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ld음악

[스크랩] Mary Hamilton(Joan Baez)

제봉산 2009. 11. 25. 21:22



    Mary Hamilton(Joan Baez)

    Word is to the kitchen gone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And word is to the hall,
    소문은 퍼져나갔고,


    And word is up to Madam the Queen
    마침내는 여왕의 귀까지 들려지게 되었죠


    And that's the worst of all,
    그건 최악의 상황이었어요


    That Mary hamilton's born a babe to the highest Stuart of all
    그 소문은 메리 해밀턴이 스튜어트왕가의 아들을 낳았다는 것이었어요.


    "Arise, arise, Mary hamilton,
    일어나라,일어나라


    Arise and tell to me,
    일어나서 내게 말해주려므나


    What thou hast done with thy wee babe
    네 갓난아기를 어떻게 하였느냐


    I saw and heard weep by thee?"
    나는 네가 우는 것을 보았단다


    "I put him in a tiny boat,
    내가 낳은 갓난아이를 내 손으로 작은 배에 태워서


    And cast him out to sea,
    바다로 떠내려 보냈지요


    That he might sink or he might swim,
    바다에 빠져죽었을지도 모르고, 어쩌면 살아났을지도 몰라요


    But he'd never come back to me."
    하지만 내게로 돌아오지 않았어요


    "Arise, arise, Mary hamilton,
    일어나거라, 일어나거라 메리 헤밀턴아


    Arise and come with me;
    일어나 함께 가자꾸나


    There is a wedding in Glasgow town
    글래스고우에서 결혼식이 있단다


    This night we'll go and see."
    오늘밤 나와함께 결혼식을 보러 가자꾸나


    She put not on her robes of black,
    나는 검정 예복을 입지도 않았고


    Nor her robes of brown,
    갈색 예복도 입지 않았어요


    But she put on robes of white,To ride into Glasgow town.
    하지만 나는 글래스고우로 가려고 하얀 예복을 입었어요


    And as she rode into Glasgow town,The city for to see,
    그리고 내가 결혼식을 보려고 글래스고우에 갔을 때


    The bailiff's wife and the provost's wife
    만나는 사람들마다 탄식하며 말했어요


    Cried, "Ah, and alas for thee."
    이 결혼식이 네 결혼식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요....


    "Ah, you need not weep for me," she cried
    나를 위해 울지 말아요 라고 난 울면서 말했어요

    "You need not weep for me;
    나를 위해 울 필요 없어요


    For had I not slain my own wee babe
    내가 낳은 갓난아기를 죽이지 않았다면


    This death I would not dee."
    내가 이렇게 죽지 않아도 되었을테니까요...


    "Ah, little did my mother think When first she cradled me,
    내가 태어났을 때 나의 어머니는


    The lands I was to travel in And the death I was to dee."
    내가 이 나라에서 방랑만 하다가 이렇게 죽게되리라곤
    꿈에도 생각을 못하셨죠


    "Last night I washed the Queen's feet,
    어젯밤 나는 여왕님의 발을 씻겨드렸죠


    And put the gold on her hair,
    머리엔 금관을 씌워드렸고요


    And the only reward I find for this,
    하지만 그 대가로 내게 돌아온건


    The gallows to be my share."
    단두대에서 죽게되는 것이었죠


    "Cast off, cast off my gown," she cried,
    내 가운을 벗겨버리세요 라고 난 외쳤어요


    "But let my petticoat be,
    하지만 속치마는 남겨두세요


    And tie a napkin 'round my face;
    그리고 수건으로 내 얼굴을 가려주세요


    The gallows I would not see."
    단두대를 보고싶지 않아요


    Then by and come the King himself,
    그때 임금님이


    Looked up with a pitiful eye,
    바라보면서 말했어요


    "Come down, come down, Mary hamilton,
    내려오너라, 내려오너라 메리 해밀턴아,


    Tonight you'll dine with me."
    오늘 밤 나와함께 저녁을 같이하자꾸나


    "Ah, hold your tongue, my sovereign liege,
    그런 말씀하지 마세요 존경하는 전하


    And let your folly be;
    그러시면 바보가 되실 뿐입니다


    For if you'd a mind to save my life
    진정으로 나를 살려주시려 하셨다면


    "You'd never have shamed me here."
    내가 이렇게 조롱거리가 되게하지 않으셨을거니까요


    "Last night there were four Marys,
    어젯밤까지는 4명의 메리가 있었는데


    Tonight there'll be but three,
    오늘밤엔 3명만 남게 되겠죠.


    There was Mary Beaton, and Mary Seaton,
    그 4명의 메리는 비이튼, 씨이튼


    And Mary Carmichael, and me."
    카마이클 그리고 바로 나 였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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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대의 포크음악이 저항과 리얼리즘의 성격을 갖추어 청년들의 절대적 호응을 받게 된 데는 밥 딜런과 조안 바에즈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두 사람은 당시 젊은이들의 의식, 시각, 욕구 등에 양심적 가치가 우선할 수 있도록 기여했다. 조안 바에즈는 포크프로테스트 시대에 밥 딜런의 여성 대응자로서 오히려 포크의 저항적 색채를 밥 딜런보다 더 오래 지켜감으로서 포크음악의 기수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하였다.

그녀는 밥 딜런보다 빨리 포크음악의 대중화에 기여했는데 그럼에도 밥 딜런의 여성 대응자 정도로 일컬어지는 데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습관적인 성차별이 깔려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조안 바에즈는 실로 약자를 위한 여교사와 같았다. 그는 늘 힘없는 사람과 상처받은 사람 편에 서서 노래했으며 미국내의 대표적 약자 가운데 한 계층을 이루고 있는 가난한 이주민의 정서를 노래에 자주 실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잊혀진 자유와 잃어버린 권리를 쟁취하라는 메시지를 던졌으며 나아가 이런 소외 받는 계층 위에 군림하고 전쟁만을 고집하는 미국정부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Strangest Dream과 같은 반전가요를 잇달아 발표하고 심지어 공산주의에 동조하는 듯한 과격한 노래까지 불러 주위를 놀라게 했다.

정치색이 짙은 노래를 지향한 이 맹렬여성은 1941년 멕시코가 모국인 아버지와 스코틀랜드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피부는 검은색이었다. 그로 인해 백인 우월의 세상에서 어린시절부터 인종차별을 당하며 성장했다.

그의 부친은 핵물리학자로 방위산업체의 스카우트를 많이 받았는데 원폭의 가공함을 잘 알고 있는지라 번번히 거절했다고 한다. 바에즈는 민중적이고 반상업적인 성격을 특징으로하는 포크음악을 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는데 어머니의 권유로 보스턴대학의 연극과에 입학하긴 했지만 학업에는 뜻이 없었고 포크의 전당인 하버드스퀘어 주변의 다방을 드나들곤 했다.

그녀는 한때 1년공연의 개런티로 10만 불을 제시한 프로모터의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했는데, "포크음악은 의식에 관여하는 음악이다. 누구든 그것으로 돈을 벌려고 한다면 나는 그것을 포크음악이라고 말할수 없다" 라고 거부이유를 밝혔다. 돈보다는 인류애를 선택하는 가풍을 그녀가 이어 받았다고 말할 수 있겠다. 바에즈는 이 세상이 부자와 빈자, 강자와 약자로 뚜렷이 이분되어 있음을 일찍이 간파하였는데 초기의 노랫말을 보면 약자의 교사라는 말답게 가난이라는 말이 무수히 반복된다. 그녀는 50년대말 하버드스퀘어에서 활동하면서 수면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는데 59년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에 출연하여 운집한 1만3천명 청중의 뇌리에 강한 인상을 심어준다. 당시 관람을 하던 뉴욕 타임즈의 기자 로버트 셀던이 바에즈의 노래를 듣고,

"전율을 자아내는 풍부한 비브라토와 열정적이며 잘 통제된 호소력을 지닌 젊은 소프라노" 라고 극찬을 했다. 62년 타임지는 그녀를 커버스토리로 다루면서 존 바에즈는 현 포크진영 신인중 가장 재능있는 가수라고 언급했다.
그해 그녀는 3장의 앨범을 발표 선풍적 인기를 누리기 시작하고 이듬해 밥 딜런과 조우하여 뉴포트 포크페스티발에 함께 서는등 콤비플레이를 전개 주목을 끌기도 한다. 반전과 인종평등을 위한 일이라면 뭐든지 다했다. 연좌농성 프리덤라이트, 시가행진등 모든 형식의 저항에 적극참여 했으며 그런 일들이 순회공연을 대신했으며 또 그런 일들들이 순회공연 내용이기도 했다.

65년에는 캘리포니아의 카멜벨리에 있는 학교건물을 개조하여 "비폭력연구사무소"를 개설하기도 했다. 이곳에서 수강생들은 간디와 핵시대같은 평화관련 서적을 탐독했고 평화에 대한 세미나와 강의를 들었다. 강사는 물론 존 바에즈였으며. 한데 카멜벨리의 일부 주민들이 연구소의 회원과 수강생들이 자신들의 아름다운 영토에 침입하여 질서를 어지럽히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즉각 연구소 활동을 중지하라는 청원서를 제출했다. 순진한 마을 사람들의 눈에는 이들이 히피, 그리고 자유연애를 부르짖는 "위험인물"로 비쳐진 모양이다.

하지만 그들의 크레임은 거부되었고 연구소는 상당기간 활동을 계속하게 된다. 마을 주민뿐 아니라 정부도 존 바에즈를 "통기타치는 파괴 분자" 로 간주했고 "페스트"와 같은 존재로 치부했다. 그녀의 이름은 대학생들에겐 명성이었지만 정부입장에서는 악명이었다. 여러 차례 정부 기관과 관계자들이 직간접적으로 '유감'을 표해왔지만, 그는 이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녀는 함께 현장을 뛴 동지이자 운동권의 지휘자인 데이비스 헤리스와 68년 결혼을 한다.
우리에게 조안 바에즈는 밥 딜런과의 로맨스로 유명한데 그녀는 밥 딜런을 진정으로 사랑했고 밥 딜런도 그녀를 모델로 한 "Vision of Johanna" 등의 곡을 써 간접적으로 애정을 표현하기도 했는데 이부분은 같은 길을 가는 사람으로서의 순수한 사랑이 아닐까 싶다.
※ Joan Baez 팬클럽에서
출처 : smiley
글쓴이 : 김형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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