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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김영랑 - `오-메, 단풍 들것네`

제봉산 2008. 10. 22. 07:47

'오-메, 단풍 들것네'

 

기사입력  2008-10-16 14:47

 

(서울=연합뉴스) 임형두 편집위원 = 예우치곤 아주 늦었다. 그가 한국문학을 대표하는 시인이라는 사실을 떠올리면 더욱 그렇다.

정부는 15일 서정시단의 거목 김영랑(1902-1950ㆍ본명 김윤식)에게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한다고 발표했다. 타계 58년 만이다.

김영랑은 한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 중 한 명이었다. 대표시 '모란이 피기까지는'은 애송시 5위 안에 드는 수작으로 꼽힌다.

이 작품뿐이던가. 투박한 사투리로 섬세하면서도 영롱하게 빚어낸 언어의 묘미는 우리 내면의 시심을 일깨워주곤 한다.

'오-메, 단풍 들것네'로 일반에 잘 알려진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이 계절에 썩 잘 어울린다.

남도의 곱상한 정서가 물씬 풍겨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오-메, 단풍 들것네 /

장광에 골 붉은 감닙 날러오아 /

누이는 놀란 듯이 치어다보며 / 오-메, 단풍 들것네 //

 

추석이 내일모레 기둘리니 /

바람이 자지어서 걱졍이리 /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 오-메, 단풍 들것네"

영랑은 서울에서 멀고도 먼 전라도의 강진 땅에서 태어났다.

500석지기 부자의 장남이었으니 부모가 얼마나 애지중지했을까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서울로 유학해 휘문고를 다녔고, 본가엔 정구장을 만들어놨을 정도였다.

선생은 축구같은 운동뿐 아니라 동서양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다.

아악에 심취하고 거문고에도 일가를 이뤘다고 하니 그의 작품에 맑은 시심이 선율처럼 곱게 흐르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고 하겠다.

"돌담에 소색이는 햇발가치 /

뜰 아래 우슴짓는 샘물가치 /

내 마음 고요히 고흔 봄길 우에 /

오날 하로 하날을 우러르고십다 /

 

새악시 볼에 떠오는 붓그럼가치 /

시의 가슴을 살프시 젓는 물결가치 /

보드레한 에메랄드 얄게 흐르는 /

실비란 하날을 바라보고십다"('내 마음 고요히 고흔 봄길 우에' 전문)

(햇빛이 비치는 돌담, 풀 아래의 맑은 샘터와 같은 자연 속, 즉 찬란한 봄날의 정격 속에서

시인의 심미적 탐구 자세가 매우 정감 있게 묘사되고 있다.

시를 하나의 생명체로 바라봄으로써 태어난 고운 시상과 시어의 조탁(彫琢), 탁월한 표현 기교 등

감정을 거르고 걸러서 도달한 순수 시정의 극치를 보여주는 김영랑의 대표작의 하나이다.

여기서는 사람의 희노애락(喜怒哀樂)의 일체가 씻기어 나가고 오직 자연의 서정만이 아름답게 반짝인다.
시어 하나하나가 섬세·미묘하게 조탁(彫琢)되어 기묘한 뉘앙스를 지니고 반짝인다.

'새악시'는 '새색시'의 방언이지만, '색시'에다 음운 '아'를 첨가한 형태이고,

'부끄럼'은 리듬을 살리기 위하여 '부끄러움'에서 '우'를 생략한 표현이다.

또 '시의 가슴'은 '시정으로 가득 찬 가슴 속'이며,

'실비단 하늘'은 '가는 실로 짠 비단처럼 고운 하늘'이다.

영랑은 이와 같이 언어의 예술성과 음악성을 미감(美感)으로 높여 놓고 있다.
<양승준, 양승국 공저 [한국현대시 400선-이해와 감상]>)


그렇다면 부잣집 아들로서 그의 삶은 평탄했을까? 마흔여덟 나이로 세상을 버렸던 짧은 생애는 굴곡의 연속이었다.

일제시대와 한국전쟁이라는 민족적 비극이 영랑의 삶에 그대로 아로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그는 적어도 고교 때부터 시대의식이 강했던 것 같다. 휘문고 시절인 1919년에 독립선언문을 구두 안창에 숨긴 채 고향에 내려와

독립운동을 주도하다가 붙잡혀 대구형무소에서 6개월 동안 복역했다.

이듬해 일본 도쿄에 유학해서도 혁명가와 무정부주의자들과 같이 하숙하며 어울렸다.

그러다 1923년 관동대지진이 일어나자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길에 오른다.

훗날 '시문학' 동인지를 함께 창간한 박용철 시인은 도쿄 유학 때 사귄 친구였다.

시련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948년 초대 국회의원 선거 때 출마했다가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그리고 한국전쟁 때 복부에 파편을 맞고 쓰러진 뒤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영랑을 만나려면 강진읍 탑동에 있는 고향집을 찾는 게 좋다.

강진군이 1980년대 중반부터 꾸준히 복원ㆍ보수한 결과 지금은 영랑의 살풋한 시정을 맘껏 느낄 수 있을 만큼

고요하고 청아한 분위기가 일품이다.

안채의 뒤꼍 언덕에는 데뷔작 '동백잎에 빛나는 마음' 그려진 동백나무들이 오늘도 청청하다.

앞마당 한쪽엔 '뜰 아래 웃음 짓는' 맑은 새암(샘)이 내방객을 부르고,

다른 한쪽엔 그가 '찬란한 슬픔의 봄' 기다렸다는 모란꽃밭이 펼쳐져 있다.

생가로 들어가는 길 양 옆엔 햇살 살포시 내려앉은 돌담이 속삭이듯 단아하고.

누구나 쉽게 떠올리는 유명시인이지만 우리는 과연 그를 얼마나 알고 가까이 해왔을까?

진정으로 그를 깊이 만나왔고, 만나고 있느냐는 거다.

문화훈장 심사업무를 맡은 정부 관계자가

"그동안 아무 훈장도 못 받았다는 걸 알고 우리도 놀랐다"고 한 말은 그냥 나온 만시지탄만은 아닐 것이다.

ido@yna.co.kr

 

 

 

동백잎에 빛나는 마음

  - 1930. 시문학

 

내마음의 어딘듯 한편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도쳐오르는 아침날빛이 뻔질한

은결을 도도네

가슴엔듯 눈엔듯 또 핏줄엔듯

마음이 도른도른 숨어있는곳

내마음의 어딘듯 한편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작품의 이해>

이 시에서 '강물'은 실재하는 강이 아니다. 그것은 마음 속 어딘가에 있다.

가슴에나 눈에 또는 핏줄 속에 있는 듯도 하고, 어디라고 할 수 없지만

'마음이 도른도른(사전에는 나와 있지는 않으나, 무언가 살아 움직이는 듯한 느낌을 주는 의태어) 숨어 있는 곳', 거기에 있는 듯도 하다.

그런데 6행에서 숨어 있다는 것은 마음이 현실의 외부 세계로 물러나 들어옴을 뜻한다.

그 때 나는 평화와 안정, 혼자만의 기쁨을 맛본다.

따라서 강물은 내 마음에만 있는 세계로, 이러한 자기만의 평화와 그윽한 아름다움의 이미지이다. 또

 바로 그 내면의 세계가 객관적인 현실의 외부 세계와는 무관한 영랑의 순수 서정의 세계이며 '내 마음'의 세계이다.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김영랑)

1930년 <시문학>제2호에 '내 마음 고요히 고흔 봄길 우에'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다가

1935년 시문학사에서 간행된 <영랑시집>과 1949년 간행된 <영랑시선>에 '돌담에 소색이는 햇발'로 수록

 

 

모란이 피기까지는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출처 : keiti
글쓴이 : 세발까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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