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흔적

[스크랩] [병자호란] (44~45) 모문룡의 죽음과 파장 (46) 自强論의 이상과 현실

제봉산 2008. 8. 21. 13:42

[병자호란 다시 읽기] (44) 모문룡의 죽음과 파장 1

앞에서 언급했듯이 정묘호란이 벌어지는 동안 모문룡은 조선에 아무런 보탬이 되지 못했다.
보탬은커녕 그의 부하들이 끼친 작폐 때문에 청북 백성들의 고통은 극에 달했다.
그럼에도 모문룡은 명 조정에 보낸 보고서에서 ‘자신의 활약 덕분에 후금군을 물리치고 조선이 위기에서 벗어났다.’고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옛날처럼 ‘해외 천자’,‘밀수 왕초’의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드러나기 시작하는 모문룡의 본질

 

모문룡이 가도로 들어가 동강진(東江鎭)을 건설했던 해가 1622년이므로 정묘호란이 끝날 무렵이면 햇수로 5년이 지난 셈이 된다.

 

모문룡은 그동안 ‘요동 수복’을 외치며 엄청난 군량과 군수 물자를 소모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다할 성과가 없었다는 점이다.

간혹 배를 타고 서해에서 압록강을 오르내리며 게릴라 활동을 벌이고, 봉황성(鳳凰城) 등지에 출몰하여 후금군과 소소한 규모의 전투를 벌였지만 그것은 ‘요동 수복’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 행동이었다.

오히려 후금을 자극하여 조선의 안전을 위협하는 행위일 뿐이었다.

 

일찍부터 모문룡의 활동과 효용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1622년 12월, 명의 어사(御史) 하지령(夏之齡)은 황제에게 올린 상소에서 모문룡을 본토로 철수시키라고 건의했다.

모문룡이 고립된 병력을 이끌고 바다 바깥의 조선 땅에 몸을 의탁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그를 지원하는 것이 어렵다는 이유였다.

대학사(大學士) 섭향고(葉向高) 또한 당시 어려웠던 명의 재정 형편을 내세워 하지령의 의견에 동조했다.

하지만 당시 희종(熹宗) 황제는 모문룡을 적극 옹호하며 섭향고 등의 건의를 일축했다.

▲ 원숭환은 산해관 바깥의 방어를 책임진 사령관으로, 최전선인 영원성에서 후금군과 대치했다. 사진은 모문룡에게 종말을 안겨준 원숭환이 지키던 영원성을 끼고 발달한 시가지의 모습.

희종 황제가 제위에 있는 동안은 모문룡의 ‘안전’에 별 문제가 없었다.

환관 위충현이 그의 뒤를 든든하게 받쳐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문룡 또한 위충현에게 결사적으로 매달려 그의 도움을 받아 위기를 피해 갔다.

그는 위충현을 지극 정성으로 섬겼다. 가도의 동강진에 위충현을 조각한 석상(石像)을 세웠을 정도였다.

 

명 조정에서 조선으로 사신이 올 때마다 그는 위기 의식을 느꼈다.

사신들이 조선을 왕래하려면 반드시 동강진에 들러야 하는데 행여 그들을 통해 자신의 본질이 탄로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1626년 윤 6월, 조선 방문을 마치고 귀국 길에 올랐던 한림원 편수(編修) 강왈광(姜曰廣)이 동강진에 들렀을 때, 두 사람이 나눈 대화의 내용은 흥미롭다.

모문룡은 만주 지도를 꺼내 놓고 강왈광에게 자신의 작전 계획을 장황하게 설명했다.

강왈광이 관심을 보이며 “이제 장군이 공을 세워야 할 때”라고 맞장구를 치자 모문룡은 본심을 드러냈다.‘공을 세우고 싶지만 군량이 없다.’고 하소연했던 것이다.

강왈광도 물러서지 않았다.‘군량이 부족하면 정예병만을 추려내서 싸우면 된다.’고 충고했다.

강왈광은 더 나아가 ‘군량이 없다는 이유로 조선에서 계속 뜯어내려 한다면 조선이 필시 딴 마음을 품을 것’이라고 우려를 표명했다.

이미 서울에 머물면서 조선의 피폐한 실상을 파악했기 때문에 했던 충고였다.

 

모문룡의 거취를 둘러싼 논란

 

모문룡을 철수시켜야 한다는 주장은 계속되었다.

1626년 5월, 총독 염명태(閻鳴泰)는 ‘바다 바깥에 병력을 배치한 것은 적의 배후를 견제하기 위한 목적인데 모문룡은 오히려 후금에 견제당하는 신세가 되었다.’며 그를 속히 여순(旅順)으로 철수시키라고 촉구했다.

원임 등래순무(登萊巡撫) 무지망(武之望)도 ‘모문룡은 후금군이 두려워 물러나려고만 하고 조선 군신들과 갈등을 일으켜 나라를 욕되게 하고 있다.’며 비난을 퍼부었다.

바야흐로 ‘모문룡 문제’가 정쟁의 ‘이슈’로 떠오르고 있는 순간이었다.

 

모문룡의 문제점을 들어 철수시키라는 요구가 이어졌음에도 명 조정이 그와 동강진을 계속 유지시키려 했던 까닭은 무엇일까?

물론 희종 황제와 위충현이 모문룡을 비호했던 것이 중요했지만 반드시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당시 명의 신료들 가운데는 모문룡이 지닌 효용 가치를 다른 측면에서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바로 조선을 견제하기 위한 거점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1626년 주문욱(周文旭)은 황제에게 올린 게첩(揭帖)에서 모문룡이 후금을 제대로 견제하지는 못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진영을 여순으로 옮기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그는 ‘조선이 후금에게 시달리면서도 명을 배신하지 못하는 이유는 모문룡이 철산에 머물면서 견제하기 때문’이라며 모문룡의 효용성을 높이 평가했다.

풍성후(豊城侯) 이승조(李承祚)도 비슷한 의견을 폈다.

그는 ‘모문룡의 진영을 옮기자마자 조선이 후금에 병탄될 것이고, 그러면 후금은 더욱 거리낌 없이 명을 공격할 것’이라고 했다.

그는, 모문룡의 진을 옮기는 대신 감독관을 보내 군량을 감독하고 그에게 전진하도록 명령하라고 촉구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모문룡에 대한 감사(監査)는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그런 와중에 정묘호란 이후 모문룡이 보인 태도는 가관이었다.

거짓말로 가득 찬 보고서를 올렸음에도 환관들의 비호 덕분에 황제의 신임을 얻게 되자 그는 더 대담해졌다.

그는 호란 이후 후금 측과 사절을 왕래하면서 사실상 내통하고 있었다.

양측의 사절들이 창성(昌城)을 경유하여 심양을 왕래하는 것은 조선의 수령들에 의해서도 빈번히 목격되었다.

1627년 12월, 서울에 왔던 후금 사신 용골대(龍骨大)도 양측이 ‘화친’ 운운하면서 사절을 서로 왕래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았다.

 

모문룡은 그러면서도 정작 조선에 대해서는 딴 이야기를 했다.

그는 12월26일 조정에 도착한 서한에서 조선이 후금과 화친한 것을 질책한 뒤,‘자신은 군사를 이끌고 후금을 일망타진할 것이니 조선도 두려워하지 말고 협력하라.’고 촉구했다.

조선으로서는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언동이었다.

 

원숭환, 모문룡에게 쌍도로 오라고 명령

 

정묘호란 이후에도 ‘감시의 사각 지대’에 머물며 희희낙락했던 모문룡에게도 종말이 다가오고 있었다. 모문룡에게 종말을 가져다 준 당사자는 다름 아닌 원숭환이었다.

 

원숭환은 모문룡을 극도로 혐오했다.

그가 가도에 ‘퍼질러 앉아’ 군량만 축내며 정작 후금군에 대한 공략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데 대한 반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원숭환의 반감은, 모문룡을 싫어하는 조정 신료들의 ‘관념적인’ 반감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산해관 바깥의 방어를 책임지고 있는 사령관으로서, 최전선인 영원성에서 후금군과 대치하고 있는 무장으로서 그가 모문룡에게 느끼는 배신감은 훨씬 구체적이고 엄중한 것이었다.

 

백기종(柏起宗)의 ‘동강시말(東江始末)’에 따르면 원숭환은 일찍부터 모문룡을 ‘처리’하려고 했던 것 같다. 조정에 상소를 올릴 때마다 매번 ‘모문룡 문제’를 거론했다고 한다.

문관을 파견하여 모문룡을 견제하도록 건의하는가 하면 그 스스로도 가도에 대해 해금(海禁) 조치를 취하려 했다.

여순을 차단하여 모문룡의 진영으로 장정들이 유입되는 것을 막으려 하는 한편, 명으로 오는 조선 사신들이 가도에 들른 이후에는 반드시 영원성을 거치도록 했다. 모두 모문룡을 견제하려는 조처였다.

천계(天啓) 연간에는 모문룡을 제거하는 것이 여의치 않았다.

희종 황제, 그리고 그와 연결된 위충현의 비호 때문이었다.1627년 7월, 희종이 세상을 떠났다.

희종의 죽음은 위충현의 종말을 의미했다. 모문룡에게도 불길한 소식이었다.

 

이윽고 1629년(崇禎 2) 5월22일, 원숭환은 가도로 전령을 보냈다.

전령은 요동 경략 원숭환의 명령서를 내밀었다.

원숭환은 모문룡에게 쌍도(雙島)로 오라고 명령했다. 쌍도는 여순에서 육로로 80리, 해로로 40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5월25일, 동북풍이 불자 모문룡은 쌍도를 향해 출발했다.

‘해외 천자’의 마지막 항해가 시작되고 있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기사일자 : 2007-11-07

 

[병자호란 다시 읽기] (45)모문룡의 죽음과 파장 Ⅱ

모문룡은 쌍도로 향하면서 엄청난 수의 병력을 대동했다.
수백 척의 선박에 2만 8000명의 병력을 싣고 갔다고 한다.
말하자면 3만명 가까운 경호원을 대동한 셈이다.
원숭환으로부터 소환 통보를 받았을 때 무엇인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북경 조정과 조선, 그리고 후금 사이에서 산전수전을 다 겪었던 그는 분위기 파악의 귀재였다.
하지만 수만명의 경호원들도 모문룡의 목숨을 지켜주지는 못했다.
원숭환은 그만큼 치밀하게 모문룡을 제거할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12가지 죄악 들어 모문룡 단죄

 

모문룡은 1629년 5월26일 쌍도에 도착했다.

6월3일 모문룡은 술자리를 마련하여 원숭환을 초청했다.

술자리가 깊어가자 원숭환은 모문룡에게 ‘공이 이제 나이가 들었는데 어찌 병권을 내놓고 향리로 돌아가지 않느냐?’며 은근히 은퇴를 종용했다.

모문룡은 ‘내가 귀향하지 못하는 것은 요사(遼事)가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응수했다.

그러면서 그는 ‘요사가 끝나면 조선을 기습하여 차지하겠다.’고 떠벌렸다.

평소 조선에 대해 품고 있던 솔직한 생각을 원숭환 앞에서 토로한 것이다.

 

두 사람은 6월5일에도 만났다.

원숭환은 자신의 휘하와 모문룡이 거느리고 온 병사들에게 활쏘기 시합을 시켰다.

그리고 섬의 산꼭대기에 설치해 둔 장막으로 모문룡을 불렀다.

장막 부근에는 복병을 배치하여 모문룡 부하들의 접근을 차단했다.

장막에서 원숭환은 앞으로 자신이 동강진을 직접 챙기겠다는 뜻을 전달했다.

동강향부(東江餉部)라는 것을 만들어 영원으로부터 군량을 공급하되 그 회계 내역을 엄격히 감시하겠다는 내용을 통고했다.

 

이윽고 원숭환은 부하들에게 모문룡을 포박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면서 모두 12가지의 죄악을 들어 모문룡을 질책했다.

‘병마(兵馬)와 전량(錢糧)을 사용하면서 전혀 감사를 받지 않은 죄’,‘제대로 적과 싸우지 않았으면서도 공을 세웠다고 황제를 속인 죄’,‘사사로이 시장을 열어 오랑캐와 내통한 죄’,‘상인들을 약탈하여 장물을 쌓아두고 스스로 도적이 된 죄’,‘부하와 여염의 부녀자들을 빼앗아 첩을 삼고 음행을 일삼은 죄’,‘위충현을 아비처럼 섬기고 환관배들과 결탁한 죄’,‘진(陣)을 연 지 8년이 지났지만 한 뼘의 땅도 수복하지 못하고 관망한 죄’ 등이 그것이었다.

결국 엄당(奄黨)의 비호 아래 ‘감시의 사각지대’에서 ‘밀수 왕초’가 되어 흥청망청 ‘해외 천자’처럼 군림했던 과오에 대한 단죄였던 셈이다.

 

모문룡은 겁에 질려 말도 못했다고 한다.

원숭환은 북경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면서 “신이 문룡을 주벌하는 것은 삼군의 기강을 바로잡기 위함입니다. 신이 성공하지 못한다면 폐하께서 또한 문룡을 죽인 죄로 저를 주벌하실 것입니다.”라고 외쳤다. 이어 상방검을 뽑아 모문룡의 목을 베었다.

수많은 모문룡의 부하들이 장막 아래 있었지만 그들도 겁에 질려 엎드린 채 감히 위쪽을 쳐다보지 못했다. 원숭환의 일갈이 추상 같은 데다 워낙 전격적으로 이루어진 일이었기 때문이다.

 

원, 목벤 후 예를 갖춰 장사 치러줘

 

이튿날 원숭환은 예를 갖춰 모문룡의 장사를 치러 주었다.

그는 제문에서 “어제 그대를 죽인 것은 조정의 대법(大法)을 밝힌 것이고 오늘 그대를 제사함은 동료의 사정(私情)에서 나온 것”이라며 눈물을 뿌렸다.

자신이 모문룡을 죽인 것이 결코 사사로운 감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님을 강조한 것이다.

 

원숭환은 모문룡을 처단하면서 황제로부터 재가를 받지 않았다.

모문룡 같은 ‘거물’을 황제의 허락도 없이 처단한 것은 분명 엄청난 문제였다.

실제 원숭환은 모문룡을 군법에 따라 처리했다고 강조했지만 그 배후에는 치열했던 당쟁의 여파가 자리잡고 있었다.

모문룡의 죽음과 관련하여 당시 민간에서는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떠돌고 있었다.

모문룡의 생일을 맞아 어떤 사람이 그에게 수장(壽帳)을 보냈다고 한다.

수장이란 오늘날로 치면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축하 ‘카드’에 해당한다.

수장에는 당시 명의 대학자이자 문장가인 진계유(陳繼儒)와 역시 석학이자 화가로도 잘 알려진 동기창(董其昌)이 쓴 글이 들어 있었다.

모문룡은 수장에 대한 답례로 동기창에게는 인삼 1근을, 진계유에게는 인삼 반 근을 보냈는데 그것이 화근이었다.

진계유는 모문룡이 자신을 경시한 데 분노하여 깊이 유감을 품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던 차에 자신의 문인 원숭환이 계요경략( 遼經略)으로 승진하자

진계유는 “터럭 하나(一毛)를 뽑아 천하를 이롭게 하는 것이 어떤가?”라고 권유했다는 것이다.

‘일모’란 물론 모문룡을 가리키는 것이다.

 

원숭환이 모문룡을 처단하는 데는 대학사(大學士) 전용석(錢龍錫)의 입김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전용석은 동림당(東林黨) 계열의 문신으로 천계 연간 예부시랑(禮部侍郞)까지 올랐지만 위충현의 눈 밖에 남으로써 벼슬에서 쫓겨났던 인물이다.

숭정제가 즉위하면서 조정으로 복귀한 전용석은 위충현 실각 이후 엄당(奄黨)을 제거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담당했다. 전용석의 고향 선배였던 진계유는 전용석에게도 ‘일모를 제거하여 천하를 이롭게 하라.’고 풍유(諷諭)했다고 한다.

전용석은 그 말의 뜻을 알지 못한 채 북경으로 돌아왔는데, 얼마 후 문인 원숭환이 그에게 ‘모문룡 처리’ 문제를 자문했다는 것이다.

그제서야 ‘일모 제거’의 뜻을 간파한 전용석은 원숭환의 ‘거사’에 동의했다.

요컨대 원숭환이 모문룡을 제거하는 과정에는 천계 연간 명 조정에서 빚어졌던 동림당과 엄당 사이의 격렬한 상쟁과 복수의 여파가 자리잡고 있었다.

환관들의 당파인 엄당에 대한 혐오가, 그들과 밀착되어 있던 모문룡의 죽음으로 연결되었던 것이다.

엄당의 잔여 세력들도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그들도 동림당에 대한 복수의 기회를 엿보게 된다.

뒤에서 다시 서술하겠지만, 그들의 복수는 원숭환의 비명횡사라는 비극적인 결과로 나타나게 된다.

 

조선, 후금정벌 파병 요구에 고심

 

원숭환이 모문룡을 제거한 것은 조선에 어떤 영향을 남겼는가?

청북 지역을 자신의 앞마당처럼 횡행하면서 징색을 일삼았던 그가 사라진 것은 일견 긍정적인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단순한 문제는 아니었다.

▲ 원숭환의 유상(遺像, 죽은 사람의 초상화). 사진 오른쪽은 원숭환의 유고 부록에 쓴 양계초의 제사(題詞).

 

원숭환은 모문룡을 처단한 직후 조선에 편지를 보냈다.

그는 편지에서 모문룡을 처단하게 된 전말을 설명하고, 과거 모문룡과 부하들이 조선에 끼쳤던 피해에 대해 유감을 표시했다.

그러면서 ‘앞으로는 동강진의 명군이 조선에 민폐를 끼치지 않도록 하겠다.’고 다짐했다.

 

문제는 그 다음의 언급이었다.

원숭환은 후금을 공격하겠다는 결의를 밝히고 조선도 병력을 동원하여 같이 협공하라고 종용했다.

그것은 상황이 급변한 것을 의미했다.

원숭환은 모문룡과는 질적으로 다른 인물이었다.

‘요동 수복’을 공언하면서 뒤로 피하기만 했던 모문룡과는 달리 원숭환은 ‘오랑캐를 제거하고 요동을 수복하는 것’을 비원(悲願)처럼 가슴에 새기고 있는 장수였다.

그는 철두철미한 ‘중화(中華) 민족주의자’였다. 그런 그가 조선에 협공하라고 요구한 것은 결코 범상한 문제가 아니었다.

 

모문룡은, 조선이 그의 욕심을 일정 부분 채워주기만 하면 다른 문제에 대해서는 대충 넘어갔다.

자신이 후금과 군사적 대결을 벌일 의지가 없는지라 조선에 대해서도 싸우자는 시늉만 할 뿐 후금과의 결전을 강요하지 않았다.

비록 사회경제적으로는 괴로웠지만 조선은 그 와중에서 후금을 자극하지 않고 군사적 대결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런데 원숭환은 달랐다. 실제 원숭환의 편지를 받았을 때 조선은 조심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최명길은, 원숭환이 당장 군대를 보내라고 요구한 것이 아닌 만큼 마치 시기에 맞춰 파병할 것처럼 답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고민 끝에 조정은 원숭환에게 답서를 보냈다.

‘명의 은혜를 잊지 않았지만 몹시 피폐한 처지에 있다.’는 것,‘어쩔 수 없이 후금과 화친했지만 명이 후금을 정벌할 때는 돕겠다.’는 내용을 완곡하게 담았다.

모문룡은 죽었지만 조선은 또 다른 선택의 기로로 내몰리고 있었던 것이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기사일자 : 2007-11-14  

 

 

[병자호란 다시 읽기] (46) 自强論의 이상과 현실

우여곡절 끝에 후금과 화친함으로써 정묘호란은 끝났다.
인조 정권은 어렵사리 종사(宗社)를 보전할 수 있었지만 남겨진 과제는 참으로 버거웠다.
먼저 후금군과 이렇다할 전투 한 번 변변히 치러보지 못하고 강화도로 피란했던 현실을 돌아보아야 한다는 반성론이 제기되었다.
병력을 뽑아 조련시키고, 조총을 비롯한 무기를 확보하며, 군량을 마련할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었다.
바야흐로 조정에서는 자강(自强)을 강조하는 분위기가 높아가고 있었다.

 

“후금에 복수” 군비 강화론 급부상

 

1627년 4월 1일, 서울로 돌아오기 직전 인조는 신료들에게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내가 좋아서 오랑캐와 화친했겠는가?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화친한 것은 적의 기세를 늦춰 설욕하려는 것이니 그대들은 빨리 장수를 선발하여 병사들을 조련시켜라.”

 

화친한 것 때문에 척화파 신료들로부터 ‘항복한 임금’이라는 비아냥까지 들어야 했던 인조는 자존심이 몹시 상했다.

구겨진 자존심을 회복하려면 군대를 길러 적과 싸우겠다는 결의를 보여주는 것이 필요했다.

 

실제 정묘호란 직후 인조는 과거와 달리 부쩍 상무(尙武)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인조는 ‘우리 장사들이 갑옷 착용을 기피한다.’고 비판하고 갑주(甲胄)를 제대로 마련하라고 유시했는가 하면,1628년 10월에는 모화관(慕華館)에 거둥하여 무사들을 시험하고 기예가 뛰어난 자들을 시상하기도 했다.

 

인조의 지시를 계기로 호란 직후부터 후금에 복수하기 위해 필요한 군사적 방책들이 활발히 논의되기 시작했다.

1627년 4월, 병조판서 이정구는 전국의 모든 주(州)·부(府)·군(郡)·현(縣)에 지휘관을 파견하여 정예롭고 건장한 장정들을 뽑으면 최소 5만∼6만의 병력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또 지방의 병사(兵使)나 수령들에게 능력 있는 무신을 수시로 천거토록 하여 지휘관을 양성하고, 서울에 도체부군문(都體府軍門)을 설치하여 지휘관들을 집결시켰다가 유사시 지방으로 파견하여 현지의 병력을 지휘토록 하자는 방책을 제시했다.

 

부제학 정경세(鄭經世)를 비롯한 홍문관 관원들은 무기와 군량을 확보하기 위한 대책을 제시했다.

그들은 기동력이 탁월한 후금군의 돌격을 막으려면 조총수(鳥銃手)의 확보가 절실하다고 지적하고 강원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등지에서 1만의 장정을 뽑아 조총을 교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교습이 끝난 뒤에는 사격 시험을 치러 3발을 쏘아 2발 이상을 명중시킨 자를 선발하자고 했다.

또 성능이 뛰어난 일본산 조총을 확보하기 위해 사람을 왜관(倭館)이나 대마도로 보내 수입해 오자고 건의했다.

비변사 또한 각 도에 비축된 군기(軍器)들을 점검하여 병사들의 수와 일치하는지를 조사하고, 감사와 병사들을 채근하여 수시로 점검토록 하자고 강조했다. 정경세 등은 군량과 군수 확보를 위한 방책도 제시했다.

그는 먼저 군량 마련과 관련하여 인조와 비변사가 제시한 대책들을 비판했다.

그는, 몇몇 하급 관리와 서리의 숫자를 줄이고 왕실의 제수(祭需)와 어공(御供)을 감축하여 절약된 비용으로 군량에 보태자는 논의는 명분만 그럴 듯 할 뿐 아무런 효용이 없다고 일축했다.

▲ 역대 임금의 필적을 모아놓은 열성어필(列聖御筆)에 실린 인조의 필적(사진 왼쪽·규장각 소장).

“천문산 끊긴 곳에 초강이 열리고/동쪽을 흐르는 푸른 물은 북쪽에서 돌아드네/

두 언덕의 청산은 마주보고 솟았는데/한 조각 외로운 배 태양 가로 나오네.”라는 시구가

인조의 고단한 심경을 말해 준다.

유효립 모반 사건의 전말을 기록한 영사공신도감의궤(寧社功臣都監儀軌·사진 오른쪽).

 

군포 징수등 근본 대책 싸고 논란

 

정경세는 반정공신들이 거느리고 있는 군관(軍官)들을 아예 혁파하고, 왕자나 공주 등 궁가(宮家)에서 독점하고 있는 토지와 어장(漁場), 염전(鹽田) 등의 면세 특권을 없애고, 인조의 사금고나 마찬가지인 내수사(內需司)를 없애라고 요구했다.

 

정경세 등은 더 나아가 군사 재정 확보를 위해 근본적인 개혁안을 제시했다.

그것은 바로 양반들에게도 군포(軍布)를 거두자는 주장이었다.

조정의 대신들은 물론, 여염의 품관(品官)이나 사대부들에 이르기까지 직접 군역을 지지 않는 양반들에게서 포를 징수하면 1년에 수십만 필을 거둘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재정 문제는 쉽게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을 법제화하는 것이 부담스러우면 군사 재정이 어느 정도 확보될 때까지 한시적으로라도 실시하자고 촉구했다.

정경세 등은 그러면서 ‘전하께서 애절한 마음으로 솔선수범하려는 자세를 보이면 외방에서는 눈물을 흘리며 명령을 따르는 자들이 있을 것’이라고 호소했다.

 

참으로 어려운 결단이 요구되는 주문이었다.

인조는 물론, 궁가들과 반정공신, 그리고 일반 양반들까지 지배층 전체가 기득권을 포기할 각오가 있어야만 실현될 수 있는 개혁안이었다.

인조는 궁가의 특권을 폐지하고 내수사를 없애라는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신료들의 요구를 거부하면서 그가 내세운 명분은 ‘조종(祖宗)의 옛 관행을 하루아침에 바꾸기는 곤란하다.’는 것이었다. 정경세 등은 ‘군사와 군량이 없어 나라가 보존되지 못하면 궁가의 재산도 결국 적의 소유가 되고 말 것’이라고 ‘경고’했지만 인조는 요지부동이었다.

오히려 광해군 때 궁가들이 점유했다가 인조반정 이후 국가로 소유권을 넘긴 토지와 어장을 본래의 궁가들에게 반환하는 것을 묵인하기도 했다.

전쟁 때문에 빚어진 어려운 현실을 타개하려면 개혁이 절실하다는 것을 인식하면서도 막상 무엇부터 손을 대고, 어떤 특권부터 혁파해야 할지 제대로 갈피를 잡지 못했던 것이 정묘호란 이후 조선의 현실이었다.

 

개혁 부진속 흔들리는 민심

 

1628년 8월, 광주(廣州)의 선비 이오(李晤)는 인조에게 상소를 올려 현실을 진단했다.

그는 당시를 ‘기강이 무너지고 탐풍(貪風)이 치성하여 염치가 사라지고, 민생이 도탄에 빠져 역모가 빈발하고, 오랑캐의 공갈 속에 인심이 흉흉한 상태’라고 표현했다.

그는 호패법(號牌法) 폐지 이후 도망자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상황에서 장정들을 군적(軍籍)에 올리기 위해 친족과 이웃까지 닦달하면서 민심이 동요하고 있다고 했다.

나아가 ‘적이 물러간 지 1년이 지나자마자 비변사 신료들은 끽연과 우스갯소리나 일삼고, 지방의 지휘관들은 기생을 끼고 앉아 술타령을 벌이고 있다.’며 직격탄을 날렸다.

 

상황이 정돈되지 않고 개혁이 지지부진한 상황 속에서 역모 사건이 빈발했다.

이인거(李仁居)가 일으키려 했던 반란의 여파가 채 가시지도 않은 1628년 1월, 유효립(柳孝立) 등이 모반을 기도한 사건이 발각되었다.

인조반정 이후 제천에 유배되어 있던 북인 잔당 유효립 등은 “반정공신들이 포학하여 백성들이 고통에 빠져 있다.”는 등의 명분을 내걸고 거사를 도모했다.

그들은 광해군을 복위시켜 상왕(上王)으로 모시고 인성군(仁城君,宣祖 7子)을 추대한다는 목표를 내걸었다. 공초(供招) 과정에서는 ‘환관을 시켜 인조를 시해하려 했다.’는 진술까지 흘러나왔다.

결국 수사 과정에서 관련자 50여 명이 자복(自服) 후에 처형되는 참극이 빚어졌다.

 

1628년 3월에는 유학(幼學) 임지후(任之後)의 고변(告變)이 이어졌다.“공신들을 모두 죽이고 광해군을 복위시킨 뒤 인성군에게 전위토록 한다.”는 내용으로 ‘유효립 사건’과 거의 같은 슬로건을 내걸고 있었다.

관련자 심길원(沈吉元)은 심지어 “반정 당시에도 200명으로 성공했는데 지금 무슨 어려움이 있을쏘냐?”고 진술하여 인조정권을 경악케 했다.

 

정묘호란 이후 인조정권은 분명 기로에 섰다.

전란으로 실추된 권위를 회복하고 집권 이후 줄곧 내세웠던 명분을 실천하려면 특단의 조처가 필요했다. 하지만 ‘군비를 강화하여 후금에 복수하자.’고 외치면서도 정작 그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는 근본 대책은 마련하기 어려웠다. 기득권을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인조가 내수사를 움켜쥐고 궁가들의 특권을 비호하는 한 양반들에게 군포를 거두는 것은 더더욱 어려웠다. 실제 양반들에게 군포를 거두자는 논의(戶布論)는 이후 200년이 훨씬 더 지난 흥선대원군 집권기에 가서야 실현된다.

정묘호란 이후, 자강의 방책을 둘러싼 이상과 현실의 괴리 속에서 시간은 계속 흐르고 있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기사일자 : 2007-11-21  

 
 
 

출처 : keiti
글쓴이 : 세발까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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