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음악

[스크랩] 다뉴브강의 잔물결과 사의 찬미

제봉산 2009. 11. 25. 20:54

Donau Wellen Walzer VS 死의 찬미

이바노비치의 다뉴브강의 잔물결

Ivanovici , Josif

피아노 연주(감상추천)

루마니아의 작곡가  이바노비치 ( Ivanovici , Josif ) 도나우강의 잔물결 (Donauwellen Walzer)이라는곡입니다. 이 곡에 윤심덕이 사랑한 김우진이 가사를 붙여 ‘사의 찬미’가 되었습니다.

<관부연락선이 사일 오전 네시경에 대마도 옆을 지날 즈음에 양장을 한 여자 한 명과 중년신사 한 명이 서로 껴안고 갑판에서 돌연히 바다에 몸을 던져 자살하였는데, 남자는 김우진(金祐鎭)이요, 여자는 윤심덕(尹心悳)이었으며, 연락선에서 조선 사람이 정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더라> 동아일보

윤심덕 死의 찬미

광막한 광야에 달리는 인생아  

너의 가는 곳 그 어데이냐.

쓸쓸한 세상 적막한 고해에

너는 무엇을 찾으려 하느냐.

 

눈물로 된 이 세상에 나 죽으면 고만일까.

행복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허무.

 

웃는 저 꽃과 우는 저 새들이

그 운명이 모두 다 같구나.

삶에 열중한 가련한 인생아.

너는 칼 위에 춤추는 자도다.

눈물로 된 이 세상이 나 죽으면 고만일까

행복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허무.

 

허영에 빠져 날뛰는 인생아

너 속였음을 너 아느냐.

세상에 것은 너에게 허무니

너 죽은 후는 모두 다 없도다.

 

눈물로 된 이세상이 나 죽으면 고만일까

행복 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허무.

 

사의 찬미 - 윤심덕  

우리 나라 최초의 대중가요인「사의찬미」를 부른 윤심덕은 암울한 일제 강점기시대에 지성인으로 자질을 마음껏 부르다 애인 김우진과 바다에 몸을 던진 풍운아였다. 윤심덕(1897∼1926)은 평양에서 출생, 경성여고를 졸업한 교사출신이고, 동경음악학교 성학과를 졸업했다. 이후 김우진의 소개로 도쿄 유학생들이 결성한 신극운동단체인 토월회에 가입해 영화(동도)를 각색극화한 여주인공 안나 역을 맡기도 할만큼 연극배우이며, 우리 나라 최초 대중 가수 및 소프라노 가수로 활약했다. 이후 일본에서 김우진과 함께 귀국하다 현해탄에서 투신정사 해 사회적 문제로 대두된바 있는 윤심덕은 1926년 8월4일 정사 당시 현금 140원(2002년 물가지수 환산, 33만원)이 있었다 한다.

 

현해탄 격랑 중에 청년 남녀의 정사

“지난 3 일 오후 11 시에 시모노세키(下關)를 떠나 부산(釜山)으로 향한 관부연락선 덕수환이 4 일 오전 4 시경에 대마도 옆을 지날 즈음에 양장을 한 여자 한 명과 중년 신사 한 명이 서로 껴안고 갑판으로 돌연히 바다에 몸을 던져 자살을 하였는데,  즉시 배를 멈추고 부근을 수색하였으나 그 종적을 찾지 못하였다.

 

그 승객 명부에는 남자는 전남 목포부 북교동 김수산(金水山, 30),  여자는 경성부 서대문정 1 정목 73 번지 윤수선(尹水仙, 30)이라 하였으나 그것은 본명이 아니요,  남자는 김우진이오 여자는 윤심덕이 였다.

유류품으로는 윤심덕의 돈지갑에 현금 1 백 40 원과 장식품이 있었고 김우진의 것으로는 현금 20원과 금시계가 들어 있었다.  연락선에서 조선 사람이 정사를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더라(‘부산 전보’)”

신문은 그날 이후 속보를 계속 내고 있었다.  유명 예술인이었던 그들이 죽게 된 이유라든가,  정사의 찬반 여론 같은 것까지도 실었다.  1926 년의 여름을 뜨겁게 달군 기사였다.  그 이후 우리는 김우진은 잘 몰라도 윤심덕에 대해서는 잘 알게 되었다.  그러면 그들이 떨어져 죽은 그 장소는 어디였을까.  신문 기사 외에 기록이 하나 더 있다.  김일엽 스님은 1962 년 낸 <청춘을 불사르고>(文宣閣)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기고 있다.

‘오키노시마 통신장들은 오키노시마와 대마도 사이에서 가끔 자살을 한다고 말했다. 이곳은 적막하고 물살이 세어 자살자들이 좋아하는 장소가 되었던 것이다.’ 나는 지금 그 물길 위에서 그 오키노시마를 보고 있는 것이다.

윤심덕의 신화  

성악가 윤심덕(1897-1926)은 평양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숭의(崇義) 여학교를 졸업하고 평양 여자고등보통학교를 거쳐 다시 경성 여자고등보통학교 사범과를 졸업했다.  당시 여성으로는 보기 드문 신교육을 받은 것이었다.  그녀는 졸업 후 강원도에서 보통학교 교원으로 봉직하기도 했다.

그녀의 집안은 우리 나라 최초의 음악가족이기도 했다.  언니는 소프라노 윤심성이고 둘째가 윤심덕이었다.  남동생은 바리톤 윤기성이고 셋째 딸이 피아노 전공 윤성덕이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윤심덕의 아버지는 친아버지가 아니었다.  그래서 그녀는 구박을 심하게 받았다고 한다.  신여성인 그녀는 가정에 안주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녀는 동경음악학교에 무시험 입학했다.  우리가 흔히 우에노 음악학교라고 부르는 곳이었다.

동경음악학교는 1887 년 관립으로 개교했다.  일본에서는 가장 권위 있는 음악학교였다.  동경음악학교는 본과와 사범과가 있었다.  본과는 그야말로 연주가를 지망하는 학생이 들어가고 사범과는 음악선생이 되려는 학생이 입학했다.
윤심덕은 원래 관립학교만 다녀 동경음악학교가 그렇게 이질적이지 않았으리라 생각된다.  1918 년 4 월 홍난파(1898-1941)와 동기생으로 입학한 것이다.  나이는 윤심덕이 한 살 위였다.

당시 김우진(1897 - 1926)도 일본에 와 있었다.  구마모토(熊本) 농업학교를 졸업하고 도쿄에 와서 와세다 대학 영문과를 다니고 있었다. 그들의 만남은 아주 자연스런 것이었으리라. 윤심덕은 우에노 기숙사에,  김우진은 시바 구(芝區)에 있는 하숙집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데이트는 주로 우에노 공원에서 이루어졌다.  

그녀는 음악학교를 졸업하고도 1년간은 도쿄에 머물며 성악에 관한 연구를 계속했다고 한다.  그들은 그후 1921 년 7 월 동우회 순회연극 공연 때부터 아주 가까워진 것으로 보여진다. 윤심덕이 그 공연 때 소프라노 가수로 찬조 출연했기 때문이다.  1921 년 귀국한 그녀는 1923 년  6 월 서울 청년회관(YWCA), 경성공회당 등에서 연주 활동을 해 대중적 명성을 얻고 있었다.

그녀의 연주 레퍼토리는 보면  ‘메기의 추억’ 이 빠지질 않았다.

30 년대  ‘매기의 추억’ 이란 노래가 유행했다.  캐나다 토론토대학 졸업생 조지 존슨이 청년 때 쓴 시로 원제목은  ‘매기,  그대와 내가 젊었을 때(When You and I Were Young, Maggie)’이다.  우리도 중학시절 많이 불렀던 노래이다.  그 2 절은 다음과 같다.

‘북망산 수풀은 고요타
매기 영웅호걸이 묻힌 곳
흰 비석 두러서 적힌다
매기, 아 우리가 놀던 곳
고운 새들은 집을 짓고
기쁜 노래 지저귀며 부른다
우리도 노래를 부르자
매기 내 사랑하는 매기야. 
   

지금 가사와는 다르다.  왜 그렇게 부르지 않는가.  1925 년 윤심덕은 테너 안기영(安基永)과 함께 이 노래를 음반으로 취입하기까지 했다.  일본 축음기회사(1928 년 일본 콜럼비아로 개칭)에서였다.  그녀는 이로써 우리 나라 최초의 레코드 가수, 즉 목소리를 남긴 성악가가 되었다.  화가 나혜석(羅蕙錫, 1896-1948)은 <개벽> 잡지 1923 년 7 월호에  ‘1 년만에 본 경성 잡감’이란 글을 쓴다.  그 글 속에 윤심덕에 관한 비판이 실려 있다.

When You and I Were Young, Maggie

 

청년회관 음악회

"듣기에 하도 유명한 성악가 윤심덕씨이기에 마침 기회가 있어서 들어간 것이다.  음량은 충분하나 소프라노 음이 아니요 엘토 음이었다.  다른 때 독창한 것도 그러한지 모르지만 이 날 두 가지 독창한 것은 음악이란 것보다 창가이었다.  없는 표정을 일부러 내는 것은 비열한 편이 많았다.  그리고 호의로 보면 활발하다고 할는지 너무 껍쩍대는 것 같았다.  좀 자연한 태도를 갖도록 수양하는 것이 어떠할는지...”

두 여류 예술인들은 나이도 비슷,  유명세도 비슷한 때라 아마 라이벌 의식이 강했나 보다.  윤심덕은 아름다운 눈에 키도 크고 날씬한 몸매를 가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때문에 그녀는 악단에서 자취를 감춰 극단 토월회 여배우로도 활동했고 라디오 방송과 레코딩을 하기도 했다.  요새 식으로 하면 만능 탤런트였던 것이다.  그녀에게는 말년이 다가오고 있었다.  염문이 계속되고 불안정한 상태에서 도피생활이 이어졌다.  집을 나온 그녀는 서울 종로구 수은동(授恩洞) 60 번지 오쿠다(奧田) 사진관 뒷방에 세를 얻어 숨어들었다.  단성사 부근(수은동 58)이었다.  

어두운 사회를 버리기로

1926 년은 대정(大正) 시대의 마지막 해였다.  시대는 암울했다.  사회주의, 염세주의 풍조가 지식인들 사이에 깊숙이 퍼져들고 있었다.  이 해의 사회상황을 대충 훑어보면,  4 월 25 일 순종이 서울 종로구 와룡동(臥龍洞)의 창덕궁 대조전(大造殿)에서 승하하였고,  5 월 9 일 긴자 마쓰야(松屋) 백화점에서 첫 투신 자살이 있었다.  건물에서 떨어져 자살한 사건은 이것이 최초였다.  6 월 10일에는 6·10 만세사건이 일어나고 있었다.  7 월 29 일 도쿄에는 박열(朴烈), 김자문자(金子文子) 사건이 일어난다.

이 시점에서 서른 살의 두 남녀는 죽음을 결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1923 년 정사를 해 큰 사회문제를 일으킨 아리시마 다케오(有島武郞, 1878-1923)와 하타노 아키코(波多野秋子)의 예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아리시마는 소설가이며 사회주의자였는데 그를 김우진은 숭배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가루이자와(輕井澤) 별장에서 정사했다.

김우진은 인산(因山) 날인 6 월 10 일 하루 전날 목포에서 서울로 온다.  수은동의 윤심덕을 찾아 가 그녀보고 동경으로 가라 하고 그는 7 월 9 일 먼저 도쿄 시바 구(芝區)에 있는 자신의 옛 하숙집으로 간다.  윤심덕은 7 월 16 일 여동생 성덕과 함께 서울을 떠나,  7 월 18 일 오사카의 오카하루 여관(岡春旅館)에 묵는다.  그곳에 김우진은 찾아든다.  ‘죽엄의 찬미’를 녹음하기 위해서였다.  녹음은 1926 년 8 월 1 일이었다.  

일동축음기주식회사(NITTO)였다.  1920년 창립한 이 회사의 사장은 다누치(田內)였다.  이바노비치 ‘도나우 강의 잔물결’에 김우진과 윤심덕이 가사를 바꿔 놓은 것이었다.  우리가  ‘사(死)의 찬미(讚美)’라고 하는 노래의 원 제목은  ‘죽엄의 찬미’ 였다.   여기서  ‘찬미’는 ‘창가’, ‘음악’이란 말이었다.

그 때는 음악을 찬미라 썼다.  이 노래는 그들의 죽음과 함께 큰 유행을 하게 되었다.  녹음 후 그들은 자신들을 정리하고 시모노세키로 간다. 그리고 그 관부연락선을 탄다. 그들의 정사 뉴스 후 레코드 회사는 돈방석에 앉고-.

윤심덕의 서울 주소 서대문정 1 정목 73 번지는 서소문동 서소문 파출소 앞의 한길이 된다.도로가 되었다.  그곳에는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다. : 김정동(목원대 교수)

참고 : himammo님의 블로그

출처 : smiley
글쓴이 : 김형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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