다. 경기동부연합 등을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 조현연 성공회대 교수는 '민주노동당 분당 과정 연구'라는 논문에서 "당은 21세기에 활동하고 있는데 내부 정파구조와 질서는 20세기적 낡은 사고와 전망에 갇힌 채 형성됐다"며 "낡은 정파질서를 타파하지 않고서는 '운동권 동창회'를 넘어설 수 없을 것"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2006년 당대표 선거 직후에도 위장전입, 집단 주소이전, 당비 대납, 대리투표 등의 부정선거 의혹이 공개적으로 제기됐지만, 제대로 치유되지 못한 채 봉합됐다. 서복경 서강대 현대정치연구소 연구교수는 "당내 문제를 공개적으로 제기하고 논의하면 자칫 보수 세력에게 공격의 빌미를 주게 되고, 그러면 당 존립 자체가 위험해진다고 판단해 문제가 있다고 여겨도 덮고 넘어갔다"고 말했다. 이번 부정경선 조사 결과를 놓고 당권파가 "조·중·동에 먹잇감을 던져줬다"고 비난하는 것은 이런 인식의 연장선이다.

김윤철 경희대 교수는 "이번 부정경선 파문을 진보정치를 원점에서 다시 시작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며 "이제 국민들이 통합진보당의 정파에 대해 속속들이 알게 됐다. 각 정파들은 근본적인 혁신을 통해 당내 주도권이 아니라, 누가 더 시대적 상황과 국민적 요구에 부합하는 이념·정책·인물을 갖고 있느냐를 놓고 경쟁해야 한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