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화영 칼럼]정신없는 유목민 만드는 세상
피맛골 청일집의 ‘부고’ 지난 5일, 아침 신문을 펼쳐 드니 “피맛골 청일집 65년의 추억”이 헐린다는 기사가 실렸다. 가슴 한끝으로 얼음 바늘이 뚫고 지나가는 것만 같았다. 나는 세상 어디를 가든 거만한 대로보다 진짜 삶의 냄새가 물씬 나는 좁은 골목길의 빛과 그늘을 사랑한다. 그중에서도 특히 서울의 피맛골을 좋아했다. 이 세상 어디에 ‘임금이나 벼슬아치들의 행차’를 피하여 ‘백성들이 지나다니는 뒷골목’을 따로 만들어준 도시가 있던가? 그런데도 신문기사는 청일집에 어떤 “대통령이 국회의원 시절에 자주 찾아왔었다”고만 추억한다.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청일집은 벼슬아치보다는 서민 룸펜 예술인 기자 대학생들의 보금자리였다. 젊은 시절, 밤에 잠자는 시간과 낮에 일하는 시간을 제외한 나의 진정한 삶은 이 피맛골 근처 어딘가에 있었다. 종로와 나란히 달리다 청진동 해장국 거리와 마주치는 뒷골목, 두 팔을 벌리면 양쪽 건물의 벽에 가 닿을 듯한 그 조붓한 피맛골에는 항상 생선 굽는 냄새가 났고 저녁 거리의 어스름 속에 나직한 목소리의 유혹이 떠돌았다. 피맛골이나 청일집은 산업자본주의에 깔려 풍요 속의 빈곤으로 질식하기 전 마지막 남은 우리 문화의 요람이었다. 지난 반세기 동안의 한국문학은 1970년대 초, 이 거리에서 태어났다. 작가회의의 모태가 된 ‘자유실천문인 협의회’는 청일집 앞의 ‘귀거래’ 다방에서의 반란이었다. 민음사, 창작과비평, 문학과지성, 한국문학, 열화당, 문장 등 출판사는 모두 이 거리에서 문을 열었고 문인들은 이 거리에서 가난한 마음의 잔치를 벌였다. 신문기사를 읽는 즉시 나는 마치 그리운 이의 문상을 가듯이 한겨울 아침 바람을 뚫고 청일집으로 달려가 보았다. 그 일대가 모두 높은 펜스로 둘러싸여 있어서 마치 전염병이 도는 양 출입금지다. 청일집 앞 개천을 복개한 교보빌딩 뒤 좁은 길로 들어서니 지진이 난 것만 같은 폐허 속에 ‘원조 청일집’ 건물이 잠시 뒤면 문을 열 듯 초현실주의적으로 서 있다. 뒤늦은 청춘의 졸업식인 듯 몇 장의 마지막 사진을 찍고 모퉁이 또 다른 명물 ‘열차집’ 간판 밑 쓰레기 흩어진 골목으로 돌아서려니 문득 그 폐허 속에서 생선구이집 ‘대림식당’이 열려 있다. 추위를 핑계 삼아 아침 소주를 시켜 입에 댄다. 쓰다. 속이 상한다. 외국에서 귀한 예술가 손님이 오시면 나는 늘 자랑스럽게 청일집에 데리고 왔었다. 그들은 시간이 켜켜이 쌓인 이 골목, 이 빈대떡집에 반해서 밤늦도록 떠날 줄을 몰랐다. 우리는 왜 ‘루소의 카페’ 허무나 남대문만 한 국보는 못 되어도 피맛골, 청일집은 이 나라 최고 문화재의 하나다. 그런데 왜 신문기사 한 번으로 끝인가. 파리는 17세기에 문을 열어 볼테르, 루소, 당통, 벤저민 프랭클린이 드나들던 최초의 카페 ‘프로코프’를, 1927년에 문을 열어 피카소와 사르트르가 드나들던 몽파르나스의 ‘쿠폴’을 문화재로 지정하고 오늘날 그 자리에서 버젓이 손님을 맞고 있는데 우리만 왜 허구한 날 오랜 기억을 헐고 재개발 유목민이 되어 앞만 보고 달리기만 하라는 것인가? 육체는 현재의 현재이지만, 근심걱정은 미래의 현재이지만, 정신만은 과거의 현재다. 벌레나 짐승과 달리 인간에게만 과거의 기억을 바탕으로 미래를 기획하는 문화가 있다. 문화는 단순한 ‘부가가치’ 이전에 바로 그 정신의 산물이 아니던가? 실로 ‘정신없는’ 세상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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