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글·이야기

지난 IMF는 쓰디쓴 보약이엇다...

제봉산 2010. 7. 6. 13:47

IMF 1년은 내게 인생을 가르쳐 주었다.

집에 배달된 노란 봉투
겁부터 났다… 휴직대상 통보였다… IMF의 시작이었다…
포도 노점상으론 하루 5만, 6만원 벌기 힘든데
회사 생활은 얼마나 편했던가
시장에선 '대충' '이 정도'가 통하지 않았다
그해 여름 시장에서 난 세상, 인생, 삶을 배웠다

1998년 여름, 퇴근하고 보니 회사에서 보낸 노란색 봉투의 등기우편이 집에 와 있었다. “올 것이 왔구나”라는 생각에 봉투 뜯기조차 겁이 났다. ‘회사 경영상 무급휴직 대상…’이란 내용이 들어 있었다. 눈앞이 캄캄해졌고 일순 모든 게 정지된 느낌이었다. IMF 태풍이 강타하면서 이미 회사에서 정리해고 통보를 받은 이들도 있었고 “다음은 누구누구 차례일 것”이란 뒤숭숭한 소문이 나돌았지만 정작 내가 그 대상 될 줄은 생각도 못했다. 열심히 일했다고 생각했는데…. 말이 2년간 무급휴직이었지 실제 복귀시켜 준다는 어떤 보장도 없었고 회사에선 퇴직금부터 챙겨가라고 했다. 눈물만 쏟아내는 아내 얼굴과 곁에서 놀고 있던 두 아이의 초롱초롱한 눈매를 마주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 아이들을 이젠 어떻게 키우지….” 한숨만 쉬었다.

1988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취업해 10년간 일한 직장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가족이나 친구, 주변 사람들을 만나면 대기업에 다닌다는 자부심을 갖고 힘있는 노조가 있다는 것을 자랑삼아 말하곤 했다. 하지만 IMF라는 태풍 앞에 모든 것이 무너졌고 꿈과 희망도 한순간에 날아가 버렸다.

그때까지 난 회사밖에 몰라 무엇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는 책임감과 의무감이 나를 짓눌렀지만 가족을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넉넉하지 못한 가정 형편에도 장남만은 공부해야 한다며 농사일조차 시키지도 않았던 부모님, 내 몫까지 농사일을 떠안고도 불평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던 동생들…. 나를 믿고 의지했던 그들을 보기 미안했다. 과수원을 하시던 부모님은 휴직했다는 소식을 듣더니 오히려 힘을 내라고 하셨다. 20㎏ 포도 한 상자를 1만원씩에 줄 테니 이문을 챙겨 생계비에 보태라고 하셨다.
승용차 트렁크와 뒷좌석에 포도상자를 실으면 16상자가 들어갔다. 염치를 무릅쓰고 주위의 이웃들과 회사 동료들에게 한 상자씩 팔아 달라고 했다. 하지만 그것도 한 번이면 족하지 두 번은 손 벌리기가 쉽지 않았다. 결국 포항·울산을 돌며 새벽시장 노점상으로 나섰다. 상인들은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새벽 일찍 나와있었지만 그런 사정을 모르는 나는 이들을 피해 외진 곳에 자리 잡았다. 하루 1~2상자 팔기도 힘들었다. 상인들과 좋은 자리를 놓고 시비가 붙어 “이게 국가 땅이지 당신 땅이냐”며 아귀다툼을 벌이기도 했다. 하루 5만원, 6만원을 번다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인줄 몰랐다. 여태껏 내가 다닌 회사란 얼마나 편안했던 것인가. 산다는 게 이렇게 전쟁인데….

시장은 나에게 인생의 삶이란 게 무엇인지도 가르쳐주었다. 한 번은 ‘바라포도(상품가치가 없는)알’만 따서 싸게 팔려고 내놓았더니 포도즙 만드는 가게에서 좋은 포도라며 있는 대로 가져오라는 것이었다. 시골에서 포도를 가져와 팔면서 수입은 좋았지만 끝물이어서 포도를 계속 대기가 힘들었다. 궁리 끝에 농산물센터에서 싼 포도를 사 가게에 보냈더니 주인은 포도가 다른 것 같다며 더 이상 가져오지 말라는 것이었다. 아! 상품가치가 없을 때는 가차없이 소비자가 외면하는구나…. 생산자와 소비자 간에 믿음과 신뢰가 없으면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구나…. ‘대충’이나 ‘이 정도면’으론 통하지 않는다는 걸 배웠다. 요즘에도 도요타 차의 리콜 사태를 보면서 내가 자동차의 부품 하나하나를 얼마나 정성스럽게 만들고 조립해야 하는지 새삼 느낀다.

여름철이 끝나면서 우연히 지역일간지에 나온 고압가스 자격증 소지자 취업 광고를 보고 자격증을 따야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공고 토목과를 나왔지만 나는 자격증 한 개가 없었다. 자격증은 공부 잘하는 아이들의 몫으로만 여겼다. 학원에 등록했지만 화학기호와 계산문제 등 기초가 없어 중도에 그만둘까 여러 번 망설였다. 하지만 오기가 생겨 열심히 해보자고 마음을 다잡아 독서실에서 공부에 전념했다. 학원 마치고 집으로 오는 버스 안에서도 입시생들처럼 배운 것을 복습하고 외웠다. 그해 고압가스기능사 시험에 당당히 붙으면서 세상을 모두 얻은 기분이었다.

한 번은 대기업 석유화학회사에 다니는 친구와 같이 위험물 기능장 시험을 쳤다. 그 친구는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합격자 명단에 내 이름은 있었지만 그 친구 이름은 찾아볼 수 없었다. 해냈다는 기쁨과 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너무나 가슴이 벅찼다. 남이 갖고 있지 않은 자격증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 나를 변하게 했다. 무엇보다도 주위에서 나를 인정해주니 기분이 좋았다.

이렇게 자격증을 따기 위해 그해 겨울부터 책에 파묻혀 지내던 중에 회사에서 갑자기 복직통보가 왔다. 경기가 풀리고 환율이 올라 자동차 수출이 잘되자 회사는 1년 만에 고참순으로 휴직 직원들을 다시 받아들였다. 퇴직금을 다시 반납하러 회사에 찾아간 날 나는 고향을 찾은 기분이었다. 직장 동료들과 다시 함께 생활하게 된 게 이리 기쁘고 행복할 줄이야. 결혼할 때 장인이 “내 딸을 데려가도 굶주리게 하진 않을 것 같다”고 하신 말씀도 새삼 떠올랐다.

축구경기의 옐로카드처럼 노란 봉투를 받고 세월을 한탄했던 그 1년. 나는 세상을 배우고, 사회를 배우고, 인생을 배웠다. 내가 다니는 회사가 얼마나 소중한지도 절실하게 느꼈다. 기업의 경쟁력은 개인의 경쟁력에서 나온다고 하지 않는가. 새로운 자격증을 따기 위한 나의 도전은 복직 이후도 계속돼 기능장 4개 등 모두 13개의 자격증을 따 회사에서 최고의 기능인으로 인정받게 됐다. 그해 여름은 내 인생에서 증발된 시간이 아니라 오히려 한 움큼 키가 더 큰 나를 발견한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