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쟁점.

"나를 화장하라"는 유언

제봉산 2010. 1. 25. 09:42

500억 들인 '은하수공원' SK그룹, 세종시에 기부 "엄숙하면서 쾌적" 호평

"내 시신을 매장하지 말고 화장하라. 훌륭한 화장시설을 만들어 사회에 기증하고 장묘문화 개선에 앞장서 달라."

1998년 8월 고(故) 최종현 SK그룹 회장은 폐암 투병 끝에 눈을 감으며 가족에게 이런 유언을 남겼다. 화장을 꺼리던 당시 분위기에서 지도층 인사가 솔선수범하며 사회에 신선한 충격을 던졌던 큰 뜻이 12년 만에 세종시에서 결실을 맺었다.

최 전 회장 유지에 따라 조성된 첨단 종합장례시설 '은하수공원'은 지난 12일 충남 연기군 남면 고정리에서 문을 열었다. SK그룹(회장 최태원)이 500억원을 들여 지어 무상 기부한 장례문화센터로, 장례식장·화장장·봉안당 등을 갖추고 있다. 한국토지주택공사가 SK그룹의 기부 시설을 중심으로 총 36만㎡ 부지에 잔디장·수목장·화초장 같은 자연장지(6만8000㎡) 등을 더했다. 세종시가 정식 출범하면 은하수공원 전체는 세종시에 기부채납될 예정이다.

22일 오전 찾아간 은하수공원 주차장에는 버스 10여대가 늘어선 가운데 조용한 분위기였다. 시설 안이 인파로 부산할 것이란 예상과 달리 의외로 조용했다. 화장장에 들어서자 그 이유를 금세 알 수 있었다. 깔끔하게 꾸며진 10개의 유족대기실 안에서 유족들이 각기 따로 대기하고 있어, 다른 화장시설에서와 같이 북적이거나 서서 기다리는 모습을 찾기 어려웠다.

한쪽에선 버스에서 내린 관을 안내요원이 운구용 미니차량에 싣고 고별실로 이동하고 있었다. 고별실에서 유족들은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애통해하며 고인과 마지막 작별하는 의식을 가졌다.

유족 전태광(54·서울 양천구)씨는 "최신 시설과 유족을 배려한 공간 배치가 마음에 든다"고 말했다. 화장장 안내를 맡은 안누리(23)씨는 "유족들 동선이 겹치지 않도록 해 정숙한 가운데 장례를 치를 수 있도록 꾸민 것이 특징"이라고 말했다.

봉안시설에선 서울시설공단 추모공원건립단 직원 10여명이 시설을 꼼꼼히 살피며 사진을 찍는 등 벤치마킹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이 시설을 만들기 위해 SK그룹이 들인 정성은 각별했다. 최태원 회장이 직접 공사장을 찾아 꼼꼼히 살폈고, 공사를 맡은 SK건설 임원진도 수시로 현장을 챙겼다. SK건설은 "최 전 회장 유지를 받들어 설계부터 시공, 자재까지 애정을 쏟았다"고 말했다.

기업인의 기부로 탄생한 선진 장례시설은 보기 드문 사례다. 혐오시설로 외면받기 일쑤인 화장시설을 민·관·지역사회가 협력해 만든 것이어서 의미가 더 크다. 최 전 회장의 뜻이 뒤늦게 결실을 맺은 이유는 당초 SK그룹이 2001년 서울에 화장장 건립을 추진했지만 주민 반대로 무산되면서 세종시로 내려오게 된 속사정이 있다.

지상 3층 규모의 장례식장(1370㎡)은 접객실·빈소·안치실 등을 갖췄다. 화장장(3035㎡)에는 화장로 10기와 고별실, 유족대기실 등을 마련했다. 화장로는 자동화된 무공해 첨단시스템으로 분진·매연을 완벽히 처리해 무취(無臭)·무연(無煙)으로 가동된다.

납골시설인 '봉안당'은 2만여기 수용 규모로 제례실 및 야외 봉안시설을 갖췄다. 은하수공원의 특징은 화장된 유골을 인공시설이 아닌 자연 속에 안장하는 '자연장'을 도입했다는 점이다. 잔디장지의 경우 비석과 봉분이 없고 1기당 면적은 불과 0.36㎡(0.11평)에 불과하다. 수목장지(1만2327㎡)에는 추모목 1그루를 가족용으로 사용하는 가족목과, 여러 개인이 공동 사용하는 공동목이 있다. 장미나무를 활용한 화초장지도 만들어졌다. 공원에는 수목장 등 선진 장례문화를 소개하는 홍보관도 있다. 부인과 함께 홍보관 한쪽에 적힌 '이 세상에서의 소풍을 마치기 전 당신은 어떤 말을 남기시겠습니까'란 문구를 음미하던 이경래(65·대전 유성구)씨는 "화장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바꿀 수 있도록 잘 꾸민 것 같다"고 말했다.

정순교 은하수공원관리사무소장은 "반경 2㎞ 안에 첨단 화장시설과 장례식장, 납골시설, 자연장지까지 함께 갖춘 곳은 국내에서 여기뿐"이라고 자랑했다.

 

***화장장은 초 만원*****

작년 화장률 65%로 급증
시설은 12년간 6개 늘어 속 태우다 타지역 가기도
주민들 "혐오시설" 외면 신·증축에 어려움 겪어

"마지막 길을 떠나는 어머니를 더 편안하게 모셨어야 하는데, 4일장을 치르고 불편하게 해 드린 것 같아 가슴이 더욱 먹먹해집니다."

22일 오전 10시쯤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서울시립 벽제화장장. 검은 넥타이를 맨 까칠한 얼굴의 박길환(62)씨 표정은 어두웠다. 기초생활보장 수급자인 박씨의 어머니는 지난 19일 오후 2시쯤 지병으로 서울 관악구 한 병원에서 95세 나이로 숨졌다. 정부에서 지원받은 장례비용 50만원으로 겨우 장례식은 치렀지만 화장장을 찾는 일이 녹록지 않았다.

"벽제에서 기초수급자는 무료로 화장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성남·수원에서 화장하려면 기초수급자라 해도 50만원을 내야 합니다. 넉넉하지 않은 살림에 돈을 더 내고 멀리까지 가 3일장을 치를 수 없어 이미 예약이 다 차버린 벽제에서 하루를 더 기다려 결국 4일장을 치렀어요."

우리의 전통 관습인 3일장 대신 최근 4일장이 늘고 있는 것은 화장률이 급속히 증가하는데도 불구하고 화장장은 턱없이 부족한 탓이다. 벽제화장장을 운영하는 서울시설공단은 "작년 벽제화장장에서 장례를 치른 상가 중 4일장 비율이 15.5%를 차지해 2008년(9.6%)보다 5.9%포인트나 증가했다"며 "대부분 고인이 오후나 밤늦게 돌아가셔서, 즉시 예약을 해도 화장장을 잡지 못한 유족들이 발을 동동 구르다 3일장을 넘기는 경우"라고 말했다.

1990년대 초만 해도 10%대에 머물렀던 국내 화장률은 2005년(52.6%) 처음으로 매장률을 넘어선 이후 매년 3%포인트 이상 증가해 작년 65%까지 치솟았다. 하지만 전국 화장장 숫자는 1998년(화장률 27%) 44개에서 2010년 50개로 12년간 고작 6개 늘어났을 뿐이다.

특히 인구가 집중된 서울(화장률 72.2%·2008년)과 경기(69.2%)를 비롯한 수도권은 화장장 부족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국내 최대 규모 벽제화장장의 경우 1년 내내 하루도 쉬지 않고 19개의 화장로를 전부 가동해 하루 평균 87건의 화장을 하는 등 '과부하'로 운영되고 있지만, 넘쳐나는 수요를 감당하기엔 역부족이다.

22일 오전 경기 고양시 덕양구에 있는 서울시립 벽제화장장 화장로들 앞에 유가족들이 줄지어 서서 화장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다./오진규 인턴기자(국민대 언론정보 4년)

이에 따라 '원정 화장'도 증가하고 있다. 작년 12월 부친상을 당한 서울시민 장모(45)씨는 충북 청주에 있는 화장장까지 가야 했다. 장씨는 "돌아가시고 나서 바로 벽제화장장에 예약을 시도했으나 도저히 시간을 잡지 못했다"며 "벽제화장장에서는 9만원만 드는데, 청주까지 가다 보니 화장료와 장의버스 요금만 87만원이 들어 '몸고생'에다 '마음고생'까지 심했다"고 말했다. 장례회사인 현대종합상조 박영석 수석팀장은 "한 달에 서울에서만 310건 정도 화장으로 장례를 진행하는데, 이 중 10%인 30건 정도는 춘천·원주 등 다른 지방에서 화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전주시립 화장장인 승화원 관계자는 "하루 화장하는 시신의 3분의 1 정도가 수도권 등 다른 지역에서 오고 있다"고 말했다. 인천시 부평구 부평동의 시립화장장도 작년 화장 시신 중 40.6%는 서울 등 다른 지역에서 왔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관내 시민이 아니면 화장 사용료를 100만원 받는 경기도 수원시 연화장과 성남시 영생관리사업소도 언제나 화장 수요가 넘친다.

서울지역 화장률은 2015년 88.4%, 2020년에는 91.7%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이에 따라 서울시 등 각 지방자치단체는 화장시설을 추가 확보하려고 하지만, '혐오시설'이란 인식으로 주민들 반대가 심해 신축이나 증축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서울시가 추진하는 서초구 원지동 '서울추모공원(화장장)'의 경우 2001년 부지 선정을 끝냈으나 주민들 반대로 공사에 들어가지 못하고 표류하다 작년 12월에야 착공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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