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흔적

[스크랩] 고구려 역사기행 (1) - 간략하게 살펴보는 고구려史

제봉산 2008. 11. 25. 12:46

고구려 역사기행 (1) - 간략하게 살펴보는 고구려史  


왜 갑자기 고구려인가?

 
▲광개토대왕릉비: 중국 지린성[吉林省] 지안현[集安縣] 퉁거우[通溝]에 있는 고구려 제19대 광개토대왕의 능비 (陵碑). 우리 나라에서 가장 큰 비석으로 고구려 전성기 때
의 역사적 사실을 잘 알려준다. 

최근 들어 신문이나 방송, 인터넷 등에서 부쩍 고구려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지요? 우리 역사책 속에 잠자던 고구려가 갑자기 깨어나기라도 한 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썩 유쾌하지는 않군요. 바로 중국이 고구려 역사를 빼앗아 가려고 하는 데서 비롯되었기 때문입니다. 드넓은 만주(滿洲) 벌판을 호령하던 동아시아의 대제국 고구려. 우리 역사상 가장 자랑스러운 고구려를 중국이 느닷없이 자기네 역사라고 주장하면서 고구려가 새삼 관심을 끌고 있어요.

많은 우리나라 사람들은 중국의 이 같은 터무니 없는 주장에 분노하면서, 중국의 역사 왜곡에 대항해 고구려 연구재단을 만들자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중국은 왜 새삼스럽게 고구려를 넘보는 것일까요? 이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중국이 추진 중인 '동북 공정'프로젝트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동북 공정이란 2002년 시작된 중국의 국가적 연구 사업입니다. 우리가 흔히 만주라고 부르는 중국 동북 지방의 역사를 연구, 앞으로 이 지역에서 일어날 수 있는 정치적 변동에 대비하려는 것이 이 사업의 목적입니다.

만주는 지금은 중국의 땅이지만, 예로부터 우리 겨레의 활동 무대였습니다. ^이 곳에는 현재 우리 겨레인 조선족이 수백만 명이나 살고 있어요. 역사적으로 따지면 조선족 자치주 지역인 간도 지역도 우리가 영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곳입니다. 우리는 만주를 잃어버린 옛 땅으로 생각하고 있는 반면, 중국은 만주를 영원히 자국 영토로 지배하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과거 만주 지역은 중국의 한족(漢族)과는 아주 다른 세상이었습니다. 고조선, 고구려, 발해, 거란, 여진 등 우리 겨레와 만주족 등이 살았던 땅이 바로 만주였던 것입니다. 중국과 만주와의 역사적 관련성은 매우 적습니다. 그런데 만일 한국이 통일되어 만주나 간도 지역과 이 지역 조선족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면, 중국의 입장에서는 달갑지 않겠지요.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중국은 서둘러 동북 지방의 정치와 국경 문제의 안정을 위한 조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런 과정에서 만주 지역 역사를 중국의 역사라고 주장하고 이를 뒷받침할 연구를 진행하고 있어요. 중국의 동북 공정 가운데 특히 우리를 크게 자극하는 것이 고구려사를 중국사라고 주장하는 부분입니다. 중국은 2003년 유네스코(UNESCO:국제연합 교육과학문화기구)에서 선정하는 세계 문화 유산에 북한이 신청한 고구려 고분 벽화의 등록을 방해한 바 있습니다. 게다가 올해에는 엄청난 비용을 들여 중국 영토 내에 있는 고구려 유적들을 정비하고서 이를 세계 문화 유산으로 등록 신청을 했답니다.

만약 오는 6월 유네스코 총회에서 북한이 신청한 유적이 보존 상태가 나쁘다든가 해서 세계 문화 유산으로 선정되지 못하고, 중국이 신청한 유적이 선정된다면 어찌 될까요? 세계인들은 '고구려 유적은 중국의 것.'이라고 착각 할 수도 있게 됩니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 역사는 전 세계적으로 잘못 알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나라는 북한의 고구려 역사 유적이 먼저, 또는 적어도 중국이 신청한 것과 동시에 세계 문화 유산으로 선정될 수 있도록 북한을 도와야 합니다. 이와 함께 고구려 역사를 세계에 널리 올바르게 알리고, 중국의 역사 왜곡에 대항할 준비도 해야 합니다.

중국은 현재 중국 영토에서 활동한 모든 나라의 역사는 자기네 역사라고 주장하는 억지를 부리고 있어요. 과거의 역사적 관련성이 현재의 영토 지배를 정당화 시켜주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사실 중국은 고구려를 자기들의 주된 역사로 기록하지는 않고 잇습니다. 진-한-삼국-남북조-수-당 등으로 이어지는 중국 정통 왕조의 변방에 위치한 속국(屬國)의 역사로 왜곡해서 기술합니다.

중국의 주장대로라면 만주 지역의 역사는 영원히 변방의 역사에 불과합니다. 고구려를 제대로 계승할 의지도 없으면서, 고구려의 옛 영토를 영원?지배하려는 정치적 목적만을 앞세珥?비겁한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중국은 결코 고구려의 정당한 계승자가 될 수 없으며, 고구려사가 중국사가 된다면 그것은 고구려사 자체도 불행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중국의 역사 왜곡을 엄중하게 비판해야 합니다. 하지만 중국이 고구려를 연구하는 것까지 못하게 할 수는 없지요. 따라서 중요한 것은 고구려의 정당한 후손인 우리가 고구려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조상들의 역사를 올바르게 계승하고 발전시킬 의지를 갖고 있어야 떳떳한 후손이 될 수 있겠지요.

우리가 고구려를 모른 체 외면하다 보면 고구려사는 중국사가 될 수도 있습니다. 반면 우리가 고구려를 잘 계승하면 고구려 역사는 영원히 우리 역사로 남을 수 있을 것입니다. 지난 역사는 바로 우리의 뿌리입니다. 과거의 역사를 잃어버린다면 곧 우리의 미래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중국의 역사 왜곡에 흥분하기 보다는 우리부터 먼저 고구려를 제대로 알아야 하겠습니다.

 
▲평안남도 남포에 있는 강서대묘 내부에 그려진 현무도. 달리는 거북의 몸을 뱀이 휘감고 있는 모습으로, 고구려인의 힘이 느껴지는 걸작으로 평가된다. 


역사, 그리고 고구려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나?

◆ 역사는 나를 아는 거울

여러분은 '나는 누구일까?' 생각해 본 적 있나요?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것은 어느 누구에게나 중요한 일입니다. 자신을 안다는 것은 다른 사람과 다른 점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뿐만 아니라, 인간으로서 자신의 본성을 아는 것을 뜻합니다. 자신을 안다는 것은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아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무엇을 할 수 있는가는 해 보기 전에는 모르기 때문에, 무엇을 할 수 있는가의 유일한 실마리는 인간이 무엇을 했는가? 뿐입니다.

이는 결국 인간의 역사를 통해 배울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역사는 지난 이야기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 인간이 무엇을 했는지를 알려 주며, 인간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기도 한답니다. 인간이 오늘날 문명 세계를 이루게 된 것은 과거의 경험을 계속해서 후대에 전달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중간에 제대로 전달되지 못한 경험과 지혜도 많았지만, 인간은 옛 사람들의 경험과 지식을 살피고 배워서 보다 나은 내일을 만들어 왔답니다.

조선 시대 임금님들은 당시 최고의 학자들로부터 수시로 '경연'이라는 자리를 마련해 역사적 사건에 대해 배우고, 이를 중요한 정책 결정을 할 때 교훈과 사례로 활용했습니다. 이는 한 마디로 역사는 인간 경험의 보물 창고라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미래를 앞서 나가는 사람들은 모두 옛 역사에 많은 관심을 갖습니다.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과거에 대한 지식과 정보에서 나오는 것이니까요.


▲동방의 피라미드 장군총. 고구려에는 장군총보다 큰 거대한 무덤들이 매우 많다. 

◆ 고구려가 처음부터 힘센 나라는 아니었다

고구려 역사를 생각해 볼까요? 우리는 흔히 고구려를 힘이 세었던 자랑스러운 나라로만 생각하기 쉽지요. 하지만 고구려가 처음부터 크고 힘센 나라였을까요? 또 고구려는 한번도 적에게 패하지 않은 행운의 나라였을까요? 대답은 '그렇지 않다.'입니다. 고구려도 처음 건국할 때는 아주 작은 나라였고, 또 전쟁에서 여러 차례 패해 굴욕을 당하기도 했답니다. 또한 705 년의 긴 역사를 가졌지만, 결국에는 멸망했지요. 우리는 고구려의 자랑스러운 면만 좋아할 것이 아니라, 고구려에 부족했던 점, 실수했던 점을 살펴보고 다시는 그런 잘못을 범하지 말아야겠다는 교훈을 얻는 것이 더 중요하답니다.

기원전 1세기를 볼까요? 당시 동아시아에서 최고 강대국은 중원에 자리한 한(漢)나라였습니다. 당시 한나라의 인구는 5000만 명을 넘었고, 면적도 370만 제곱킬로미터 정도였답니다. 반면 고구려는 인구가 겨우 15만 명, 면적은 불과 2만 제곱킬로미터도 안 되었습니다. 도저히 두 나라는 비교 대상이 아니었지요. 하지만 700 년 뒤인 7세기 무렵 고구려는 수(隨)나라, 당(唐)나라와 싸워서 승리를 했습니다. 당시 수ㆍ당의 면적과 인구는 한나라와 비슷했습니다. 하지만 고구려는 면적이 50 배, 인구도 30 배 가량이나 커져 있었습니다. 고구려가 눈부신 성장을 했던 것입니다. 고구려가 이처럼 성장해서 강대국과 싸워 승리할 수 있는 까닭은 무엇이었을까요?

조선 중종 때조차 온 나라에서 군사를 총동원한다고 해도 6만 명을 넘기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고구려 후기에는 30만 명 이상의 군대가 있었습니다. 조선 사람들은 중국의 북경과 일본의 에도를 갔다 오는 것이 외국 여행의 전부일 정도였는데, 고구려 사람들은 멀리 중앙아시아에 있는 우즈베키스탄의 수도 사마르칸트까지 다녀 왔습니다. 고구려에는 요동성 한 곳에만 50만 석의 곡식이 저장되어 있었습니다. 조선 초기 전국의 군량 비축량이 50만 석, 문종 ㎰〈?10만 석에 불과했습니다. 세조 때에 잠깐 90만 석으로 올랐지만, 성종 때는 50만 석 정도였습니다.

어떻게 농업만을 중시한 조선보다 고구려가 군량을 더 많이 갖고 있었던 것일까요? 조선은 명(明)나라와 한 차례 싸워 보지도 않고 스스로 제후(諸候)국이라며 굽실거렸습니다. 그런데 고구려는 스스로를 천하의 질서를 지키는 천손(天孫)의 나라이자, 세상에서 가장 신성한 나라라고 여겼습니다.

◆ 좌절 속에서도 희망을 키운 나라

조선과 고구려의 차이는 대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요? 고구려는 대체 어떤 실력을 갖고 있었고, 고구려인은 얼마나 열심히 살았던 사람들이었을까요? 을지문덕 장군이 수나라 30만 대군을 물리친 살수대첩을 기억하고 있다면, 이제는 고구려가 어떠한 나라였기에 당시 세계 최강국인 수나라를 격파할 수 있었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겉으로 드러난 결과보다는 그 바탕에 깔린 고구려의 특성, 고구려인의 생활 자세, 문화 등에 궁금증을 갖고 그것을 배워 보려는 자세가 더욱 필요합니다.

고구려는 당당히 세상의 주인공이자 대국인으로 살았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고구려의 당당함과 함께 대국을 건설한 고구려인의 노력을 배워야 합니다. 고구려가 처음부터 강한 나라였다면, 우리가 배울 것은 별로 없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고구려는 숱한 좌절을 겪으면서 좋은 모습으로 발전해 왔습니다. 비록 지금은 반에서 꼴찌를 하는 친구라도 고구려의 역사를 보며 희망을 가지세요. 고구려 역사를 통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면, 앞으로의 미래는 크게 달라질 것입니다. 시간이란 모든 것을 바꾸어 놓기 때문입니다.


무엇으로 고구려에 대해 알아 내나?

고구려에 대해 알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될까요? 부모님의 어린 시절 이야기는 할머님께서 이야기해 주시면 알 수 있지만, 1000 년도 넘게 지난 고구려 시대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직접 이야기해 줄 수는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책이나 방송 프로그램을 보면 알 수 있다고요? 또 신문 기사를 읽으면 알 수 있다고요?
 
 
▲서울과 구리시 사이의 아차산에는 고구려 군사 유적지가 많이 발견되고 있다. 연천 호로
고루 유적과 서울 구이동 군사 유적지 등 남한 내에도 고구려 유적이 많이 분포하고 있다.
 

◆ 고구려 고분 벽화

그럼, 고구려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분들은 어떻게 그 먼 옛날의 일들을 시시콜콜 알 수 있는 것일까요? 아주 오래 전에 있었던 나라일지라도,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이 남긴 물건, 또는 그 시대 이야기를 가까이서 듣고 적은 기록들을 찾아 연구함으로써 그 시대의 모습을 알아 낼 수 있습니다. 고구려의 경우에는 고구려 사람들이 직접 그린 고분 벽화가 남아 있습니다. 고분 벽화는 고구려인의 생활 모습이나 신앙은 물론, 죽은 후의 세계를 어떻게 생각했는지까지도 알려 줍니다. 고분 벽화를 보는 것만으로도 고구려 시대의 모습을 생생히 알 수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림은 대개 1000 년의 세월이 지나면 본 모습을 간직하기 어렵지만, 다행히도 고구려 사람들이 그린 고분 벽화의 상당수는 지금까지도 옛 모습 그대로 우리에게 고구려 이야기를 들려 주고 있답니다. 최근 북한과 중국이 세계 문화 유산으로 고구려 고분 벽화를 신청한 것은 그만큼 고분 벽화의 가치가 크기 때문입니다. 전문 연구자들은 고분 벽화를 통해 고구려 사람들이 어떻게 생겼고, 무엇을 입었고, 또 어떤 믿음을 가졌는지 등을 연구한답니다. 하지만 벽화는 그림일 뿐이어서 각 시대별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자세히 알 수는 없습니다.

◆ 역사책과 유물

그럴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삼국사기'라는 책입니다. 이 책은 고구려가 멸망한 지 500 년쯤 후 고려 시대 김부식이란 분이 전래의 자료와 외국의 자료를 취합해서 만든 역사책입니다. 고구려에 관해서 가장 체계적으로 설명되어 있지만, 그 양이 많지 않아 고구려 역사 전체를 알기는 어렵답니다.

고구려 시대 사람들이 쓴 역사책으로는 '신집'과 '유기'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지금은 전해지지 않습니다. 대신 고구려를 지켜 본 당나라, 혹은 일본 등에서 기록한 책들이 남아 있어 고구려의 모습을 살펴볼 수가 있답니다. 책은 아니지만 고구려 사람들이 만든 성벽이나, 그릇, 기와, 무덤과 무덤 속에 넣어 둔 각종 물건, 글자가 새겨진 비석 등도 고구려를 아는 데 도움이 된답니다.

고고 학자란 땅 속에 묻혀 있던 이런 자료들을 발굴해 옛 시대의 모습을 찾아 내는 사람들이랍니다. 또 민속 학자들은 우리들의 생활 풍습 가운데 과거부터 전해 오는 풍습을 연구해 옛 시대를 되찾습니다. 언어 학자들은 언어를 통해 이 같은 일을 하지요.

 
▲시루봉 유적지 발굴 현장. 서울 광진구 광장동 아차산 줄기에 있는 시루봉에서 발견된 고구려 군사 유적嗤?발굴하는 현장. 

◆ 가까운 곳에 있는 고구려 유적들

고구려인이 남긴 유물이나 기록을 눈으로 확인해 보려면 박물관이나 도서관, 혹은 서점에 가면 됩니다. 직접 역사의 현장에서 살펴볼 수도 있고요. 고구려를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곳은 물론 고구려의 수도가 위치했던 중국의 환인 시나 집안 현 등입니다. 이 지역에는 장군총이나 광개토대왕릉비가 있지요. 북한의 평양시 등을 방문하여 대본瑗별?장안성, 강서대묘, 안학3호분 등을 직접 볼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런 기회를 얻기도 힘든 데다, 비용도 많이 듭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남한 땅에도 고구려 유적이 많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나요? 특히 서울 동부 지역과 구리시 사이에 있는 아차산에는 고구려 군사 기지가 무려 15 개나 있었답니다. 또 임진강변에도 호로고루 성벽 등 고구려 유적지가 아주 많습니다.

충주에 가면 장수왕 시대에 만든 중원고구려비가 있고, 울산에는 고구려인의 무덤인 적석총이 있지요. 경주를 비롯한 여러 지방에도 고구려 유적과 유물이 있습니다. 긴 역사와 넓은 영토를 지녔던 나라였던 만큼 고구려와 관련된 유적과 유물은 한반도 전역에서 찾아 볼 수 있답니다.

옛 역사는 박물관이나 도서관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말과 습관, 그리고 길가에 떨어진 작은 토기 조각, 돌덩이에서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이 땅에 줄곧 살아 왔던 조상들이 그 흔적을 남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도 언젠가는 역사가 되어 먼 후손들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로 전해질 것입니다. 그 이야기 속에 여러분은 어떤 인물로 등장할까 상상해 보는 것도 즐겁지 않을까요? 


고구려는 어떻게 건국되었을까?

천하를 호령했던 강대국 고구려는 어떻게 탄생했을까요? 처음부터 크고 강대한 모습으로 멋지게 출발했을까요? 아니랍니다. 대부분의 나라가 그러하듯이 고구려도 처음에는 아주 작은 나라에서 출발했답니다. 오늘은 고구려 건국에 대해 알아 봅니다. 

 
▲오녀산성의 성벽. 2000 년의 숨결이 살아 있는 고구려 초기의 성벽이다. 

고구려 건국 이야기는 이규보의 ‘동명왕편’이란 글에 재미있게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미 알고 있는 사람도 많을 것입니다만, 한번 들어 볼까요? 천신의 아들인 해모수가 땅에 내려와 부여의 왕이 되었는데, 어느 날 웅심연 물가에서 하백의 딸 유화와 만나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해모수는 유화를 버리고 떠나고 말았습니다. 결국 유화는 아버지에게도 버림받게 되었습니다. 그 후 유화는 동부여 금와왕을 만나게 되었는데, 금와왕은 그녀를 궁궐로 데려와 살게 했습니다. 그 곳에서 유화는 햇빛을 받아 임신을 한 후 커다란 알을 낳았습니다. 그 알을 깨고 태어난 사람이 바로 주몽입니다.

주몽은 어릴 적부터 활을 잘 쏘고 힘도 센 데다 세상을 보는 눈이 뛰어난 인재였지만, 동부여에서는 자신의 뜻을 펼칠 수가 없었습니다. 도리어 금와왕의 자식들에게 질투를 받아 마구간 지기를 해야만 했습니다. 주몽은 희망 없는 현실에 안주하기를 거부하고 동부여를 떠나 미지의 세계를 찾아 길을 나서는 용기를 보여 줍니다. 그것이 곧 고구려 건국의 시작이 됩니다. 이 이야기는 고구려인이 직접 쓴 ‘광개토대왕 비문’에도 간략히 나온답니다. 다만 고구려를 건국한 분의 이름을 추모(鄒牟)왕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몽은 활을 잘 쏜다는 뜻의 별명이랍니다.

추모왕의 건국 이야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신화적인 이야기가 담겨 있기도 합니다. 추모왕이 남으로 내려오다 엄리대수를 건널 때에 나룻가에서 “나는 천제(天帝)의 아들이며, 하백의 따님을 어머니로 한 추모왕이다. 나를 위하여 갈대를 연결하고 거북이 무리를 짓게 하라.”고 명하였답니다. 추모왕의 이야기가 신화처럼 기록된 것은 고구려 사람들이 추모왕을 고등신으로, 어머니 유화를 부여신으로 섬겼기 때문입니다. 추모왕은 고구려인의 사랑을 독차지한 아주 위대한 왕이었던 것이지요.

추모왕은 비류곡에 이르러서 홀본 서쪽 성산(城山) 위에 도읍을 세우고 나라이름을 고구려라고 했습니다. 현재 고구려 첫 수도는 압록강 북쪽에 있는 환인시의 오녀산성으로 보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오녀산은 해발 800 m나 되는 산으로, 산 정상에는 둘레 2 km의 넓은 평지와 연못이 있습니다. 그 곳에 궁궐로 보이는 많은 건물 터가 발견되었습니다. 추모왕이 이 곳에 도읍을 정하고 거주했다면 산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당연히 우러러 볼 수밖에 없을 만큼 오녀산 정상은 참으로 신비한 곳이랍니다. 추모왕이 처음 고구려를 세웠을 때는 아주 작은 나라에 불과했습니다. 그래서 궁궐도 초가로 이어 지을 정도로 작고 초라했습니다. 땅도 농사짓기에 적합하지 못하여 늘 가난하게 살아야 했습니다. 게다가 그 곳 사람들은 말갈부락 사람들에게 시달림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천혜의 요새인 오녀산성. 해발 800 m 고지에 넓은 평지와 연못이 있다. 

이들을 변화시킨 사람이 추모왕입니다. 소극적이던 사람들에게 힘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답니다. 추모왕은 자신을 천신의 자손이라고 내세우며 고구려인에게 강한 자부심을 갖도록 하는 한편, 결속력을 키워, 사람들의 시선을 바깥으로 돌리게 만들었습니다. 고구려는 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주변의 말갈, 비류국, 행인국, 북옥저 등 여러 나라들을 하나하나 굴복시켜 갔습니다. ‘동명왕편’에 비류국을 정복하는 이야기는 매우 재미있습니다. 추모왕과 비류국 송양왕이 서로 활쏘기 시합을 비롯한 여러 대결 끝에 마침내 하늘의 도움을 받아 비를 내려 굴복시켰다고 합니다.

아마도 엄청난 전쟁을 치렀고, 특히 물을 이용하여 비류국을 공격해 정복했다는 뜻이겠지요. 고구려는 빠르게 강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옛날의 대제국인 고조선의 뒤를 이을 국가로 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추모왕이 만일 동부여에 머물렀다면, 고구려는 탄생하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용감하게 새로운 길을 개척한 탓에 우리 역사에서 멋진 고구려가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추모왕은 우리 나라 최초의 벤처 사업가라고 할만 하답니다. 


왜 고구려인들은 활을 잘 쏘았나?
 
 
▲약수리 고분 수렵도. 사냥은 몰이꾼과 사냥꾼의 협동으로 이루어지는 작은 군사 훈련이기도 하다. 

◆ 사냥은 작은 군사 훈련

고구려 사람들은 사냥하는 것을 매우 즐겼습니다. 유명한 무용총 수렵도를 비롯해, 덕흥리 고분, 장천 1호분 등의 벽화는 고구려인의 사냥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 주고 있지요. 약수리 고분 벽화를 보면, 말을 타면서 활을 쏘는 사람들과 숨어서 사냥감을 몰아 주는 사람들이 각자 맡은 역할대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사냥감을 한쪽으로 몰면, 길목을 지키던 사람들이 나와서 공격하고, 뒤에서 활을 쏘며 쫓아오는 장면은 마치 적을 섬멸하는 군대의 움직임처럼 보입니다.

말을 탄 사람을 보세요. 발에 걸치는 등자도 없이 말 위에 올라탄 채 뒤로 몸을 돌려 화살을 쏘고 있습니다. 참 멋있게 보이지만, 이는 쉽게 흉내낼 수 없는 동작이에요. 아주 어린 시절부터 말 타기와 활 쏘기를 연습한 결과랍니다. 말을 탄 상태에서 자유자재로 몸을 움직이고 균형을 잡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게다가 활을 쏘려면 말 고삐를 놓아야 하므로, 말과 사람이 한 몸처럼 되어야 합니다. 말 타기는 어려서부터 최소 10 년은 훈련해야 능숙해질 수 있답니다.

활 쏘기 역시 쉽지 않답니다. 활시위에 화살을 올려 놓고 그냥 잡아 당겼다가 놓는다고 되는 것은 아니지요. 시위를 당기는 힘이 세지 않고서는 화살을 멀리 보낼 수 없습니다. 자세가 안정되어야 하고, 목표를 정확히 바라보고 흔들리지 않은 상태에서 화살을 쏘아야 제대로 맞힐 수가 있습니다. 갑자기 맹수나 적이 뛰쳐나올 때를 대비해 화살 통에서 화살을 꺼내어 재빠르게 화살을 날리려면 엄청난 훈련을 해야 합니다.

 
▲덕흥리 고분의 활 쏘기 경기 장면. 말을 타고 몸을 뒤로 돌려 활을 쏘는 고구려인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 어려서부터 글 공부와 활 쏘기 배워

고구려 시대 학교인 경당에서는 글공부와 활 쏘기를 가르쳤습니다. 말 타기도 물론 어릴 때부터 훈련했지요. 이런 훈련을 거쳐 정말 활을 잘 쏘는 사람을 ‘주몽’이라고 불렀습니다. 고구려를 건국한 추모왕의 별명이 ‘주몽’이었던 것 기억하지요? 부여와 고구려에서 ‘주몽’이라 불리는 사람은 요즘 말로 ‘스타’였던 것입니다.

고구려에서는 매년 3월 3일 낙랑언덕에서 사냥 대회를 열었습니다. 국왕이 직접 참여하는 이 행사에는 젊은이들이 참가하여 저마다 사냥 솜씨를 뽐내었습니다. 이 날 가장 사냥을 많이 해 온 사람에게는 관직을 주고 나라의 일을 맡기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뽑힌 사람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람은 평강공주의 남편인 온달입니다. 온달은 가난한 평민 출신이지만, 사냥 대회에서 뛰어난 실력을 보여 임금의 사위로 인정 받았답니다.

고구려 청소년들이 말 타고 활 쏘는 것을 배우는 데 열심이었던 것은 이처럼 높은 벼슬길에 오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글공부를 많이 한 사람도 벼슬길에 올랐지요. 고구려는 학문도 매우 발달한 나라였지요. 태학박사 이문진을 비롯한 많은 학자들이 있었습니다. 고구려 사람들이 평소 사냥을 즐긴 것은 그것이 일종의 군사 훈련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냥감을 적군이라고 생각해 본다면 이해가 되겠지요. 고구려는 처음부터 많은 나라들과 싸워야 했기 때문에 강한 군대, 능력 있는 전사가 필요했답니다.

◆ 일반 국민들도 군사 훈련 받아

초기 전쟁에서는 ‘좌식자’라고도 불리는 전문 군사 집단이 앞장 섰습니다. 하지만 점차 위, 돌궐, 수, 당 등 큰 나라와 전쟁을 해야 했기 때문에 군사의 수가 많아야 했습니다. 따라서 전문 군인만이 아닌 일반 국민들에게도 군사 훈련을 시켰던 것입니다. 평소 활 쏘기를 잘한 사람은 전쟁이 났을 때에 즉시 뛰어난 궁병(弓兵)이 될 수 있고, 말을 잘 탄 사람들은 날랜 기병(騎兵)으로 활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고구려 시대의 국경은 지금처럼 함부로 넘어 올 수 없는 선이 아니라, 수시로 적군이나 도적들이 쳐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반대로 고구려도 부족한 식량이나 노동력, 재물 등을 얻기 위해서 초기에는 다른 나라를 수시로 공격하기도 했답니다. 전쟁을 피할 수 없다면 맞서 싸워 이기자는 것이 고구려인의 생각이었습니다.

고구려가 건국 초기의 불리한 여건을 극복하고 주변국과 싸워 이기면서 강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평소부터 날쌔고 용감한 군인을 길렀기 때문입니다. 고구려가 우연히, 또는 운이 좋아서, 똑똑한 지도자 몇몇 때문에 강국이 된 것은 결코 아니랍니다. 세상에 공짜란 없는 것이니까요.


국내성으로 수도를 옮긴 '유리명왕'
부여에 맞선 천연 요새서 고구려 발전 토대 마련

고구려 2대 유리명왕 때인 서기 2년,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 쓰기 위해 나라에서 키우던 돼지 한 마리가 달아나는 일이 생겼습니다. ‘설지’라는 사람이 돼지를 뒤쫓아 국내 위나암이란 곳에서 겨우 잡을 수 있었습니다. 설지는 유리명왕에게 이 일을 보고하면서, 국내 위나암 지역이 수도로 적합하다고 추천을 했습니다.

 
▲환도산성. 최근 이 곳에서는 고구려 궁궐 유적이 발견되기도 했다 

유리명왕은 다음해에 위나암성을 쌓고 국내(國內)로 수도를 옮겼습니다. 광개토대왕릉비를 비롯한 많은 유물이 남아 있는 압록강 북쪽의 집안 지역이 곧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인 국내성입니다. 그렇다면 고구려는 돼지로 인해 수도를 옮긴 셈이 됩니다. 그런데 과연 수도를 옮기는 거대한 일이 단지 도망간 돼지와 돼지를 키우는 관리의 말 때문에 진행될 수 있었을까요?

펄펄 나는 저 꾀꼬리 암수 서로 정다워라
외로워라 이 내몸은 뉘와 함께 돌아갈꼬.

황조가라 불리는 이 시는 몹시 외로운 주인공의 심정을 노래합니다. 이 시의 주인공은 놀랍게도 유리명왕이었답니다. 왕이라면 모든 것을 가질 수 있고, 많은 사람들에게 명령하며 자기 뜻대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가 쉽지요. 하지만 왕이기 때문에 하지 못하는 일도 많습니다. 또 왕이기에 남보다 불행해진 경우도 많습니다.

유리명왕은 어린 시절에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른 채 살다가, 뒤늦게 아버지가 고구려 왕이 된 것을 알고 동부여에서 탈출해 온 분입니다. 그가 왕이 되자, 가장 힘들어 한 사람은 추모왕이 고구려를 건국할 때에 크게 도와 준 소서노와 그녀의 자식인 비류와 온조였습니다.

소서노는 자신의 아들들이 고구려 왕이 될 것이라는 희망을 접어야만 했습니다. 결국 소서노와 비류, 온조는 무리들을 이끌고 고구려를 떠나 남쪽으로 가서 백제를 세웠습니다. 소서노 세력이 빠져 나가자 고구려의 국력은 약화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유리명왕은 새롭게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을 모아야 했습니다. 첫째 부인인 송씨 왕후가 1 년 만에 죽자, 왕은 강력한 힘을 가진 골천 출신의 화희와 한족 출신의 치희를 새로운 왕후로 맞이합니다. 유리명왕은 결혼을 통해 고구려의 힘을 모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화희와 치희 왕후가 서로 질투하며 싸우다가 끝내 치희가 화가 나서 궁궐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왕이 치희를 쫓아갔지만, 그녀를 돌아오게 하지는 못했습니다. 유리명왕은 큰 힘을 가진 화희의 세력에 의지해야 했기 때문에 자신의 뜻대로 할 수가 없었습니다. 유리명왕은 이 때 황조가를 부르며 슬픔을 달래야 했을 뿐입니다. 

 
▲집안 시 전경. 지금은 한적한 소도시지만, 과거에는 고구려의 중심지였다. 

유리명왕은 주변의 선비족을 공격하여 그들을 복종시키는 등 고구려를 힘센 나라로 만들어 갔지만, 고구려는 여전히 부여에 비하면 약한 나라였습니다. 부여의 대소왕은 고구려에게 세금을 바치라고 강요하고, 태자 도절을 인질로 보내라고 요구해 왔습니다. 유리명왕은 사랑하는 자식을 인질로 보낼 수 없어 버티다가 부여의 공격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태자 도절이 20 세도 못 되어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부여국의 억압은 거세지고, 아내에 이어 자식까지 잃어버리자 유리명왕은 크게 마음이 상했습니다. 이 때 유리명왕이 선택한 것이 부여의 위협을 막아 내기도 쉽고, 국력을 키우기에도 적합한 국내성으로 도읍을 옮겨 새로운 변화를 꾀해 보자는 것이었습니다. 국내성은 산과 물이 깊고 농사짓기와 사냥과 고기잡이에도 좋아 백성들도 살기 좋고, 전쟁의 피해도 줄일 수 있는 곳입니다.

약한 나라에게는 방패 막이 되어 주는 높은 산이 둘러싸고 있고, 힘이 강해졌을 때에 주변으로 뻗어갈 수 있는 압록강을 비롯한 여러 교통로가 연결되어 있어 수도로서는 아주 좋은 조건을 갖춘 곳潔鄕熾? 돼지 사건 때문에 수도를 옮긴 것만은 아니랍니다. 고구려는 국내성을 수도로 삼아 나라를 크게 키울 수가 있었습니다.

고구려 발전의 토대를 이룬 국내성 일대의 주요 유적들은 최근 중국에 의해 세계 문화 유산으로 등록 신청이 되었답니다. 장군총, 환도산성, 춤무덤과 오회분5호묘, 태왕릉 등 고구려의 대표적 유적들을 이 곳에서 찾아 볼 수 있답니다. 하지만 국내성은 큰 나라의 수도로서는 면적이 좀 좁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장수왕은 427년 넓은 평야 지대에 위치한 평양으로 도읍을 옮겼습니다. 국내성은 오랫동안 고구려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 크게 번영했답니다. 


고구려에도 대장금이 있었을까?
침술 발달·깨끗한 심신 단련으로 '장수 국가' 자랑

사람들은 누구나 늙지 않고 오래 살기를 원합니다. 사람의 생명보다 소중한 것이 또 있을까요? 오회분4호묘 벽화에는 공작새를 탄 신선이 약 단지를 들고 날아가는 모습이 보입니다. 강서대묘 벽화에도 영원히 늙지도 죽지도 않는 삼신산으로 날아가는 신선의 모습이 보입니다. 고구려인들은 오래 사는 신선이 되기를 희망했으며, 오래 살 수 있는 약이나 비법을 찾으려고 노력했답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나이를 먹음에 따라 사람의 몸은 약해지고, 병이 들어 죽게 된답니다. 그래서 병을 치료할 의사들이 필요하지요. 고구려에도 허준, 대장금과 같은 유명한 의사들이 있었을까요? 

 
▲1 : 오회분4호묘의 약 단지를 든 신선의 모습. 약 단지에는 먹으면 늙지도 죽지도 않는 선약(仙藥)이 들어 있다. 

◈ 침술이 발달한 나라

물론 있었습니다. 고구려 의사로 왜국에 건너가 왜왕의 어의가 된 모치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백제 사람으로 왜국에서 활동한 소수니라는 여의사는 부인병 치료에 뛰어났다고 합니다. 고구려에도 대장금, 소수니와 같은 여자 의사도 있었을 것입니다. 고구려에서는 특히 침술이 발달했는데, 안작득지라는 분은 침으로 못 고치는 병이 없었다고 합니다. 또 고구려 의사는 한 치의 머리털을 갈라 10여 가닥으로 만들어 그곳에 보이는 빈틈까지 찌를 정도로 기술이 절묘했다고 중국 기록에 전해 옵니다. 고구려의 약재인 인삼, 오미자, 백부자, 말린 지네, 금 등은 품질이 아주 좋아서 외국으로 수출되기도 했답니다.

◈ 깨끗한 생활 습관

옛날에 사람들을 가장 괴롭힌 것은 전염병인 역병이었습니다. 고구려에도 3 차례 역병이 돌았다고 하는데, 신라나 백제에 비하면 적은 편입니다. 고구려의 기후 탓도 있겠지만, 사람들이 깨끗한 것을 좋아하여 자주 목욕을 했기 때문에 역병이 적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구려인들도 온천에서 목욕하는 것을 즐겼습니다. 옛날부터 우리 조상들은 몸 씻기를 아주 좋아했습니다. 목욕을 1 년에 한번도 제대로 하지 않기 때문에 냄새가 나고 더러워서 ‘때국 놈’이라고 놀림을 받았던 중국인들은 고구려의 이런 풍습을 놀라워했답니다.

과거에는 질병만이 아니라, 굶주림으로 사람이 죽기도 했습니다. 고구려에서는 사람이 굶어 죽는 것을 막기 위해 가뭄이나 홍수가 생기면 나라의 곡식을 풀어 사람들을 살렸습니다. 특히 식량이 부족한 봄철에 나라에서 농민에게 곡식을 빌려 주고 가을에 돌려받는 진대법을 실시하여 백성들을 굶주림으로부터 구하기도 했답니다.

 
▲2 : 강서대묘의 삼신산으로 날아가는 신선의 모습. 삼신산은 늙지도 죽지도 않는 신선들이 살고 있는 천국과 같은 곳이다. 

◈ 장수한 왕 많아

옛날에는 60 세가 넘게 사는 사람이 드물었기 때문에 60이 넘으면 나라에서 장수를 축하하고 입을 것과 먹을 것, 때로는 관직도 주었답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친형제 사이인 고구려 6대 태조대왕과 차대왕, 신대왕은 대단히 오래 살았다고 합니다. 태조대왕은 서기 53년인 7 세에 왕위에 올라 146년까지 무려 94 년 간이나 나라를 다스렸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가 죽은 것은 이보다 더 늦은 165년으로 그 때 태조대왕의 나이는 무려 119 세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차대왕은 95 세에, 신대왕은 90 세에 죽었다는군요. 또 백성을 괴롭혔던 차대왕을 몰아 내고 신대왕을 왕위에 앉힌 명림답부는 98 세에 국상이 됐다가 113 세에 죽었습니다. 20대 장수왕은 78 년 간 왕으로 살다가 98 세에 죽었芽求?

과연 당시 사람들이 이렇게 오래 살 수가 있었을까요? 차대왕과 신대왕의 나이에 대해서는 의심할 여지가 있기는 하지만, 조선 시대에도 영조가 83 세, 태조 이성계가 74 세까지 살았으니까, 굳이 오래 산 것을 의심할 필요는 없겠지요. 고구려 왕들의 평균 수명을 계산해 보면 대략 55 세가 됩니다. 지금 사람들보다는 일찍 죽은 셈이지요. 하지만 1960년의 한국인 평균 수명이 불과 52 세였던 것에 비하면 대단히 오래 산 것이라고 할 수 있답니다.

◈ 평소 몸과 마음을 단련

고구려가 장수 국가였던 것은 목욕을 자주해 위생에 철저했고, 의학이 발달했으며, 무엇보다 사람들이 평소에 몸과 마음 단련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고구려인들은 씨름과 수박 등으로 몸을 단련했고, 빠르게 걸으며 씩씩하게 생활했답니다.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것도 즐겼는데, 이 때 말을 탄 기마 자세나 활을 당기는 자세는 자연스럽게 단전 호흡을 하게 하여 건강에 큰 도움이 됐다고 합니다. 고구려 사람들은 늘 노래와 춤을 추며 즐겁게 살았는데, 이 또한 건강 유지에 큰 도움이 됐을 것입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생활하고, 자주 씻고, 운동으로 몸을 단련한다면 여러분도 건강한 어린이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을파소의 등용과 고국천왕
시골 농부에서 '국상'으로… 정치·경제 튼튼한 나라 만들어

을파소는 서기 191년부터 13 년 간 9대 고국천왕과 산상왕을 모신 고구려에서 제일 가는 현명한 국상이었습니다. 국상은 신하들 가운데 가장 으뜸으로 조선 시대 영의정과 같은 관직이랍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을파소는 국상에 임명되기 전까지는 시골에서 농사짓고 살던 농부였답니다. 그런 그가 어떻게 하루 아침에 국상이 될 수 있었을까요? 

 
오회분4호묘에 그려진 손에 벼 이삭을 들고 있는 농사의 신. 고구려인의 대다수는 농민이었다. 따라서 진대법을 실시한 을파소와 고국천왕은 농사의 신처럼 고마움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 귀족의 반대에도 농부를 국상으로 등용

능력이 뛰어난 사람을 갑자기 크게 등용하는 사례가 ‘삼국지’에 나옵니다. 떠돌이 무사 집단의 지도자였던 유비가 삼고초려 끝에 제갈량을 만나 촉나라를 세운 이야기지요. 하지만 고구려 고국천왕이 을파소를 등용한 사건은 이보다 16 년 전의 일이랍니다. 게다가 고국천왕은 확고하게 정비된 국가 조직과 많은 귀족들을 거느린 한 나라의 왕이었습니다. 따라서 고국천왕이 을파소를 등용한 것은 유비가 제갈량을 등용한 것보다는 더 큰 결심과 더 뛰어난 사람을 보는 판단력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하루 아침에 농부를 국상으로 임명하여 성공한 고구려에서의 사례가 서쪽으로 전해져서 유비로 하여금 제갈량을 등용하도록 결심하는 데 자극이 된 것은 아닐까요?

고국천왕은 왕이 된 지 13 년 되던 해에 정치를 바로잡고자 새로운 인재를 추천하라고 신하들에게 명령했습니다. 이 때 많은 사람들이 추천한 사람은 을파소가 아니라 안유라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안유는 높은 관직을 맡아서 정치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이를 사양했습니다. 그 대신 자기보다 더 능력이 뛰어난 을파소를 천거했습니다.

고국천왕은 오로지 안유의 말을 믿고 을파소에게 사람을 보냈습니다.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살던 그에게 지금의 장관에 해당되는 중외대부 관직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을파소는 중외대부직을 사양했습니다. 올바른 정치를 하려면 중외대부라는 직책으로는 일을 할 수 없음을 알고 이를 사양했던 것입니다. 사람을 보는 눈이 뛰어난 고국천왕은 을파소의 진정한 마음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를 국상에 임명했습니다.

시골 농부를 국상으로 삼은 파격적인 조치는 귀족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귀족들은 왕에게 을파소를 비난하며 그를 국상직에서 쫓아 내려 했습니다. 하지만 고국천왕은 한번 결심한 이상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고국천왕은 사람의 출신을 보지 말고 사람의 능력을 믿으라면서 귀족들에게 을파소를 믿고 따르라고 명령했습니다.

◈ 대대적인 개혁에 나선 을파소

국왕의 절대적 믿음을 받은 을파소는 이에 보답이라도 하듯, 교육 제도를 개편하고 부정 부패 방지, 인재 선발 활성화, 진대법을 비롯한 경제 정책 개혁 등을 통해 정치를 바로잡아 고구려를 부강하게 만들었습니다.

특히 진대법은 고구려가 가장 먼저 실시한 제도입니다. 식량이 부족한 3월에서 7월까지 나라에서 농민에게 곡식을 빌려 주고 10월에 되돌려 받아 백성들을 굶주림으로부터 구했습니다. 진대법의 실시로 농민들은 보다 안정적으로 생업에 종사할 수 있게 되었답니다. 조선 시대에 농민을 구제하는 제도인 환곡과 11세기 송나라의 개혁적 정책이었던 청묘법은 고구려의 진대법을 본받아 시행된 것이랍니다.

고구려가 살기 좋은 곳이라고 소문이 나자 이웃 나라 농민들이 고구려로 자진해서 넘어오기도 했답니다. 백성들이 모이자 고구려는 더욱 부강한 나라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을파소는 백성들의 사랑을 받는 고구려 최고의 명재상이었습니다. 그가 죽자 고구려 사람 모두가 진심으로 슬퍼하며 울었다고 합니다.

1800 년이 지났지만 고국천왕과 안유, 을파소를 생각해 봅시다. 을파소와 같은 훌륭한 인재들은 여러분의 친구들 가운데에도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을파소와 같은 업적을 이룰 수 있을까요? 고국천왕과 같이 널리 인재를 구하고, 한번 믿은 인재를 끝까지 밀어 준 사람들이 없다면, 또 안유와 같이 자신보다 뛰어난 사람에게 기회를 양보하는 사람들이 없었다면, 국상 을파소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자기보다 어떤 부분에 능력이 뛰어난 친구가 있다면 그 친구의 능력을 인정하고 그 능력을 발휘하도록 도울 때, 그 친구도 내 능력을 인정하고 나를 도울 것입니다. 서로를 질투하기보다는 서로의 능력을 함께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 준다면 우리 나라도 크게 발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 주변에는 을파소와 같은 뛰어난 인재도 필요하지만, 고국천왕이나 안유와 같은 사람들이 더욱 필요한지도 모르겠습니다.


고구려의 당찬 여성들

 
수레를 타고 외출을 하는 덕홍리 고분의 여 주인공. 여성이 외 출하여 남자와 자유롭게 얘기를 나누며 놀고 있다. 

조선 시대는 남성 중심의 사회였습니다. 남자가 여자보다 더 귀하다고 여겨서, 여성들은 남성들의 뒷바라지를 하며 살았습니다. 여성으로 태어났다는 그 이유만으로 해 보고 싶은 일도 못 하고 살았던 조선의 여성들이 조금은 애처롭고 답답하게 보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이 우리 역사의 전통적인 여성의 모습일까요?

아니랍니다. 그것은 조선 후기에 주자학이 일상 생활 습관까지 규제하면서 생긴 몇백 년 안 되는 일시적인 모습일 뿐이랍니다. 신라 시대에 선덕 여왕 등 3 명의 여왕이 있다는 것은 여러분도 잘 알고 있겠지요? 고구려에는 남성보다 더 당찬 삶을 살아온 여성들도 많았답니다.

고구려를 건국한 추모왕의 어머니 유화의 삶을 만나 볼까요? 그녀는 웅심 연못가에 동생들과 나왔다가 천신의 아들이라는 해모수를 만나 사랑을 하게 되었고 임신도 했습니다. 하지만 해모수는 그녀를 떠났고, 아버지 하백은 그녀를 내쫓아 버렸습니다. 갈 곳 없던 그녀는 금와왕을 만나 동부여에서 후궁으로 살았답니다.

 
장천 1호분의 야외 출행도. 그림에서 보듯 고구려의 여성 들은 수레를 타고 자유롭게 외출할 수 있었다. 

지금의 기준으로 본다면 그녀는 미혼모이며, 집에서 버림 받고, 첩살이를 한 그다지 행실이 아름답지 못한 여인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고구려인들은 그녀를 해마다 동맹 행사에서 부여 신으로 섬겼답니다. 그녀는 추모에게 말을 고르는 법, 활과 화살을 만드는 법, 또 곡식을 고르는 일 등 나라를 세울 때 필요한 많은 일들을 가르쳐 준 지혜의 여신이자 생명의 신, 물의 여신, 풍요와 곡식의 여신이었습니다. 그녀가 이렇게 신으로 섬겨질 수 있었던 것은 여성에 대한 차별 의식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랍니다.

한편, 6대 태조 대왕의 어머니인 부여 태후는 모본왕을 몰아 내고 7 세에 불과한 어린 아들이 왕위에 오르게 만듭니다. 그리고 자신이 한동안 직접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남편이 있었지만, 그녀야말로 실질적인 여왕이나 다름없었던 것이지요.

또 한 명의 주목할 여성 인물은 우씨 왕후입니다. 그녀는 남편인 고국천왕이 죽자 왕의 죽음을 알리지 않고, 밤에 몰래 왕의 두 동생인 발기와 연우를 찾아갑니다. 그리고 자기를 받아들인 연우에게 왕위를 넘겨 주고, 자신은 다시 한번 왕비가 됩니다.

그녀처럼 왕위를 자신이 선택한 인물에게 물려 주고 다시 왕비가 된 예는 세계 어느 나라 역사에서도 찾기 어렵습니다. 우씨 왕후는 자신이 연나부의 대표로서 고국천왕과의 사이에 자식을 두지 못 했기 때문에, 발기가 왕이 되면 연나부 세력이 약해질 것을 걱정하여 이처럼 과감한 행동을 했던 것입니다. 산상왕이 된 연우는 그 후 후궁을 맞아들이는 것도 몰래 할 정도로 우씨 왕후의 눈치를 봐야 했답니다.

평강 공주 역시 대단한 여성입니다. 그녀는 귀족의 자제와 결혼하라는 왕의 명령을 받아들이지 않고, 스스로 궁궐을 뛰쳐나와 자기가 선택한 바보 온달과 결혼해 그를 대장군으로 만들었습니다. 조선 시대라면 평강 공주는 공주의 신분을 빼앗겼을 것이고, 온달은 죽임을 당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고구려 평원왕은 그녀와 대장군 온달을 축복해 주었답니다. 평강 공주는 이처럼 신분을 뛰어넘어 사랑을 성취한 용기 있고 진취적인 여성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고구려의 일반 평민 여성들도 당당하게 자기 주장을 펼치며 살았습니다. 산상왕의 둘째 부인이 된 후녀는 자기를 죽이려는 군사들 앞에서 당당히 자신이 왕의 자식을 잉태했음을 밝혀 죽음을 면하는 당찬 면모를 보여 주기도 합니다. 고구려 여성들은 이 밖에도 결혼, 상속, 외출 등에서도 남자와 별다른 兌걋?받지 않았습니다. 자유롭게 연애를 하며 자기 재산을 갖고 당당히 사는 고구려 여성들은 말 타고 사냥하는 용감한 고구려 남성들과 무척이나 잘 어울렸습니다. 고구려의 데릴사위제는 남자들이 처가에서 오랫동안 생활한 후에야 아내와 함께 남자의 집으로 돌아올 수 있는 지극히 여성을 배려한 결혼 풍습입니다. 장천 1호 고분 벽화에는 여성이 좌우가 탁 트인 개방형 수레를 타고 외출하여 남자에게 말을 걸고 함께 춤추고 악기를 연주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아엄이란 여성은 자신의 재산으로 불탑을 세우기도 했고요. 여성들은 또 경제 생활의 주체로서 농사도 짓고, 시장에서 물건도 팔고, 전문 직업인으로도 활발하게 활동했습니다. 세상의 절반인 여성의 능력을 발휘하지 못 하게 막는다면 한 나라의 힘은 절반밖에 사용하지 못 하는 것입니다. 고구려가 강하고 멋진 나라였던 이유는 이처럼 여성들이 남성 못지않게 능력을 발휘하며 생활했기 때문이랍니다. 여성과 남성은 함께 살아가야 할 동반자입니다. 어린이 여러분들도 서로의 능력을 존중해 주고, 좋은 세상을 만드는 데 힘을 합쳐야 하겠지요.


교만해서는 안 돼요, 동천왕님


환도산성. 고구려의 수도였던 환도산성은 위나라 군대에 의해 노략질 을 당하기도 했던 곳이다. 

고구려 11대 왕인 동천왕은 대단한 효자였고, 정치도 잘해서 사람들의 인기를 한몸에 받았습니다. 그가 죽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왕과 함께 무덤에 묻히기를 희망하여, 아들인 중천왕이 이를 금지시킬 정도였습니다. 이처럼 백성들의 사랑을 받은 동천왕은 고구려를 힘센 나라로 만들었습니다. 그 때문인지 외국인들은 그를 대단히 무서운 인물로 기록하고 있답니다.

당시 고구려는 조조의 위나라, 손권의 오나라와 외교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고구려가 위나라와 외교 관계를 맺는 것을 보고 오나라가 트집을 잡자 동천왕은 크게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위나라 사신의 목을 베어 위나라에 보내고 오나라와의 관계도 끊었습니다. 이처럼 단호하고 결단력 있는 동천왕에게는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답니다. 그것은 지나치게 자신감이 넘쳤다는 점입니다. 자신감이 지나치면 자만심이 되지요. 동천왕은 딱 한 번 자만심을 부려 곤경을 치르게 된답니다.

동천왕은 238년 위나라를 도와 요동에 있었던 공손씨 세력을 공격하여 멸망시켜 버렸습니다. 고구려로서는 당연히 어떤 대가를 바라고 도와 준 것인데, 위나라로부터 아무런 보상을 못 받았습니다. 그래서 동천왕은 위나라의 서안평이란 곳을 공격했습니다. 동천왕은 위나라가 오, 촉과 싸우기에 바빠서 고구려를 공격해 오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고구려 철갑 기병. 대단히 강해 보이지만, 느린 움직임으로 인해 적군에게 크게 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위나라는 이미 오, 촉을 크게 앞선 강대국이었습니다. 위나라는 곧바로 관구검이란 장군을 보내어 고구려를 공격해 왔습니다. 동천왕도 2만의 군대를 비류수로 보내 위나라 군대와 맞섰습니다. 첫 전투에서 고구려군은 적군 3000 명의 목을 베는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여세를 몰아 양맥 계곡까지 추격해서 또 한 차례 승리를 거뒀습니다. 이 전투에서 적 3000 명을 죽이거나 포로로 잡았습니다. 동천왕은 거듭 승리를 거두자, 이 때부터 상대를 얕보기 시작했습니다.

“위나라가 큰 나라라고 자랑하더니, 많은 군대를 이끌고 와서도 우리의 적은 군사보다 못 하구나. 이제 적장의 목도 내 손 안에 있다.”

이 때 득래라는 현명한 신하가 동천왕에게 방심하지 말라고 충언을 했습니다. 하지만 동천왕은 자신만만해하며 고구려의 자랑인 5000 명의 철갑 기병대를 이끌고 위나라 군대를 공격했습니다. 위나라군은 무모하게 달려드는 고구려 군을 처음에는 싸움에 지는 척하면서 유인했습니다. 적의 작전에 말려든 것도 모르고 공격하던 고구려군은, 사방에서 갑자기 나타난 위나라 군대에 포위 당했습니다.

무거운 갑옷을 입은 철갑 기병은 적과 정면 충돌을 할 때는 막강한 군사들이지만, 빠르게 말을 달릴 수가 없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적군이 사방에서 포위를 하자, 고구려군은 활동이 자유롭지 못 하여 꼼짝없이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 전투로 무려 1만 8000 명이나 되는 군사들이 죽었고, 동천왕은 겨우 1000 명의 군사만을 데리고 도망을 쳐야 했습니다. 단 한 번의 실수가 이처럼 고구려를 위태롭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위나라 군사들은 곧 고구려 수도인 환도성으로 쳐들어와 노략질을 했습니다. 위나라 관구검은 부하인 왕기를 시켜 동천왕을 추격했습니다. 득래의 충언을 듣지 않은 동천왕은 크게 후회했지만, 추격병에 쫓기는 신세가 됐습니다. 이 때 밀우 장군이 나서서 자신이 결사대로 적을 막을 것이니, 어서 피하라고 했습니다. 밀우는 있는 힘을 다해 적과 맞섰습니다. 동천왕은 밀우가 걱정되었습니다. 그러자 유옥구가 나서서 죽음 직전의 밀우를 구해 왔습니다.

동천왕은 밀우를 자신의 무릎 위에 뉘었습니다. 한참 만에 밀우가 깨어났고, 고구려 군사들은 부하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왕을 보고 힘을 내었습니다. 동천왕은 적군의 추격에서 벗어나 다시 군사를 모으려고 했습니다. 이 때 신하인 유유가 계책을 냈습니다. 유유는 위나라 군대에 가서 거짓으로 항복을 한다고 했습니다. 위나라 장군은 유유의 말을 믿고 그가 준 음식을 먹으려고 했습니다. 이 틈을 타서 유유가 칼을 꺼내 위나라 장군을 죽였습니다. 장군이 죽자 위나라 군대는 혼란에 빠졌습니다. 때맞춰 동천왕은 모은 군사들로 위나라 군대를 공격하여 크게 이겼습니다. 동천왕의 승리 소식에 곳곳에서 고구려 사람들이 군사를 내었고, 위나라 군대는 서둘러 도망갔습니다.

밀우, 유유, 유옥구 등 충성스럽고 지혜로운 신하들 덕택에 나라를 구하기는 했지만 동천왕의 한 번의 자만심은 나라를 크게 위태롭게 했습니다. 동천왕은 크게 반성을 했을 것입니다. 여러분도 동천왕처럼 한 번 이겼다고, 한 번 잘했다고 뽐내서는 절대로 안 되겠지요. 동천왕처럼 크게 후회할 수도 있으니까요.


왜 그토록 많은 무덤을 만들었을까?
내세의 삶 믿어 '신성한 공간'으로 관리

고구려의 수도였던 집안 시를 처음으로 방문하던 날이었습니다.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히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 보니 주위엔 온통 무덤들이었습니다. 그것도 밑변 길이가 85 m나 되는 천추총, 밑변 길이 31.6 mㆍ높이 13 m의 장군총, 밑변 길이 65 m의 태왕릉을 비롯해 임강총, 오회분 2호묘, 서대총 등 거대한 무덤과 아름다움 벽화가 그려진 이름난 무덤이 참 많았습니다. 집안 시에는 무려 1만 2358 개의 고구려 무덤이 있었다고 합니다. 많이 훼손되기는 했지만, 지금도 절반 이상이 남아 있습니다. 고구려 사람들은 왜 이렇게 많은 시간과 힘, 비용을 들여 정성을 다해 거대한 무덤들을 만들었던 것일까요?
 


▲ 너무나 커서 마치 산처럼 보이는 천추총. 밑변길이가 85m에 이른다. 

장군총에 사용된 돌 가운데에는 무게가 수십 톤이나 되는 것도 있습니다. 이런 돌들은 집안 시 외곽에 있는 채석장에서 캐내 온 것인데 겨울에 언 강물을 이용해 운반했거나, 또는 큰 수레에 실어서 무덤 만드는 곳까지 힘겹게 운반했을 것입니다. 당시에는 대형 트럭이나 포크레인 등이 전혀 없었고, 기중기와 비슷하게 무거운 것을 쉽게 들어올리는 간단한 장비 정도만 있었습니다. 돌을 매끈하게 다듬는 기계도 물론 없었습니다. 따라서 대부분의 일을 사람과 동물의 힘으로 해내야 했습니다. 당시에도 전문 기술자가 있었지만, 무덤을 만드는 일은 대단히 힘들고 비용도 많이 드는 일임이 분명합니다.

고구려 사람들은 사람이 죽으면 영혼이 죽지 않고 무덤에서 머문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죽은 이후의 세상에 대해 관심이 많았던 고구려 사람들은 살아 있을 때부터 자신의 무덤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또 결혼을 하면 자신이 죽어서 장사 지낼 때 쓸 옷을 미리 만들기도 했습니다. 물론 장례식도 비용을 아끼지 않고 성대하게 치렀습니다. 그리고 무덤에는 많은 금은보화(金銀寶貨)를 묻어 두기도 했답니다.

하지만 차츰 보물을 노리고 외국인들까지 무덤을 도굴하는 경우가 생기자, 고구려 후기에는 죽은 사람이 살았을 당시 사용하던 옷과 노리개ㆍ수레ㆍ말 등을 무덤 옆에 놓아 두고 장례에 참석한 사람이 나눠 가지도록 했습니다. 고구려 사람들은 사람이 죽었을 때는 크게 슬퍼하지만, 막상 영혼이 저승에 가는 장례식 날에는 북치고 춤추고 노래하며 죽은 사람을 떠나 보냈습니다. 현재의 삶은 끝나지만, 죽은 후 내세의 삶이 다시 시작된다는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9대 고국천왕과 10대 산상왕의 부인이었던 우 씨 왕후는 죽기 직전 유언을 통해 자신을 산상왕릉에 묻어 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무당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국천왕이 내게 강림하여 말하기를 우 씨가 산상왕의 무덤에 묻힌 것을 보고 내가 분한 마음을 이기지 못 하겠으니, 네가 조정에 고하여 무슨 물건으로 나를 가리어 달라고 해라.”

죽은 고국천왕이 질투하는 모습은 산 사람과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죽어도 현재의 관계가 지속된다고 여겼기 때문에 동천왕이 죽었을 때 사람들이 따라 죽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고구려 사람들이 돌아가신 왕을 부를 때 사용한 ‘고국천왕’ㆍ‘산상왕’ 등에서 ‘고국천’ㆍ‘산상’ 등은 왕이 묻혀있는 장소의 이름입니다. 즉, 어느 곳에 묻혀 있는 왕이라고 임금의 호칭을 그대로 사용한 것입니다. 그곳에 아직도 임금의 영혼이 살아 있다고 믿었던 것이지요.

죽은 자가 머무는 공간이 무덤인 만큼, 잘 만들고, 잘 지켜야 합니다. ‘광개토대왕릉비문’은 흔히 광개토대왕의 업적이 쓰여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비문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것은 무덤을 지키는 수묘인에 대한 규정입니다. 무려 330여 가구가 수묘인으로 차출되어 광개토대왕의 무덤을 관리하도록 법으로 정해졌었습니다. 국상이었던 명립답부의 무덤을 관리하는 수묘인도 20 가구나 되享윱求? 광개토대왕은 자신의 무덤이 만 년 후에도 잘 보존되기를 바랐습니다.

후손들 역시 무덤을 찾아가서 제사를 지내고 조상오黴킵湧?돌봐 주기를 기원했습니다. 무덤이 이렇게 신성한 공간이었기에 화려하게 치장을 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고구려의 아름다운 고분 벽화는 이러한 믿음과 생활 습관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랍니다. 지금은 고구려 시대처럼 거대한 무덤을 만드는 것은 곤란하답니다.

전 국토가 다 무덤으로 사용되면 살아 있는 사람이 살 수 있는 공간이 부족해지니까요. 고구려가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層돋?옮긴 이유의 하나도 너무나 많은 무덤 때문에 산 사람이 살 공간이 부족했기 때문이랍니다. 조상이 돌아가신 후에 화려하게 무덤을 만드는 것보다는 오늘 당장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 할머니께 효도하는 것이 더 소중하겠지요.


왕궁서 피신해 소금 장수를 했던 제 15대 미천왕
고생했던 경험 밑거름 삼아 영토 넓히고 국력 크게 키워


고구려인의 삶의 자취가 물씬 풍겨 나오는 압록강의 모습.
당시 을불도 이 강을 오르내리며 소금 장수를 했었다.
 

▲ 왕 가운데는 의심쟁이 유독 많아

어린이 여러분은 한 나라의 왕이라면 어릴 적부터 궁궐에서 여러 사람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행복하게 성장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겠지요. 그런데, 고구려 15대 미천왕은 놀랍게도 소금 장수를 했었답니다. 대체 어찌 된 일이었을까요?

서기 248년 12대 중천왕 때는 동생인 예물과 사구가 반란을 시도하다가 죽임을 당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286년에도 13대 서천왕의 동생인 일우와 소발이 반란을 계획하다가 죽음을 당했습니다. 오직 한 명만이 가질 수 있는 왕의 자리는 누구에게나 탐이 나는 자리였지요. 그래서 왕들 가운데는 남을 믿지 못 하는 의심쟁이가 유독 많답니다.


황해도 황주군 석정리에서 출토된 벽돌. 고구려 서민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특히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일을 지켜 본 14대 봉상왕은 의심이 많았습니다. 봉상왕은 달가를 의심하여 그를 죽였습니다. 그는 숙신족(말갈족)을 정벌한 공이 있어서 백성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 자신의 작은아버지였습니다. 봉상왕은 또 아우인 돌고도 왕위를 넘본다고 의심하여 죽였습니다. 돌고의 아들인 을불은 큰아버지인 봉상왕이 언제 자신을 의심할지 몰라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그는 왕궁에서 몰래 도망쳐야 했습니다. 을불은 처음에는 음모라는 사람의 집에 가서 일을 해 주면서 살아야 했습니다. 음모는 그가 왕자인 줄도 모르고 아주 힘든 일을 시켰습니다.

▲ 왕궁서 몰래 도망쳐 머슴살이

그 집 곁에 있는 연못에서 개구리가 요란하게 울자, 음모는 을불로 하여금 밤에 기와와 돌을 연못에 던져 개구리가 울지 못 하게 하도록 시켰습니다. 또 낮에는 땔감용 나무를 베어 오도록 시켜서 잠시도 쉬지 못 하게 했습니다. 자기 재산이 없어서 남에게 의지하며 살아야 하는 을불의 신세는 개인적인 자유가 전혀 없는 노예와 별 차이가 없었습니다. 결국 을불은 고생을 이기지 못 하고 일 년 만에 그 집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을불은 이번에는 재모란 사람과 함께 소금을 팔러 다녔습니다. 어느 날 배를 타고 압록강에 가서 소금을 가지고 내려와 강의 동쪽 사수촌 사람의 집에 머물렀습니다. 그 집의 노파는 숙박비로 소금을 요구했고, 을불은 한 말 가량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노파는 다시 소금을 더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을불은 거절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노파는 화가 나서 을불 몰래 자신의 신발을 소금 속에 넣어 두었습니다.

을불은 이런 일을 전혀 모르고 길을 나섰다가, 쫓아온 노파에 의해 도둑으로 몰렸습니다. 노파는 압록 태수에게 고소했고, 소금 속에서 신발이 나오자 을불은 벌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신발값으로 소금을 내놓고, 몽둥이로 매를 맞은 후에야 풀려 나올 수 있었습니다. 벌을 받은 신세여서 을불은 제대로 일자리를 얻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또 제대로 먹지도 못해 얼굴이 야위고, 옷도 다 해져서 누구도 그가 왕자였음을 알지 못할 지경이었습니다.

한편 봉상왕은 백성들을 삶을 돌보지 않고, 마구 부려먹었습니다. 특히 300년에는 2월부터 7월까지 비가 오지 않아 큰 흉년이 들었습니다. 백성들은 먹을 것이 없어서 서로를 잡아먹을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백성들이 어려움에 처했는데도, 봉상왕은 8월부터 나라에 15 세 이상의 남녀들로 하여금 궁궐을 수리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굶주린 백성들은 나라에서 강제로 일까지 시키자 고통을 참지 못 하고, 고향을 떠나 이리저리 떠돌 수밖에 없었니#?p> 백성들의 고통을 보다 못한 국상 창조리는 왕에게 간청하여 궁궐을 수리하는 일을 중지하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봉상왕은 궁궐이 웅장하고 화려하지 않으면 나라의 권위를 내보일 수가 없다며 거절했습니다. 또한 창조리가 백성에게 인기를 얻으려고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라며, 그를 의심했습니다.

▲ 왕위에 오른 뒤에는 백성 돌봐

이처럼 봉상왕은 스스로 왕으로서 자신감이 부족했기 때문에, 왕위를 넘볼 형제와 친척들을 죽였고, 궁궐 등 보이는 것만을 화려하게 만들어 과시하려는 삐뚤어진 사람이었습니다. 창조리는 왕이 잘못을 고치지 않을 것임을 알고, 여러 신하들과 의논하여 봉상왕을 왕위에서 몰아 냈습니다. 그리고 사람을 시켜 을불을 찾아 냈고 그로 하여금 왕위에 오르게 했습니다. 그가 바로 미천왕입니다.

왕위에 오른 미천왕은 백성들을 잘 살게 하는 일은 좋은 농토에서 마음 편히 농사를 지으며 일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넓은 농경지를 개척하기 위해 주변의 낙랑군과 대방군 등을 몰아 내고, 요하 유역으로 영토를 넓히려는 노력을 하였습니다. 물론 미천왕 이후에는 왕의 형제들 간에 왕위를 놓고 싸우는 일도 없어졌습니다. 그가 고생했던 경험은 이처럼 그를 좋은 왕이 되도록 이끌었던 것입니다.  


고구려는 전쟁에서 항상 승리만 했을까?
고국원왕의 잇단 패배와 죽음 강대국으로 거듭나는 발판돼

전연, 342년 고구려 공격

우리는 고구려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 승리 혹은 놀랍거나 아름다운 것을 듣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때로는 패배하고, 괴로웠던 이야기도 귀담아 들어 봐야 합니다. 강대국 고구려도 언제나 승리만 한 것은 아니었으니까요.

미천왕이 왕위에 오른 300년 무렵 고구려는 요동 지역의 지배권을 놓고 전연과 자주 전쟁을 해야 했습니다. 전연은 모용선비족이 세운 나라로, 고구려 서쪽인 요서 지역을 중심으로 크게 발전한 나라입니다. 특히 전연의 왕 모용황은 대단히 야심만만한 인물로, 고구려를 이겨 보려고 무던히 애를 썼습니다. 마침내 342년 전연의 대군이 고구려를 공격해 왔습니다.

 
강인한 모용선비족 전사의 사냥 모습. 고구려는 3~4세기 모용선비족과 치열한 경쟁을 했다. 5세기 초 광개토대왕 등장 이후 비로소 고구려는 이들을 굴복시킬 수 있게 된다.

▲ 고구려의 쓰라린 패배, 복수 기회 엿봐

이 때 미천왕의 아들인 고국원왕은 전연의 군대가 공격해 올 두 가지 길 가운데 넓고 평탄한 북쪽 길을 방어하기 위해 정예 병사 5만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약한 병사들을 거느리고 좁고 험한 남쪽 길을 방어했습니다. 그런데 북쪽길로 공격해 온 전연의 군대는 1만 5000 명에 불과했고, 도리어 남쪽길로 모용황이 이끄는 정예 병사 4만 명이 쳐들어왔습니다. 북쪽길에서는 고구려 군대가 전연 군대를 전멸시켰지만, 남쪽길에서는 고구려 군이 크게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고국원왕은 전투에서 패배하자, 후퇴를 하여 다시 군대를 모았습니다. 그 사이 전연의 군대는 빠르게 고구려 수도인 환도성에 들어와서 노략질을 했습니다. 모용황은 북쪽길에서 전연의 군대를 물리친 고구려의 정예 병사들이 곧 공격해 올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또 전쟁이 길어지면 자신들에게 불리할 것이라고 판단했지요. 모용황은 서둘러 미천왕의 시신을 파헤쳐 가져가고, 고국원왕의 어머니인 주태후와 포로 5만 명을 잡아갔습니다.

전연에 비해 군사력에서 뒤진 것도 아니었지만, 작전을 잘못 세운 탓에 고구려는 큰 수모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고국원왕은 미천왕의 시신과 주태후를 되돌려 받기 위해 진귀한 물건을 바치며 이들에게 복종해야 했습니다. 반면 전연은 고구려를 굴복시킨 후, 서쪽으로 진출하여 황하 하류를 차지하는 대국으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고구려는 어쩔 수 없이 전연의 발전을 지켜 보아야 했습니다. 고국원왕은 355년 주태후를 되돌려 받은 후에는 전연과의 관계를 끊고, 복수할 기회만을 엿보고 있었습니다.

▲ 백제에 잇따른 공격, 고국원왕의 죽음

한편, 고국원왕은 369년 영토를 넓히기 위해 남쪽의 백제를 공격했습니다. 당시 백제는 뛰어난 왕인 근초고왕과 그 아들 근구수 태자가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고구려의 보병과 기병 2만 명이 황해도 지역인 치양에 도착하여 백제의 민가에서 식량을 얻으려고 움직이고 있을 때였습니다.

근구수 태자가 이끈 백제군이 불시에 공격을 해 왔습니다. 기습을 당한 고구려 군은 5000 명이나 죽는 패배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2 년 후 고구려는 다시 군사를 내어 백제를 공격했습니다. 하지만 백제군이 패하 강가에서 복병을 배치하고 있다가 갑작스레 공격해 오는 바람에 또다시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그 해 겨울 백제 근초고왕과 근구수 태자가 이끄는 3만의 군대가 평양성을 공격해 왔습니다.

당시 60 세가 넘은 고국원왕이었지만, 용감하게 군사들을 독려하며 백제군과 맞섰습니다. 그런데 고국원왕은 백제군이 쏜 화살에 맞아 죽고 말았습니다. 고구려 역사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왕이 적과 싸워 죽는 일이 생겼습니다. 백제에게 패배한 것은 고구려인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커다란 충격이었습니다. 왜냐 하면 백제를 건국한 소서노와 온조가 추모왕의 부인과 아들이었기에 서로 같은 뿌리에서 나왔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요. 동생의 나라로 여겼던 백제에게 당했으니, 고구려 泳宕湧?질투심은 클 수밖에 없었습니다.

▲ 쓰라린 패배가 강대국으로의 길 터

고국원왕의 거듭된 패배는 고구려 역사에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성공이 아니라, 너무도 쓰라린 패배를 당했기 때문에 이를 극복하기 위해 고구려는 일대 변화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고국원왕의 두 아들인 소수림왕과 고국양왕은 고구려를 대대적으로 정비하며 새로운 준비를 합니다. 두 왕이 노력한 끝에 고구려는 크게 변신을 하게 되고, 이후 광개토대왕 시기에는 전성기를 맞게 됩니다.

만약 성공만 하고 실패가 없다면 사람들은 과거 그대로의 습관을 따라 하며 아무런 변화도 없이 그저 그렇게 살아가기가 쉽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실수할 수 있고, 좌절할 수도 있습니다. 실패를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따라 실패가 성공의 어머니가 되기도 합니다. 즉, 실패를 거울삼아 새롭게 변신할 때 새로운 미래가 열리는 것이지요. 고구려도 마찬가지로 고국원왕의 실패를 딛고 다시 일어서게 됩니다. 고구려의 진정한 힘을 여기서 다시 보게 되는 것입니다.


고구려에는 어떤 법이 있었나요?
소수림왕 '율령'반포…철저한 집행·엄격한 처벌

▲ 길에 떨어진 물건도 함부로 줍지 않는 고구려인

어린이 여러분은 법 없이 살 수 있나요? 만약 세상에 법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단 하루도 살기가 어려울지 모릅니다. 당시 고조선에도 8 조로 된 법이 있었는데, 후기에 와서 점차 지켜야 할 법 내용이 많아져 60여 항목에 이르렀습니다. 이처럼, 사람이 사는 곳이라면 예나 지금이나 법이 없을 수는 없겠지요. 지금부터 고구려에는 어떤 법이 있었는지, 고구려에서 법은 어떤 의미를 지녔는지 알아 보겠습니다.

옛날 중국의 나라들은 속고 속이며, 범죄를 저지르는 일이 무척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들 나라에서 기록한 역사책에서는 고구려는 범죄가 적고 감옥이 없었다는 사실을 무척이나 놀라운 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고구려 사람들은 길거리에 떨어진 것도 함부로 줍지 않았답니다. 고구려 사람들이 워낙 착했기 때문일까요?

▲ 소와 말도 함부로 죽이면 노비로 만들어

그보다는 법을 위반하면 처벌이 엄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다른 나라와 수시로 싸워야 했던 민족이었던 만큼, 배신자가 생긴다면 국가의 생존이 위태로울 수 있었겠지요. 그래서 나라와 왕을 배반한 사람은 먼저 불로 지진 다음 목을 베고, 그의 전 재산을 빼앗았습니다. 또 도둑질한 사람은 그 물건의 10 배를 갚도록 했습니다. 만약 그것을 갚을 수 없다면 그와 그의 자식들을 기어이 노비로 삼아서 보상하게 했답니다.

고구려에서는 또한 소와 말을 매우 중하게 여겼는데, 소와 말을 함부로 죽이면 그 사람을 노비로 만들었습니다. 당시 소는 농사 짓는 데, 말은 전쟁에 반드시 필요한 귀한 동물이었습니다. 그리고 강한 나라가 되려면 소와 말이 많아야 하기 때문에 이렇듯 엄격하게 법을 적용한 것입니다.

고구려 초기에는 범죄자가 생기면 부족의 지도자들이 회의를 통해 사형을 시키고, 부인과 자식들은 전부 노예로 삼았습니다. 알다시피 사회에서 범죄자로 낙인찍히면 사람들의 냉대를 받아 살아가기가 힘겨워집니다. 당시 을불이 관가에서 벌을 받은 후 다시는 장사도 못 하고, 거지처럼 살았던 것도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 소수림왕 때 국가 공식법 ‘율령’반포

부족별로 관습처럼 법을 집행하거나, 수시로 만든 법을 기준으로 집행해 오던 고구려는 373년 소수림왕이 이를 정비해 율령(국가의 공식적인 법)을 반포하기에 이릅니다. 법이란 단순히 형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여러 가지 기준도 포함됩니다. 즉, 관청의 조직은 어떻게 만들고, 물건의 크기를 재는 도량형은 어떤지 등 사회의 기준이 되는 것이 다 법으로 정해질 수가 있습니다.

소수림왕이 율령을 반포함에 따라 각 지방별로 달리 집행되던 법의 집행이 통일되었습니다. 같은 죄를 지었는데, 누구는 가벼운 벌을 받고 누구는 중형을 받는 일이 사라진 것이지요. 또 물건의 크기와 무게를 재는 도량형도 통일돼 물건을 거래할 때 보다 편리하게 되었습니다. 아울러 국가가 백성들에게 세금을 징수하거나, 일을 시키는 요역(徭役)도 보다 체계적으로 집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각 관리들의 높고 낮음과 봉급을 주는 것, 각자 맡은 업무도 명확하게 규정되어 보다 책임 있게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 국가적인 행사의 절차와 의미 등에 대해서도 하나의 기준이 생겨 전국적으로 같은 행사도 치룰 수 있게 되었습니다. 중앙과 지방의 문화적 격차도 줄어들었습니다.

▲ 광개토대왕 무덤 비문에서도 세세한 법 규정 있어

소수림왕의 조카인 광개토대왕의 무덤의 비문을 보면 전체의 1/3이 무덤을 지키는 수묘인에 대한 법 규정입니다. 릉비에는 광개토대왕이 몸소 잡아 온 한인과 예인 220 호만으로 자신의 무덤을 지키라고 명령했는데, 비를 세운 장수왕은 한인과 예인이 무덤을 관리하는 예법을 잘 모를 것을 걱정해 경험 있는 110 호를 더 데려왔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처럼 묘를 지키고 청소하고, 수시로 제사 지내는 일은 다양한 절차와 격식이 규정되어 있는 쉽지 않은 일이었음을 짐작케 합니다. 릉비에는 또 수묘인을 배출할 지역과 그 숫자를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고, 법령을 위반할 경우에는 형벌을 내리겠다는 것까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고구려의 법은 신라에도 큰 영향을 줬습니다. 신라가 만든 단양적성비, 울진봉평비 등에도 각?법령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고구려는 철저히 법에 의해 집행되고 관리되는 나라였습니다. 과거와 달리 대충 감으로 일이 처리되는 것이 아니라, 분명한 기준에 의해 일 처리가 진행되었던 만큼 고구려의 국력도 크게 성장하게 됩니다. 소수림왕의 율령 반포가 고구려 발전의 큰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고구려 학생들은 어떤 교육을 받았을까?
백성들은 글공부ㆍ군사 훈련 '경당' 귀족의 국립 대학 '태학'


아차산 고구려 군사 유적지에서 출토된 토기. 다양한 글자가 적혀 있다. 

▲ 문지기 등 가장 미천한 신분까지 경당서 책 읽게 해

고구려 시대에는 학교가 존재했을까요? 당시 학생들은 무엇을 배웠을까요? 그 때 어린이들도 지금처럼 학원 과외를 많이 받았을까요? 그래요. 고구려 시대에도 물론 학교는 있었습니다. 그 때에도 학생들이 1등을 하려고 열심히 노력을 했겠지요. 다만 과외 공부까지 했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문헌에서 살펴보면 고구려 사람은 공부를 매우 열심히 했습니다. 중국인이 쓴 ‘구당서’라는 책에는 고구려 사람들은 워낙 글읽기를 좋아해 각 거리마다 큰 집을 지어 이를 경당이라 부르고, 문지기 혹은 말의 먹이를 주는 사람과 같은 가장 미천한 신분에 이르기까지 밤낮으로 이곳에서 책 읽기와 활쏘기를 익히게 한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고구려에서 미천한 신분에 이르기까지 글공부를 했다는 것은 조선 시대와 비교해 보면 큰 차이가 납니다. 조선에서는 일반 농민들이나 노비들은 서당에서 공부를 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서기 191년까지 농부로 지냈던 을파소는 평소 엄청난 공부를 한 지식인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하루 아침에 국상에 임명될 수가 있었습니다.

▲ 주변에서 살아 남기 위해 백성들에게 글 가르치고 활쏘기 시켜


고구려 고분 무용총에 그려진 활쏘기 장면 벽화.

고구려 사람들은 경당에서 배운 활쏘기를 평소에 사냥 등을 통해 솜씨를 다듬었다. 아차산 고구려 군사 유적지에서 나온 각종 그릇에는 소유자를 표시하는 글자가 적혀 있습니다. 이를 통해 고구려 군인 대부분이 교육을 통해 글자를 알고 있었음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고구려에서 이처럼 글공부를 강조한 것은 살아 남기 위한 자구책이었습니다. 백성들이 글을 알아야 국가에서 행한 법령을 집행하기가 쉽고, 상거래를 할 때에도 서로 편리하기 때문입니다. 또 군사들도 보다 정교한 군 작전을 쉽게 수행할 수 있습니다. 만약 군인과 백성이 글을 전혀 모른다면, 군대의 작전 능력이 떨어지는 것은 물론 상거래도 위축되고 법을 몰라 죄를 범하는 사람들이 많아질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나라가 약해지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합니다. 주변의 많은 적들과 상대하면서 살아 남기 위해서 고구려가 선택할 것은 국민 개개인을 교육시켜 사람들을 스스로 강하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고구려도 초기에는 ‘좌식자’라 불리는 소수의 전문 전사 집단이 전쟁을 담당했습니다. 하지만 나라가 커지면서 전쟁에 동원할 군사의 숫자가 많아지고, 백성들도 군사로 활용해야 했습니다. 따라서 일반 백성에게 군사 훈련을 시켜야 했습니다. 그로 인해 경당을 세우고 활쏘기ㆍ말타기 등과 함께 글공부도 함께 시킨 것입니다.

중국인들이 기록한 글에는 유교 경전인 시경ㆍ서경ㆍ역경ㆍ예기, 춘추ㆍ사기 등의 역사서, 옥편을 비롯한 글자학 서적, 문선과 같은 문학책까지 폭넓은 중국 서적이 고구려에서 널리 보급되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경당 등에서 교육한 책들이 중국에서 들여온 책들만은 아니었겠지요.당연히 고구려의 역사와 종교 사상과 관련된 서적을 더 많이 가르쳤습니다. 고구려는 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유기 100 권을 만들었습니다.

경당에서는 또 글공부 못지않게 전사를 양성하는 교육을 강조했습니다. 이것은 신라 화랑 제도와 많이 비슷합니다. 경당에서 전사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평소에도 사냥 등을 통해 말 타고 활 쏘는 기술을 익히는 데 힘썼습니다. 이를 열심히 해야 나라의 관리도 되고 출세도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 교육 기관 태학 세워 전문적 지식인도 길러 내

소수림왕은 372년 태학이란 교육 기관을 세웁니다. 신라에서는 태학과 비슷한 국학을 682년에 만들기도 합니다. 태학은 교육을 담당하는 박사들이 학생을 가르쳤는데, 귀족의 자제들을 9 년 정도 가르쳤고, 이곳을 졸업한 학생들은 관리를 도맡아 했습니다. 이처럼 체계적이고 전문 지식을 배운 이들이 나라의 관리가 되면서, 고구려 정부의 능력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391년에 등장한 광개토대왕이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었던 것도 태학에서 배출된 전문적 지식을 갖춘 관리들이 이 때 많이 등장했기 때문입니다. 태학 박사 이문진은 600년 고구려 역사를 기록한 신집 5 권을 만들었고, 역시 태학 출신으로 생각되는 을지문덕은 멋진 시를 짓는 뛰어난 지식인이었습니다.

소수림왕이 국력을 정비하는 과정에서 만든 태학이 광개토대왕 시기 고구려 번영의 기초가 된 것입니다. 또한 고구려가 강대국이 된 것은 경당에서 많은 백성을 교육했기 때문입니다. 교육은 국가의 최고 자원입니다. 어린이 여러분들도 열심히 공부하여 많은 지식과 지혜를 갖출 때 우리 나라는 분명 더 좋은 나라, 더 강한 나라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고구려 사람들은 어떤 종교를 갖고 있었을까요?

 
평안남도 평원군 원오리 절터에서 나온 흙 부처. 미소 띤 얼굴과 균형 잡힌 몸매, 곱게 주름진 옷 등 입체감이 두드러진 조각품이다.
 
 
▲ 해마다 10월에 동맹 축제 열어

고구려 사람은 어떤 종교를 믿었을까요? 당시에는 기독교나 이슬람교가 전혀 전파되지 않았고, 372년 소수림왕이 비로소 불교를 나라의 종교로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고구려 사람들은 평소 최고의 신인 천신을 비롯해 고등신ㆍ부여신ㆍ해와 달의 신ㆍ별신ㆍ조상신ㆍ농사의 신ㆍ불의 신 등을 믿었습니다. 고등신은 나라를 세운 추모왕이며, 부여신은 왕의 어머니 유화 부인입니다.

고구려 사람들은 특히 매년 10월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동맹 축제를 했습니다. 이 때 가장 중요한 의식은 나라의 동쪽에 있는 큰 굴에서 수신을 맞이해 강가로 모셔 제사를 지내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해모수가 변신한 태양의 빛을 받아 유화 부인이 추모왕을 탄생시킨 것의 재현입니다. 고구려는 왕이 직접 주관하는 이 행사를 통해 고구려가 신의 후손임을 확인했습니다. 이 날 왕과 귀족들은 비단에 수놓은 의복과 화려한 장신구로 치장하고 식장에 나오며, 행사 후에는 함께 노래하고 춤추는 화합의 축제를 벌였습니다.

고유 종교를 받들었던 장소마다 추모왕을 모신 사당이 있었고, 수신을 맞이한 동굴과 여러 신을 모신 신전이 곳곳에 있었습니다. 특히 국내성 지역의 동대자 유적은 고구려 고유 종교의 신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답니다.

▲ 각 지방마다 서로 다른 신 섬겨

고구려인들은 조상에 대한 제사도 자주 지냈습니다. 특히 무덤은 제사가 행해지는 아주 중요한 장소였습니다. 고구려 사람들은 사람이 죽어도 영혼은 살아 있다고 믿었으며, 조상이 후손들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무덤을 잘 만들고 오래오래 보존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고구려 사람들은 영원히 죽지 않는 신선의 삶을 갈망했고, 이러한 믿음은 고분 벽화 등에서 잘 나타납니다. 이것은 때로 중국의 도교와도 비슷한 면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고구려 고유 종교는 교단의 조직과 교리가 체계적이지 못 했습니다. 그래서 각 지방이나 부족마다 서로 다른 신들을 섬기기도 했습니다.

▲ 소수림왕 때 불교를 종교로 인정

고구려 종교의 이런 문제점을 안 소수림왕은 불교를 받아들였습니다. 당시 불교는 교리 체계가 합리적이고 교단 조직도 갖추고 있었으며 인도에서 중국을 거쳐 서서히 전해져 고구려인의 정서에 이미 친숙해져 있었습니다. 소수림왕이 이 불교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은 전진이란 나라에서 순도 스님이 불상과 경전을 전한 때부터였습니다.


장천1호분에 그려진 그림. 후손들이 죽은 무덤 주인을 향해 절하고 있다.
가운데 주인공이 앉은 좌대에는 북두칠성이, 머리 위에는 부처가 지키고 있다. 

 
그로부터 3 년 후 소수림왕은 소문사와 이불란사라는 절을 짓고 순도ㆍ아도 스님으로 하여금 고구려에 불교를 전하도록 했습니다. 고구려의 불교는 고국양왕이 적극 불교를 높이 받들고, 광개토대왕이 평양에 사찰 9 개를 만드는 등 불교를 적극 보호함에 따라 번창했습니다. 고구려의 스님들은 또 해외로 나가 널리 불교를 전파하기도 했는데, 일본의 법륭사 금당 벽화를 남긴 유명한 화가인 담징도 당시의 스님이었습니다. 특히 혜량 스님은 신라로 건너 가서 신라 불교의 지도자인 국통에 올라 팔관회를 개최하기도 했습니다.

▲ 국력 향상과 한국 종교 발전의 계기돼

고구려 왕들이 불교를 적극 지원한 것은 불교가 왕의 권위를 강화하는 데 큰 도움이 됐기 때문이었습니다. 또 불교는 국가에 대항 충성을 강조하는 호국 불교의 성격도 지니고 있었으므로 국가의 지원을 많이 받았습니다. 현재 남아 있는 고구려 불교 유적으로는 정릉사ㆍ금강사 등의 절터, 신묘명금동아미타여래상, 원오리 흙부처, 연가7년명금동여래입상 등입니다. 특히 장천1호분 벽화에는 부처와 보살의 모습이 그려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고구려 불교는 신라와 비교해 보면 크게 발전하지 못 했습니다. 고구려 고유 종교의 힘이 워낙 강했기 때문입니다. 장천1호분 벽화의 그림처럼 조상신 숭배와 부처님 신앙이 서로 공존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고구려에서 불교를 받아들인 것은 결과적으로 한국의 종교 발전에 계기가 되었고, 고구려의 국력 정비에도 커다란 도움이 되었습니다. 고국원왕 때 국가적인 위기를 극복하고 광개토대왕 시기에 고구려가 전성기를 맞이한 것도 소수림왕 때에 이뤄진 법과 교육 그리고 종교 이렇게 세 분야의 큰 변화와 개혁 때문입니다.


광개토태왕 그는 누구인가?
역사상 가장 눈부신 정벌 활동 동북 아시아 대국으로 이끌어


경기도 구리시에 세워진 광개토대왕 동상. 그는 말을 타고 갑옷을 입은 정복 군주에 머무르지 않았다. 나라를 잘 다스린 위대한 성군(聖君)이기도 했다. 그래서 동상도 힘있는 성군의 모습을 띠고 있다.
 

▲ 18 세에 왕의 자리에 오른 뒤 21 년 간 고구려 이끌어

373년 고구려 왕실에 담덕이란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이 아이가 바로 고구려 역사에서 가장 널리 이름을 날린 광개토대왕입니다. 광개토대왕은 18 세의 비교적 어린 나이에 왕의 자리에 올라 39 세의 나이로 일찍 돌아가셨습니다. 하지만 391년부터 412년까지 그가 다스린 21 년의 시간은 고구려 역사를 크게 뒤바꾸어 놓았습니다.

그가 유명해진 것은 그의 아들 장수왕이 아버지의 무덤 앞에 거대한 비석을 세웠고, 그것이 120여 년 전 새롭게 발견됐기 때문입니다. 오랫동안 잊혀졌던 광개토대왕릉비에 기록된 글을 통해 우리는 비로소 그의 진면목을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광개토대왕은 고구려 역사상 가장 눈부신 정벌 활동을 펼쳤습니다. 이 때문에 후손들이 ‘크게 영토를 넓힌’(廣開土) 그의 훌륭한 업적을 기려 대왕(大王)이라고 불렀으며, 더 나아가 ‘태왕(太王)’이라 칭했던 것입니다.

▲ 거란 정벌과 후연 공격으로 북방 진출의 초석 다져

능의 비문에 따르면 광개토대왕 최초의 공적은 395년에 거란족을 정벌한 일입니다. 대왕은 친히 군사를 이끌고 의무려 산과 노노아호 산맥을 지나 서요하 유역의 염수 지역을 공격하여 거란족 3 부락 6~700 명을 쳐부쉈습니다. 그리고 엄청난 소ㆍ말ㆍ양 등을 얻어 고구려로 돌아왔습니다. 기병을 육성하기 위한 좋은 말들을 마련하고, 오랜 적인 모용선비족이 세운 후연을 북쪽에서 압박할 수 있는 거란족 정벌은 고구려의 북방 진출에 큰 성과였습니다.

그리고 광개토대왕은 계획대로 후연을 적극적으로 공격했습니다. 요하를 넘어 후연의 수도와 가까운 숙군 성을 공략하여 평주자사를 패배시켰습니다. 404년에는 후연의 후방인 현재의 북경 부근의 연군을 공격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고구려의 일방적인 승리가 계속되는 가운데 후연은 고구려와의 항쟁 과정에서 내분이 일어나 고구려인의 후손인 고운이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그래서 고구려는 고운이 세운 북연을 신하의 나라로 삼게 됩니다. 북연은 고구려의 영향력 아래 있던 나라고, 특히 435년 북위의 공격을 받아 멸망의 위기에 닥칠 때에는 고구려에게 구원을 요청하였고, 그 왕과 많은 백성들이 고구려로 넘어오게 됩니다.

▲ 동북쪽과 남쪽으로 세력 크게 확장시켜

광개토대왕은 또 동북쪽으로도 세력을 크게 넓혔습니다. 410년 광개토대왕은 친히 군대를 이끌고 동부여를 공격해 64 개성, 1400 촌락을 정벌했습니다. 그러자 동부여왕은 대왕에게 곧바로 항복하게 됩니다. 고구려는 이 때 동부만주와 연해주 지역도 함께 차지하게 됩니다.

또 소규모의 군사를 보내 숙신족을 돌아보고 이들을 신하의 나라로 삼아 버립니다. 대륙쪽만이 아니라, 광개토대왕은 남쪽으로는 백제를 공격하여 굴복시켰습니다. 그리고 신라 땅에 쳐들어온 가야ㆍ왜 연합군을 격파합니다. 더 나아가 백제와 왜 연합군도 계속해서 물리칩니다. 이처럼 광개토대왕은 신라를 속국으로 삼고, 금관가야를 멸망에 이르게 하였으며, 백제를 굴복시켜 한반도 전체를 크게 호령했습니다.

▲ 영토 확장 못지않게 나라의 내실 다지는 데도 노력

그가 이렇듯 빠르게 고구려의 영토를 크게 넓힐 수 있었던 것은 먼저 최고 군사령관으로서의 능력이 뛰어났기 때문입니다. 또 철갑옷을 입은 군사를 많이 키우고, 왕의 친위군인 왕당군을 따로 편성하였습니다. 해군을 별도로 육성하여 수륙 양면에서 입체적인 작전을 펼치게 하는 등 군사 부분에서의 개혁을 성공적으로 이뤄 냈기에 가능했습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요인은 따로 있습니다.

앞서 보았듯이 소수림왕과 고국양왕 때에 법과 교육 그리고 종교 분야 등에서의 개혁을 통해 국력을 꾸준히 키워 왔기 때문에 그의 활발한 정복 활동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이 점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던 광개토대왕은 밖으로 팽창하는 것 못지않게, 고구려의 내실을 다지는 데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능비문에는 ‘그의 은혜와 혜택이 하늘에 가득 찼고, 위엄과 무공은 온 세상을 덮었으며, 못된 자들을 없애 치우고 생업을 편안케 하니 나라는 부유하고 백성은 넉넉하고 오곡이 풍요롭게 무르익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비문에서 보듯 광개토대왕은 단지 땅만 넓힌 왕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고구려를 잘 사는 나라, 당당한 대국으로 변모시켰던 것입니다.

그의 등장 이후 고구려는 지역 강국에서 벗어나, 동북 아시아의 대제국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고구려 사람들에게 나라를 건국한 추모왕과 더불어 대표적인 영웅으로 칭송을 받은 것입니다. 그 때문에 후손인 우리에게도 세종 대왕과 더불어 가장 존경하는 역사적 인물로 기억되고 있는 것입니다. 


광개토대왕은 왜 삼국을 통일하지 않았을까?
백제·신라와는 형제 관계로… 다른 나라들과는 잦은 전쟁



광개토대왕의 부하인 유주자사 진의 무덤인 덕흥리 고분에서 나온 벽화 모습.오늘날의 북경 일대를 다스린 13 명의 태수들에게 보고 받는 장면이 등장한다. 

고구려에 관심을 가져 본 사람이라면 한 번쯤 갖게 되는 궁금증이 있습니다. 그것은‘왜 그토록 강력한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하지 못했을까?’하는 것입니다. 특히 광개토대왕 때라면 충분히 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고, 그랬더라면 우리 역사도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런 생각을 해 보았나요?

▲ 백제와 신라는 형제의 나라

잘 알다시피 광개토대왕 시기의 고구려는 분명 백제와 신라ㆍ가야를 완전히 통일할 강한 힘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고구려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고구려는 왜와 가야의 침입을 받은 신라가 구원을 요청하자, 즉시 5만의 군대를 보내 신라 지역에 쳐들어온 왜구는 물론 가야까지 공격해 금관가야를 멸망에 이르게 합니다. 그 고마움의 표시로 신라는 고구려에게 조공을 바칩니다. 그 뒤 고구려는 신라 수도에 100 명 이상의 군대를 주둔시키고 왕위 계승 문제까지 간섭하게 됩니다. 하지만 신라를 직접 영역으로 삼지는 않았습니다.

396년 광개토대왕이 직접 백제를 공격해 궁성을 포위하자, 백제 아신왕은 노비 1000 명ㆍ베 1000 필을 바치며 “영원히 신하가 되겠다.”고 맹세합니다. 그런데 광개토대왕은 백제 왕의 성의를 받아들여 58 개의 성과 700 촌을 얻고, 백제 왕의 아우와 대신 10 명만 포로로 잡고 본국으로 돌아갑니다. 위에서 보듯 광개토대왕은 백제와 신라 두 나라를 통합할 의지가 없었습니다. 광개토대왕은 다만 백제와 신라ㆍ동부여 등을 고구려를 중심으로 하는 세계의 중요한 구성원으로만 보았던 것입니다. 즉, 고구려는 신라와 백제를 같은 언어와 생활 습관, 피가 섞인 형제의 나라로 생각했던 것이지요.

▲ 왜ㆍ거란족ㆍ후연은 멸망시켜야 할 대상으로 여겨

광개토대왕은 그러나 왜국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악당의 무리로 보았습니다. 왜국은 못된 짓만 하는 존재로서, 고구려를 중심으로 한 세계의 질서를 파괴하는 대상이기 때문에 반드시 멸망시켜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와 함께 문화적으로 이질적인 거란족도 물리칠 대상으로만 생각했습니다. 마찬가지로 후연도 철저히 공격해 멸망시켜야 할 대상으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후연에 정치적 변동이 생겨 고구려의 후예인 고운이 북연을 세우자, 광개토대왕은 그 나라를 같은 종족의 나라로 여기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고구려는 북연을 제후국으로 규정해 더 이상은 공격하지 않았습니다. 광개토대왕과 고구려 사람들은 자신들과 같은 뿌리를 가진 나라와 그렇지 않은 나라와는 이처럼 아주 분명히 구분을 했던 것입니다. 일부 학자들은 따라서 이 당시부터 고구려ㆍ백제ㆍ신라 사이에서 같은 민족의식이 생겨나기 시작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 다른 나라와는 잦은 전쟁

하지만 고구려가 형이고, 신라가 아우인 관계는 영원히 지속될 수 없었습니다. 왜냐 하면 신라와 백제 모두 자신들의 운명은 스스로 개척하고 싶어 했고, 다른 나라의 명령을 듣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백제와 신라는 서로 전쟁을 하는 사이였지만, 고구려를 몰아내기 위해 동맹을 맺었습니다. 그 결과 광개토대왕이 죽은 후 140 년이 지난 550년대에는 두 나라가 고구려 남부 지방을 함께 공격해 빼앗기도 합니다.

고구려가 백제와 신라를 완전히 자기 영토로 삼지 못했던 또 다른 이유는 고구려가 잦은 전쟁을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후연과는 408년까지 치열하게 전쟁을 치렀습니다. 고구려는 후연을 무너뜨리기 위해 당시 북경 인근까지 공격하는 등 전쟁에 많은 힘을 쏟아야 했습니다. 따라서 그만큼 백제와 신라 지역에 많은 군대를 두고 이들을 완전히 정복하기가 힘들었습니다.


광개토대왕의 이름이 새겨진 호우. 신라의 수도 경주 호우총에서 출토됐으며, 당시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를 잘 알려 준다. 

▲ 백제와 신라에 기술과 문화ㆍ제도에 큰 영향

백제는 또한 비록 고구려에 패배하기는 했지만 지속적으로 고구려에게 저항할 만한 강한 국력을 가진 나라였습니다. 때문에 고구려도 백제를 완전히 멸망시킬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했다고 해도, 우리 역사가 더 좋은 방향으로 발전했을지 아니면 더 나쁜 방향으로 변했을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고구려가 백제ㆍ신라 두 나라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는 것입니다. 특히 신라는 당시 앞선 고구려의 기술과 문화ㆍ제도 등을 받아들여 급속하게 성장, 장차 삼국을 통일할 기반을 마련하기도 했습니다. 광개토대왕 시기에 삼국이 완전한 통일을 이루지 못했지만, 서로 밀접히 만나 문화를 주고받으며 우리 민족 발전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답니다.


활발한 무역·강력한 해군으로 동·서해 장악
동아시아 바다를 제패한 해양 강국
고구려, 4세기부터 ‘해양 강국’으로 떠올라


요동반도 남단의 고구려 수군 기지인 비사 성에서 바라본 서해. 
고구려는 서해와 동해 바다를 소유했던 해양 강국이었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백제를 ‘해양 강국’이라 일컫고, 해외에 영토를 개척하고 활발한 무역 활동을 한 것을 높게 평가합니다. 그런데 4세기 말인 광개토대왕 때 고구려는 백제로부터 동아시아 바다의 지배권을 빼앗아 옵니다. 드넓은 대륙의 주인공이었던 고구려가 바다의 주인이 된 것입니다. 말을 타고 빠른 이동을 즐겼던 고구려인은 그러나 일찍이 정보의 고속 도로이자, 많은 물자와 사람을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바다에 관심을 가져왔습니다. 그 중 추모왕의 외할아버지 하백은 강을 중심으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한 큰 세력가로서 ‘물의 신’으로 숭배되기도 했습니다.

고구려가 졸본에서 국내성으로 수도를 옮긴 이유 가운데 하나는 압록강을 이용한 수상 교통의 이점과 물고기 등의 수산 자원을 얻기 위함이었습니다. 고구려 옛 수도였던 집안 시의 박물관에는 철제 낚싯바늘과 어망추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특히 JYM3283호 고분에서 나온 유물은 무덤 주인이 생전에 물고기를 즐겨 먹었고, 그 당시 어망을 이용한 고기잡이가 행해졌음을 보여 줍니다. 고구려 사람들은 또 요하ㆍ송화 강ㆍ눈 강ㆍ우수리 강ㆍ혼하ㆍ태자하ㆍ압록강과 두만강ㆍ청천강ㆍ대동강 등의 수많은 하천을 누비면서 많은 양의 수산 자원을 획득했고, 풍부한 물을 이용해 농업을 크게 발전시키기도 했습니다.

▲ 송ㆍ오나라와 해상 교역

강에서 키워 온 이러한 해운력은 바다와 만났을 때 급격히 발전되었습니다. 고구려는 동해안의 동예를 복종시키고, 소금과 바다고기 등의 산물을 획득한 데 이어 서해 바다를 통한 여러 나라와의 교류 관계도 활발히 맺었습니다. 특히 북중국의 위 나라에 막혀 육지로는 직접 관계를 맺을 수 없는 양자 강 유역의 오나라와 233년 배를 통해 서로 교류를 맺기 시작했습니다. 고구려는 오나라가 의복과 보물을 바치자, 말 수백 필을 답례로 주었습니다. 이후 200 년이 지난 장수왕 시절 고구려는 송나라에 말 800 필을 수출하기도 합니다. 점차 해상 교류의 규모가 커져 갔던 것입니다.


동해와 서해를 장악한 5세기 고구려의 모습. 

▲ 백제 이어 동아시아 바다의 지배자로 등장

고구려가 동아시아 바다의 지배자로 등장한 것은 이전까지 ‘바다의 왕’으로 군림했던 백제를 물리치고 난 이후부터입니다. 광개토대왕은 백제 수군의 핵심 기지이며, 난공불락의 성인 관미성을 점령했습니다. 이어 백제의 수도 한성을 공략하여 아신왕의 항복을 받아 냅니다. 전쟁 승리 이후 고구려는 백제를 대신해 서해 중부는 물론 대륙 동해안과의 교역권까지도 장악하게 됩니다. 또한 5세기 초에는 울산 등지에 고구려 전초기지를 설치해 두고, 신라 해안가를 넘보는 왜국의 배를 공격하여 격퇴하는 등 동해도 장악했습니다. 한편, 478년에는 왜국이 양자 강 유역의 송나라에 보낸 국서에, 두 나라의 왕래를 중간에 고구려가 방해한 적도 많았다고 합니다. 이는 고구려가 남해에서도 상당한 지배력을 행사했음을 보여 줍니다.

‘삼국사기’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는 백제가 북위ㆍ송ㆍ남제ㆍ당과 교류하는 것을 바다에서 막았다는 기록이 자주 보입니다. 고구려 해군은 신라 김춘추가 당나라에 갔다가 돌아올 때에 바다에서 그의 배를 검문하기도 했습니다. 반면 백제나 신라가 고구려의 바다를 통한 활동을 막았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고구려는 이처럼 동해와 서해의 패권을 장악하고 활발한 해상 무역을 통한 이익을 얻어 나라를 부강하게 키웠습니다. 또 바다를 통해 만난 나라와의 교류를 통해 국제 외교 무대에서 큰 힘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 강력한 해군도 육성

그러나 바다가 고구려에게 반드시 기회만 준 것은 아닙니다. 고구려는 바다를 통해 적이 공격해 올 것에 대비하여 요동반도 남부와 장산군도에 비사성을 비롯한 해양 방어성을 세워 강력한 해군을 육성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고구려는 598년 수나라와의 전쟁에서는 적의 해군기지를 격파, 해상 보급로를 막아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기도 했습니다.

고구려가 수ㆍ당과의 전쟁에서 거듭 이길 수 있었던 주요 원인은 바다에서의 전쟁에서도 승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처럼 동아시아 바다는 백제에서 고구려로 또 고려로 이어지는 우리 겨레의 터전이었습니다. 하嗤?13세기 원나라의 고려 침공 이후 우리 겨레는 바다를 한동안 잊고 살았습니다. 이제 바다의 중요함이 커 가는 시대에 우리는 옛 조상들의 전통을 되새겨 보아야겠습니다. 바다는 우리가 개척해야 할 또 하나의 미래이기 때문입니다.


고구려에도 스파이가 있었다
도림 스님·덕창·고죽리… 정보전으로 승리 이끈 일등 공신들


007 시리즈를 비롯해 영화에서 스파이가 등장하는 장면을 본 적이 있나요? 적진 깊숙이 홀로 침입해서 적을 혼란에 빠뜨리게 하거나, 중요한 정보를 빼내오는 스파이는 어느 시대나 중요한 존재였습니다. 고구려에도 이런 역할을 하는 스파이가 있었습니다.


아차산 홍련봉 1보루. 백제 수도(풍납토성ㆍ몽촌토성 등 아차산에 마주 보이는 한강 이남 지역) 지역을 견제하기 위해 고구려군이 주둔한 군사 유적지다. 

▲ 백제 정복에 결정적 역할 ‘도림’

도림 스님은 장수왕이 백제를 정복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로 유명합니다. 그가 어떻게 백제를 궁지에 빠뜨렸는지 살펴볼까요? 472년 고구려에 온 북위의 사신은 백제가 북위와 협력해 고구려를 공격하자는 제안을 해 왔다는 사실을 고해 바쳤습니다. 396년 광개토대왕이 이끄는 고구려군에게 패배한 후, 오랫동안 고개를 숙이고 있던 백제가 이 무렵 점점 힘을 길러 강국으로 거듭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북위와 힘을 합해 고구려를 공격할 의지까지 야심차게 드러냈으니, 장수왕은 크게 걱정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백제를 다시 굴복시킬 수 있을까?’를 고민하던 장수왕은 먼저 스파이를 비밀리에 모집했습니다. 이 때 도림이란 스님이 찾아왔습니다. 장수왕은 그를 비밀리에 백제로 보냈습니다. 도림은 자신이 고구려에서 죄를 짓고 도망 온 것이라 속이고, 백제에 정착할 수 있었습니다. 백제 개로왕은 평소 바둑 두기를 좋아했는데, 마침 도림이 자신이 바둑을 잘 두니 왕께 바둑의 재미를 알려 드리겠다고 청을 넣었습니다. 이에 개로왕은 도림을 불러 바둑을 뒀습니다. 개로왕은 도림의 바둑 실력이 무척 뛰어나자, 그에게 바둑을 배우고자 손님으로 잘 대접을 했습니다.

개로왕과 바둑을 두며 친해진 도림은 얼마 후 왕에게 말을 건넸습니다. 백제가 매우 부유하고 강한 나라임에도 성곽과 궁궐이 수리되지 아니하고, 죽은 왕들의 무덤도 볼품이 없으며, 백성들의 집도 자주 하천의 범람으로 무너지니 이는 좋지 않은 일이라고 했습니다. 도림은 개로왕이 나라를 부유하고 강대하게 한 만큼, 그에 맞는 나라의 위엄을 갖추라고 부추긴 것이었습니다.

개로왕은 그의 말을 전적으로 옳다고 생각하고, 백성들을 강제로 동원해 화려한 성과 궁궐을 짓도록 했습니다. 또 왕의 아버지인 비유왕의 무덤도 크고 화려하게 만들었고, 한강 연안을 따라 긴 제방을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한꺼번에 많은 공사를 한 탓에 나라의 창고는 텅텅 비었고, 백성들의 생활은 곤궁해졌습니다. 이렇게 되자 백제는 국력이 크게 악화되었습니다. 그러자 도림은 백제를 탈출하여 이 사실을 장수왕에게 아뢰었습니다.

장수왕은 즉시 3만의 군대를 동원하여 백제의 수도 한성을 포위하였습니다. 개로왕은 성문을 닫고 저항했지만 고구려군이 사방에서 공격하는 바람에 위기에 몰렸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항복하려는 백제군이 점점 많아졌습니다. 개로왕은 자신이 도림의 말만 믿고 나라를 잘못 다스린 것을 후회했습니다. 개로왕은 내가 죽어도 나라의 명맥은 유지해야겠다는 생각으로 태자 문주를 먼저 내보냈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탈출을 시도했습니다. 하지만 금세 고구려 군에게 잡혔고 결국 처형당하고 말았습니다. 백제는 이 사건을 계기로 웅진으로 천도해야만 했습니다.


석촌동 백제3호분. 동서 55.5 mㆍ남북 43.7 m의 백제 고분으로, 고구려 적석총과 닮았다. 백제는 이 같은 대형 무덤을 갑작스레 만들다가 국력이 쇠해졌다. 

▲ 덕창ㆍ고죽리 등도 뛰어난 활약

장수왕은 무조건 힘만으로 백제를 이긴 것이 아니라, 스파이를 활용해 적은 힘으로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정보전의 효과입니다. 667년 당나라는 고구려가 정보를 잘 캐낸다는 것을 알고, 군대의 중요한 정보를 ‘이합시’라는 암호문으로 작성했습니다. 하지만 고구려 스파이들은 이 암호문을 해독, 당나라 군대를 압록강에서 곤경에 빠뜨리기도 했습니다.

고구려는 특성상 여러 나라와 관계를 맺어, 외국 사정을 잘 알아야 했습니다. 그런 이유로 외국에 수시로 스파이를 보냈던 것입니다. 그 가운데 스파이 덕창은 연개소문의 부하로, 신라 김유신의 군대가 고구려를 공격해 온다는 정보를 미리 얻어 고구려에 알렸습니다.

고죽리는 645년 당나라 진영에 들어가 그들의 움직임을 상세히 보고하던 스파이였는데, 적에게 잡혔다가 풀려 난 탓에 이름이 널리 알려졌습니다. 한편, 신라 김유신도 스파이를 잘 이용한 사람으로 유명합니다. 김유신의 명을 받은 조미곤은 백제 좌평 임자를 통해 백제를 혼란스럽게 만들었고, 주요 정보를 틈나는 대로 빼냈습니다. 즉, 조미곤은 신라가 백제를 멸망시키는 데 큰 공을 세웠던 것입니다. 정보는 이처럼 고구려 시대에도 지금처럼 매우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그 시대에도 나라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 치열하게 살았던 것입니다.


어떻게 농사를 지었을까?
소와 쟁기로 '농업 강대국' 우뚝, 농민 우대 정책으로 농업 발전



오회분 4호묘에 그려진 소머리를 한 농사의 신. 

우리 나라에서는 현재 도시 생활을 하는 사람이 대다수입니다. 반면, 농촌에서 농사를 짓거나 어촌에서 고기를 잡는 사람의 숫자는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최근 100 년 전만 해도 많은 이들이 농사를 짓고 살았습니다. 때문에 한 해 농사가 잘 되면 나라가 부유해지고, 농사가 안 되면 백성들이 굶주리게 돼 나라의 임금도 식사량을 줄이기까지 했습니다.

옛날 임금님은 또 백성이 농사를 잘 짓도록 돕는 것을 중요히 여겼습니다. 고구려도 마찬가지입니다. 고구려가 대륙의 광활한 땅을 차지하고 있었으니까 목축과 수렵을 통해 고기를 많이 먹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고구려인의 가장 중요한 생업은 역시 농업이었습니다. 고구려는 건국 당시 농사 짓기에 좋은 넓은 평야를 갖지 못했지만, 힘을 키운 다음에는 요동ㆍ한반도 서북부ㆍ만주 평원의 좋은 농경지를 모두 차지했습니다. 이 땅을 차지하기까지 고구려 사람들은 엄청난 피와 땀을 들였습니다.

하지만 좋은 농경지가 있다고 갑자기 부자가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농부가 많고, 농사짓는 기술도 발달해야 나라가 부자가 될 수 있었지요. 따라서 고구려는 외국에서 건너오는 사람들도 호의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세금도 낮추고, 새롭게 정착할 땅도 주면서 적극적으로 이민을 받았습니다. 고구려가 농민들을 우대한다는 소문이 나고 많은 사람들이 고구려로 건너가자, 후연은 세금을 낮추어 백성들이 떠나가는 것을 붙잡기도 했답니다.


평양시 상원2호 무덤에서 출토된 길이 35 cm의 대형 쇠보습. 

▲ 2~3세기부터 소를 이용 엄청난 양의 식량 저장

고구려 말기 요동성에는 50만 석이라는 엄청난 식량이 저장되어 있었습니다. 개모성ㆍ백암성 등 각 성에도 많은 식량이 저축돼 장기간 전쟁을 치를 수 있는 힘을 갖게 됐습니다. 이렇게 식량을 쌓아 놓을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원인은 소를 널리 이용해 농사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조선 시대에는 소가 부족해서 소를 함부로 잡아먹지 못하게 법으로 단속을 했고, 사람들도 수레를 끌 소가 적은 탓에 가마를 타고 다녔습니다. 하지만 고구려는 소가 무척 많았습니다. 광개토대왕은 395년 거란을 정복하면서 엄청난 양의 소와 말을 끌고 옵니다. 소가 농업에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이지요. 또 외출을 할 때는 소에 수레를 메워 타고 다녔습니다. 이렇듯 소가 농업에 이용되자 농민들은 더 넓은 땅을 일굴 수 있었습니다.

소가 끄는 보습(쟁기)은 밭을 깊게 또 많이 갈 수 있어서, 농부 한 명이 경작하는 땅을 크게 넓혀 주고 작물의 생산도 많게 해 주었습니다. 또 황무지도 쉽게 개간할 수 있고, 물길도 쉽게 뚫어 보다 좋은 논밭을 만들 수 있게 했습니다. 신라는 502년에서야 소로 농사를 지었고, 백제도 6세기에서야 소를 농업에 활용했지만, 고구려는 이보다 앞선 2∼3세기에 소를 농업에 이용했습니다.

▲ 앞선 농기구로 강대국 유지ㆍ발전

소가 끄는 보습은 보통 10 kg이 넘고 길이도 40∼80 cm나 되는 큰 것입니다. 이전까지 사람이 밭을 갈기 위해 사용하던 U자형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앞선 농기구입니다. 고구려는 이와 같은 큰 보습을 많이 만들 정도로 철 산업도 무척 발달해 있었습니다. 고구려는 특히 요동과 두만강 가까운 곳에서 생산되는 철로 이 같은 농기구를 만들어 널리 사용했습니다.

고구려는 소를 이용한 농사가 본격적으로 보급되는 4세기 이후 농업이 크게 발전했습니다. 농업이 발달되자, 많은 농산물을 저축할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645년 당과의 전쟁 당시 요동성에도 50만 석의 군량이 있었습니다. 이는 조선 성종 때 전국의 군량과 같을 정도로 엄청난 양입니다. 많은 식량 생산은 곧바로 백성들을 부유하게 했고, 남은 식량은 물자 교환으로 이어졌습니다. 나아가 상업의 발달, 국제 무역의 발달까지 가져왔습니다.

부자 나라가 된 고구려는 멋진 성도 쌓고, 화려한 문화도 꽃피울 수 있었습니다. 또 이웃 유목민에게 식량도 공급하면서 그들을 용병으로 활용했습니다. 고구려가 대제국을 유지하고 발전할 수 있었던 힘은 농업의 발달로 나라가 부유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고구려의 번영은 농경지를 확보하려고 노력했던 역사와, 농민을 보호했던 나라의 정책, 그리고 많은 소 덕택이었던 것입니다.

오회분 4호묘와 5호묘 고분 벽화에는 벼 이삭을 들고 있는 소의 얼굴을 한 신이 그려져 있습니다. 바로 농사의 신입니다. 소가 농업에서 얼마나 중요했는지 이 벽화가 무척이나 잘 보여 줍니다. 고구려의 전사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뛰어난 기동성을 지닌 말(馬)이겠지만, 고구려의 농민들이 진정으로 필요했던 것은 바로 소(牛)였답니다.


최고 전성기를 이룬 장수왕(長壽王)
광개토대왕 업정 이어 평화로운 대제국 완성

어린이 여러분은 ‘고구려의 왕’ 하면 광개토대왕을 먼저 떠올릴 거예요. 광개토대왕은 고구려의 영토를 크게 개척한 영웅이지요. 그런데 그에 못지않은 고구려의 왕이 있어요. 바로 광개토대왕의 맏아들 장수왕이지요. 장수왕은 아버지의 업적을 크게 이어 간 임금입니다. 그는 고구려 최고 전성기를 이룬 임금으로 유명합니다. 그의 업적을 알아 볼까요.


장수왕이 새롭게 건설한 안악궁과 그 앞에 전개된 시가지 상상복원도. 

▲ 수도를 국내성에서 평양성으로 옮겨

413년부터 491년까지 무려 79 년 간 고구려를 다스린 장수왕의 업적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일은 수도를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옮긴 일입니다. 국내성은 압록강을 이용할 수는 있지만, 주변에 넓은 평야가 없다는 단점이 있었습니다. 고구려는 나라가 커짐에 따라 경제적인 기반이 튼튼하고 교역의 중심지로서의 기능을 할 수 있는 새로운 수도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찾은 곳이 바로 평양이지요. 평양은 대동강과 서해를 이용할 수 있고, 넓은 평야 지대가 있으며 기후도 국내성보다 따뜻합니다. 고구려는 오래 전부터 평양으로 수도를 옮길 준비를 해 오다가, 427년 마침내 수도를 옮기게 되었습니다.

수도가 남쪽으로 옮겨짐에 고구려는 남쪽으로 보다 더 강하게 진출합니다. 도림 스님을 앞세워 백제를 굴복시키고, 중원 고구려비를 세우며 충북 중원 지역에 강력한 거점을 만든 것도 장수왕 시기의 일입니다. 중원 고구려비에는 고구려대왕과 신라왕이 서로 형과 아우가 되어서 서로 합심하여 세상의 질서를 지켜 나가자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즉 고구려와 신라가 서로 상하 관계를 맺었음을 보여 줍니다. 고구려가 천하의 중심국이라는 당당한 자부심이 비문에 담겨 있습니다. 고구려는 이 때 한반도 남쪽에서 강력한 힘을 과시하고 있었습니다.


장수왕이 평양으로 수도를 옮긴 후, 궁성인 안악궁을 호위하기 위해 쌓은 둘레 7 km의 대형 산성인 대성산성의 남문. 

▲ 가장 대우받는 나라로 성장

한편 고구려 서쪽에서는 북위가 크게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북위는 고구려의 영향력 아래에 있던 북연을 공격하여 멸망 직전으로 몰아갑니다. 그러자 북연왕 풍홍은 고구려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장수왕은 갈로 맹광에게 2만의 군대를 주어 북연의 수도로 보냅니다. 고구려군은 북연의 병사들을 데리고 도성에 들어가 각종 물자와 백성들, 그리고 북연왕을 함께 고구려로 데려왔습니다. 고구려가 이러한 작전을 수행하는 동안, 북위군 지휘관 고필은 고구려군이 두려워 감히 나서지도 못했습니다.

북위는 북연을 멸망시켰지만 아무런 소득도 없고, 고구려가 북연의 모든 재물과 백성을 가져가자 화가 났습니다. 북위는 고구려를 공격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실행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북위가 북쪽의 유목 제국인 유연, 양자 강 이남의 송나라와 대립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장수왕은 유연과 송나라를 서로 연결시켜 주면서 3 면에서 북위를 포위했습니다.

5세기 동아시아에서 가장 인구도 많고 힘도 센 북위지만, 고구려에게 만큼은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북위는 고구려를 외국 가운데 가장 우대하고, 평화롭게 지내기를 원했습니다. 북위와 유연, 송 등은 서로 전쟁을 한 탓에 문화와 경제가 크게 발전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고구려는 상대적으로 평화를 누리면서 인구도 크게 늘고, 문화와 경제도 크게 발달했습니다.

▲ 화려한 고분 벽화 문화도 꽃피워

장수왕이 다스리던 시기에 고구려는 화려한 고분 벽화 문화를 활짝 꽃피웁니다. 무용총, 각저총을 비롯한 많은 벽화 무덤이 만들어집니다. 당시 동아시아의 미술 문화는 서쪽의 돈황과 함께 고구?평양과 집안 일대가 양대 중심지로 번영했습니다. 또 장수왕 시기에는 새롭게 확대한 영토를 개간하여 경작지가 크게 늘어 농산물 생산이 크게 증가했고, 광업과 상업도 함께 발전했습니다. 특히 당시 고구려가 동아시아 바다를 제패하면서 해외 무역이 활발히 펼치게 된 것도 고구려를 부자 나라로 만들었습니다.

장수왕은 남진(南進) 정책만을 편 것이 아니라, 북쪽으로도 크게 영토를 넓혔습니다. 유목 제국인 유연과 함께 두 나라 사이에 있는 지두우라는 나라를 나누고 내몽고 지역인 대흥안령 산맥 일대로 진출하기도 합니다. 또 지두우 남쪽에 있던 거란족에 대한 영향력도 확대합니다. 북쪽으로는 눈강 일대의 실위에게 철을 수출하면서 고구려의 힘을 과시하기도 합니다.

장수왕은 광개토대왕이 만든 대국 고구려를 보다 발전시키면서 동아시아의 4대 강국의 하나로 발돋움하며 국제 질서를 이끌어 갔습니다. 만리장성과 대흥횅?산맥 이동의 동방 지역을 모두 고구려가 제압하였습니다. 장수왕은 큰 전쟁을 치르지 않으면서 평화와 안정이 보장된 살기 좋은 대제국을 만드는데 성공했습니다. 39 세에 죽은 광개토대왕과는 달리 장수왕은 98 세까지 장수하면서, 고구려의 태평성대를 이룬 또 한 명의 위대한 대왕이었습니다.


'춘향전'·'별주부전'은 고구려에서 유래됐다
안장왕의 사랑·김춘추의 탈출과 비슷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춘향전과 별주부전을 들어 보았을 것입니다. 판소리와 고전 소설로 유명한 이 이야기는 어린이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가 언제부터 비롯되었을까요? 놀랍게도 고구려에서 그 유래를 찾아 볼 수 있답니다.


을밀 장군에게서 이름이 유래 되었다는 평양의 을밀대. 

▲ 고구려 안장왕, 백제 여인 한주와 사랑에 빠져

고양시 고봉산 일대가 백제의 지배를 받던 시절, 어느 고을에 한주라는 아름다운 여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한 청년은 산책에 나선 한주를 보고 그만 사랑에 빠졌습니다. 청년은 이윽고 한주에게 사랑을 고백했고, 그녀 역시 그 남자를 사랑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이 청년은 고구려의 태자로, 백제에게 빼앗긴 한강 유역을 되찾기 위해 몰래 정탐을 하던 중이었습니다.

얼마 후 태자는 한주에게 “내 임무가 끝났으니 이젠 고구려로 돌아가야 하오. 돌아가는 즉시 군사를 동원해 이 곳을 정복하고 그대를 아내로 맞이할 테니 기다려 주시오.”라고 말하며 백제를 떠났습니다. 태자는 얼마 후 문자명왕의 뒤를 이어 고구려 22대 안장왕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안장왕은 쉽게 백제의 땅을 되찾지 못했습니다.

한편 한주의 아름다움이 소문이 퍼지자, 백제의 태수가 사람을 보내 청혼했습니다. 하지만 한주는 장래를 약속한 사람이 있다며 청혼을 거절했습니다. 화가 난 태수는 한주를 잡아다가 그가 누구냐고 다그쳤습니다. 태수는 한주가 적과 내통한 것이 분명하다면서 그녀를 옥에 가둬 버립니다. 이 소식을 들은 안장왕은 부하들에게 한주를 구해 오도록 명령했습니다. 이때 장수 을밀이 왕에게 나아가 자신이 왕의 여동생인 안학공주를 사모하고 있으니, 공을 세우면 둘의 결혼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을밀은 부하들과 함께 광대놀이패로 변장하고서 백제로 잠입해 들어갔습니다. 태수는 자기 생일날 한주를 끌어 내어 다시 청혼했지만, 한주는 다시 한번 거절합니다. 태수는 너무 화가 나 결국 한주를 죽이라고 명령합니다. 이 때 을밀과 그의 부하들이 감춰 둔 무기를 꺼내 무리에서 뛰쳐나와 고구려 대군이 이미 이 곳에 쳐들어왔다고 외치며 한주를 극적으로 구합니다. 이 소식을 들은 안장왕은 백제를 공격했고, 한주도 고봉산에 올라 봉화를 밝힙니다. 마침내 왕과 한주는 다시 만나게 되고, 을밀도 안학공주와 결혼합니다. 이 이야기는‘삼국사기’ㆍ‘동국여지승람’ 등에 짧게 기록돼 있고, ‘해상잡록’ 등에도 그 내용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춘향전과 거의 같은 내용인데, 이름과 사건이 일어난 배경만 다를 뿐입니다.


안장왕과 한주의 사랑 이야기가 전해지는 고양의 고봉산. 

▲ 신라 김춘추는 토끼의 지혜를 활용해 고구려에서 빠져 나와

별주부전과 비슷한 이야기도 고구려인의 입을 통해 들어 볼 수 있습니다. 642년 겨울 신라의 김춘추는 사신 자격으로 고구려를 방문을 하게 됩니다. 그는 백제가 계속해서 신라를 공격하고 있으니, 고구려가 신라에 힘을 보태달라고 요청을 합니다. 그런데 연개소문과 보장왕은 그 제의를 하려면, 먼저 신라가 고구려에서 빼앗아 간 조령과 죽령 이북의 땅을 내놓겠다는 약속을 하라고 요구합니다. 만약 그 땅을 돌려 주지 않는다면, 김춘추를 신라로 돌려 보내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았습니다.

백제에게 빼앗긴 땅을 되찾으려던 김춘추는, 도리어 영토를 내놓을 판에 이르렀으니 앞이 깜깜했습니다. 김춘추는 잡혀 있는 동안 고구려 대신인 선도해에게 뇌물을 바쳐 자신을 도와 달라고 요청합니다. 선도해는 김춘추를 만나 다음의 이야기를 들려 줍니다. 동?용왕이 병이 들었는데, 토끼의 간을 먹으면 낳는다는 말을 듣고, 거북을 육지로 보냈습니다. 거북은 토끼를 만나 용궁 구경을 가자며 유혹했고, 토끼는 거북의 등을 타고 바다로 갔습니다.

이 때 거북은 토끼에게 토끼의 간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자 토끼는 나는 신의 후손이라 간을 꺼내 씻어 넣을 수도 있는데, 공교롭게도 지금 간을 꺼내 땅에 놓아 두었으니 다시 돌아가야 한다고 거북에게 말했습니다. 거북은 토끼를 다시 육지에 내려놓았습니다. 그러자 토끼는 도망치며 “너는 어리석구나. 어찌 간이 없이 살 수 있는 자가 있겠느냐.”며 거북에게 말했습니다. 김춘추는 이 이야기 속의 숨은 뜻을 깨닫고, 연개소문과 보장왕 앞에서 땅을 돌려 주겠다는 약속을 한 다음 고구려를 무사히 탈출합니다. 그리고는 토끼가 그랬듯이 땅을 돌려 주지 않았습니다. 그 때문에 신라와 고구려는 더 사이가 나빠졌습니다.

위에서 선도해가 말한 이야기가 곧 별주부전으로, 불교 경전과 인도ㆍ일본 민담에서도 유사한 이야기를 찾을 수 있습니다. 고구려에는 이 밖에도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온달과 평강공주, 농부 을파소가 국상이 된 이야기, 소금장수가 미천왕이 된 이야기 등 재미난 이야깃거리가 많습니다. 이런 얘기들이 언젠가 영화ㆍ드라마ㆍ게임 등의 소재로 널리 활용되어 우리 모두 고구려를 더 잘 알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고구려의 축제와 놀이
신분·남녀 구분 없이 함께 술 마시며 춤과 노래 즐겨
 


오회분 4호묘에 악기를 연주하는 신선의 모습.(왼쪽) 장천 1호분 벽화에 보이는 씨름을 비롯한 다양한 놀이 장면. 고구려인들은 평소 춤과 노래를 즐겼다. 

고구려에 대한 공부를 하다 보면 유명한 인물이 누구이며, 언제 어떤 나라와 싸워 이겼고, 얼마나 큰 땅을 차지했는가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고구려 사람들은 오로지 훈련에만 힘을 쏟고 전쟁만을 하며 살았을까요? 물론 그렇지는 않았겠지요. 고구려 사람들도 평상시에는 다양한 문화 생활과 놀이를 즐겼답니다. 그 가운데 특히 축제를 좋아했습니다.

▲ 10월에 열리는 가장 큰 축제 '동맹'

고구려에서 1 년 중 가장 큰 축제는 동맹으로, 해마다 10월에 열렸습니다. 이 축제는 유화부인과 추모왕을 신으로 모시면서, 시조의 탄생을 재현하는 경건한 의식을 왕이 직접 참여해 진행했습니다. 이 날은 왕ㆍ귀족ㆍ일반 백성까지 모두 한자리에 모여 온갖 놀이를 즐깁니다. 신과 하나가 돼 신명 나게 즐기는 것입니다. 조선 시대 양반은 엄숙한 제사를 지낼 뿐, 마을 제사 등에는 뒷짐을 지고 돈이나 몇 푼 내어 주는 데 그쳤습니다. 백성들과 함께 노래하고 춤추는 일은 무척이나 보기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고구려인은 신분과 남녀의 구분 없이 밤늦도록 함께 술 마시고 춤과 노래를 즐겼습니다. 전쟁이 잦은 나라인 만큼, 아래와 위의 일체감이 무엇보다 필요했습니다. 즉, 축제가 단결을 이끌어 내는 중요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 고분 벽화에 노래하고 춤추는 모습 많아

고구려 사람들은 동맹 축제뿐만 아니라 평소에도 밤늦도록 노래하고 춤추며 놀기를 좋아했습니다. 고구려의 노래 가운데 지금 전하는 것은 황조가와 인삼노래 정도에 불과하지만, 당시에는 많은 노래가 연주되었습니다. 동맹에서 의식이 진행될 때는 잔잔하면서도 신을 부르는 음악이 연주됐습니다. 또 함께 춤추고 노래할 때에는 격정적인 음악이, 군대 행진 때에는 씩씩하고 웅장한 음악이 연주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오회분 5호묘 천장 네 벽에는 8 명의 신선이 그려져 있는데, 이들은 뿔피리ㆍ횡적ㆍ장구ㆍ거문고ㆍ퉁소 등을 연주하고 춤을 추며 노래하고 있습니다.

안악3호분에는 음악에 맞추어 탈춤을 추는 사람도 그려져 있습니다. 무용총 역시 무덤 주인이 유희 모습을 보는 장면이 그려져 있기도 합니다. 덕흥리 고분의 경우 주인공이 업무를 볼 때, 뒤에서 완함과 피리ㆍ나팔을 연주하는 사람이 함께 보입니다. 이 밖에 장천1호분에는 귀부인이 야외에서 남자와 만나 함께 거문고를 연주하고 춤추는 장면이 보여집니다. 당시 당나라와 일본에서는 고구려의 음악을 궁중 연회에서 연주했고, 고구려의 춤과 노래도 당나라 귀족층에서 크게 유행하기도 했답니다. 고구려 사람들은 한 해가 시작될 때 왕이 신하들과 함께 패수로 나가 사람들이 모여 놀이하는 것을 구경했습니다. 이 때 사람들은 두 편으로 나뉘어 서로 돌을 던지는 돌싸움을 했습니다. 서로의 경쟁을 부추기면서도 화해를 도모하는 이 돌싸움은 20세기 중반까지도 전국에서 볼 수 있는 놀이였습니다.

▲ 씨름ㆍ겨루기ㆍ축국ㆍ윷놀이 등 즐겨

고구려의 놀이 가운데에는 씨름이 있습니다. 각저총과 장천1호분 벽화에 보이는 씨름은 샅바의 형태는 오늘날과 매우 비슷합니다. 무용총과 안악3호분에는 겨루기를 하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이는 태권도의 조상격인 수박이라는 무예를 겨루는 것입니다. 고구려 사람들은 또 축구와 비슷한 축국이란 놀이를 즐겼습니다.

한편, 장천1호분 벽화에는 고구려인의 야외 활동 장면이 나옵니다. 원숭이를 부리며 놀기ㆍ재주꾼이 수레바퀴를 던지며 놀기ㆍ춤추고 연주하기ㆍ말 타며 사냥하기ㆍ씨름ㆍ술래잡기 등 다양한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팔청리와 수산리 고분 벽화 등에서는 높은 나무다리에 올라 춤추기ㆍ칼 재주 부리기ㆍ여러 개의 막대와 공을 엇바꾸어 던져 올리며 받기 등 서커스를 하는 사람들의 장면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같은 육체적 놀이 외에도 고구려 사람湧?바둑ㆍ주사위ㆍ윷놀이 등 머리를 쓰는 오락을 즐겨 했습니다.

특히 윷놀이는 우리 겨레 고유의 놀이인데, 놀이판과 윷가락은 많은 상징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윷놀이가 우리 전통 사상의 원형이 담긴 보물이라고 말합니다. 고구려 사람들은 잦은 전쟁을 치렀음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여유롭게 인생을 즐기며 살 줄 알았습니다. 특히 상하와 남녀 구분 없이 함께 축제를 즐기는 고구려인의 모습은 오늘날 우리가 크게 배워야 할 점이겠지요.


고구려 사람들은 무엇을 먹고 살았을까?
솥에 밥 짓고 시루에 떡 쪄 함께 먹어, 불고기 비슷한 '맥적' 외국에도 유명



안악3호분 벽화. 고구려인이 부엌에서 음식 만드는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 철제 솥 보급되면서 밥 지어 먹어

고구려 사람들은 무엇을 먹고 생활했을까요? 요즘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햄버거와 피자는 구경조차 못했을 것이고, 고추와 감자ㆍ옥수수ㆍ커피 등도 없었는데 대체 무엇을 먹었을까요. 지금은 우리 먹을 거리에서 사라지거나 소외된 것이겠지만, 당시 이들이 즐겨 먹었던 것을 알아봅시다. 고구려인의 주식은 지금처럼 밥이었겠지요. 그런데 초기에는 쌀보다 기장이나 수수ㆍ조 등의 잡곡을 많이 먹었습니다. 신석기와 청동기 시대의 우리 조상들은 곡식을 물에 불리거나 가열해서 죽을 만들어 먹었지만, 시루가 개발되면서 점차 떡을 만들어 먹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철제 솥이 널리 보급되면서부터는 밥을 지어 먹었습니다. 대무신왕은 부여를 공격할 때, 저절로 밥이 되는 신기한 솥을 얻어 전쟁 중에도 포식했다고 합니다. 당시 솥의 주인인 부정이 전쟁 중에 솥을 짊어지고 따라다녔다고 합니다. 솥은 당시 서민들의 가장 중요한 재산이었고, 군대에서도 필수였습니다. 하지만 357년께 만들어진 안악3호분 벽화에는 시루에 음식을 만들어 먹는 모습이 보입니다. 즉, 솥이 등장했다고 해서 시루가 사라진 것이 아니고 떡과 밥을 함께 먹었던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임진강 무등리에서 발견된 5~6세기 고구려 군량 창고에서는 쌀과 조가 함께 발견된 바 있었습니다. 쌀과 조가 섞인 밥이 당시 군인들의 주식이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 고구려 지역은 또 콩의 원산지입니다. 고구려 사람들은 콩을 발효시켜 된장 등을 만들어 먹기도 했답니다. 고구려는 소ㆍ돼지ㆍ양ㆍ닭ㆍ말ㆍ개 등 다양한 가축을 길렀던 만큼, 이 역시 주요 식량 자원이 되었습니다.

▲ 겨울 길어 장기 보존 식품 필요

멧돼지ㆍ사슴ㆍ토끼ㆍ꿩 등 지금 우리들이 거의 먹지 않는 고기들이 당시에는 중요한 양식이 되었습니다. 안악3호분 벽화에는 고기를 꼬챙이에 걸어 둔‘육고’라 불리는 별도의 건물이 부엌 옆에 그려져 있습니다. 고구려에는 또 ‘맥적’이라 불리는 고기 요리가 외국에 널리 알려졌는데, 고기를 된장 등으로 양념해 불에 구워 먹는 것이지요. 이것이 발전해 지금의 불고기라는 음식이 된 것으로 짐작됩니다.

고구려 남자들은 평소 허리 왼쪽에는 갈돌을 달고, 오른쪽에는 오자도를 차고 있었습니다. 사냥을 나가거나 먹을 고기를 썰기 위해 오자도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만큼 고기는 고구려인의 중요한 식량이었습니다. 압록강과 요하를 비롯한 큰 강과 바다에서 나는 물고기 등도 고구려인의 중요 먹을 거리였습니다. 고구려 초기에는 동해안에 자리한 동옥저에서 바다 고기와 해초류ㆍ소금 등을 공급 받아 먹기도 했답니다.

채소류도 중요한 양식입니다. 부루ㆍ아욱ㆍ쑥ㆍ무ㆍ배추 등이 재배됐는데, 아욱과 배추ㆍ무 등을 이용해 김치를 만들어서 먹었습니다. 물론 고추가 없었기 때문에, 소금에 절여서 발효시키고 마늘ㆍ파ㆍ생강 정도만 곁들어진 백김치와 같은 것을 먹었을 것입니다. 겨울이 춥고 긴 고구려의 환경에서는 김치나 된장ㆍ말린 고기 등의 장기 보존 식품이 필요했습니다.


무용총 벽화에 보이는 음식 나르는 모습.
 

이렇게 볼 때 고구려인의 식탁에는 밥과 장국ㆍ고기요리ㆍ김치ㆍ나물ㆍ젓갈 등이 올라왔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하지만 벽화에는 소반 위에 4∼5 개의 그릇만이 보일 뿐이어서 한 끼에 무엇을 먹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고구려 사람들은 술도 잘 빚었습니다. 산상왕의 둘째 부인은 술을 전문적으로 빚어 내다파는 사람들의 마을인 주통(酒桶-香?촌 출신입니다. 이런 마을이 있다는 것은 고구려에서도 술이 널리 사고 팔린 식품이었음을 잘 보여 줍니다. 동맹 축제를 비롯해 평소에서 밤늦게까지 노래하고 춤추며 술을 마신 사람들인 만큼 술 역시 중요한 음식이었던 것입니다.

▲ 참막 중요 간식거리

과일로는 복숭아ㆍ배ㆍ밤ㆍ오얏 등을 즐겨 먹었는데, 이것이 중요한 간식거리였습니다. 감자와 고구마는 없었지만, 백제 서동이 신라 선화공주를 부인으로 삼기 위해 아이들에게 노래를 부르라며 주었던 ‘참마’는 당시 고구려인에게는 중요한 간식이었을 것입니다.

고구려 귀족의 집에는 부엌이 안채 건물과 별도로 있었습니다. 안악3호분 벽화에는 부엌 아궁이에서 불을 지펴 음식을 만들고, 그릇을 닦고, 소반에 음식을 차려 안채 사람들에게 음식을 전해 주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음식을 담는 그릇은 토기ㆍ자기ㆍ목기 등으로 만들었는데, 특히 조두라는 좋은 식기류와 맥반 이라고 불리는 작은 소반을 사용하기도 했답니다.


고구려인의 주거 문화
'쪽구들'로 부분 난방… 실내서도 신발 신으며 입식 생활


조선 시대가 배경인 사극들을 보면, 온돌방에 앉아서 대화를 나누는 사람의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이 시대에는 또 앉아서 생활 하기에 편하도록 집안의 가구도 모두 높이가 낮았습니다. 그런데, 뜀박질 잘 하고 말 타며 돌아다니기를 좋아하던 고구려 사람들도 조선인들처럼 좌식 생활을 즐겼을까요?


각저총에서 보이는 고구려인 실내 생활도. 

▲ 잠자는 공간만 따뜻한 '쪽구들'

고구려인들은 실내에서도 엉덩이를 방바닥에 붙이며 사는 좌식 생활보다는 요즘 아파트에서 사는 것처럼 입식 생활을 많이 했습니다. 고구려의 겨울은 몹시 추웠습니다. 이들은 추위를 피하기 위해 온돌을 만들어 실내를 따뜻이 했습니다. 하지만 방 전체에 구들장을 놓은 것이 아니라, 잠을 잘 수 있는 공간만 온돌방으로 꾸몄습니다. 이를 쪽구들이라고 합니다.

군사 유적지인 아차산 4보루(작은 성)의 발굴 때에도 12 개의 쪽구들이 발견됐습니다. ‘ㄱ’자형과 직선형 두 종류의 쪽구들은 옆에 평평한 돌판을 세워 벽을 만들고 그 위에 납작하고 긴 돌을 뚜껑을 덮은 형태를 지니고 있습니다. 쪽구들이 끝나는 부분은 원형으로 마무리돼 있는데, 여기에 연기가 빠져 나가는 굴뚝을 세웠습니다.

▲ 방 안에 의자·평상·장방 놓아

이렇게 전체가 아닌 부분 난방을 했다면, 나머지 공간은 무엇이 있었을까요. 각저총 널방 북벽에 그려진 주인공 부부의 실내 생활도를 보면 이들의 생활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생활도에서 남자 주인공은 꽤 높은 의자에 앉아 있는 반면, 그의 두 부인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습니다. 부인들이 앉은 곳은 주황색으로 칠해져 있고, 방바닥이 방 바깥보다 약간 더 높은 곳으로 보아 쪽구들 방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방 안의 나머지 공간에는 이처럼 의자와 평상ㆍ장방을 놓아 그 위에 앉아서 생활했습니다. 평상은 평평한 넓은 의자로 혼자 또는 여럿이 함께 앉기도 했는데, 평상 아래에는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 놓았습니다. 즉, 실내에서도 신발을 신었던 것입니다. 장방은 평상의 세면에 낮은 둘레 벽을 치고, 천으로 지붕을 만들어 마치 작은 방처럼 꾸민 곳입니다. 장방은 주로 신분이 높은 귀족이 즐겼던 것으로 여기에 비단이나 자수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하기도 했습니다.

고분 벽화에 등장하는 귀족들의 정면 초상화는 대개 장방에 앉은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장방에는 휘장(커튼)을 둘러 때로는 접거나, 내려서 밖을 볼 수도 있고 없게도 했습니다. 휘장은 방에도 둘러서 내부의 공간을 구분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평상과 장방ㆍ휘장 문화는 조선 시대에 와서 온돌과 마루 문화가 발전하면서 점차 사라졌습니다. 특히 온돌이 방 안 전체를 따뜻이 하게 되면서, 신을 벗고 실내에 들어와 살게 된 것은 주거 문화의 큰 변화였습니다. .


장방에 앉아 있는 무덤 주인공. 안악 3호분에서 나온 그림이다. 


▲ 부엌ㆍ마구간ㆍ차고는 따로 지어

집은 또 용도에 따라 건물을 별도로 지었습니다. 부엌ㆍ마구간ㆍ고기 창고ㆍ식량 창고ㆍ방앗간ㆍ수레를 넣어 두는 차고는 물론이고 남녀가 사는 건물도 구분되어 있었습니다. 또 연못과 활 쏘기를 연습할 수 있을 정도의 마당도 있었고, 노비들의 잠자는 장소도 따로 있었습니다. 기와 지붕을 얹은 귀족들의 집과는 달리, 가난한 사람의 집은 초가 지붕 혹은 나무껍질로 만들었습니다. 특히 북쪽 사람들은 겨울철 추위를 막기 위해 무덤처럼 생긴 굴을 파고 지하에서 살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고구려 서민들의 집에는 쪽구들이 있어서 난방을 했습니다.

고구려 시대의 집들은 나무와 흙으로 벽체를 만들어 불에는 약하지만, 시멘트 집보다 맙?효과가 뛰어나 쪽구들에다 부분적으로 화로를 통한 난방을 해 한겨울을 따뜻하게 보낼 수 있었습니다. 물론 서민들의 집은 집 내부에 여러 건물들이 없었고, 마구간이나 창고 정도만이 따로 만들어졌을 뿐입니다.

옛 사람들이 쓰던 가구류 대부분은 나무로 만든 것들입니다. 따라서 불에 타거나 훗날 연료 등으로 태워져 고구려의 가구 가운데 현재 전해 오는 것은 없습니다. 다만, 벽화나 무덤에서 나온 나무 조각을 보면 고구려에서는 옻칠을 한 칠기류 제품을 많이 사용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옻칠을 하면 벌레나 열ㆍ직사광선으로부터 나무를 보호할 수 있고, 때도 잘 타지 않습니다. 고분 벽화에는 의자와 탁자ㆍ소반ㆍ책상 등이 등장하지만, 장롱 등 다른 가구류를 더 이상 확인할 수 없어 당시 사람들의 실내 생활을 모두 다 알 수 없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세계 문화 유산, 고구려 고분 벽화
삶의 모습·생각·종교 고스란히… 예술로서도 걸작


지난 7월, 31 개의 고구려 벽화 무덤이 장군총ㆍ광개토대왕릉비 등과 함께 유네스코에서 선정한 세계 문화 유산 목록에 등록되었습니다. 고구려 고분 벽화가 얼마나 대단하기에 세계 문화 유산으로 선정된 것일까요?


고구려 강서대묘(6세기 말~7세기 초)의 현무도(위)ㆍ청룡도(아래). 

▲ 초기에는 사냥 등 일상 생활 주로 담아

고구려 고분 벽화는 차분하면서도 신비로움을 주는 놀라운 색채감과 구성으로 세계 어느 벽화에도 뒤지지 않는 걸작품입니다. 그리스ㆍ로마ㆍ이집트 등 세계적인 고대 문명국마다 멋진 벽화를 남기곤 했는데, 고구려 또한 돈황 석굴의 벽화와 더불어 동아시아를 대표하는 벽화를 창조했습니다. 현재까지 알려진 벽화가 그려진 고구려 무덤은 106 기로, 평양 등 북한 지역에 76 기ㆍ집안과 환인 등지에 30 기가 있습니다. 벽화가 그려진 무덤은 돌로 된 방 형태의 내부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돌로 된 방의 네 벽과 천정 그리고 입구의 좌우 벽에 벽화가 그려져 있습니다.

3세기 말부터 그려지기 시작한 고분 벽화에는 초기엔 무덤 주인공의 집ㆍ사람이 즐겨했던 사냥 등의 놀이ㆍ주인공 부부의 모습ㆍ야외 행차ㆍ연회 장면 등이 담겨져 당시 고구려인의 일상 생활 풍습을 사실적으로 전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벽화는 무덤의 네 벽에 주로 현실 세계를 그렸지만, 천정에는 하늘 세계 등 당시 고구려인의 생각을 알 수 있는 그림들이 그려져 있습니다.

덕흥리 고분 벽화에는 무덤 주인공 부부의 주거 생활, 주인공의 공식 업무 생활, 천정에 각종 괴이한 괴수들, 해와 달을 비롯한 별들, 견우와 직녀 이야기 등이 그려져 있습니다. 안악 3호분의 경우 마굿간과 외양간은 물론 부엌과 우물ㆍ방앗간ㆍ수레창고와 고기창고 등도 그려져 있습니다. 또 춤추는 사람들과 사냥하는 그림이 멋진 무용총, 씨름하는 사람들이 그려진 각저총, 가족이 바깥 나들이를 하면서 놀이를 구경하는 수산리 고분, 야외 놀이 장면과 주인공의 불교 신앙을 전해주는 장천 1호분 등이 이와 같은 인물 풍속도를 대표하는 벽화 무덤입니다.

▲ 후기부터 영혼의 안식 바라는 그림 주로 그려

같은 시기 당나라 금등촌 7호묘의 현무도ㆍ청룡도. 고구려의 예술 수준이 얼마나 높은지를 미뤄 짐작할 수 있다.  5세기 중엽 이후에는 점차 생활 풍속 장면과 함께 무덤 안을 장식해 주는 아름다운 장식 무늬가 많이 그려졌습니다. 연꽃 무늬ㆍ동심원 무늬ㆍ왕자 무늬ㆍ화초 무늬ㆍ구름 무늬 등이 무덤 내부를 화려하게 장식합니다. 연꽃 무늬만을 그린 산연화총, 태양을 상징하는 원형 무늬가 그려진 환문총, 왕자 무늬와 연꽃 무늬가 그려진 동명왕릉 등이 이 시기에 만들어집니다.

특히 고구려 후기가 되면서 무덤 내부에는 점점 더 종교적이고, 영혼의 안식의 도움이 되는 그림들이 그려집니다. 특히 사신(四神)이라 불리는 4방위의 수호신이 점차 벽화의 핵심 주제가 되어 갑니다. 동쪽의 청룡ㆍ남쪽의 주작ㆍ서쪽의 백호ㆍ북쪽의 현무가 그것입니다. 이 사신들은 모두 상상 속에 존재하는 동물입니다. 청룡과 백호는 서로 그 모습을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슷하기도 하며, 하늘을 나는 주작은 때로는 수탉으로 표현되기도 하고, 현무는 거북과 뱀이 서로 얽힌 조화로운 형상을 갖고 있습니다.

▲ 고구려인의 삶과 생각 고스란히 담겨 있어

고구려인들에게 사신은 저승 세계로 가는 길을 호위해 주는 신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또 무덤을 영혼이 머물며 저승에 가기 위해 준비하는 장소로 생각했던 사람들인 만큼, 나쁜 기운이 들어오지 못하게 사신도를 무덤 방의 벽 전면에 크게 그리기도 합니다. 특히 강서대묘의 현무도와 청룡도 · 강서증묘의 백호도와 주작도는 너무나도 뛰어난 걸작입니다.

또한 오회분 4호묘와 5호묘의 아름다운 색채를 간직한 사신도 아름답습니다. 사신도를 주요 주제로 그린 것은 고구려만의 특징으로, 주변국의 사신도와 비교해 보면 얼마나 고구려의 예술 수준이 높은 것인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고구려 사람들이 입었던 의복, 그들이 사용했던 무기, 춤과 놀이, 천문학을 비롯한 고구려의 과학, 죽음 뒤의 세계에 대한 생각을 비롯한 당시의 종교 사상 등도 고분 벽화를 통해 엿볼 수 있습니다. 고분 벽화는 고구려 사람들이 현대인에게 자신들의 삶과 생각을 알려 주는 타임 캡슐입니다.

 

고구려는 왜 한강 유역을 빼앗겼을까?
돌궐 침략 막기 위해 군대 북쪽 배치, 약해진 틈타 백제·신라에 공격 당해

고구려는 장수왕 시기 동아시아 최강국의 위상을 자랑했습니다. 이즈음 고구려는 백제를 공격해 개로왕을 죽였고, 신라를 신하의 나라로 여겼습니다. 그렇게 막강하던 고구려였지만, 551년 백제와 신라의 공격을 받고 한강 유역을 빼앗겼습니다. 왜 고구려는 이 곳을 지키기 못했던 것일까요?



고구려를 위협했던 돌궐족 귀족의 석인상. 석인이란 무덤 앞에 세운 돌로 만든 사람이다. 

▲ 나라 안의 권력 다툼으로 국력 점차 약해져

고구려는 장수왕과 문자명왕 시기에 전성기를 누렸지만, 내부적으로는 문제점이 하나 둘씩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귀족들이 권력을 잡고, 왕의 힘은 상대적으로 약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급기야 안원왕이 병들어 눕게 됐고, 귀족들은 왕의 둘째 왕후와 셋째 왕후의 가문을 중심으로 나뉘어져 싸우게 되었습니다. 다음의 왕을 자신들의 가문에서 내놓은 왕비가 낳은 자식으로 삼기 위함이었습니다. 양측은 그래서 안학궁성 앞에서 무력으로 충돌했습니다.

이 때 둘째 부인 측에서 승리했고, 상대방은 약 2000 명이나 죽었습니다. 전쟁과도 같은 엄청난 내란이 끝난 후, 545년 양원왕이 왕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551년까지도 고구려의 정치는 안정을 찾지 못했습니다. 귀족회의 의장인 대대로의 자리를 놓고 귀족들이 치열하게 싸워 힘으로 그 자리를 차지했고, 왕은 이를 제지하지도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 돌궐과 맞서느라 백제ㆍ신라의 통제력 약화

이즈음 고구려에게 커다란 위협이 닥쳤습니다. 북쪽 초원지대를 지배했던 유연제국이 새롭게 등장한 돌궐족에게 망하고 만 것입니다. 유연은 고구려와 사이좋게 지냈는데, 돌궐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551년 돌궐은 군대를 이끌고 고구려의 신성을 향해 공격해 왔습니다. 성은 포위됐지만 고구려군이 강하게 방어하자 돌궐의 군대는 백암성으로 공격 목표를 바꾸었습니다. 고구려에서는 고흘 장군에게 1만 군대를 딸려 보내 돌궐군을 공격하게 했고, 이 때 적군 1000 명을 죽이거나 포로로 잡았습니다.

돌궐의 침략은 그러나 고구려로 하여금 많은 군대를 북쪽에 배치하게 했습니다. 고구려와 돌궐은 두 나라 사이에 있는 거란족ㆍ말갈족의 통제권을 놓고도 여러 차례 전쟁을 했습니다. 이 때 고구려는 동쪽 진출을 막고 북쪽으로 더욱 진출했습니다. 북쪽 국경의 안정과 거란ㆍ말갈ㆍ실위족 등에 대한 통제력의 유지는 고구려가 대국의 위상을 유지하는 데 가장 중요한 문제였던 것입니다.

▲ 한강 유역은 빼앗기고 돌궐에겐 승리

고구려의 어려운 상황을 주변에 있던 백제와 신라가 모를 이유가 없었습니다. 마침 두 나라에는 성왕과 진흥왕이란 뛰어난 왕이 있었습니다. 백제와 신라는 힘을 합쳐 함께 고구려를 공격해 왔습니다. 이후 백제는 한강 하류의 6 개 성을 차지하고, 신라는 한강 상류의 10 개 성을 차지합니다. 고구려는 순식간에 지금의 경기도와 강원도 일대의 넓은 땅을 빼앗겼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고구려는 돌궐뿐만 아니라 서쪽에 있는 북제와도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남쪽에만 힘을 쏟을 수만 없었습니다.

이즈음 신라가 고구려에게 평화 제의를 해 왔습니다. 고구려는 신라와 평화 조약을 맺는 대가로 신라의 한강 유역 점령을 인정했습니다. 그러자 신라는 553년 백제를 공격하여 한강 하류를 빼앗았습니다. 백제는 신라를 공격하다, 성왕이 신라군에게 죽임을 당합니다. 결국 가장 약했던 신라가 삼국간 경쟁에서 가장 중요한 한강 유역을 모두 차지하게 됩니다. 이 때의 전쟁으로 세 나라는 이전과 달리 보다 치열하게 싸우게 되었고, 이것이 결국에는 신라의 삼국통일이란 결과로 이어지게 됩니다.

고구려는 비록 남부 영토를 빼앗겼지만, 백제와 신라가 서로 싸우도록 해 남쪽 국경에서의 전쟁을 멈추게 됩니다. 이를 바탕으로 북쪽에 힘을 쏟아 돌궐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동북아의 강자의 위치를 지켜 냈습니다. 이처럼 고구려가 백제와 신라에게 한강 유역을 빼앗긴 것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고구려는 너무 많은 문제를 한꺼번에 모두 해결할 수는 없었지만, 가장 중요한 사건부터 처리하면서 위기를 극복해 나갔던 것입니다.

 
■ 고구려의 새로운 수도 장안성
고구려의 마지막 수도였던 장안성의 칠성문. 성벽이 웅장하다. 

고구려는 신라가 수도인 평양과 가까운 한강 유역과 함흥 평야를 차지함에 따라, 수도를 더욱 튼튼히 방어해야 할 필요성이 생겼습니다. 이에 따라 고구려는 35 년 간에 걸친 대규모 공사를 거쳐 튼튼한 장안성을 만들고 586년에 수도를 옮깁니다. 이 장안성은 기존의 안학궁성과 가까운 현재의 평양시 중심지에 위치합니다. 당나라 대군의 공격도 막았던 고구려 최대의 성(城)입니다.
 

평강 공주와 온달 이야기로 본 고구려
능력 위주로 인재 등용, 노력하면 '인생 역전' 가능

울보 공주 평강과 바보 온달 이야기를 들어 보았나요? 바보 온달이 평강 공주와 만나서 결혼하고, 뛰어난 무사가 돼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이야기 말입니다. 이 이야기 속에 담겨진 고구려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알아 보도록 할까요.


온달이 신라군에 맞서 싸우다가 죽은 충북 단양의 온달 산성. 

▲ "너무 울어서 바보 온달에게 시집 보내야겠다"

온달은 가난한 백성이었습니다. 그는 밥을 빌어다가 장님인 늙은 어머니를 봉양하며 살았습니다. 떨어진 옷과 신을 신고 평양 시내를 다니면서도 늘 명랑했기에 사람들은 그를 ‘바보 온달’이라고 불렀습니다. 한편 고구려 25대 평원왕에게는 울보 공주가 있었습니다. 왕은 공주에게 ‘너는 너무 잘 울어서 나를 시끄럽게 하니, 귀족의 아내는 될 수 없고 바보 온달에게나 시집 보내야겠다.’고 자주 놀렸습니다.

공주가 16 세가 되자, 왕은 귀족인 상부 고씨에게 시집 보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공주는 ‘아버님이 항상 저를 온달의 아내가 된다고 했는데, 이 무슨 말입니까. 저는 그렇게 결혼할 수 없습니다.’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아버지의 미움을 산 공주는 보물 팔찌 수십 개를 팔꿈치에 매고 궁궐을 나와 혼자서 온달을 찾아갔습니다. 공주는 왕인 아버지의 말을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당당하게 거부하고, 자신의 의지대로 새 인생을 찾은 것입니다.

장님인 온달의 늙은 어머니는 공주를 가까이서 만나 보고는 ‘그대의 냄새를 맡으니 향기가 보통이 아니고, 손을 만지니 부드럽기가 솜과 같으니 천하의 귀한 사람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볼 때 당시 고구려 여인들도 향수를 비롯한 화장품을 사용했었습니다.

▲공주는 가져온 귀중품 팔아 온달의 집 일으켜

평강 공주는 금팔찌를 팔아 논과 밭ㆍ집ㆍ소ㆍ말ㆍ가구ㆍ노비까지 샀습니다. 이 때 공주는 온달에게 나라에서 쓰는 말을 사고, 시장에서 파는 말을 사지 말라고 할 정도로 생활에 필요한 경제 정보까지 모두 알고 있을 정도였습니다. 즉, 공주였지만 그저 아무것도 모른 채 곱게만 자란 것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당시 고구려 시장에는 없는 물건이 없을 정도로 번창했었습니다. 국가에서도 시장에 물건을 내다 팔았고, 노비도 거래될 정도였지요.그리고 상거래에는 금과 은ㆍ베 등이 주로 사용되었습니다. 한편, 온달은 느릅나무 껍질을 벗겨 식량을 삼을 정도로 가난했습니다.그래서 한때 시장을 돌아다니며 구걸도 했지요. 이처럼 고구려에서는 부자와 가난한 사람간의 경제적ㆍ신분적인 차별이 매우 컸습니다.


북한 학계에서 온달과 평강 공주의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는 진파리 4호분. 

▲온달은 공주의 도움으로 무사로 성장

온달은 공주와 결혼한 이후, 사람이 변하여 뛰어난 무사로 성장했습니다. 매년 3월 3일 낙랑 언덕에서 열리는 사냥 대회에 나가 온달은 왕이 보는 앞에서 당당히 1등을 차지했습니다. 온달은 이를 계기로 장군이 돼 후주와의 전쟁에서 선봉장으로 출전합니다. 그리고 큰 공을 세워 평원왕에게 정식 사위로 인정 받고 또 높은 벼슬도 얻게 됩니다.

하지만 아무리 공주와 결혼했다고 하더라도, 온달 자신이 큰 공을 세우지 못했다면 왕의 사위로서 인정 받기는 무척 어려웠을 것입니다. 즉 고구려 자체가 능력 위주로 인재를 등용하는 나라였고, 따라서 신분이 낮았던 온달도 벼슬길에 나갈 수 있는 길이 열려 있었던 것입니다. 590년 영양왕이 왕위에 오르자, 온달은 왕에게 자신에게 군대를 준다면, 신라에게 빼앗겼던 한강 북쪽의 땅을 되찾아오겠다고 건의를 했습니다.

▲노력으로 신분 뛰어넘은 고구려인의 상징

온달은 전쟁에 나가기 전 공주에게 다짐했습니다. “조령과 죽령까지의 땅을 모두 귀속시키지 못하면 결코 돌아오지 않겠소.” 온달은 그러나 아단성에서 신라군과 맞서다 화살에 맞아 죽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장례를 치르고자 했는데, 시신을 넣어둔 관이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이에 공주가 관을 어루만지면서 “이제 죽고 사는 것이 결정되었으니 돌아갑시다.”라고 하자 관이 움직였다고 합니다. 이는 고구려 사람들이 얼마나 옛 땅을 되찾고자 하는 열망이 강한가를 말해줍니다. 또한 공주의 말에서 고구려인의 삶에 대한 태도도 엿볼 수 있습니다.

온달은 비록 비천한 신분에서 태어났지만, 열심히 노력해서 나라에 공을 세우고, 임금님께도 인정 받는 왕의 사위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뜻을 다 이루지 못하고 죽은 비극의 주인공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온달을 고구려 백성들의 영웅으로 오래오래 기억해 왔습니다. 다시 말해 고구려 사람들은 온달이 공주를 만나서 자신의 운명을 바꾼 행운아로 보기 보다는, 자신의 부단한 노력으로 신분마저 뛰어넘은 고구려인의 상징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지금도 온달이 죽었던 온달산성이 있는 충북 단양군에서는 해마다 온달 축제를 개최해 그의 뜻을 기리고 있습니다. 


살수대첩 승리로 이끈 을지문덕 장군
지혜로운 '청야 전술'로 수양제 30만 대군 대파


‘출렁이며 흐르는 저 푸른 살수에/
수나라 백만 대군 장사 지냈지./
낚시꾼 나무꾼들 신나는 말이/
그까짓 대국 놈들 별 것 아니로구나!’

조선을 세우는 데 큰 공을 세운 조준이 청천강이 내려다보이는 누각에서 명나라 사신 축맹과 더불어 술을 마시며 지은 시입니다. 조준은 이 자리에서 옛날 조선의 조상인 고구려 을지문덕 장군이 명나라의 조상인 수나라 백만 대군을 물리친 살수대첩을 시로 읊어, 큰 나라라고 우쭐대는 명나라가 조선을 얕잡아 보지 못하게 했던 것입니다.

이렇듯 을지문덕 장군이 수나라 대군을 물리친 살수대첩은 우리 역사에서 큰 자랑거리 중 하나입니다. 그래서 조선 시대에서도 영양왕과 을지문덕 장군에게 제사를 지내며 자랑스런 조상을 잘 대접해 주었습니다. 오늘은 살수대첩이 일어난 과정을 알아 보고 고구려가 어떻게 수나라를 이길 수 있었는지를 살펴볼게요.

▲ 수나라 등장으로 고구려에 큰 위기 닥쳐

광개토태왕이 임금에 오른 후 고구려는 몽골 초원의 유목제국, 양자 강 이남의 한족 왕조, 황하 유역의 선비족 등이 세운 호족 왕조와 더불어 동아시아의 4대 강국으로 번영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200 년 동안이나 평화롭던 고구려에게 위기가 닥쳤습니다. 바로 581년 건국한 수나라의 등장이었습니다.

수나라의 문제는 양자 강과 황하 유역의 북제, 진 등을 통합해 강력하고 거대한 제국을 건설했습니다. 게다가 유목제국인 돌궐마저 굴복시켰습니다. 한 나라가 지나치게 강해지면, 주변의 나라들은 생존의 위협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고구려도 마찬가지로 수나라로 인해 큰 위기 의식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언젠가 수나라와 전쟁을 해야만 할 것이라면, 앉아서 기다릴 필요가 없겠지요. 고구려 영양왕은 598년 자신이 직접 말갈 군사 1만을 거느리고 수나라의 동쪽 전진 기지인 영주를 공격했습니다. 수나라는 즉시 30만 대군을 동원해서 고구려를 공격했습니다. 그러나 고구려군은 수나라 군대가 요하에 이르지 못하게 만드는 등 적을 물리쳤습니다.

마침내 598년 고구려와 수나라의 1차 전쟁은 고구려의 승리로 끝났고, 수나라의 문제는 더 이상 고구려와 전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아버지 수문제와 형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수양제는 온 세상이 자신의 발 밑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야심가였습니다. 그는 대운하를 건설했으며 만리장성을 보수하는 등 백성들을 괴롭혔습니다.

▲ 수양제의 대군을 청야 전술로 크게 무찔러

그런 그에게도 한 가지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고구려였습니다. 마침내 수양제는 612년 무려 113만 3800 명의 대군을 동원해 고구려를 공격해 왔습니다. 아버지가 못 이긴 고구려를 이기겠다는 욕심, 고구려를 굴복시켜 천하의 지배자가 되겠다는 야망이 전쟁을 일으키게 했던 것입니다.


삼실총에 그려진 고구려 군대가 수나라 군을 공격하는 모습. 용맹스러움이 넘친다. 

하지만 고구려는 요하 전투ㆍ요동성 전투ㆍ평양성 전투 등에서 수나라 군대를 계속 격파했습니다. 수양제는 화가 나서, 정예병 30만 5000 명으로 하여금 곧장 고구려 수도인 장안성을 공격하도록 지시했습니다. 이 때 수나라 정예병을 대적한 사람이 바로 을지문덕입니다. 그는 적의 군량이 부족해 상당히 지쳤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적과 싸우며 지는 척을 했습니다. 대신 수나라 군대가 가는 길에는 식량을 한 톨도 얻지 못하게 들판을 비워 두는 청야 전술을 폈습니다. 즉, 수나라 군대가 지나는 지방의 모든 시설과 양식을 불태우고 고구려인을 대피시켰던 것입니다.

수나라 군대는 고구려의 꾐에 빠진 줄 모르고 계속 깊숙이 진격해 왔습니다. 하지만 군량 보급이 안 되고 또 현지에서 식량도 얻지 못하자 수나라 군대는 고구려 수도 인근에 이르러 지치고 말았습니다. 그제서야 꾐에 빠짐을 안 수나라 군대가 후퇴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때를 놓치지 않고 을지문덕 장군은 총 공격을 명령했습니다. 고구려군은 도망가는 적들을 살수(지금의 청천강)에서 거의 전멸시켰습니다. 30만 5000 명 가운데 살아 돌아간 병사가 겨우 2700 명뿐이었습니다. 세계 전쟁사에서 이 같은 대승은 쉽게 찾아 보기 어렵습니다.

▲ 살수대첩은 고구려인 모두의 정신력 승리

살수대첩의 결과 수나라는 크게 패했습니다. 이후 613년과 614년에도 30만 명의 군사를 보내 고구려를 공격했지만, 역시 이기지 못했습니다. 수나라는 결국 고구려 공격의 실패로 인해 멸망의 길로 들어섭니다. 이처럼 을지문덕 장군의 살수대첩은 우리 역사에서 길이 남을 큰 승리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점은 살수대첩에서 쓴 청야 전술이 고구려 사람들이 서로 믿고 적을 돕지 않아야 승리할 수 있는 작전이었다는 것입니다. 만약 배신자가 생겨 수나라 군대가 식량을 구할 수 있었다면, 고구려는 결코 이길 수 없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고구려가 수나라를 이긴 것은 을지문덕 장군만의 공이 아니라 적을 물리치겠다는 강한 정신력을 지닌 고구려인 전체의 승리였던 것입니다.


당나라와의 대전쟁
연개소문 "자유를 억압하는 세력은 용납하지 않는다"
30 년 간 줄기찬 공격 맞서 승리 또 승리


당나라 육ㆍ해군의 줄기찬 공격을 막아 내 고구려의 승리에 일조했던 둘레 7 km의 거대한 성인 건안성. 

고구려가 당나라와 치른 전쟁은 우리 역사상 가장 큰 전쟁입니다. 또 동아시아 역사를 바꾼 대전쟁입니다. 당나라는 당시 세계 최강의 나라였고, 고구려도 수나라를 물리친 자부심 강한 나라였습니다. 두 나라의 대결은 30 년 간 이어졌고, 특히 645년 1차 전쟁은 고구려의 승리로 오래 기억되어 왔습니다.

▲ 당 태종 이세민, 고구려 멸망 야심

618년 수나라가 멸망한 후 등장한 당나라는 처음엔 고구려와 평화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626년 형과 동생을 죽이고 아버지를 핍박해 임금의 자리에 오른 당 태종 이세민은 달랐습니다. 그는 수양제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못된 행동을 감추기 위해,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전세계를 자신의 발아래 두려는 야심을 키우고 있었습니다. 더욱이 당나라는 642년경에 이르러 고구려를 제외한 주변의 거의 모든 나라를 굴복시킬 만큼 국력이 강해져 있었습니다.

당나라의 위협이 점점 커지는 상황에서 고구려 영류왕은 전쟁보다는 평화를 원했습니다. 이를 위해 그는 당나라의 무리한 요구도 들어 주었습니다. 하지만 연개소문은 이러한 영류왕의 정책에 반대했습니다. 마침내 642년 9월 연개소문은 영류왕과 몇몇 귀족들을 죽이고 권력을 쥐었습니다. 연개소문은 고구려의 자유를 억압하는 어떤 세력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 고구려군, 잇달아 당나라군 격파

두 나라는 마침내 전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644년 연개소문은 군사를 보내 당나라의 전진 기지를 공격하기도 하고, 요동 지역의 여러 성도 보다 튼튼히 수리했습니다. 645년 당나라는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로 공격해 왔습니다. 그런데 전쟁 초기 당나라 대군의 공격을 받자 개모성과 비사성ㆍ요동성ㆍ백암성 등 여러 성이 함락되고 말았습니다. 특히 요동성은 수나라 100만 대군도 함락시키지 못한 중요한 성이었기에 고구려의 충격은 더욱 컸습니다.

하지만 고구려의 반격도 만만찮았습니다. 먼저 국내성ㆍ오골성 등 후방의 성에서 군사를 뽑아 당나라 군이 고구려 내부로 진격하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특히 요동 지역에서 고구려 내부인 압록강 일대로 진격하기 위해 반드시 넘어야 할 천산산맥을 당나라 군이 끝내 넘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당나라가 노리던 주요 성인 신성과 건안성에서도 당군을 거듭 격파했습니다. 또 요동반도 남단의 비사성을 함락시킨 당나라 해군이 압록강 방면으로 공격해 오는 것도 고구려 해군이 막아 냈습니다. 군량 보급을 책임질 당나라 해군이 진격하지 못하자, 당나라 육군도 고구려 내부로 진격하지 못했습니다.


늪지대인 요택. 이 곳에서 당나라 군대는 엄청난 패배를 맛보았다. 

▲ 당나라 군, 안시성 줄기차게 공격

당나라의 군대는 충분한 식량과 공격 기지를 차지하기 위해 안시성을 줄기차게 공격해 왔습니다. 연개소문은 고정의로 하여금 병사 15만을 보내 당나라 군과 맞서게 했습니다. 그런데 선봉장인 고연수와 고혜진이 첫 전투의 승리에 자만해, 적진 깊숙이 들어갔다가 도리어 패배하고 포로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고구려의 군대는 곧 당나라 군대를 포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요동성 북쪽의 신성과 안시성 남쪽의 건안성, 그리고 뒤쪽의 요하 등 사방으로 당나라 군을 둘러싸기에 이릅니다. 고구려군은 당나라의 식량 보급을 차단하면서, 당나라 군대가 지치기 만을 기다렸습니다. 당나라는 이 상황을 극복코자 안시성 공격에 매달렸지만, 고구려 군인은 철저히 지켜 냈습니다. 그리고 당의 군대가 안시성 성벽을 넘기 위해 만든 흙 산이 무너지고, 이를 고구려군이 빼앗자 당나라 군대의 사기는 떨어졌습니다.

▲ 30 년 동안의 전쟁 승리로 이끌어

결국 고구려의 포위 작전에 말려 식량마저 부족해진 당나라는 9월 18일에 서둘러 철군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고구려군의 포위로 인해 편안한 길로 가지 못하고, 늪지대인 요택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곳에서 당나라 군의 소와 말 70∼80 %가 죽고, 수만의 군사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당태종도 요택에서 병들었고, 겨우 목숨만 건져 도망갈 수 있었습니다.

결국 고구려는 당나라를 물리치는 승리의 기쁨을 누렸고, 당나라는 처참한 패배를 맛보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당태종은 고구려에 패한 것을 인정치 않고, 647년과 648년에도 공격해 왔지만 다 실패했습니다. 하지만 당나라는 고구려에 대한 야심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660년 백제를 멸망시킨 여세를 몰아, 661년 100만 대군을 동원해 고구려를 공격해 왔습니다. 연개소문은 662년 2월 사수에서 적의 주력군을 전멸시켰고, 이로 인해 당나라는 다시 패배했습니다.

고구려가 당나라를 물리친 이 사건은 우리 역사의 큰 자랑거리입니다. 아쉬운 것은 우리 기록이 부족해 이 전쟁의 자세한 상황과 의미가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못한 점입니다. 지금부터라도 세계인에게 고구려의 바른 역사를 널리 알리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고구려 유목민족들과의 만남
각기 다른 삶의 방식 존중… 적국과의 전쟁 땐 서로 도와

우리가 생각하는 고구려인들은 대륙을 호령하며 활보하는 용감한 모습입니다. 이 같은 이미지는 말을 타고 초원을 달리며 양과 말을 키우며 떠돌아다니는 유목민과 많이 닮았습니다. 고구려 주변에는 흉노ㆍ선비ㆍ거란ㆍ유연ㆍ돌궐ㆍ실위를 비롯한 여러 유목민이 시대를 달리하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고구려와 깊은 영향을 주고받았습니다. 그럼, 고구려와 유목민의 관계는 어땠을까요?


백암성. 고구려군과 돌궐군이 싸웠던 역사의 현장이다. 

▲ 선비족은 후한과의 전쟁 때 활용

고구려 2대 유리명왕은 서기 전 9년에 선비족을 공격해 이들을 굴복시킨 바 있었습니다. 고구려는 이후 서기 49년까지 농경 국가인 후한과 전쟁을 할 때 선비족을 활용했습니다. 고구려가 후한 땅 깊숙이 쳐들어가고, 포로를 많이 잡을 수 있었던 것은 기동성이 뛰어난 선비족 군대를 잘 활용했기 때문입니다.

광개토대왕은 395년 유목민인 거란족 부락을 공격해 이들을 굴복시켰습니다. 이후 거란족에 대한 고구려의 통제력은 매우 강해졌습니다. 고구려는 거란족을 이용해서 북중국을 지배했던 북위의 변방을 수시로 공략하기도 했습니다. 또 600년 경에는 거란족을 이용해 수나라의 해안 기지를 공격하기도 했고, 거란족에 대한 통제력을 놓고 당나라와 650년대에 치열하게 전쟁을 했습니다. 거란족의 일부는 고구려가 멸망할 때까지 운명을 같이하기도 했습니다.

▲ 유연과는 북위 견제하며 힘 합쳐

사냥과 가축 키우기가 중요한 생업이었던 말갈족은 건국 직후부터 꾸준히 고구려인이 포섭해왔던 대상이었습니다. 영양대왕은 말갈군 1만 명을 이끌고 수나라 전진 기지인 영주를 공격한 적이 있었습니다. 말갈 장수 생해는 고구려를 위해 신라의 북한산성을 공격하기도 했습니다.


고구려의 석대자산성. 유목민들은 심양시에 있는 이 성처럼 튼튼한 성벽을 결코 넘을 수 없었다. 

실위족은 고구려가 부여를 통합하면서 만나게 된 북쪽에 사는 유목민 입니다. 이들은 자체에서 철이 생산되지 않아 고구려에게 철을 의지해야 했습니다. 고구려는 실위족뿐만 아니라 거란족에게도 철을 수출하면서 이들을 고구려를 돕는 세력으로 만들었습니다. 백제와 신라ㆍ가야 그리고 왜국과 같은 남쪽의 나라와 후한ㆍ위ㆍ북위ㆍ수ㆍ당과 같은 서쪽의 나라들은 고구려와 많은 관련을 가졌습니다. 이에 못지않게 북서쪽의 흉노ㆍ선비ㆍ유연ㆍ돌궐ㆍ설연타ㆍ철륵 등과도 시대를 달리하며 고구려와 깊은 관련을 가졌습니다.

특히 유연은 5∼6세기에 고구려의 우방으로 북중국의 북위를 견제하는데 서로 힘을 합쳤습니다. 고구려는 유연과의 평화관계를 기반으로 초원길을 말을 타고 달려 멀리 서역의 나라와 교류를 하기도 했습니다. 또 서로 협력하여 양국 사이에 좋은 말을 생산하는 지두우를 분할하여 서로 나누어 갖기도 했습니다. 돌궐은 고구려와 전쟁을 하기도 했지만, 수나라가 등장하자 서로 사신을 왕래하며 도움을 주고받을 것을 모색하기도 했습니다. 돌궐인이 남긴 비석에는 고구려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어 두 나라간의 밀접한 관계가 있었음을 알려 주기도 한답니다.

645년 당나라와 전쟁을 하던 고구려는 설연타에 사신을 보내 당나라를 견제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설연타는 곧 대군을 보내 당을 공격했고, 당나라는 이들을 막기 위해 서둘러 고구려에서 군대를 철수하기도 했습니다. 철륵의 경우도 비슷합니다. 661년 고구려와 당나라가 전쟁을 하는 도중, 철륵은 당나라와 전쟁을 시작합니다. 따라서 고구려를 공격하던 당나라 군대의 일부가 철륵을 막기 위해 급히 철수를 하게 됩니다.

▲ 유목민의 탁월한 기동력 이용

고구려는 이처럼 유목민들과 때로는 연합하고 때로는 일부 부족들을 세력권 안에 두고 활용해 적국과 싸우기도 했습니다. 특히 유목민 기병은 탁월한 기동력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에 서쪽의 수ㆍ당과 싸울 때 큰 힘이 되었습니다. 고구려가 강했던 것은 단지 고구려 혼자의 힘만이 아니라, 이웃들의 힘도 적절히 활용할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고구려인들은 유목민이 강대해져서 고구려를 위협할 것에 대비해 말 타고 활쏘기를 열심히 훈련하기도 했습니다. 우씨왕후의 사례에서 보이는 형사취수제라는 결혼 풍습, 하늘에 제사를 지내며 나라 사람들이 함께 모여 춤추고 노래하며 신을 맞이하는 제천 행사, 윗옷을 왼쪽으로 여미고 바지를 입는 복장 등은 모두 북쪽 유목민과 비슷한 풍습들입니다. 또 동복ㆍ각배 등 유목민이 사용하던 식기류가 고구려에서도 발견됩니다.

고구려와 유목민의 관계에서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고구려가 거란 등을 억압하기보다는 그들의 삶의 방식을 존중해 주고 공존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이 고구려의 편에 서서 끝까지 고구려를 도운 것입니다. 만약 고구려가 이들을 억압하기만 했었다면, 이들은 고구려에게 등을 돌리고 적이 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왜 고구려는 멸망했나요?
안으론 분열, 주변국 공격 대비는 소홀

동아시아를 호령했던 고구려가 왜 멸망했을까요? 만약 고구려가 지금까지 존재했다면 우리 역사는 크게 달라졌겠지요. 하지만 고구려는 멸망했습니다. 오늘은 고구려가 왜 멸망했는지, 우리는 여기서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지 생각해 볼게요.


조양 시. 과거 유성이라 불렸던 이 곳에 고구려 사람들이 많이 끌려가 살았다. 이들 중 걸걸중상과 대조영 부자가 나타나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를 세웠다. 


▲ 연개소문 가문의 세습ㆍ독재로 나라 어려워져

고구려 멸망의 첫 번째 원인은 세습 독재 체제 때문입니다. 연개소문은 645년과 661년∼662년에 있었던 당나라 대군의 침략을 거듭 물리치고 고구려를 지킨 위대한 영웅입니다. 그는 병법 등 군사 문제에 있어서 능력이 뛰어난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과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영류왕과 많은 대신들을 죽였습니다. 또 자신을 지지하는 인물 위주로 정치를 이끌었기 때문에, 다양한 의견들이 무시되었습니다. 따라서 여러 사람의 지혜를 모으는 데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가 죽자 남생ㆍ남건ㆍ남산 세 아들이 권력을 나뉘어 가졌습니다. 그러자 권력에서 소외된 사람들은 외국으로 탈출하는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독재 권력이 20 년 이상 지속되면서 권력자들은 점점 부패에 물들었습니다. 능력이 부족한 남생이 단지 연개소문의 큰아들이란 이유로 지도자가 되자, 정치는 크게 어지러워졌습니다. 독재 권력이 결국은 고구려를 쇠약하게 한 중요 원인이 된 것입니다.

▲ 형제간의 다툼과 배반으로 몰락의 길

두 번째 원인은 내분과 배반입니다. 당나라와 신라가 연합해서 고구려를 공격하려는 시점에서도 고구려 내부에서는 권력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아버지에 뒤이어 대막리지(고구려 말 행정과 군사권을 가진 최고의 관직)에 오른 남생은 얼마 후, 지역 순방에 나섰습니다. 이 때 동생인 남건ㆍ남산에게 형을 믿지 말라고 꼬드기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남생 역시 두 동생을 믿지 못했고, 결국은 두 세력 간에 내란이 생겼습니다. 이 전쟁은 고구려의 중요 지역에서 크게 벌어졌습니다. 이로 인한 국력의 손실도 매우 컸습니다.

게다가 고구려 최고 지도자였던 남생이 동생과의 싸움에서 패하자, 적국인 당나라에 자신을 도와 달라고 부하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당나라가 자신을 돕겠다고 하자, 남생은 666년 6월에 나라를 배반하고 당나라에 투항했습니다. 당나라와 신라는 남생이 가져온 최고의 정보를 이용하고, 내란으로 힘이 약해진 고구려의 허점을 최대한 이용했습니다. 100만 대군이 협공을 해 오자, 마침내 668년 9월 26일 고구려는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힘을 합쳐 적을 물리치던 과거의 고구려라면 쉽게 멸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연개소문은 자식들에게 “너희 형제는 고기와 물과 같이 화합하여 작위를 다투는 일을 하지 말아라. 만일 그런 일이 있으면 반드시 이웃들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고 유언을 남긴 바 있었습니다. 하지만 못난 자식들이 서로 싸운 탓에 나라까지도 멸망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허물어져 가는 백암성. 나라가 망하면 그들이 남긴 유적도 허물어져 간다. 

▲ 주변 정세 변화에 대한 늦은 대응

고구려 멸망의 세 번째 이유는 무엇보다 변화에 대한 대응이 늦었다는 점입니다. 고구려는 주변의 변화를 정확히 이해하고, 제대로 대응하면서 나라를 발전시켜 왔었습니다. 하지만 5∼6세기와 달리 동아시아에는 강력한 신흥제국 당나라가 들어섰습니다. 당나라는 아주 치밀하게 고구려를 상대했습니다.

당나라는 혼자 힘만으로 고구려를 이기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신라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였습니다. 또 고구려의 요동 방어망이 워낙 튼튼해 공략하지 못하자, 바다를 통해 고구려를 공격했습니다. 이 때 고구려의 중요 농경지를 크게 파괴했습니다. 또 거란족ㆍ말갈족 등 고구려의 영향을 받는 족속들을 끝없이 꾀어 내어 고구려를 약화시켰습니다. 하지만 고구려는 다양한 대비책을 세우지 못한 채, 성벽을 더욱 높이 쌓으며 당나라에 대한 무력 대응에 치중했습니다.

그럼에도 요동의 굳센 성 방어만을 믿고서 당나라 해군의 공격이나, 신라가 공격해 올 것에 대한 대비에는 다소 소홀했습니다. 또 백제ㆍ왜국ㆍ유목의 제국들과는 고구려를 돕는 구체적인 협조 체제도 갖추지 못했습니다. 그 밖에 오랜 전쟁으로 농사지을 땅이 못 쓰게 돼 백성들이 가난해진 것도 고구려 멸망의 한 원인이 되었습니다. 만약 남생 형제의 내분이나 반란, 독재 정권의 나쁜 점들이 없었고 주변 세상의 변화에 보다 철저하게 대비했다면 고구려의 운명도 달라졌을지 모릅니다.

누구나 그렇듯이 실수는 있고, 잘못을 저지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잘못을 통해 다시는 그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겠다는 교훈을 얻는 것이겠지요. 지금 남보다 앞서 가더라도 나쁜 습관에 빠지고, 자만하며 게을러진다면, 그의 미래는 도리어 남보다 뒤쳐질 것입니다. 고구려도 당나라를 이겼다고 자만하다가 멸망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소중한 경험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고구려는 살아 있습니다
부흥 의지 계속 이어져 발해·고려로 부활
"우리가 역사를 옳게 계승하고자 할 때 고구려는 영원히 죽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고구려 역사 기행을 마칠 시간이 되었군요. 지금까지 고구려사의 중요한 흐름과 고구려의 여러 특징 들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지난 주 고구려의 멸망 이야기를 쓰고 나니 못내 아쉬움이 남습니다. 고구려가 당과 신라 연합군에 의해 멸망한 후, 고구려는 완전히 사라지고 잊혀진 것일까요?

 

최근에 발굴된 아차산 홍련봉 1보루. 


▲ 668년 멸망 후 고구려 부흥을 위한 전쟁 시작

고구려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당나라에 끌려가고, 일부는 신라인이 되었습니다. 또 전쟁을 피해 일부는 돌궐과 일본 등지로 이주를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고구려 옛 땅에는 그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남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고구려를 세울 준비를 했습니다. 668년 고구려가 공식적으로 멸망은 했지만, 신성ㆍ요동성ㆍ안시성ㆍ북부여성 등 고구려 대부분의 성들은 여전히 당과 신라 연합군이 점령하지 못했습니다. 고구려 사람들은 이 성들을 중심으로 고구려 부흥을 위한 전쟁을 시작했습니다.

669년 당나라 장군 이적이 당 고종에게 “압록강 이북에서 아직 항복하지 않은 성은 11 개 성이며, 도망간 성도 7 개나 됩니다. 당군이 공격하여 빼앗은 성은 3 개에 불과하며, 항복해 온 성은 11 개 성입니다.”라고 보고했을 정도로 고구려의 땅에는 당군의 힘이 제대로 미치지 못했습니다. 당나라는 고구려를 제대로 지배할 힘이 없었고, 그저 자신들을 위협하는 강한 세력을 제거하는 것에 만족했습니다. 당나라는 고구려 전역을 통치할 계획을 세우기도 했지만, 고구려인의 완강한 투쟁을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당나라 군대는 고구려의 동부 지역에는 전혀 나아가지 못했고, 겨우 요동에서 평야에 이르는 정도만을 점령할 수 있었을 뿐입니다.

▲ 당을 몰아내기 위해 신라와도 손잡아

홍련봉 1보루에서 출토된 연화문 와당. 이 유물에서 보듯 남한 지역에도 고구려의 숨결이 많이 남아 있다. 이제 고구려를 말로만 사랑할 것이 아니라, 이러한 고구려의 유적과 유물들부터 먼저 아끼고 잘 보존 관리해야 한다.  남의 지배를 받기 싫어한 고구려인들은 당의 군대를 몰아내기 위해 때로는 신라와도 손을 잡았습니다. 670년 3월 고연무가 이끄는 1만 명의 고구려 부흥군은 신라 설오유가 이끄는 1만 군대와 연합해 압록강 건너 옥골에서 당나라군을 크게 격파하기도 했습니다. 또 검모잠은 보장왕의 서자인 안승을 모셔다가 고구려 부흥군의 왕으로 삼고, 황해도 지역을 중심으로 큰 세력을 이루기도 했습니다.

그러자 당나라는 대군을 파견하여 고구려 부흥군을 공격했습니다. 게다가 안승이 검모잠을 죽이는 사건 등이 생기고, 안승이 신라에 의지하는 등 고구려 부흥군은 점차 약해졌습니다. 672년 백수성 전투, 674년 호로하 전투 등에서 당군과 맞붙었던 고구려 부흥군은 끝내 이기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고구려인의 강력한 투쟁 탓에 당나라는 겨우 요동성에 안동도호부를 두고 요동 지역만을 장악했습니다.

당은 요동을 다스리기 위해 고구려 마지막 왕인 보장을 요동주도독 겸 조선왕으로 삼아 이 곳에 파견했습니다. 그렇지만 보장왕은 당나라의 꼭두각시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고구려 사람들의 힘을 모으며 4 년 간 치밀하게 고구려를 세울 준비를 했습니다. 그는 고구려의 자존심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보장왕의 계획은 681년에 당나라에게 발각되어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 발해ㆍ고려 등 고구려의 계승 노력 이어져

고구려의 부흥 의지는 그러나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라,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마침내 698년 당나라에 끌려갔던 유민들이 탈출하여 다시 고구려 옛 터로 돌아왔고, 이들의 지도자였던 대조영이 마침내 고구려를 계승하는 발해를 건국할 수 있었습니다. 발해의 왕들은 스스로 고구려왕이라고 하였으며, 고구려의 옛 터를 대부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고구려는 망했지만, 이처럼 끝없는 생명력으로 부활했습니다.

고구려를 계승했던 발해로 부활했고, 고구려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한 고려로 부활했습니다. 고려의 서희는 고려가 고구려의 후계자임을 내세워 고려를 공격해 온 거란 군대를 되돌아가게 만들었습니다. 조선은 고구려를 선조의 역사로 높이 받들어 해마다 고구려 시조왕과 영양왕과 을지문덕 등에게 제사를 지냈습니다. 명나라도 조선이 고구려의 후계자인 만큼, 늘 경계하기도 했습니다. 고구려는 이후에도 우리 겨레의 정신 속에 뿌리 깊게 살아 있습니다. 우리가 고구려의 후손임을 잊지 않고, 그 역사를 옳게 계승하고자 할 때 고구려는 영원히 죽지 않을 것입니다.

최근 중국인들이 억지로 고구려사를 자기 나라의 역사라고 주장한다고 해도, 중국의 역대 사서에는 고구려를 자국의 역사라고 본 기억이 없습니다. 단지 영토에 대한 욕심 때문에 억지로 고구려를 자기 역사라고 주장할 따름입니다. 우리가 고구려를 영원히 살아 있는 역사로 만들려면, 그 어떤 나라 사람들보다도 고구려를 더 사랑하며, 제대로 알고, 이를 계승하려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한다면 고구려는 언제까지나 우리 곁에서 살아 숨쉴 것입니다.

김용만(우리역사문화연구소장)





고구려를 빛낸 10개의 명장면  


고구려를 빛낸 10개의 명장면

1. '하늘'과 '물'의 정령 주몽왕

북부여 땅을 탈출하여 추격하는 병사들을 따돌리며 내달리는 주몽 앞에는 시퍼런 강물이 굽이치고 있었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위기일발의 순간이었다. 숨 고를 틈도 없이 주몽은 활로 수면을 내리치면서 "나는 황천(皇天)의 아들이고 하백(河伯: 강의 신)의 외손자다. 나를 위해 다리를 놓아라"고 외치자, 물고기와 자라떼가 일제히 떠올라 다리를 놓았다. 주몽이 건너자 이들은 다시 흩어져 추격하는 병사들은 건너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하늘'과 '물'의 정령이 결합된 주몽은 왕자(王者)로서 초능력을 부여받았기에 시련을 통과하는 불사신의 신체를 획득하였다. 그랬기에 [광개토왕릉비문]에서는 그의 사망을 하늘이 황룡을 보내 맞아갔다고 설명했다. 요컨대 주몽은 고구려 건국을 위해 하늘의 대리자로서 지상에 내려왔고 그 사명이 끝나자 원향(原鄕)인 하늘로 다시 올라갔다는 이야기가 된다. 주몽왕의 도하설화는 사실 여부를 떠나 고구려인들에게는 긍지의 원천이기도 했다.



2. 사냥터에서 즉위한 미천왕

흉노의 묵특 선우가 가을의 대규모 수렵대회를 이용해서 부왕을 살해한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하다. 고구려에서 수상격인 국상 벼슬의 창조리도 그 기회를 이용하여 거사했다. 창조리는 가을에 폭군인 봉상왕이 후산(侯山) 북쪽으로 사냥 나갔을 때, 따르던 무리에게 "나와 마음을 같이 하는 자는 내가 하는대로 하라"면서 갈댓잎을 모자 위에 꽂았다. 그러자 모든 사람이 일제히 그렇게 하였다. 모자 위에 꽂는 갈댓잎은 일치의 상징으로 결사를 도모할 때 서약으로 이용되었다.

무리들이 자신의 뜻을 따라 마음이 일치한다고 확신한 창조리는 즉각 사냥터에서 봉상왕을 감금한 후 폐위하고 왕손인 을불(乙弗)을 즉위시켰다. 그가 바로 400년간 중국의 식민지였던 낙랑군과 대방군을 한반도에서 축출하는 미천왕이다. 사냥터는 때로는 왕위 계승이라든지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장소였거니와, 또 그와 같은 기능은 유목사회적 전통이었다. 고구려의 역동성을 확인해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3. 광개토왕의 백제 정벌

[광개토왕릉비문] 영락 6년조(396년)에 의하면 광개토왕이 직접 이끈 수군은 지금의 한강인 아리수를 건너 백제 왕성을 급습해서 항복을 받아냈다. 이때 백제왕은 영원히 비천한 노예가 되겠다고 광개토왕에게 맹세하였다. 아울러 백제왕은 남녀 노예 1,000명과 세포(細布) 1,000필, 그리고 왕의 아우와 대신 10명을 볼모로 바쳤다. 광개토왕은 나아가 백제의 58성과 700개의 촌락을 확보하였다. 광개토왕은 조부인 고국원왕이 백제군에 피살된 지 25년 만에 완벽하게 복수를 한 것이었다. 19세의 광개토왕이 한강 유역에 처음 진출해서 백제를 압박한 지 4년 만에 일단의 결산을 보게 되었다.

이때 고구려가 백제로부터 빼앗은 58성의 소재지는 대략 예성강에서 임진강선과 남한강 상류 지역으로 추측된다. 특히 백제로부터 확보한 남한강 상류 지역은 신라와 가야 지역으로의 진출이라는 원대한 남진(南進) 구도와 관련이 있다. 고구려는 이때 보급-수송 루트인 소백산맥 이북의 충주와 단양, 제천을 비롯한 강원도 내륙 지역을 장악했다. 영락 6년의 백제 정벌은 고구려 남진 경영의 기념비적인 사건이었다.



4. 중국의 왕을 살해하다

북중국의 강자인 북위(北魏)의 공격을 받아 멸망 직전에 있던 북연왕(北燕王) 풍홍(馮弘)이 고구려에 도움을 청하였다. 그러자 장수왕은 436년에 북위의 반대와 협박을 묵살하고 병사들을 보내 풍홍을 구출했다. 그로부터 2년 후에 풍홍이 망명객이 되어 고구려에 오자 장수왕은 사신을 보내 "용성왕 풍군(馮君)이 야외로 행차하느라고 군사와 말이 피로하겠습니다"라고 조롱하였다. 장수왕은 그러나 풍홍이 과거의 위세를 잊지 못하고 황제처럼 행세하며 교만하게 굴자 시종하는 인원을 대폭 줄이고 그 태자를 볼모로 잡았다.

이에 불만을 품은 풍홍은 남중국의 유송(劉宋)으로 망명하려 했다. 유송도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풍홍을 자국으로 보내라고 요청했지만, 장수왕은 오히려 풍홍과 그 손자 10여명을 죽였다. 아울러 장수왕은 풍홍을 맞으러 왔던 유송의 병사 7,000명도 생포하여 유송으로 압송하였다. 고구려의 눈치를 보던 유송 황제는 어쩔 수 없이 이들을 투옥했다. 남북조인 북위와 유송 사이에서 당당하게 처신하는 고구려의 자주적인 면모를 살필 수 있는 장면이다.

 

5. 국제적인 강국의 면모

5세기 후반 고구려의 영토는 서쪽으로는 요하선을 넘어 북중국의 북위와 대치하고 남쪽으로는 금강과 영덕을 잇는 선까지 내려왔다. 북쪽으로는 송화강 유역까지, 동쪽으로는 두만강 하구에 다다랐다. 즉 장수왕은 475년에 한성을 함락한 후 백제를 금강 유역까지 밀어붙였고 신라 땅에는 병력을 주둔시켜 강력한 지배권을 확립하였다. 게다가 고구려는 유목국가인 유연(柔然)과 더불어 대흥안령산맥 부근에 소재한 거란족의 일파인 지두우(地豆于) 분할을 시도하였으니 그 영향력은 몽골 고원지대까지 미쳤다. 이러한 배경 위에 484년에 북위에 파견되어 온 사신의 서열을 보면 남조인 남제(南齊)가 1위, 고구려가 2위를 차지하였다. 고구려는 동아시아와 북아시아 전역에서 북위 및 남제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강국으로 국제적인 인정을 받게 된 것이다. [책부원귀]에서 고구려의 강성과 관련해 이 구절을 언급했다. 489년에는 북위에 온 남제 사신이 고구려 사신과 동급으로 취급받는데 대해 불만으로 항의할 정도였다. 고구려의 국력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6. 안장왕의 로맨스

[삼국사기] 지리지 고구려조에 보면 지금의 경기도 고양시에 포함되는 왕봉현(王逢縣)과 달을성현(達乙省縣)이라는 2개 고을에 관한 기록이 잡힌다. 그런데 왕봉현과 달을성현 항목에는 이례적으로 짤막한 지명 유래가 담겨 있다. 즉 왕봉현은 "한씨 미녀가 안장왕을 맞이한 지역이라 왕봉으로 불렀다"라고 적어 놓았다. 달을성현은 "한씨 미녀가 높은 산마루에서 봉화를 올리고 안장왕을 맞이한 곳이기 때문에 뒷날 고봉(高烽)이라 이름하였다"라고 적혀 있다. 오늘날 고양시에 우뚝 솟은 고봉산의 봉수가 그것이다.

안장왕은 6세기 전반기에 재위한 고구려 제22대 국왕이다. 그는 남순(南巡)하여 한강 하류의 북안인 지금의 고양시 부근에서 한씨 미녀를 만나 일종의 로맨스를 남겼던 것 같다. 그랬기에 임금이 누구를 만났다는 뜻을 담은 '왕봉현'이라는 지명으로 그 사연이 실낱같이 전해지게 되었다. 냉혹하게만 느껴졌던 고구려왕의 인간미가 물씬 풍긴다.

 

7. 온달 장군의 전사

고구려 평원왕(재위 559~591년)의 사위로 전해지는 온달 장군은 고구려가 절치부심하던 한강 유역 회복을 위해 출정을 자원했다. 그는 떠나면서 "계립현(문경 새재의 동쪽에 위치한 하늘재)과 죽령(풍기 북쪽에 위치한 고개) 서쪽을 우리 땅으로 돌려놓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겠다"고 맹세하였다. 고구려 군대를 이끌던 온달 장군은 신라 군대와 지금의 충청북도 단양군 영춘면의 온달산성으로 짐작되는 아단성(阿旦城) 아래서 싸우다가 화살에 맞아 생을 마감했다.

그런데 온달 장군의 관을 운구하려는데 땅에서 옴짝달싹 않은 채 조금도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비보를 접하고 내려온 평강공주가 관을 어루만지면서 "죽고 사는 것은 이미 결정되었으니 이제 그만 돌아갑시다"라고 말하자 그제서야 관이 땅에서 떨어졌다고 [삼국사기]의 온달전은 전하고 있다. 비장하게 느껴지는 이 장면에는 서약의 중요성과 국토 수호에 대한 고구려인들의 결연한 의지가 서려 있다.

8. 물귀신 된 수나라 30만 대군

수양제는 612년에 1백13만여명의 군사를 동원해서 고구려를 침공해 왔다. 보급 부대까지 합치면 무려 3백만명에 이르는, 세계 전쟁역사에서도 유례가 드문 규모였다. 이때 고구려 대신 을지문덕이 수나라 진영에 가서 거짓 항복하는 체하고는 그 허실을 살피고 돌아왔다. 이후 을지문덕은 추격해 오는 수나라 군대에 거짓 패하여 수나라 군대를 피로하게 만들었다. 수나라 군대가 평양성 30리 되는 곳까지 이르자 을지문덕은 "신통한 전략은 천문(天文)을 꿰뚫고 기묘한 전술은 지리를 통달하였네, 싸움에서 이겨 공로가 이미 높으니 만족함을 알고 돌아감이 어떠하리"라는 내용의 오언시(五言詩)를 보내 적장을 희롱하였다. 수나라 장군 우문술은 을지문덕의 거짓 항복을 핑계 삼아 회군했다. 고구려군은 수나라 군대가 살수(청천강)에 이르러 반쯤 건넜을 때 후미를 급습하였다. 수나라 장군 신세웅을 비롯한 전군이 궤멸되었다. 30만5천명의 수나라 군대는 압록강에 이르렀는데 하루낮 하룻밤에 4백50리를 도망간 것이었다. 이들이 요동에 이르렀을 때 생환자는 겨우 2,700명이었을 정도로 참담하게 패했다.

 
 
9. '불세출의 영웅' 연개소문

귀족인데다 체구가 당당하고 성품도 호방한 연개소문에게 정치적 위협을 느낀 귀족들은 영류왕과 모의하여 그를 살해하려고 했다. 이러한 낌새를 포착한 연개소문은 642년에 반대파 귀족들을 초청한 후 주연장을 덮쳐 200명에 가까운 귀족들을 참살하였다. 이어 연개소문은 영류왕을 살해하고 그 조카를 왕으로 삼았다. 이후 그는 최고위직인 막리지가 되어 전권을 틀어쥐었다.

연개소문은 몸에 다섯 자루의 칼을 차고 있어 사람들이 감히 쳐다보지도 못하였다. 그는 말에 오르고 내릴 때면 귀족이나 장수들을 땅에 엎드리게 하여 발판으로 삼았고 외출할 때는 반드시 대오를 갖추었다. 앞에서 길라잡이가 긴 소리로 외치면 길거리에 나와 있던 사람들이 달아나면서 구덩이도 피하지 않았다. 가위 하늘을 찌를 듯한 위세였다. 노년에 이르러서도 그는 직접 당나라 장수 방효태와 그 아들 13명을 비롯해 전군을 몰살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연개소문은 당태종이 보낸 사신들을 토굴에 감금하기까지 하였다. 송나라 신종은 그러한 연개소문을 불세출의 영웅으로 평가했다.



10. 당태종도 손 든 안시성 전투

645년에 고구려를 침공한 당나라 군대는 지금의 중국 요녕성 해성(海城)에 위치한 안시성을 포위하였다. 안시성은 고립무원의 상황에 처하게 되었으나, 안시성주를 비롯한 병사와 주민들이 하나로 뭉쳐 굳세게 항전했다. 당나라 군대는 60여 일 동안 연인원 50만 명을 동원하여 높은 흙산을 쌓고, 이를 발판으로 삼아 성을 공격하였다. 당나라 군대는 하루에도 6∼7회의 공격을 가하고 마지막 사흘 동안은 전력을 다하여 공격했으나 끝내 함락시키지 못했다.

당나라 군대가 철수할 때 안시성주는 성 마루에 올라와 손을 모아 절을 하며 작별 인사를 하였다. 당태종은 비록 적군이지만 그가 성을 잘 지킨 것을 칭찬하면서 비단 100필을 선물하였고 또 임금 섬기는 절의(節義)를 격려하고는 황급히 철군했다. 당태종이 고구려를 침공하게 된 명목상의 이유는 신하로서 임금을 죽인 연개소문을 응징한다는 것이었다. 안시성주는 그러한 연개소문에게도 굴하지 않은 지사였다. 당태종의 야욕을 좌절시킨 안시성의 전승을 통해 우리 민족의 역사적 위상도 올라갔다.

이도학[한국전통문화학교 문화유적학과 교수]

출처 : keiti
글쓴이 : 세발까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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