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흔적

[스크랩] [그림이 있는 조선풍속사] 6 ~ 10

제봉산 2008. 8. 21. 12:36

[그림이 있는 조선풍속사] (6) 쌍겨리와 소

김홍도의 그림 ‘쌍겨리’다. 그림은 위쪽과 아래쪽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먼저 위쪽을 보자.
남자 둘이 쇠스랑을 들고 일을 하고 있다.
쇠스랑은 주로 두엄을 쳐내고 퇴비를 긁어 올리는 데 사용하며, 드물게는 밭을 가는 데도 사용된다.
쇠스랑은 그림에서처럼 발이 세 개인 것이 일반적이고 이따금 둘인 것도 있다.
자루는 대개 참나무로 만들고 발은 당연히 쇠로 만든다.
그런데 이 그림의 농부 둘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두엄을 쳐내는지, 퇴비를 긁는지, 아니면 밭을 가는지 그림만으로는 알 수가 없다.
 

▲ 김홍도의 그림 ‘쌍겨리’. 소 한 마리에 멍에를 지우는 것을 외겨리 혹은 독겨리라고 하고,

쌍멍에에 소 두 마리를 지우면 쌍겨리라고 한다.

쌍겨리는 화전 같은 경사지나 단단한 땅 등을 갈 때 주로 이용된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지방마다 쟁기 끄는 소의 마릿수 달라

 

아래쪽의 사내는 소 두 마리로 쟁기질을 하고 있는 중이다. 소 엉덩이에 똥이 묻은 것까지 자세하게 그렸으니, 어지간한 관찰력이다. 어쨌거나, 쟁기질이라니, 아마도 봄이리라.

흥미로운 것은, 쟁기를 끄는 소가 두 마리라는 것이다. 소 한 마리에 멍에를 지우는 것을 외겨리, 혹은 독겨리라 하고, 쌍멍에에 소 두 마리를 지우면 쌍겨리라 한다.

대개 논과 밭을 갈 때 땅이 평평하여 쉽게 흙을 팔 수 있으면 외겨리로 하지만, 화전 같은 경사지거나 흙이 단단하거나 돌이 많은 곳은 힘이 많이 들기 때문에 쌍겨리로 하는 것이다.

대개 쌍겨리는 땅을 깊이 갈기 위해 고안된 방법인 것이다.

 

다산 정약용은 강진에 귀양 가서 ‘탐진농가’란 시를 지었는데, 여기에 흥미롭게도 외겨리,

쌍겨리 이야기가 나온다(탐진은 강진의 옛이름이다). 모두 10수인데,7번째 작품을 보자.

 

게으른 습성은 정말이지 옥토에서 생기는 법

상농(上農)도 해가 중천인데 잠에 빠졌다가

느릅나무 그늘에서 술주정을 부리다 말고

느지막이 소 한 마리 몰고 마른밭을 가는구나

 

이 시에 주석이 붙어 있는데,“경기 지방의 마른밭은 소 두 마리로 간다.”라고 되어 있다.

곧 전라도 강진에서는 외겨리로 밭을 갈지만, 경기도에서는 쌍겨리로 갈았던 것이다.

우하영의 ‘천일록’은 지방에 따라서 쌍겨리로 밭을 가는지, 외겨리로 가는지를 밝히고 있다.

이에 의하면, 관동지방은 영서·영동을 막론하고 쌍겨리로, 황해도 봉산·재령·신천·안악 등도 쌍겨리,

경상도는 대개 쌍겨리로 하고, 남쪽 지방은 외겨리로, 전라도는 산간 지방은 쌍겨리, 평야 지대는 외겨리로 한다는 것이다(주강현,‘두레’).

혼자 소 두 마리를 가지고 있다면 문제가 없지만, 소란 것이 농민이면 누구나 손쉽게 가질 수 있는 재산이 아니어서, 이웃과 함께 어울려 소 두 마리를 메기도 하였던 것이다.

위의 그림도 그런 사정을 말해 주는 것이 아닌가 한다.

 

쌍겨리로 논밭을 갈면서 부르는 노래를 ‘쌍겨리소리’라 하는데, 경기도 가평의 쌍겨리소리를 들면 이렇다.

“어져, 저 소야, 줄 잡아 당겨라. 이랴, 이랴. 먼저 나가지 말고, 두 마리가 잘 잡아 당겨라.”

물론 노래는 소리를 길게 뽑고 후렴구를 넣기도 하여 길게 늘어진다.

 

농우 확보위해 도살 금했지만 ‘고려공사 사흘´

 

농우는 농사를 짓는 데 필수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농민들에게 소가 언제나 넉넉하게 돌아갔던 것은 아니다.

성종 때 시인이자 관료였던 강희맹이 쓴 농서 ‘금양잡록(衿陽雜錄)’을 보면 농촌에 소가 아주 드물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동리에 100집이 있는데, 가축이 있는 집은 10집 남짓이고, 소는 한두 마리에 불과하다.

거기서 송아지를 제외하고 농사일을 맡길 만한 소는 겨우 몇 마리에 불과하다.

100집의 밭을 몇 마리 소가 갈자 하니 힘이 부치기 마련이다.”라고 하고 있으니, 농사지을 소가 충분하지 않았던 것이다. 거기다 도둑떼까지 소를 잡아먹어 남은 소로는 경작이 불가능해 하는 수 없이 사람이 쟁기를 끄는데, 아홉 명이 쟁기를 끌어도 소 한 마리를 당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 김홍도의 그림 ‘외겨리’. 외겨리는 땅이 평평하여 논이나 밭을 쉽게 팔 수 있을 때 사용된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농업사회인 조선조에는 소가 늘 부족했다. 소 전염병도 자주 돌았다.

예컨대 인조 15년,16년 두 해에는 소 전염병이 너무 심하여, 성균관에서 공자에게 올리는 봄 가을의 제사, 곧 석전 때도 제물로 소 대신 돼지를 쓰게 했으며,

현종 11년 전국의 소가 거의 다 죽어 사람이 대신 쟁기를 끌었다고 한다.

한데 소가 모자라는 가장 큰 이유는 쇠고기의 소비 때문이었다.

‘세종실록’ 7년 2월4일조를 보면 국가에서는 농우의 확보를 위해 소의 도살을 금지하고 있다.

읽어보면 다음과 같다.“먹는 것은 백성의 근본이 되고 곡식은 소의 힘에서 나오므로 우리나라에서는 금살도감(禁殺都監)을 설치하였고, 중국에서는 쇠고기의 판매를 금지하는 법령이 있으니, 이는 농사를 중히 여기고 민생을 후하게 하려는 것이다.”

조선조 500년 동안 지속된 세 가지 금령이 있는 바, 소나무의 벌채를 제한하는 송금(松禁), 술을 빚는 것을 금하는 주금(酒禁), 그리고 바로 소의 도살을 금하는 우금(牛禁)이 그것이었다.

조선 정부는 이처럼 소의 도살을 막았지만, 그것이 성공한 적은 없었다.

왜냐하면 정책을 수립하는 지배층 자체가 쇠고기를 가장 많이 소비하는 계층이었기 때문이었다.

 

소는 농가 최고 재산… 세금 못내면 끌고가기도

 

정조 때 박제가가 쓴 ‘북학의’에 의하면 당시 날마다 소 500마리를 도살한다 하였다.

서울에는 쇠고기를 파는 24개의 푸줏간이 있고, 지방 300여 고을 관아에서도 빠짐없이 쇠고기를 파는 푸줏간을 열고 있다 했으니, 실로 쇠고기의 소비량이 대단했던 것이다.

‘정조실록’ 17년 9월11일조의 대사간 임제원이 올린 상소문을 보면, 이해 가을 작황을 보니 좋은 날씨로 인해 유례 없는 풍년이 들었는데도, 뜻밖에도 모내기도 못한 곳이 있다면서 그 이유로 농사지을 소의 부족을 들었다. 즉 소를 잡아먹는 일이 최근 너무 심해져 소가 부족해졌다는 것이다.

큰 도시에서 쇠고기를 파는 가게가 늘어서 있으며, 호서 지방과 호남 지방이 가장 쇠고기를 먹는 데

열중한 나머지 소 값이 올라 논밭을 가는 소가 모자라게 되고,

그 결과 사람이 대신 쟁기질을 하므로 모를 내지 못하는 곳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요컨대 소를 잡아먹는 것을 금하자는 것이었지만, 고려공사 사흘이라고 아무리 금령을 발동해도 고쳐지지가 않았다.

 

소는 농사를 짓거나 고기만으로 이용되는 것이 아니었다. 짐을 끄는 것도 소가 하는 중요한 노동이었다.

영조 때의 시인인 홍신유가 쓴 시에 ‘우거행(牛車行)’이란 작품이 있다.

‘수레를 끄는 소에 대한 노래’란 뜻이다. 서울 한강 근처에 강을 통해 서울에 도착한 양곡이며, 땔나무를 도성 안으로 옮기는 수레를 끄는 소를 제재로 삼은 것이다.

이 작품의 소는 짐을 싣고 도성으로 들어가다가 큰 비로 생긴 웅덩이에 빠졌다가 천신만고 끝에 나오지만, 다시 좁은 비탈길에서 양반네 행차를 만나 놀란 나머지 진흙 구덩이에 빠져 버둥거리다 죽고 만다. 시인은 소를 가엽게 여겨 이렇게 말한다.

 

“한 해 가고 두 해 가면/ 전신은 성한 데 없고/ 가죽은 마르고 살은 쫄아 붙어/ 영락없이 고사목처럼 되고 말지/ 그 소 마침내 푸주로 끌려와서/ 잡아먹히게 되는데/ 수레 끄는 소는 고기 맛이 없다고/ 말들 한다네/ 소의 힘 모두 빨고/ 마침내 그의 고기까지 먹으니/ 사람들 잔인하기/ 어찌 이와 같단 말가?”

(임형택 편역,‘이조시대 서사시(상)’)

평생 노동력을 빼앗고, 죽으면 고기까지 먹으니, 인간처럼 잔인한 짐승이 지구상에 또 있을까?

 

소는 농가의 최고 재산이었다. 조선시대 한시를 보면 세금을 내지 못한 농가에 아전들이 들이닥쳐 소를 끌고 가는 장면이 흔히 나온다. 아니,20세기에도 소는 대학생의 등록금이 아니었던가.

위 그림의 소를 부려 농사짓는 사람은 그나마 넉넉한 농민이었던가 보다.

 

 

 

 

(7) 일 하다 먹는 ‘들밥’

들녘서 보리밥 쓱쓱비벼 막걸리 한잔 걸치면…

장정이 7명, 젖먹이 어린애가 한 명, 더벅머리 꼬마가 한 명, 그리고 젖을 먹이는 아낙이 한 명이다.
뙤약볕에서 일을 했는지 장정 다섯은 웃저고리를 벗고 맨살을 드러내고 있다.
큼지막한 밥사발을 들거나 앞에 놓고 먹고 있는데, 가난한 살림이라는 것은 절로 짐작이 간다.
김홍도 그림 ‘들밥’의 왼쪽을 보면 두 사내가 한창 밥을 먹고 있는데, 반찬 그릇은 오직 하나다.
그림 중앙의 사내는 아예 반찬 그릇조차 없다. 모든 밥은 아낙네의 앞에 놓인 보자기를 덮은 방구리에서 나온 것이다. 장정 일곱의 밥이 방구리 하나에서 나오다니, 좀 쓸쓸하다.
방구리는 한쪽이 열려 있는데, 조심스럽게 보면 그릇을 담은 것이 아니라, 단일한 품목의 물건을 담은 것으로 보이는데, 내 눈에는 보리밥으로 보인다. 아닌가. 하기야 들밥에 무슨 음식의 종류가 있을까. 보리밥에 풋고추와 된장이면 족할 것이다. 하지만 빠질 수 없는 것이 막걸리가 아닌가.
그래서 새참은 동시에 ‘술참’이 된다.

 

김 매는 노동뒤에 배불리 먹는 포만감

 

흔히 직업에 귀천이 없다는 말을 하지만, 사실 직업에는 귀천이 있다.

편안하고 쾌적한 사무실에서 깔끔한 복장으로 앉아 커피를 마시며 업무를 보고 월급을 받는 것과,

저 땅 속에서 비지땀을 흘려가며 석탄가루를 뒤집어쓰고 석탄을 캐는 노동으로 대가를 받는 것이

선택사항이라면 당신은 어느 쪽을 택하겠는가.

양반들은 언필칭 농자천하지대본이라고 말하지만, 그것이 곧 농민이 가장 고귀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식량은 인간의 필수적 생존조건이다.

그런 의미에서 식량을 생산하는 농사가 가장 중요한 것일 뿐, 뙤약볕에 몸을 내맡기고 허리가 끊어져라 김을 매는 노동은 사실상 선택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사실 농사일은 엄청난 중노동이다. 농업의 기계화가 이루어지기 전의 농사는 하나에서 열까지 모든 것이 인간의 손끝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 노동의 강도는 대단히 높고, 칼로리의 소모도 엄청난 것이다. 그 소모되는 칼로리를 공급하는 것이 들밥이고 새참이 것이다.

 

강희맹이란 분이 있는데, 한국한문학사에 꽤나 이름이 높은 분이다.

그 분의 저술에 ‘금양잡록(衿陽雜錄)’이란 책이 있는데, 농사일에 관한 책이다.

금양은 지금의 과천인데, 그는 한때 과천에서 씨를 뿌리고 채소를 가꾸고 나무를 심는 등 직접 농사일을 하여, 농사 제반에 대해 제법 알게 되었다.

강희맹은 먹물이었으니, 그는 또 먹물답게 거기서 얻은 지식을 ‘금양잡록’이란 책으로 엮는다.

책의 내용은 곡식의 종류, 농사짓는 법, 농민과의 대화 등등이지만, 뜻밖의 것도 있다.

농민들이 농사를 지을 때 노래를 부르는데

듣고 보니, 괜찮다. 그래서 한시로 옮긴다.

이것이 ‘농구(農謳)’ 14편이다. 말이 길었지만, 여기에 ‘들밥을 기다리며’란 시가 있는 것이다.(‘농구’는 모두 14수다. 그 중 여덟 번째 작품이 ‘들밥을 기다리며’이다). 작품을 읽어보자.

큰 며느리 절구질 서둘러

작은 며느리 부엌으로 들어가자

푸른 연기 모락모락 피어나고

주린 창자에선 우레 소리 울린다

들밥 기다릴 때는

호미 들 힘조차 안 남았네

남자들이 들에 나가서 김을 매고 있을 때 집안에서 부녀들은 들밥 준비에 바쁘다. 고된 노동을 하면서 오로지 들밥만을 기다릴 뿐이다. 그렇지 않은가. 나는 한 끼 밥을 즐겁게 먹기 위해 오전의 노동을 견디고, 한 끼 저녁밥을 즐겁게 먹기 위해 오후의 노동을 감내한다.

농사일은 강도 높은 노동이다. 새벽에 나와서 허리를 꼬부리고 계속 일을 하다가 정오 때가 되면 뱃속에서는 우레 소리가 울리고 호미 들 힘조차 남지 않는다. 드디어 들밥이 오고, 배불리 먹는다. 그 다음은 ‘배를 두드리며’란 작품이 이어진다.

광주리 향기로운 보리밥

아욱국 달디 달아 숟갈에 매끄럽게 흐르네.

어른 젊은이 차례로 둘러앉아

왁자지껄 밥 먹는 소리 요란하다.

달게 포식하매 속이 든든하니

배를 북처럼 두드리고 그저 흡족할 뿐

어떤가, 힘든 노동 끝에 배불리 먹고 흡족해 하는 농민의 심정을 느낄 수 있으신지.

전근대 사회는 농업사회이니 당연히 농사에 관한 한시가 많이 남아 있다. 그런 한시 중에서 들밥을 내 가는 여성은 단골로 등장하는 제재다. 성종 때 관료로서 시인으로서 대제학 벼슬까지 했던 서거정의 ‘전가(田家)’란 시를 보자.

고사리나물을 반찬삼아 밥을 먹고 농담을 하며 웃음소리가 낭자하다. 봄비도 넉넉히 내렸다. 굳이 두레박으로 논물을 퍼 올리지 않아도 된다. 여유 있는 풍경이다. 한데 들밥 자체에 초점을 맞춘 것은 아니다. 고려 말 시인인 안축이 삼척 죽서루를 읊은 8수의 한시 중 ‘밭이랑에 들밥을 내어가는 아낙네’란 시를 보자.

아낙은 들밥 차리느라 자기 밥도 아니 먹고

새벽부터 마음이 논밭에 가 있네

점심나절 밭이랑으로 걸음을 재촉하여

남편을 배불리 먹인 뒤 신이 나서 돌아오네.

남편은 꼭두새벽에 들로 나갔다. 한여름의 농사일은 너무나 고되다. 아내는 그 남편이 너무나 안쓰럽다. 그것을 생각하고 서둘러 밥을 지으며 정작 자신의 식사는 잊어버린다. 정오가 되어 서둘러 들로 나가 남편이 배 불리 먹는 것을 보고는 그제서야 편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온다. 앞서 들었던 서거정의 시보다는 현실에 훨씬 더 가깝다. 김홍도의 그림도 그렇다. 김홍도의 그림에서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있는 여성의 표정을 보라. 자식에 대한 따스한 눈길을 느낄 수 있다. 사랑하는 대상에게 무언가를 먹이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의 표현이 아니겠는가. 먹이는 것은 인간의 생명의지를 충족시켜 주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남편 배불리면 굶어도 흐뭇한 아낙

 

그런데 이 시에 꼭 맞는 그림이 남아 있다. 역시 김홍도가 그린 ‘들밥 내가는 아낙네’라는 그림이다.

논에서 농부들이 김을 매고 있고, 그 아래에 아낙네가 머리에 밥을 담은 광주리를 이고 있다.

그 앞의 사내는 지게를 지고 있는데, 역시 먹을 것이 담겨 있을 것이다.

 

각설하고 조선후기 가사체 농서인 ‘농가월령가’를 보자.‘농가월령가’는 월령이란 말대로 달마다 농사꾼이 해야 할 일을 열거한다.6월령의 점심 먹는 부분을 인용해 보자.

 

날 새면 호미 들고 긴긴 해 쉴 틈 없이

땀 흘려 흙이 젖고 숨 막히고 맥 빠진 듯

때마침 점심밥이 반갑고 신기하다

정자나무 그늘 밑에 앉을 자리 정한 뒤에

점심 그릇 열어 놓고 보리단술 먼저 먹세

반찬이야 있고 없고 주린 창자 채운 뒤에

맑은 바람 배부르니 낮잠이 맛있구나

농부야 근심 마라 수고하는 값이 있네

 

아마 이 부분은 김홍도의 그림과 흡사할 것이다. 점심밥의 내용물은 무엇인가.5월령을 보면,

“보리밥 찬국에 고추장 상추쌈을, 식구들 헤아리니 넉넉히 준비하소”라고 했으니, 보리밥에 찬국에 고추장과 상추쌈이었던가 보다.

논문 실적이 개인 능력에 대한 야박한 평가가 된 요즘, 원고를 내놓으라는 독촉에 시달리며,

뜬금없이 다시 태어나면 들밥을 먹으며 농사를 짓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근골을 움직여 나와 내 가족이 먹을 정도로만 수확을 얻는다면, 나머지 시간은 그냥 놀다가 늙어지면 죽어 흙으로 돌아가는 그런 삶 말이다. 욕심이 너무 과한가.

한국의 농업이 무너지고, 수천㎞ 바다를 건너온 식량에 목을 매고 사는 이 시대를 생각하면 그런 생각 더욱 간절하다.

 

 

 

 

(8) 금지된 사랑의 만남 ‘밀회’

신윤복의 그림 ‘밀회’다. 때는 초승달이 뜬 밤. 서정주는 ‘동천’에서 “내 마음 속 우리님의 고운 눈썹을/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 동지 섣달 나르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라고 하였다. 초승달은 우리님의 고운 눈썹이다. 해서 초승달은 ‘우리님’의 사랑을 떠올린다. 이 그림 역시 그런 이야기를 담고 있다.
 

“두 사람의 마음은 두 사람만 알겠지”

 

그림의 왼쪽에는 기와집이 꼭 반만 그려져 있다. 그리고 기와집에 이어서 담이 있는데, 흙담이 아니고 제대로 깎아서 만든 돌담이다. 그리고 그림의 중앙에서 돌담은 꺾이고 있으니, 아마도 도시의 골목길일 터이다. 또 도시의 골목이라면, 필시 서울의 골목일 것이다.

▲ 신윤복 ‘밀회’. 희미한 초승달 아래 내외하듯 서 있는 남녀의 모습이 애틋한 정을 느끼게 한다.  간송미술관 소장

 

그림의 위쪽에는 초승달이 떠 있고, 그 아래에는 나무를 그려 담을 슬쩍 지우고 있다.

어쨌거나 초승달이 희미하게 비치는 한밤중이다. 그림 오른쪽에는 남녀가 있다.

이 그림의 핵심은 이 두 남녀다.

먼저 여자를 보자. 여자는 쓰개치마를 쓰고 있지만, 얼굴은 다 보인다. 쓰개치마는 여성이 내외를 하기 위해 사용하는 옷이다. 내외를 위해 여성이 뒤집어쓰는 옷은 다양하지만 장옷이 으뜸이고, 장옷보다 간단한 것이 쓰개치마다(장옷은 신윤복의 또다른 그림 ‘장옷 입은 여인’에도 여실히 묘사돼 있다).

한데 여자는 저고리 깃과 소맷부리에 자주색 회장을 대고 있으니, 삼회장으로 제대로 갖추어 입은 차림이다. 그리고 신발을 보라. 맵시 있는 가죽신이다. 여성은 필시 지체 있는, 부유하게 사는 집안의 여성이다.

 

오른쪽의 남자를 보자. 넓은 갓을 쓰고 중치막을 입었다.

이 남자는 수염도 나지 않았고 또 얼굴이 앳되며, 갓끈이 아무 장식 없는 헝겊으로 만든 것을 보아,

아직 벼슬하지 않은 양반가의 젊은이다. 여자와 마찬가지로 가죽신을 신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이 젊은이 역시 체모를 차리는, 산다 하는 양반가의 자제가 분명하다.

한데 초승달 희미하게 비치는 한밤중에 이 두 사람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남자가 왼손을 품속에 집어넣고 있는 것으로 보아, 어떤 물건을 여자에게 건네기 위해 여자를 불러낸 것인가. 아니면 여자를 불러내어 둘이 어디론가 가고 있는 것인가. 두 사람은 어떤 관계인가. 그림만으로는 알 길이 없다.

어딜 가고 있는가. 그림 왼편에 있는 화제를 보자.

“달빛 어둑어둑한 밤 삼경/ 두 사람의 마음은 두 사람만 알겠지.”(月沈沈夜三更,兩人心事兩人知)

 

화제처럼 두 사람의 마음속은 알 길이 없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시간은 삼경이랬다. 삼경은, 밤 11시에서 새벽 1시까지다. 알다시피 조선시대에는 통금이 있어서,

초경(밤 8시)에 인경종을 33번 치면 성문이 닫히고 시내의 통행이 금지된다.

인적은 완전히 끊기고 도성은 침묵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가 5경(새벽 4시)이 되면, 다시 33번 울리는 인경종에 성문이 열리고 통행이 시작된다.

이 그림의 시각은 3경이니, 통행금지 시간에 해당한다. 통행금지 시간에 사방등을 들고 젊은 두 남녀는 조심스러운 얼굴로 어디를 가고 있는가. 두 사람은 부부인가. 부부라면 무엇이 아쉬워서 통행금지 시간에 길거리에서 만나겠는가. 이 두 사람이 부부가 아닌 것은 삼척동자라도 알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두 사람은 어떤 관계인가.

위에 인용한 시에 바로 이 그림의 비밀을 푸는 열쇠가 있다.

화제는 이 시기에 유행한 시조에서 따 왔다.

 

창외(窓外) 삼경 세우시(細雨時)에 양인심사양인지라

신정(新情)이 미흡한데 하늘이 장차 밝아온다

다시곰 나삼을 부여잡고 훗기약을 묻더라

 

삼경이라 한밤중이다. 창 밖에는 가랑비가 소리도 없이 내린다. 남자와 여자는 빗소리를 듣는다.

위 시조의 중장에 등장하는 신정(新情)이란 말은 새로 사귄 정이란 뜻이니, 이제 막 서로의 사랑을 확인한 단계다. 둘은 만나서 하룻밤 내내 사랑을 나누었다. 이내 날이 밝을 것이다.

남자는 떠나려 하니, 여자가 옷깃을 잡고 뒤에 만날 날을 묻는다.

시조는 원래 노래의 가사다. 이 노래는 워낙 인기가 있었다. 조선후기의 웬만한 시조집에는 모두 실려 있는 유명한 작품이다.

보다시피 남녀 간의 애틋하고 절절한 사랑을 토로하고 있기에 대중의 관심을 받았을 것이다.

 

임진왜란 때 팔도 도원수 지낸 김명원의 일화

▲ 신윤복 ‘장옷 입은 여인’. 여성의 장옷은 신분이 높거나 경제적으로 넉넉한 계층임을 말해준다. 아이를 업고 있는 여성의 맨발이 눈길을 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한데 이 시조의 사랑은 어떤 금지된 바를 범하고 있다. 삼경은 위에서 말했다시피 밤 11시에서 다음날 새벽 1시까지다. 밤은 밤이지만, 사람들의 활동이 완전히 멈추는 그런 시간은 아니다.

한데 남자는 날이 밝아올 것을 의식하여 자리를 털고 일어서고 여자는 남자의 옷을 잡고 다시 만날 날을 묻는다. 둘이 부부라면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그럴 수 없다. 두 사람의 관계는 어떤 금지된 사연을 담고 있는 것이다.

이 시조는 원래 한시를 다시 풀어 쓴 것이다.

한시는 다음과 같다.

 

삼경 깊은 밤 창 밖에 가는 비 내리는데

두 사람의 마음은 두 사람만 알겠지

환정(歡情)이 미흡한데 하늘이 밝아오니

다시금 나삼 잡고 뒷날 기약을 묻는다

 

窓外三更細雨時,兩人心事兩人知

歡情未洽天將曉,更把羅衫問後期

 

어떤가. 시조는 한시를 온전히 풀어서 다시 쓴 것이다. 시조로 풀어 쓴 사람은 알 길이 없지만, 한시를 쓴 사람은 알려져 있다.

임진왜란 때 팔도 도원수를 지낸 김명원(1534∼1602)의 작품이다.

이 시를 쓴 김명원의 젊은 시절이 이 시의 내용과 관계가 있다.

김명원은 젊은 시절 어떤 어여쁜 기생을 좋아했다.

이 기생이 권세가의 첩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기생은 관청에 매인 계집종이기 때문에, 권력을 쥔 자가 예쁜 기생을 차지하고 다른 여자를 계집종으로 대신 넣는 일이 허다하였다.

김명원은 기생이 보고 싶어 견딜 수 없었다. 해서 그 권세가의 집 담을 넘어 기생과 만나 통정을 하던 중,

발각이 되었다.

조선시대의 법은, 자신의 아내나 첩이 다른 남자와 통정하는 것을 현장에서 잡았을 경우 즉시 타살해도 살인죄가 성립하지 않는다. 죽일 요량으로 묶어 놓고 한참 분풀이를 하고 있는데, 소식을 들은 김명원의 형 김경원이 달려와 자기 아우의 인물을 보라고 말한다. 요컨대 장차 나라에 크게 쓰일 인물이 아닌가, 제발 젊은이의 앞날을 위해 살려만 달라고. 김경원의 호소가 주효했던지, 주인은 망설이다가 포박을 풀고 술대접까지 해서 보낸다.

김명원은 임진왜란 때 팔도 도원수로 공을 세우고 좌의정까지 지냈으니, 과연 형의 말과 같았다.

김명원의 일화가 이 한시와 관계가 있는지는 미상이다.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기 위해 담장을 넘고, 남편이 오기 전에 떠나야 하는 처지는 위의 한시와 여합부절로 들어맞는다.

 

조선시대 남녀도 금지된 사랑을 했다

 

다시 그림으로 돌아가자. 화제를 볼 때 이 그림의 여자와 남자는 역시 사회적으로 공인된 그런 사이는 아니다. 여자의 표정은 어딘가 수줍어하면서도 조심스럽다.

남자 역시 나직한 목소리로 무슨 말을 건네고 있다. 남에게 알려지면 안 되는 관계, 금지된 사랑을 이 두 남녀는 나누고 있는 것이다.

이 사랑은 합법적인 것일 수도 있고, 합법적인 것이 아닐 수도 있다. 합법적인 것이라면 처녀 총각이 만나는 것이겠지만, 신윤복이 살던 시대에 양반가의 젊은 남자와 여자가 이렇게 한밤중에 몰래 만나는 것은, 유가의 도덕이 금지하는 것이었다.

불법적인 것이라면, 그야말로 두 사람 다 결혼한 상태이거나, 한 쪽만 결혼한 상태일 것이다.

어느 쪽도 모두 비윤리적인 것이다.

불법적이건 비윤리적이건 사랑은 사랑이고, 연애는 연애다.

자유연애가 금기시되어 있었을 뿐 조선시대 남녀도 사랑을 하고 연애를 했다.

남자와 여자의 사랑은 인간이 지구상에 생겨난 이래 변하지 않았다. 다만 사랑의 방식이 지역에 따라 시간에 따라 달리 나타날 뿐, 사랑하는 감정과 남녀의 만남 자체가 사라진 적은 없었다.

금기를 넘는 사랑의 행위는 얼마든지 있었다. 조선왕조실록과 ‘추관지’ 등의 사료에는 금지된 사랑,

곧 간통의 행위가 허다하게 실려 있다.

혜원은 그 금지된 사랑의 한 장면을 그림으로 절묘하게 잡아냈을 뿐이다.

 

 

 

 

 

(9) 수확의 즐거움과 괴로움 ‘타작’

저 유명한 김홍도의 그림 ‘타작’이다. 한때 서울 시내의 어떤 빌딩의 벽면을 장식하기도 했다.
그림은 등장하는 사람이 여럿이다. 중앙에는 긴 나무둥치(‘개상’이라고 한다)에 볏단을 쳐서 알곡을 떨어내는 사람이 넷이 있다. 그 중 둘은 볏단을 묶고 있고, 둘은 볏단을 털고 있다.
맨 왼쪽 구석에는 떨어진 알곡을 비로 쓸어 한 곳에 모으고 있고, 왼쪽 위에는 볏단을 지게에 지고 오는 사람이 있다.
볏단을 묶는 사람 둘은 싱글벙글 웃고 왼쪽 상단의 볏단을 지고 오는 사람 역시 웃고 있다.
수확의 기쁨이 얼굴에 가득하다. 한 해 몸을 수고롭게 한 끝에 알곡이 충실히 여물었다.
세 사람의 밝은 표정은 바로 이 때문이다.

▲ 김홍도 ‘타작’. 수확의 기쁨이 가득 담긴 농군들의 표정에서 노동의 신성함마저 느껴진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김홍도 그림 중 사회비평 가장 뛰어나

 

타작하는 사람의 기쁜 심정을 노래한 다산 정약용의 한시가 있다.

위의 그림은 벼 타작을 그린 것이지만, 다산의 시는 보리타작이다. 종류는 다르나, 기쁨은 매일반이다.

 

막 거른 탁배기 우유처럼 뽀얗고

큰 사발 보리밥을 한 자나 담았구나

수저 놓고 도리깨 들고 마당으로 나서니

검게 그을린 두 어깨 햇볕에 번들번들

옹헤야 소리 하며 발장단 맞춰 내리치니

순식간에 보리 이삭 질펀하다

앞소리 뒷소리에 소리 더욱 크게 지를 적에

보이는 건 지붕까지 날아오르는 보리이삭이로다

기색을 보아하니 이보다 즐거울까?

노동에 시달린 마음이 도무지 아니로다

낙원이야 천당이 멀리 있지 않으니

무엇이 괴로워 고향 떠나 나그네가 되리오(‘보리타작 노래(打麥行)’)

 

탁배기를 한 잔 걸치고 앞소리를 매기고 뒷소리로 받는다.

노동은 고되지만, 얼굴에는 기쁨이 가득하다. 풍성한 수확이 있는 곳이 낙원이고 천국이다.

어찌 고향을 떠나 떠돌이가 될 것인가.

다시 단원의 그림으로 돌아가자. 그림 왼쪽의 볏단을 털기 위해 머리 위로 한껏 볏단을 치켜들고 있는 사람의 얼굴에는 무언가 수심이 가득하다. 이 사람이 문제다.

그림 왼쪽 상단의 모서리에서 오른쪽 하단의 모서리로 직선을 그으면 완벽하게 그림이 반으로 나뉘는데, 빗금 아래는 일하는 사람들이 있고, 빗금 위에는 한 사내가 볏가리 위에 돗자리를 깔고 비스듬히 기대어 장죽을 물고 있다.

자리 앞에는 담배쌈지와 신발이 놓여 있고, 작은 술단지가 놓여 있다. 술잔으로 덮어 놓았다.

갓을 젖혀 쓴 꼴이 영 게으른 얼굴빛이다.

단원은 한 폭의 그림에 기쁨과 수심, 심드렁함 셋을 동시에 배열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이 사람은 지주이거나 지주를 대신하여 소작료를 받아 지주에게 바치는 일을 하는 마름일 것이다. 알다시피 타작마당은 먼지가 펄펄 날리는 곳이다. 타작마당 바로 옆에 사람이 누워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단원은 왜 이 사람을 이렇게 가까이 그려놓은 것인가.

여기에 단원의 사회비평이 있는 것이다. 나는 이 그림이 김홍도 그림 중에서 가장 탁월한 사회비평을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기쁨의 시간… 고민의 시간

 

타작의 시간은 수확의 기쁨을 누리는 즐거운 시간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국가에 바칠 세금과 지주에게 바칠 소작료에 대한 고민으로 가득한 고민의 시간이기도 하였다.

그것은 조선시대 전시기를 걸쳐 거의 동일하였다. 선조 때의 관료이자 문인이었던 이산해(1539∼1609)의 ‘전가잡영(田家雜詠)’이란 시를 보자.

이 시는 모두 3수인데,

첫째 수에서는 갓 빚은 막걸리로 토지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흰 떡을 쪄서 먹으며 즐긴다.

정말이지 정승판서가 부럽지 않다.

두 번째 수는 타작이 끝난 뒤 등불을 켜고 술과 닭고기를 먹으며 한 해의 회포를 푼다.

문제는 세 번째 수다.

 

마을 아전 문 앞에 들이닥쳐 늙은 할멈 묶어 가고

아들 셋은 지난해 남쪽으로 수자리 갔다오

솥단지 다 쏟아낸들 세금 납부를 늦출 수 있으리오

밭 갈던 소까지 팔아도 세금을 못 채운다

고을 원님 위세는 어찌 그리 무서운가

관가 마당에서 매질이 잠시도 그치지 않네

부럽구나, 저 집도 절도 없이 떠도는 비렁뱅이가

아침에 빌어먹다 저녁에 구렁에 뒹굴어 죽는 것이

 

나라에 낼 세금을 바치지 못하자, 집안의 할멈을 잡아가고 아들 셋을 징발하여 군인으로 끌고 갔다.

솥 안에 있던 것까지 털고 소까지 팔아도 세금을 다 내지 못한다. 해서 관청에 끌려가 매를 맞는다.

그러면서 유리걸식하다가 구렁에서 죽는 거지를 부러워한다.

 

다시 그림으로 돌아가면, 볏단을 털던 사내의 근심은 바로 이런 사정에서 온 것이 아닐까.

그림 오른쪽 상단에 단원이 의도적으로 배치한 게으른 지주(혹은 마름)가 바로, 나의 상상에 합당한 근거를 마련해 줄 것이다. 앞에서 여러 번 지적했듯, 중세사회에서의 농민은 생산의 전체를 담당하면서도 늘 빈곤하였다. 최대의 수탈자는 국가였다. 국가의 이름으로 강제적으로 세금을 부과하고 거두었던 것인데, 그것은 국가가 독점하는 폭력으로 가능하였다.

한데 국가는 다만 폭력을 집약한 기구일 뿐이고, 그 기구가 작동하게 하는 것은, 국가의 권력기구를 장악한 그 사회의 지배층이었다.

따라서 국가에 바치는 세금이란 사실상 지배층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다. 생각해 보라. 중세, 구체적으로 말해 조선이란 국가에서 왕과 사대부가 무엇을 한단 말인가.

그들이 세금을 받을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이상하지 않은가.

 

농민의 70%가 고통스러운 소작농

 

농민이 세금을 내어야 할 곳은 국가만이 아니었다. 지주가 있었다.

농민들이 모두 자기 농토를 넉넉히 갖고 농사를 짓는다면 천국이 따로 없겠지만, 여유 있는 자작농의 비율은 대단히 낮았고 대부분이 소작농이었다. 소작농은 가혹한 지대를 바쳐야 하였다.

정약용의 ‘호남 여러 고을의 소작농이 세금을 바치는 풍속을 엄히 금하기를 청하는 차자’라는 긴 제목의 글을 보면 소작농의 딱한 사정이 잘 나와 있다.

이에 의하면, 당시 호남의 농민 100호 중 자작농은 25호 정도, 소작농은 70호, 그리고 땅을 빌려주고 세를 받는 것이 5호라 하였다. 인구의 70%가 소작농인 것이다.

그런데 호남의 경우 소작농은 추수를 하여 거둔 곡식을 지주와 소작농이 반으로 나누지만, 나라에 내는 세금(10분의1)과 곡식 종자는 소작농이 내어야 한다.

경기도의 경우, 지주가 세금과 종자를 맡는 것과 비교해 본다면, 호남의 소작농은 30% 정도의 수확물만 가지는 것이다.

성호 이익은 ‘성호사설’의 ‘빈민’이란 글에서 충청 전라 경상도는 모두 이런 식으로 소작을 한다 하고 있으니, 곡식을 많이 생산하는 지방은 대부분 그랬던 것이다.

경기도는 지주가 종자와 세금을 내기 때문에 소작농이 50%를 차지할 수 있다지만, 이 역시 충분한 분배는 아니다. 왜냐하면 박지원의 ‘한민명전의’를 보면, 이 50%에서 땔감과 소금, 장을 마련하는 비용, 의복 마련에 드는 비용, 결혼과 상제 등에 드는 비용이 나와야 하고, 여러 가지 계에 드는 돈, 관청에 바치는 잡세를 내어야 한다. 또 홍수와 가뭄이 들기도 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남는 것이 얼마 되겠는가. 해서 추수에서 정말 즐거운 사람은 5%의 지주나 혹은 25%의 자작농이다. 우선은 기뻐하겠지만, 괴로운 사람이 70%다.

위의 찡그리는 사람은 아마도 그 70%에 드는 사람일 것이다. 타작은 노동의 대가를 거두는 것이기에 즐겁기 짝이 없지만 한편으로 그 수확물을 거지반 빼앗기기에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림은 이 복잡한 사정을 온전히 드러내고 있다. 그래서 천재 김홍도가 아니겠는가.

 

  

 

 

(10) 유혹하는 그림 ‘춘화’

신윤복의 그림 ‘춘화 감상’이다. 그림은 간단하다. 방안이다. 왼쪽 위편에 상이 놓여 있고, 무엇을 담는 그릇인지는 모르지만 그릇 둘이 있고, 아래에는 화로가 놓여 있다. 그리고 그 밑에는 아마도 요강으로 보이는 물건이 있다.
두 여자가 무언가 한참 들여다보고 있는데, 왼쪽 여자는 저고리 깃과 고름 곁마기 끝동을 모두 자주색 천으로 댄 삼회장을 갖추어 입고 있으니, 호사스러운 양반가의 여성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저 커다랗게 틀어 올린 구름 같은 가체(큰머리)를 보라. 이런 큰 가체는 여간한 부자가 아니면 하지 못한다.
▲ 신윤복의 그림 ‘춘화 감상’.촛불이 일렁이는 방안에서 여인네들이 춘화를 보며 참을 수 없는 욕망을 달래고 있는 모습이 안쓰럽기까지 하다. 간송박물관 소장.

 

춘화첩 보며 욕망 달래는 소복 입은 과부

 

왼쪽 여자의 입성에 비해, 오른쪽 여자는 확연히 다르다. 이 여자는 아래 위가 모두 흰옷이다.

저고리 깃도, 옷고름도, 곁마기 끝동도 모두 흰색이다. 무언가 이상하지 않은가.

짐작했겠지만, 이 여성은 상중에 있는 과부다. 아마도 남편이 죽었을 것이다.

부모, 시부모가 죽은 사람도 소복을 입기야 하지만, 그 경우는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문제는 앞에서도 말했다시피 소복을 입은 젊은 여인은 바로 과부일 뿐이다.

 

두 여자의 앞에 놓인 것은 그림책이다. 그림책을 자세히 보면 예사 그림책이 아님을 알 것이다.

사람 둘이 엉켜 있다. 바로 남녀의 성관계를 그린 것이다. 그림은 여러 장으로 만들어져 있고,

한 페이지씩 넘겨보게 되어 있다. 이 그림은 환하게 그려져 있지만, 사실은 어두운 방안이다. 왜냐고? 그림책 앞의 촛불을 보라. 불꽃은 바람에 날려 오른쪽으로 드러눕다시피 하여 꺼질락 말락 하고 있다. 어두운 밤의 방안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은밀히 두 여인이 한밤중에 춘화를 보고 있는 것이다.

앞서도 말했다시피 과부라 해서 성욕이 없는 것은 물론 아니다.

과부는 참을 수 없는 욕망을 춘화첩을 보면서 달래고 있는 것이다.

과부의 억눌린 성적 욕망에 대해서는 이미 말한 바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는다.

문제는 춘화의 존재다.

 

인간의 성적 욕망 내부에는 포르노그래피를 향한 상상력이 존재한다.

성에 관해서는 그 어떤 치밀한 언어적 표현도 시각적 예술을 넘어설 수는 없는 법이다.

어느 고대건 중세건, 동양과 서양을 막론하고 성적 상상력을 구체화한 조각과 회화가 존재한다.

오늘날 인터넷에 범람하는 포르노 사이트야말로 인간의 가장 내밀한, 그리고 한없이 복잡하고 한없이 다양한 성적 욕망을 시각화하여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수면 위에 떠오르지 않는 무량한 그 형상물이야말로 슬프게도 인간의 리얼리티일 것이다.

 

인조 때 중국서 ‘성행위 조각품´ 들어와

 

그 포르노그래피의 한국에서의 원조가 바로 그림 속 두 여성이 보고 있는 춘화다.

춘화는 중국, 일본, 한국에 모두 있고, 또 서양의 경우는 더 풍부하게 남아 있다.

다만 한국의 춘화는 조선후기에 비로소 생산된 것이다.

박식하기로 이름난 이규경은 ‘오주연문장전산고’의 여러 글에서 춘화에 대한 이야기를 남기고 있다. 일부분을 읽어 보자.

일찍이 북경에서 온 그림책을 보았더니 그 속에 남자와 여자가 성관계를 하는 여러 모습을 그린 그림이 있었다.

또 진흙상으로 만든 조각을 상자 속에 넣고 기계장치를 조작해 움직이게 한 것도 있었다.

이름을 춘화도라 했는데, 사람의 성욕을 돋우게 한다 하였다.

대개 북경에서 춘화도가 수입되었고, 때로는 조각품도 있었던 것이다.

특히 진흙으로 만든 조각품 중에는 인형을 상자 속에 넣고 기계장치를 해서 성행위 장면을 재현하도록 하는 신기한 것도 있었던 모양이다.

이규경은 이어서 박양한(1677∼?)의 ‘매옹한록’을 인용하고 있는데 이 책에 의하면, 그런 그림은 춘화라 하고 그런 조각은 춘의(春意)라 한다 하였다.

이규경은 자신은 두견석으로 조각하고 자작나무 갑에 넣은 춘의 조각을 보았는데,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생생했다고 한다.

‘매옹한록’의 기록은 계속된다. 중요한 것이니 직접 읽어 보자.

 

명나라 말기에 음란한 풍조가 날로 퍼져 남녀가 성행위를 하는 모습을 혹은 조각으로 만들고 혹은 그림으로 그렸는데, 조각으로 만든 것은 춘의라 하였다.

사신이 와서 바친 예물 중에 상아로 만든 춘의 하나가 있었다.

인조가 승정원에 내렸는데, 상아로 남녀의 면목을 새긴 것으로 기계장치를 작동시키면 남녀관계의 동작을 하는 것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일찍이 보지 못하던 것으로 모문룡이 우리를 모욕하려고 보낸 것이라 생각했고, 중국사람들이 평소 이런 것들을 좋아한다는 것은 까마득히 몰랐다.

인조가 마침내 깨부수어 버리라고 명하였다. 이때 조정 신하들 중에 손에 쥐고 감상하는 자가 있었는데, 조정에서 그 일을 비판해 그 사람의 청로(淸路)를 막아버렸다.

우리나라의 곧고 깨끗한 풍속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위 기록을 보면 인조 때 처음 남녀가 성관계를 갖는 조각품이 전해져 상당한 충격을 던졌던 것이다.

또 이 기록을 통해 인조 당시까지는 조선에 전혀 춘화나 춘의가 없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박양한은 춘의를 만지작거리며 감상한 사람의 벼슬길을 막아버린 것을 두고, 조선이 도덕적인 나라라고 했지만, 과연 그럴까. 이런 향락적 문화는 풍요한 경제력 위에서 가능한 법이다.

박양한 자신이 명나라 말기부터 음풍이 번졌다고 하고 있거니와 사실이 그랬다.

중국에서는 춘화나 춘의가 한나라 이래로 지배층 사이에 유행하였다.

다만 그것이 민간의 일반인들에게까지 널리 퍼진 것은 명대 말기에 와서이다.

명대 말기 상품경제의 발달로 도시문화가 꽃피자 자연히 소비와 향락열이 번졌고, 그 중에서도 특히 성적 욕망이 분출되었으니, 춘의와 춘화는 애당초 경제적 풍요 위에 꽃핀 성적 욕망이었던 것이다.

일본에서조차도 에도막부 이후 도시문화의 발달과 함께 춘화가 서민들에게 널리 유행했다.

화려한 채색 판화(우키요에,浮世繪)로 만든 춘화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1719년 제술관으로 통신사행에 끼어 일본에 갔다 온 신유한(1681∼?)은 일본 여행기인 ‘해사동유록(海사東遊錄)’에서 일본의 남자는 품속에 반드시 운우도(雲雨圖)를 넣어가지고 다니면서 성욕을 돕는다고 하고 있다. 그것은 아마도 지금 일본의 서점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우키요에 춘화일 것이다.

 

광통교 다리 위에 걸어놓고 팔던 춘화

 

이규경은 ‘화동기원변증설(華東妓源辨證說)’이란 글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요사이 춘화가 북경에서 들어와 널리 퍼졌다. 사대부들이 많이 돌려가며 보고도 부끄러운 줄을 모른다.” 즉 춘화는 북경에 드나들 수 있는, 또 북경 현지에서 춘화를 구입할 수 있는 세력 있는 양반층이 아니면 접할 수 없는 것이었다.

 

김창업(1658∼1721)은 1712년 연행정사로 중국에 파견되었던 형 김창집을 따라 북경에 다녀와서 기행문 ‘연행일기’를 남긴다. 이 책의 12월23일 조에 춘화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날 선비 차림의 한 사람이 그림을 팔러 오는데, 소년과 미인이 성관계를 하는 그림이었다.

서장관 노세하가 더 들추어 보려고 하자 김창업은 춘화 같다고 하면서 말린다.

김창업은 그 사람을 보고 선비냐고 묻고 그렇다고 답하자 유학을 공부하는 사람이 어찌 춘화를 가져와 남에게 보이냐고 힐책하자 그 선비는 그림을 싸서 달아나고 만다.

 

이 일화에서 김창업이 정확하게 춘화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김창업은 그야말로 혁혁한 서울의 명문가 안동김씨 집안 사람이다. 형 김창집이 영의정까지 지냈으니 말해 무엇하랴. 이런 명문가가 되어야 비로소 북경에서 춘화를 구입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비록 춘화에 대해 부정적인 말을 하고 있지만, 그 자신이 춘화를 보지 않았다면 과연 단박에 춘화라고 하는 판단이 나올 수가 있었을까?

 

이렇게 하여 전해진 춘화는 드디어 조선에서도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사대부가에서 춘화를 가지는 것은 별반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19세기 중반에 창작된 서울의 풍물을

노래한 ‘한양가’에서는 광통교 다리 위에서 걸어놓고 파는 그림을 잔뜩 열거하고 있는데, 그 중 춘화가 들어 있으며,‘춘향전’의 한 이본에도 춘향의 방 안을 묘사하면서 춘화를 꼽고 있다.

춘화를 감상하는 것은 18세기 이래 조선의 성풍속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던 것이다.

강명관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출처 : keiti
글쓴이 : 세발까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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