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지금 농촌은

거창의 동계 정온고택.

제봉산 2010. 6. 29. 08:48

거창 동계 정온 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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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절의 표본 동계 정온 - 인조가 청에 항복하자 자결시도



서울에서 볼 때 낙동강을 기준으로 하여 강 왼쪽을 경상좌도라 하고 강 오른쪽을 경상우도라고 부른다. 그러니까 오늘날 경상남도 지역은 옛날에 경상우도로 불렸다. 경상우도에서 손꼽을 수 있는 명가 중 하나가 선조, 광해, 인조의 세 왕대에 걸쳐 활동한 동계 정온 집안이다.

경상좌도의 집안들이 대체적으로 퇴계 이황의 학풍을 계승하였다면 우도의 집안들은 남명 조식의 학풍을 계승하였는데, 동계 정온은 사회적 실천을 강조하는 남명의 학풍을 이어받은 대표적인 인물로 꼽힌다.

동계 정온 종택이 자리 잡은 경남 거창은 ‘울고 들어가서 울고 나오는 곳’이라는 말이 전해진다. 산꾼들의 귀뜸에 따르면 거창 지역은 산세가 높고 험해서 들어갈 때는 심란하게 보이지만, 지내다 보면 인심도 좋고 먹을 것도 많아서 살기 좋은 곳이라는 것이다.

동계 고택은 거창 버스터미널에서 이름난 명승지인 수승대쪽으로 방향을 잡아 택시로 15분 정도 더 들어가야 한다. 수승대 바로 못 미쳐서 좌측길로 접어들면 강동마을이 나타나고 마을 정면 중앙에 동계 고택이 있다.

초계 정씨들이 조선시대에 명문가로 부상한 것은 동계 정온이 임금에게 목숨을 걸고 직언한 상소문에서 비롯된다.

동계가 46세 되던 해에 임금 광해군은 동생인 영창대군을 강화도로 귀향 보냈다가 강화부사 정항을 시켜 죽이고, 부왕인 선조의 계비이며 영창대군의 생모인 인목대비마저 폐출하려 하였다. 바로 이때 동계는 상소문에서 임금이 지금 패륜 행위를 저지르고 있다고 직언한 것이다.

이미 광해군은 친형인 임해군을 역모로 몰아 죽이고 외조부인 연흥부원군 김제남을 역적이라고 하여 죽였으며, 선왕의 공신, 현신들도 자기 귀에 거슬리는 상소를 했다고 해서 죽이거나 귀양을 보낸 바 있었다. 그러니 자기에게 패륜을 저지르고 있다고 직언한 동계를 그냥 놔둘 리 없는 것은 자명한 일.

동계가 올린 상소문은 광해군이 막 식사를 하려고 수라상을 받았을 때 입직 승지가 그 내용을 읽어주었다고 한다. “그런 짓을 하시고 죽어서 무슨 낯으로 종묘에 들어가서 역대 선황들을 만나시겠소?” 하는 대목에 이르자, 노기가 충천한 광해군이 수라상을 발길로 걷어차니 반찬 그릇과 장 종지가 어찌나 세게 튀었던지 옆에 있던 시녀와 승지의 머리가 터져 버릴 지경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처럼 흉측한 상소를 전달한 승정원 승지들도 책임이 있다고 해서 그 자리에서 파직되는 사태가 일어났다. 기록에 따르면 전국의 유생은 물론이고 부녀자들까지도 동계의 상소문을 언문으로 번역하여 읽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하며, 동계가 구금된 감옥의 역졸들도 선생의 인품에 감복되고 또 여론에 압도되어 지성으로 동계를 보살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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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계가 충절의 선비로서 존경받았던 또 하나의 사건은 병자호란 때였다. 임진왜란과 함께 병자호란은 조선조의 2대 난리로 꼽힌다. 임진왜란이 많은 인명피해와 함께 물질적인 피해가 컸다고 한다면 병자호란은 물질적인 피해는 적었지만 정신적인 피해는 오히려 임란보다 심각했다고 볼 수 있다. 병자호란은 그때까지 우습게 알던 오랑캐에게 임금인 인조가 맨발로 엎드려 절을 해야 했던 치욕스러운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명분과 자존심을 생명보다 소중하게 여겼던 조선조 선비들에게는 남한산성에서 무릎꿇은 임금의 치욕 행위가 선비의 자존심을 송두리째 망가뜨리는 대사건이었다. 1636년 동계는 남한산성에서 오랑캐와의 화의를 적극 반대했으나 결국 화의가 성립됨에 따라 칼로 배를 긋는 활복 자살을 기도하였다. 주욕신사(主辱臣死:임금이 욕보면 신하는 죽어야 한다)의 정신이었다.

그러나 모진 목숨이 마음대로 끊어지지 않자 국은에 보답하지 못한 것을 한탄하고 덕유산 자락의 모리라는 곳에 은거하면서 백이숙제처럼 죽을 때까지 미나리와 고사리를 먹고 살았다. 고사리를 캐며 살았다고 해서 그 은거지는 고사리 미자를 넣어서 ‘채미헌’이라는 이름으로 전해진다. 요즘도 후손들이 동계 제사를 지낼 때는 제사상에 반드시 고사리와 미나리를 올려놓는다고 한다. 이 집에서 고사리와 미나리는 채소가 아니라 의리와 절개의 상징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