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일본의 음식"스시"

제봉산 2008. 12. 20. 10:46

맛있는 스시의 역사와 1657년 동경 대화재(1)

 일본을 상징하는 3가지 전통 음식, 즉 스시(초밥)와 사케(청주), 소바(메밀국수)을 모르는 이는 아마 없을 것 입니다. 묘하게도 이 3대 음식은 영어로 치면 이름이 모두 다 S로 시작을 하는 게 공통점 입니다.

 오늘은 이 3S 중에서 스시 라는 음식이 대중화의 첫 길을 걷게 된 이면을 한번 알아보도록 합시다. 아래 글에서 나오지만 스시라는 음식이 대중화, 세계화의 길을 걷게 된 이유는 1657년에 일어난 일본 동경(당시 에도)의 대화재와 연관이 깊습니다. 이때 큰 불이 일어나면서 비로서 스시도 일반 대중의 사랑을 받는 음식으로 처음 발돋움하게 되었다는 얘기지요. 
  
 <<<#큰 불이 만들어낸 에도마에스시
 (*참고로 에도마에스시는 일본 전국에서, 그리고 외국에서 흔히 먹을 수 있는 스시를 가리킵니다)
 
 1657년 정월의 일이다. 이 때 에도(현재 일본 동경)에서 일어난 엄청나게 큰 화재 때문에 죽은 사람들은 적게 잡아 3만명, 많게는 10만명까지도 된다고 한다. 에도의 10채 가운데 6채가 타버린 꼴이었는데, 특히 옛날부터 있던 서민들의 낡은 거리는 한 줌의 재로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사실 에도에는 3년에 한번 꼴로 큰 불이 났고, 일주일에 한번 꼴로 작은 불이 났지만, 이 불은 정말로 특별한 것이었다.
 
 불 때문에 원통하게 죽은 사람들이 유난히 많은 에도에는 참 아이러니하게도 그 덕분에 도시문화가 아주 발달했다고 한다. 대참사가 끝난 뒤 에도에는 전국에서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 들어 에도 재건은 발빠르게 재건됐다. 이 사람을 위한 먹을거리를 마련하기 위해서 발달된 것이 바로 소바, 튀김, 스시 같은 일본 전통의 패스트푸드들이었다.
 
 역사에서 <만약>이라는 게 없다고 하지만 만약 에도에 큰 불이 없었다면 우리가 지금처럼 스시랑 소바랑 튀김 같은 맛있는 음식들을 즐길 수 있었을까? 찬란한 도시문화와 세계적 음식 문화를 꽃피운 에도의 그늘에는 불기둥 속에서 사라져간 수많은 에도 사람들의 넋이 있었다는 걸 가끔은 기억하고 싶다.
 
 718년 경의 문헌을 보면 조세 항목 가운데 <전복 스시> 같은 기록이 나온다. 이를 고려해보면 이 무렵 스시가 이미 하나의 음식문화로 정착했다는 걸 알 수 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스시가 일반 서민들 사이에서 대단한 인기를 누리기 시작한 것은 이 큰 에도 화재가 끝난 뒤의 일이다. 갑자기 많아진 사람들로 인해 에도 거리에 음식을 파는 노점장들이 먹물 번지듯 순식간에 늘어서게 됐고, 이게 에도에 외식산업 붐을 불러 일으켰다.
 
 1689년 에도에서 <간사이(일본 관서지방)스시>가 전해졌다. 이미 1687년부터 에도에는 스시가게들이 번성하기 시작했다. 1779년에는 김으로 만 <노리마키(김말이 초밥)>가 생겼다. 1824년에는 드디어 료코쿠(동경 내 지명)의 하나야 요헤이(1799~1858) 또는 마츠노즈시의 사카이야 마츠고로 라는 사람이 일본 스시의 대명사 라고 할 수 있는 <니기리 스시>를 세상에 선보였다고 한다.
 
 1824년에 스시 가게인 <요헤이 스시>를 연 하나야 요헤이는 고추냉이(와사비)를 사용해 현재 우리가 먹는 스시와 거의 유사한 것을 만들어냈다.
 
 재미있는 것은 이 때에만 해도, 스시는 값도 부담없는 가벼운 서민들의 음식이었다. 소바가 그랬듯이 에도 서민들이 가볍게 한끼 식사를 하고 싶을 때에, 취객들이 한 잔 술과 함께 허기진 배를 가볍게 채우는 거리의 노점 음식이었다.
 
 아마 모르긴 해도 손님들이 주문한 스시를 서서 기다리며 사케 라도 한 잔 할 터이고, 그동안 스시집 주인들은 의자에 앉아서 나기리 스시를 열심히 만들어냈을 것이다. 냉장고가 있었던 시대도 아니고, 위생상태가 좋을 리도 없는 시대였다. 포장이 되지 않은 거리는 비라도 올 양이면 물 웅덩이가 생겨나고 길은 금방 진흙투성이가 되었을 것이다. 손님들은 낯익은 얼굴들과 또는 처음보는 객들과 뒤섞여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짧은 한 때를 즐겼을 것이다.(계속)>>>

 

스시, 막부 요인들에게 바쳐지면서 고급화의 길 걷기 시작했죠(2)

 지난글에 이어 오늘도 스시 라는 음식에 대해서 계속 더 알아봅시다. 동경 대화재 이후에 스시가 대중화의 길을 걷고 있는 모습을 계속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 자리는 더도 덜도 아닌 서민의 정감어린 술자리 정도였을 것이다. 그러던 것이 점차 신분이 높은 사람들에게도 인기를 끌며 옮겨갔다고 한다. 남루한 가게에 직접 오기 민망한 사람들은 하인들을 시켜 커다란 접시에다 한 접시씩 스스를 날라다 먹기 시작했다. 그래도 여전히 가게 앞의 노점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말이다.
 
 이렇게 서민들의 스시가 고급음식으로 갑작스럽게 바뀌게 된 것은 스시집 <마츠노 스시> 때문이라고 한다. 이 집의 호화스러운 메뉴가 막부 요인들에게 바치는 음식으로 유행하면서 스시가 점차 고급화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이 유행이 너무 가열된 나머지 나중에는 음식 사치 금지령이 내려졌고, 이 때문에 200명이 넘는 스시 가게 주인들이 줄줄이 잡혀 들어 갔다고 한다. 이때에 니기리 스시의 유력한 창안자로 알려진 하나야 요헤이도 장어 스시를 만들었다는 이유로 감옥에 갖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지금도 스시 사이사이에 대나무 잎사귀를 놓아 스시 맛이 서로 섞이지 않도록 내놓는데, 이미 이때에 생긴 식습관이라고 한다. 여러 명문 대가에 스시 배달을 갈 때에 서로 섞이지 않도록 대나무 잎사귀로 그 가문을 상징하는 문장 모양을 오려서 어느 접시가 어느 가문으로 갈 것인가를 구분했다고 한다.
 
 어쨌든 에도에서 손으로 쥔 밥 위에 생선을 얹는 스시가 유행하면서 점차 <니기리 스시>를 <에도마에 스시>로 부르게 됐다. 지금도 스시집 간판을 보면 대부분 에도마에 스시 라는말이 붙어 있는데, 이것은 에도 전통을 잇고 있다는 자부심 섞인 표현이라기보다는 니기리 스시를 먹는 곳이라는 뜻으로 보면 된다.
 
 지금 와서는 일본 전국, 그리고 외국에서도 흔히 먹을 수 있는 스시가 바로 이 에도마에 스시다. 에도마에 스시가 전국으로 퍼지게 된 계게는 태평양 전쟁과 무관치 않다. 일본이 테평양전쟁을 일으키면서 거의 대부분의 음식점이 폐업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스시집 만은 <위탁가공제도> 덕을 보아 당당하게 장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제도는 손님이 쌀 한 홉을 갖고 가면 니기리 스시와 노리마키(마키모노와 같은 말로 김밥을 말한다)로 바꾸어주고 가공임을 받는 것을 말한다.
 
 일본 동경에서 시작된 이 제도는 금세 전국으로 퍼졌고,  결과적으로 스시를 전국으로 보급하는데 결정적으로 공헌했다. 또 스시는 원래 한 개씩 만들어 접시에 담아 내놓은 것인데, 이 전쟁 이후에 가게 편의상 한꺼번에 두 개씩 만들어 접시에 올리도록 바뀌었다고 한다. 물론 스시의 기준이 생선의 질을 중요하게 여기는 분위기로 바뀌면서 밥의 양이 적어진 것도 크게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또 전쟁과 관동대지진의 영향으로 전국에서 에도로 모였던 스시 장인들이 다시 제 고향으로 흩어지면서 전국에 에도마에스시가 퍼졌다는 것도 또다른 이유로 꼽힌다.
   
 스시는 일본이 자랑하는 일식의 국가대표적인 선수임에 특림없다. 그만큼 세계인들에게 최고급 요리로 사랑받는 스시가 된 것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스시 원산지는 일본이 아니다. 원래 동남아시아 원주민들이 소금에 절인 민물생선을 밥 안에 넣어 발효시킨 <나레 스시>에서 시작했다. 우리가 요즘 흔하게 먹는 니기리 스시와는 전혀 다른 모양이지만 지금도 동남아시아, 타이, 대만에서는 <나레 스시> 형태로 스시를 먹고 있는 것이다. 가자미 식혜나 홍어회 같은 생선을 삭혀 먹는 한국식 스시 문화도 바로 여기에 해당된다. 일본에서는 사가현의 <후나 스시>가 나레 스시와 가장 가까운 형태다.
 
 그러고 보니 한국 땅을 떠날 때까지 나한테 스시는 길쭉하게 쥔 밥 위에 생선을 얹은 것이었다. 일본에서 말하는 니기리 스시 또는 에도마에 스시가 바로 이것이다. 지금은 스시의 대명사가 되어버렸으니 외국인 입장에서는 일본의 스시가 니기리스시인 것은 당연한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정작 일본에서 말하는 스시는 식초 같은 조미료를 갖고서 간을 한 밥에 생선 채소 같은 식재료를 곁들여 먹는 음식 전체를 이르는 조금 넓은 개념의 말이다. 그래서 스시의 종류는 지방에 따라 수십 가지가 되고, 일반적으로 먹는 것도 열 가지가 넘는 것 같다.(계속)>>>
 


 

쓰레기통에 버려지던 마구로(참치) 스시가 최고의 스시로 떠오른 이유(3)

 오늘은 스시 라는 음식에 대한 연재 중 마지막 글 입니다. 쓰레기통에 버려지던 마구로(참치) 스시가 최고의 스시가 된 사연이 눈길을 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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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기리 스시 외에도 한국에서도 많이 먹는 유부초밥은 이나리즈시 이고, 김밥 종류는 마끼모노 라고 한다. 그중에서 후토마키가 여러가지 재료를 넣은 김밥으로 한국 김밥과 비슷한 것이고, 밥에 오이를 만 갓빠마끼, 마구로를 만 텟카마끼, 낫또를 만 낫또마끼 같은 것도 있다.
 
 길쭉하게 쥔 밥에 주위를 김으로 싸고, 그 위에 여러가지 토핑을 얹은 것은 군칸(군함 이란 한자어를 사용함)이다. 김 위에 밥과 자기가 원하는 재료를 한두 가지 넣어 말아 먹는 것은 데마끼즈시다.
 
 밥에 여러가지 생선과 짠지, 채소를 예쁘게 펼쳐서 담은 것은 짜리시 스시(여기에서 찌라시는 뿌린다는 뜻임)다. 고등어처럼 쉽게 비려지는 생선은 식초와 다시마와 한번 처리한 다음에, 밥 위에 얹어 눌러 먹는데 이게 오시즈시다. 앞서 말한 스시의 발상을 보여주는 나레즈시 또한 스시다. 스시라는 이름이 붙지는 않지만, 생선 두세 가지에 짠지를 조금 얹어 먹는 것은 사시미동(회덥밥)이다.
 
 (이어 저자의 글 중에서 마구로 스시가 최고의 스시가 된 사연도 같이 소개합니다.)
 
 스시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재료가 마구로(참치)지요. 참치는 세계 어획량의 28%를 일본 사람들이 먹고, 일본 사람들에게 가장 사랑을 많이 받는 스시 재료 중 하나이지만, 당시는 전혀 상황이 달랐답니다.
 
처음 니기리즈시 라고 불리우는 현재의 스시가 탄생한 것은 에도시대 이지만, 이후 메이지 시대가 되어도 마구로는 스시 재료로는 대접을 받지 못했답니다. 마구로는 싸구려 생선 중에서도 아주 싸구려여서 천민들이나 먹은 음식이었던 것이지요. 고급 스시집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고, 노점 스시집에서 취급하기 시작한 것도 스시가 대중화되고 나서 한참 뒤의 일이었습니다. 그것도 상하기 쉬우니 간장에 절여 먹는 것이고, 뱃살부분인 토로는 그런 데에서 조차 먹을 수 없었지요.
 
 기름이 많은 부분이라 상하기 쉬웠으니, 그냥 내버리는 게 당연했죠. 냉동, 냉장 기술이 발달한 지금 와서는 비싸서 못
 먹으니 참 격세지감을 느낍니다.

 돈이 없어 싼 생선을 살 수 밖에 없었던 스시집 주이이 내놓은 참치 뱃살부분을 한 사람 두 사람 먹기 시작했습니다. 터무니 없는,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재료를 갖고서 스시를 만들었으니 부끄러워서 밖에서는 말도 못했지요. 물론 메뉴에도 올려놓지 않았답니다. 그것이 요시노스시혼텐(1880년에 시작된 스시집, 마구로 토토가 탄생한 전통의 스시집으로 유명함) 2대 주인장이 가게를 잇고 있을 때 일이었지요.
 
 세상 일이란 참으로 모르는 건가 봅니다.
 
 그 참치뱃살 부분으로 스시를 만들서 손님들에게 선보였는데, 이게 인기를 끈 것 입니다. 기름이 잔뜩 올라 입에서 사르르(일본식 의태어로 토로토로) 녹는 음식으로 알려지기 시작을 했으니까요.
 
 그렇게 해서, 마구로 토로(입안에서 사르르 녹는 참치라는 뜻)라는 이름이 세상에 태어났답니다. 지금은 그것도 부위에 따라서 주토로(참치 옆구리살), 오토로(참치 기름진 뱃살) 같이 세분화하여 부르게 됐고, 가격도 가장 비싼 고급재료 중 하나가 됐네요. 인생만사 새옹지마랄까요. 역시 영원한 것, 절대적인 것은 없는 모양이네요. 먹지 못해 쓰레기통으로 들어가던 싸구려 부위가 지금은 보란듯이 가장 대접을 잘 받는 입장이 됐으니 말이죠.
 
 토로 라는 말을 처음으로 만든 요시노스시혼텐은 4대째 주인장 요시노 쇼지로씨가 5대를 이를 두 아들 마사토시 씨, 다카토시 씨와 함께 가게를 꾸려가고 있었습니다. 가게에 자리한 니혼바시 주변이 옛부터 게이샤들을 대어주는 오키야(술자리의 여흥을 북돋워주는 게이샤, 게이코들이 소속되어 있던 집)들이 성업을 하던 곳이라네요. 이곳은 음식을 만들지 않고, 손님 요구에 따라서 외부 식당에서 음식을 배달시켜 먹었는데 요시노스시혼텐도 그런 요리집 중 하나였던 거죠.(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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